[독서정산 07_08] 희망의 길-지금 여기, 우리 인문학자들의 결을 쫓아

내맘대로 독서 편린 모음 

지금


1. 통제가능하지 않는 과학기술에 대한 앎의 경고는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에 잘 나타나 있다. 과학기술의 단맛만 우려낼 경우, 그 과학기술이 끌고가는 위험은 어떻게 되돌아올 것인지, 자본의 세계화와 같은 흐름으로 위험은 지구화되고 있다. 경제만의 세계화와 위험은 어찌 그리 짧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자웅동체처럼 자신을 증식시켰는지 모른다.

2. 니클라스 루만은 우리가 어떻게 다른 세상을 볼 수 없는지 조목조목 따지고 들었다. 정치,경제,교육,사회,문화,법 등등이 이 사회에서, 돈과 개인이란 블랙홀로 빠져들면서 그 이분법의 도식에서 자신순환고리로 악순환하는지 말했다. 단 도덕이 아니라 윤리가 코드화되지 않는 제3의공간을 만들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잠깐한 것으로 기억한다.

3. 마셜 맥루한은 이야기한다. 시각중심의 사회가, 그러고보니 원근법이란 관점이 서구에 나타나고, 그 관심의 끝이 자본으로 예리하게 되면서 이 시각중심의 사회는 청각,후각,미각,촉각의 오감을 경도시켰다. 그래서 이 사회는 온몸으로 느끼지 못하는 불감의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다른 시대를 폄하시켰다. 중세도 그 이전도... ... 시대의 복원은 머리중심으로 회복될 수 없다. 이 시대는 머리만 목말라하는데, 시각이 바뀐다고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가슴과 마음과 손,발의 감각이 회복되지 않는 이상 껍질만 유령처럼 돌 뿐이다라고 한다.

4. 머레이 북친은 말한다. 환경을 가장 해치는 것은 사람이라고. 그런데 정녕 환경을 생각한다면 인간은 죽어야 한다는 거꾸로 된 결론에 다다른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를 다시 사람이 해온 족적을 거꾸로 거슬러올라가야 한다. 환경을 위해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환경이 공존하는 삶이었다고, 그래서 그 관점에서 다시 근본적인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나와 너

5. 마르틴 부버는 이야기한다. 나와 너. 사람들은 마치 [나]만 이야기한다. 너로 시작한 모든 것을 잘리우고, 뻔히 생각이란 것도 일상도 온통 너로 비롯된 것임에도 마치 모든 것이 [나]로 거느려진 것 같은 아둔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그것], [그]만 있지, 영롱하게, 문득 아름다움에 현기증이 느껴지는 [너]을 만나지 못한다고 말이다. 어쩌면 서구가 개인을 역사에서 달콤하게 빼먹고 사유하기 시작한 이후로 그 세뇌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사는 것이 지금인지도 모른다. [너]가 없는 세상에서 너로부터 인한 [나], [너]를 만나고 마음에 품어 내가 되지 못하는 지금에 중독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자유 



6. 바슐라르는 말한다. 상상력이란 것이 지금까지 있어왔던 것에서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시에서 언어가 다시 호명되듯이 내 속에서 울림은 스스로 다시 자랄 수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나]는 지금까지 있어왔던 것의 연장성이 아니라 다시 지금 이 순간부터 새로운 [나]로 풍부해질 수 있는 것이라는 늘 자유의 출발점을 지금의 나로 잡는 것은 아닐까? 너로부터 작은 일상의 하나에서부터 공명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너-나]의 상상력이라는 것이 무진장이라는 것이다.

7. 오감의 회복은 아니더라도 학문이란 것이, 마음의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 즐거움의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 자유의 영토를 확장하는 방편으로 앎의 중력에 그치지 말 것을 요구하는 사람이 있다. 시도, 음악도, 미술도, 그 학문의 경계가 다른 것이 아니라, 그 넘치는 즐거움을 거부할 바보가 어디있는가 하고, [내가 어떻게 알아] [내 분야가 아니야] [전문가가 알겠지] 하는 숱한 무지의 중력의 자장에 떨어지는 어리석음을 경계한다. 끝까지 밀고나가는 [까이것]의 정신을 이야기한다. 앎의 울타리를 치지 말 것을 요구한다. 그 즐거움과 그 것이 온전히 네것, 네 소유이므로, 즐거움을 거부하는 바보가 어디있단 말인가? 진리라는 것은 더 표현하고 싶은 것이지 수도꼭지처럼 잠그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알고싶은 것은 그쳐질 수 없다. 그 행위로 인해 즐거움은 거듭하는 것이라고 쟈코토의 말을 빌어 자크 랑시에르는 말한다. 


너에게 가는 길
 

8. 김상봉은 말한다. 서양철학이 자기애에 함몰된 나르시스의 철학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정녕 너를 볼 수 없다. 거기에서 가지치기한 학문이란 것이 자기애에 함몰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이다. 대부분이 너와 함께있는 것이 현실이어서 [나]만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런데 생각의 편리를 위해 따로 떼어내어 그로부터 사유를 발달시킨 오류를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지적한다. 그 전제의 위험함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다. 더 더군다나 떨어진 나와, 원자같은 떨어진 실재에서 비롯된 사유는 나머지 아흔아홉을 떼어버리지 않거나, 그 움직임의 동선으로만 시작했어도 이론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지 않았으리라 말한다. 

 8.1  

9. 너를 만나는 법에 대해 김영민은 이야기한다. [나]를 싱싱하고 파릇파릇하게 신선도를 유지하게 숙성시키는 법을 이야기한다. 동무라는 것이 어렵다면 한발 떨어져 친구라는 것이 사랑이란 것이, 잡아채어 내 주머니속에 넣는 것이 아니라, 식욕을 채우기 위해 허겁지겁 먹어치우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만 갖기 위해 떠돌아다니는 부나비같은 것이 아니라 물 한모금을 마시기 위해 두 손을 모으고 떠받들 듯이 그렇게 보듬는 것이라 한다. [너]를 섬기는 일이 [나]의 풍요이자 [너-나]로 이어지는 길이라 한다. 늘 머물러 제자리에 있는 것이 [나]가 아니다. 끊임없이 [너-나-너..]로 새로와지는 것이 동무의 관계인 것이다. 동무는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것이란다.
 

삶 


10. 가타리와 라이히, 윤수종은 이야기한다. 이 삶 바깥은 없다. 이 삶도 이야기하지 않고, 삶의 바깥만 이야기한 어리석음에 대해 말한다. 갑옷을 입고 칭칭동여진 일상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진리가 아니라 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반진리임을 이야기한다. 예수만이 예수를 알 듯, 그 무서운 살아지는 관음증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쳐다보기만 하는 삶이란, 나날이 무거워지는 삶의 두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나]를 넘어서는 그 [00되기]는 이정우, 고병권에 이어진다.

11. 피터싱어는 기부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정작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도덕심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삶이, 나의 영역내에만 머무르는 앎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이야기한다. 윤리라는 것이, 삶에 있어 얼마나 많은 아픔과 자유를 가져오는지 동시에 말하고 있다. 세계대전보다 많은 이가 굶어죽어나가는 현실에 대한 윤리는 당연한 이타심이 아니다. 사회에 대한 편협한 앎과 삶이 당신 안에서 쓰나미처럼 새롭게 각인 될 것을 요구한다. 나만이 아니라 아마 그것에서 너로 바뀌는 상태를 가정하면서 말이다. 푸코가 이야기한 윤리적 인간에 지금을 살아내고, 살고있는 현실을 비참할 정도로 생생하게 녹여내고 있다. 

사회

12. 폴라니는 말한다. 사회라는 몸속에 있던 에어리언같은 괴물이 빠져나와 마치 사회는 없는 것처럼 길길이 날뛰고 있다고, 온통 쑥대밭을 만드는 것을 넘어서, 사회를 지탱하는 사람도 숨을 쉴 수있는 공간도 모조리 싹쓸이하고 있다고 말이다. 살림살이를 위한 경제가 이젠 자본의 증식공간만이 될 뿐이라고 말이다. 중세를 넘어서 보이지 않은 손이라는 핑계로 방임된 뒤, 벽지처럼 납작해져 도통 보이지 않는 사회라는 것은, 국가라는 자본의 파수대에 밀려 나라마다 단절된 사회란 것은 절망과 아픔의 생살의 상처를 딛고 그 괴물에게 상처 투성이 사회를 한장 두장 붙여, 사회의 생살이 오르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야 그제서야 저기 아크로폴리스에서, 아테네에서 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행복이나 삶을 논할 바탕이 겨우 만들어지는 것이란다.

13. 서경식과 노신은 안온한 이데올로기를 경계한다. 죽음에서 절망에서, 현실의 추악함에서 한걸음 딛기가 쉽지 않음을 경고 한다. 온몸에 상처를 내고 피를 한움큼 흘려내야 한걸음을 겨우 디딜 수 있음을 표현한다. 쇳덩어리 정육면체 속에 갇힌 우리에게 그 강철로 된 방임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알려야 하는 것이 맞는지에 대해 말한다. 점점 조여들고 희박해지는 공기. 그것이 현실이라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알게하는 고통. 모르면 오히려 편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 고함을 질러야 그 강철문 바깥이 어떤지 모르지만 고통스럽지만 지르지 않는 것보다 낫다고 한다.

"가령 말일세, 강철로 된 방이 있다고 하자. 창문은 하나도 없고, 여간해서 부술 수도 없는 거야. 안에는 많은 사람이 깊이 잠들어 있어. 오래잖아 괴로워하며 죽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혼수상태에서 죽음으로 이르는 과정에 놓여 있으면서도 죽음의 비애를 조금도 느끼지 못한다. 이 때 자네가 큰 소리를 질러서, 그들 중에서 다소 의식이 또렷한 몇 사람을 깨워 일으킨다고 하자. 그러면 불행한 이 몇 사람에게 살아날 가망도 없는 임종의 고통만을 주게 될 것인데, 그래도 자네는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래도(콕!!)---

14.  

뱀발. 이런 앎들을 연결시켜본다. 부질없는 짓이겠지만 혹 서로 내리는 잔뿌리들이 있어 조금 도움이 될까? 다른 뿌리에 대한 궁금증도 이어져 내식대로 모아둔다. 틈나는대로. 오독은 모두 나의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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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내마음대로 독서 편린 결산 (2) (ing)
    from 木筆 2009-09-09 16:53 
    -그런데-- "그래도 몇 사람이 정신을 차린다면 그 쇠로 된 방을 부술 수 있는 희망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없지 않은가?" << 펼친 부분 접기 << 14-1. 다시 니클라스 루만으로 가본다. 노신의 쇠로 된 방이 나름대로 코드로 둘러싸여 프로그래밍된 궤도를 돌고있는, 종언에 휘말려있는 정치,경제,사회,문
  2. 091012 죽음, 자유 그리고 사회
    from 木筆 2009-10-13 14:36 
    [칼 폴라니로 가는 여러 산책길에 대한 소묘]란 주제로 텍스트 [초국적자본주의인가 지역적계획경제인가]에 다른 색깔들을 배경삼아 자료를 만들어본다. 가장 잘배우고 알게하는 방법은 가르치는 것이란 말을 실감한다. 시간의 흐름만큼이나 책들이 섞여 어디에 기록했는지도 깜박한다. 어쩌면 하고싶은 이야기는 산책길에 나서기전 준비사항에 있다. 경제인이란, 이분법에 의한 근대인, 직선적인 시간관이나 발전관에 녹아있는 우리는 다른 것을 상상하기 힘들다. 블로그의
  3. [깜짝이벤트] 누구일까요?
    from 木筆 2009-11-20 13:51 
            자신의 머릿속에 어떤 사상을 갖는 자는 미친 사람으로 취급될 위험성에 빠진다.   같은 생각을 갖는 두 사람은 바보로는 취급될 수 있어도 미친 사람으로 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