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어 사전
나탈리아 긴츠부르그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1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사를 기록하는 또다른 언어


가족어 사전, 나탈리아 긴츠부르그, 2016-04-15.


  많은 작품을 썼지만 국내 번역본은 이 책만 있는 이탈리아 소설가 나탈리아 긴츠부르그는 파시즘 시대를 살아가는 이탈리아 유대인 가족의 이야기를,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썼다. 이 이야기는 실존 인물들의 이름이 그대로 등장함에도 소설‘로 분류되어 있다. 작가 자신이 ’소설‘이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 굳이 작가가 ’소설이오' 외치는 이유가 무얼까 했는데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알았다. 처음엔 그저 가족의 실명을 써가며 내밀한 그들의 이야기를 쓰는 것에 대한 부담인가 생각했는데 이런 단순하고 일차원적 생각을 하는 것이 나탈리아와 나의 차이였다.

  소설 속 등장인물은 제법 낯익은 이름들이라 잘 알지도 못하는 가족들에게 친근감이 느껴졌다. 그러하기에 이들 가족이 문밖을 나서면 맞닥뜨리는, 문 안으로 끊임없이 들어오는 이탈리아의 상황이 비켜가기를 바라게 되는지도 모른다. 독재자 무솔리니가 권력을 잡고 흔들던 파시즘과 인종차별의 시대. 이탈리아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잊을 수 없는 시기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이야기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탈리아 현대사의 순간순간을 드러내는 증언이기도 하다.

  지식인으로 또한 독재에 맞선 반파시스트 운동을 한 나탈리아이기에 그들 가족들의 독재에 맞선 활약상이나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어떤 담론들이 경건하게 펼쳐지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 시기의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이 강하게 내비칠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소설은 나탈리아 가족들의 유난스런 성격과 가족간의 대화에 집중한다.


우리 형제는 5남매다. 우리는 각기 다른 도시에 살고 있으며 어떤 형제는 외국에 산다. 만났을 때도 서로에게 무관심하고 신경을 쓰지도 않는다. 하지만 우리들끼리는 단 한마디면 족하다. 단 한마디, 한 문장, 우리의 어린 시절에 수도 없이 듣고 반복했던 그 오래된 말 한마디면 우리들의 옛날 관계를 단숨에 되찾는다. 이렇게 말하기만 하면 된다. ‘우린 베르가모에 소풍 온 게 아니오’라든지 ‘황화수소산 냄새는 어떤지.’ 우리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는 떼려야 땔 수도 없게 이런 문장, 이런 말과 연결되어 있다. 이런 문장들은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존재하게 될 우리 가족 간의 연대감의 토대를 이루면서, 우리 중 누군가가 “친애하는 리프만 씨”라고 말하게 될 때, 그리고 곧 “그 이야기 좀 집어치워! 도대체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르겠군!”이라고 말하는 성급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우리의 귀에 다시 울리게 될 때, 지구상의 이곳저곳에서 이런 말들이 다시 창조되고 살아날 것이다.


  생물학 교수인 아버지 주세페 레비는 고집불통에다가 막말도 서슴지 않는데 반해 어머니 리디아는 쾌활한 낙천가로 수다스럽고 집안일보다 다른 일들을 하기를 더 좋아한다. 오빠 셋과 언니 한명을 가진 막내 나탈리아가 ‘보는’ 가족들은 하나같이 개성이 강하고 사사건건 주세페 레비와 대립한다. 문 밖에는 이탈리아 파시즘이 문 안에는 주세페의 파시즘이 성행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어쩌면 주세페의 아이들은 일찌감치 파시즘에 대항하는 법을 체현하여 반파시스트 운동에 적극적이고 필요성을 절감했으리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이 개성강한 가족은 유대계이며 억압과 차별을 겪었으리라는 점이 주요했을 것이다. 주세페 자신도 몇 번이나 수감되었고 그런 만큼 자녀들의 반파시스트 운동에 대해 자랑스러워한다. 또한 가족들이 관계하는 이들 대부분이 각자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반파시스트 운동가였다. 그런 이들만을 만났다기보다 그저 이웃으로 친구로 같이 하던 사람들 모두가 자연스럽게 이탈리아의 독재정치에 반대하게 되었을 뿐이다.


전쟁이 모든 사람의 삶을 즉각 뒤엎고 변화시키리라 우리는 생각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은 자기 집에서 항상 해오던 일을 계속해나가면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살았다. 이제 모든 사람들이 결국엔 위험을 그럭저럭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것이며 혼란스러운 상태는 벌어지지 않을 테고 집도 파괴되지 않고 탈출이나 고문 같은 것도 없으리라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도처에서 폭탄과 지뢰가 터지고 집이 무너지고 폐허 더미와 군인과 피난민들이 길을 뒤덮었다. 이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행동할 수 있는 사람,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베개 밑으로 머리를 밀어넣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탈리아에서 전쟁은 그렇게 벌어졌다.


  거대한 사건에 휘말려 하루하루가 어떤 형태였는지를 생각하지 못할 때가 있다. 전쟁에도 사람의 일상은 지속된다는 것을 잊게 된다. 거대한 사건에 영향을 받으며 세세한 하루의 삶들이 이어져간다는 것을 잊게 된다. 나탈리아 가족들의 말, 그들만이 통하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작가는 이 소설을 써내려갔지만 다른 어떤 가족인들 달랐을까. 등장인물마다의 성격과 직업이 다를지언정 가족마다 그들만의 독특한 언어가 가족문화가 있다.

  제삿날 각기 다른 곳에 사는 고모들이 모여 상차림을 두고 말들이 오갔다. 음식의 종류, 상차림 시간과 방법 등등. 그때에 고모들의 기준은, 문화는 어디였었나. 어린 시절 그네들 모두가 함께 해온 부모의 차림 예법이건만 시간이 흘러 ‘다른 가족의 문화’라고 말하는 그 지긋지긋한 수다에서 난 또다시 짜증과 함께 서글픔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가족들만의 가족어로 가족 연대감과 시대의 이야기를 전했던 이 책이 생각났다. 가끔은 나도 작가처럼 가족문화에 우리들만의 충만함에 싸일 때도 있지만 때론 지긋지긋하고 연민의 감정이 느껴질 때가 있다. 열렬히 환영하고 싶지 않은 유대감, 이해하고 싶지 않은 감정에 벗어나고프기도 한 가족의 무게, 가족어 가족문화. 

  나탈리아가 자신의 가족들은 서로간 무신경하지만 단한마디만 족하다고 말한 것처럼 우리의 가족 역시도 그럴 것이다. 연이은 일들로 가족, 친척들을 만날 때마다 느끼게 되는 것은 어찌 이리도 닮았나 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머리를 내젓게 되는 어떤 것들이 있다. 가족문화는 어떤 경우엔 더욱 공고히 되기도 하고 사회에 맞부딪치며 수정되고 변화되기도 한다. 한사회도 그렇게 흘러가야 한다. 그리고 크고 거대한 사건을 기억하는 세상에서 그 사건들에 영향을 받을 수 없는 개인의, 가족의 역사는 그들의 언어와 역사로 기록되어 세상의 이야기와 맞물려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르카디아
로런 그로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죽음도 찾아가는 곳

아르카디아, 로런 그로프,  문학동네, 2018-2-20.


  ‘인 아르카디아 에고(In Arcadia Ego)’.

  죽음은 아르카디아에도 있다. 모두의 이상을 모아 만든 유토피아에 이 문구를 걸었다면 그것은 자만일까 경각일까. 아르카디아는 “순수한 것. 대지 위에서의 삶이 아니라 대지와 더불어 사는 삶. 상업주의라는 악마에게서 벗어나 우리 손으로 일구어나가는 삶. 우리의 사랑이 세상을 밝히는 횃불이 되게 하는 것”을 희망하며 일군 공동체다. 최초의 아르카디아인 ‘비트’의 일대기는 아르카디아의 생성과 소멸의 과정과도 같다. 아르카디아에서 태어나고 자란 비트는 그곳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존재이며 그곳에 대한 애정을 지우지 않는다. 비트는 그 공간에서 꿈꾸고 희망하고 사랑했다.

  비트의 시선으로 보는 아르카디아는 흔히 이야기되는 유토피아의 모습에서 동떨어져 있지 않다. 이때의 유토피아는 환경적으로는 아름답고 깨끗하고 문명이 거치지 않은 듯한 자연풍광을 가진 섬으로 묘사된다. 또한 함께 토론하고 일하는 사회다. 희망을 안고 출발했던 공동체는 오래 지나지 않아 무너졌다. 1970년대 히피 문화가 그러하듯이 아르카디아는 이상적인 목표를 가지고 그에 맞는 규칙을 정했지만 히피문화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약물은 그들의 지향을 무너뜨리는 원인이기도 했다. 실제 히피문화가, 그들의 저항운동이 보여주었지만 자유의 상징이 왜 마약과 약물의 절정으로 치닫는지는 참 모를 일이다. 자유와 방종의 그 끈끈한 관계. “자유가 너무 많으면 공동체는 썩기 마련이다. 그것도 아주 빨리.”  

  아르카디아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난 후 최초로 태어난 아이라는 상징성을 갖는 비트이기에 그가 아르카디아에 갖는 남다른 애정은 필연적인지도 모르겠다. 인구과밀과 가난과 굶주림과 갈등이 이어지고 마약과 범죄가 들끓는 아르카디아의 변화되는 모습에도, 사람들은 흩어지고 아르카디아는 와해되었어도 비트는 아르카디아인으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에게는 행복했던 곳으로 기억되는 곳, 아르카디아.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공부하던 “정신에는 자기 고유의 공간이 있고  자기 안에서 지옥의 천국도, 천국의 지옥도 만들 수 있다”는 『실낙원』의 문장이 비트에게 일찌감치 각인되었을 지도 모른다. 비트는, 이미 아르카디아라는 공간을 이상적인 곳으로, 유토피아로 구현해 놓았고 그리움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 그곳이 무너졌든 아픔과 상실을 겪었던 곳이라는 것과는 상관없이 말이다. 아르카디아의 바깥 세상에서 살고 있기에 기억 속에 더 크게 자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르카디아 사람들의 실험이 모두 아름다웠던 건 그곳이 시골이어서가 아니란 걸 모르시겠어요? 중요한 건 사람이었어요. 서로와의 연결, 모두가 모두에게 의지했던 그 친밀함, 그것 때문이었다고요. 지금 시골 마을들은 다 죽어가고 있어요. 미국적인 작은 타운이란 것은 죽어가고 있고, 지금 그때와 같은 감정이 존재하는 유일한 곳은 여기, 도시예요. 수백만의 사람들이 같은 공기를 호흡하고 있는 바로 여기라고요. 이곳, 여기. 지금이 유토피아보다 더 유토피아예요. 이웃이라고는 딱따구리밖에 없는 아버지의 숲속 작은 집보다 더 유토피아라고요. 모르시겠어요? 우리 아이들 전부가 여기에, 아르카디아 아이들 거의 전부가 여기 도시에 있잖아요. 우리는 모두 도시로 왔어요.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고요. 여기가 그것과 가장 가까운 유일한 곳이에요. 친밀함. 연결. 이해하시겠어요? 다른 곳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요.


  아버지와의 대화에서 비트가 외치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공간적인 특성이 유토피아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서로 함께 했던 공동체의식, 그러한 것들이 유토피아를 규정한다는 것을. 그러나 현재 안전하게만 보이는 도시 공간 역시 지속적인 안정을 보장하지 않는다. 비트가 사진작가로, 교수로 살아가는 도시는 디스토피아의 세계가 된다. 알 수 없는 병이 휘도는 세상을 떠나 비트가 찾아간 곳은 아르카디아다. 엄마가 없는 그의 딸 그레테와 루게릭 병을 앓는 그의 어머니 해나와 함께. 어쩌면 불안하고 공포스러운 공간을 떠난 뒤의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얻기 위한 이유일지 모르나 다시 돌아온 폐허가 된 아르카디아라는 공간에서 비트가 보는 것은 유토피아와도 같은 지상낙원의 아르카디아, 그때의 모습이다.

  소설의 분량은 제법 되는데도 아르카디아에서 벌어진 사건보다도 아르카디아를 묘사하는 문장이 많다. 그렇기에 비트의 긴 인생의 시간은 너무나 쉽게 축소되어 이야기된다. 매력적이게 아르카디아를 묘사하려는 작가의 노력에 비해 아르카디아가 그렇게 아름답게 여겨지지 않았던 것은 쉽게 아르카디아의 몰락이 서술되었다는 것도 크지만 이상향으로 추구하는 공동체적인 질서를 갖추고 생활하는 모습이 매우 적게 서술되었던 것도 이유가 아닐까 한다. 아르카디아가 시골이어서 유토피아가 아니라 서로간의 친밀함과 연결이 유토피아였다는 말, 그것을 받아들이고 싶은데도 불구하고 아르카디아의 대표인 핸디는 공동체의 리더로서의 역할과 자질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에 아름다운 아르카디아의 환경을 제외하고 애당초 아르카디아라는 공동체가 잘 유지되었나 싶고 핸디가 왜 아르카디아의 리더인지도 이해되지 않는다. 애써 갖추려던 아르카디아의 공동체적 질서가 이상적인 지도자에 의해 잘 운영되고 곧 쇠락이 이어졌더라면 아르카디아의 실패를 더 안타까워했을지 모르나 아르카디아를 세우기 위해 모든 힘을 쏟았던 비트의 부모, 에이브와 해나의 노력에 비해 턱없이 아르카디아는 무너졌다. 유토피아는 결국 신기루인가 싶을 정도로.

  아르카디아 사람들의 친밀감과 연결이 잘 형성되고 공동체적 질서가 잘 유지된 이상향의 모습보다 아름답고 깨끗한 어느 휴양의 섬같은 이미지로만 작가가 아르카디아를 그려놓은 듯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신화를 읊조리는 듯한 작가의 문장에 힘입어 나홀로 그렇게 이미지를 형성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등장인물 역시도 인과가 명확치 않은 채로 흘러 서사는 묘사에 숨겨진다. 그럼에도 아르카디아를 읽고 나면 길도록 쓸쓸함과 비트와 비트의 아버지, 에이브에 대한 연민이 생긴다. 아, 그건 서사의 힘이겠다.

  마음속으로 그리는 유토피아에 대한 동경으로 아르카디아를 그려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세상 수많은 이야기들은 ‘문명’이 가해지지 않은 모습의 유토피아를 그린다. ‘문명’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고 있음인가. ‘인 아르카디아 에고(In Arcadia Ego)’. 죽음도 찾아가 머무는 곳. 유토피아. 비트의 생각처럼 유토피아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정신의 공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흘 그리고 한 인생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생의 재해

사흘 그리고 한 인생, 피에르 르메트르, 열린책들, 2018-04-15.


  얼핏 창밖을 보았을 때 주차된 차량 사이에 숨은 듯 서 있는 한 소년에게 시선이 갔다. 아무리 보아도 중1은 넘지 않은 듯한 소년의 손은 간격을 두고 입을 향했다. 내가 주시한 것은 소년의 손가락 사이에 든 ‘무언가’였을 게다. 절대 새우깡으로 보이지 않는 그것. 내가 본 것이 착각이리라 생각하는 사이 소년은 사라졌고 담배를 본 게 아닐 거라고 생각하려는 내가 이상하고 우습게 느껴졌다. 새벽 여섯시 즈음 발생한 교통사고, 무면허 고교생이 운전했고 탑승자 다섯은 중고생이며 이 중 네 명 사망, 음주 여부 확인하는 중이라는 기사를 보고서도 그랬다. 

  뭐랄까.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할 지 몰라 생각을 정지시켜 놓은 것이 맞을 것 같다. 이 책의 주인공, 앙투안에게 딱 그랬다. 어떻게 앙투안을 바라봐야 할지 난감했다. 그의 인생을 위로하지도 격려하지도 질타하지도 못한 채 애매하게 있었다. 감정과 이성이 제각각 분리되어 서로의 의견을 내달리는데 마음이 편해지지가 않았다. 최근의 잇따른 사건들, 촉법소년들이 벌인 무수한 사건들이 겹쳤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쨌든.

  뿔난 소년의 주먹 한방에 여섯 살 아이가 죽었다. 아이는 무덤에 곱게 묻힐 기회도 없이 나무 구멍에 은폐되었다. 자신도 모르게 아이를 죽이게 된 앙투안이 제일 먼저 할 일은, 한번 더 아이를 후려치는 일이었다. 왜 죽어 버렸느냐는 울부짖음과 함께. 실종된 아이, 레미를 찾기 위해 작은 마을 보발 사람들이 수색을 벌인다. 곧 마을에는 엄청난 재해가 닥친다. 사흘이라는 시간, 운명은 누구의 편이었을까. 소설은 레미를 죽이고 시신을 은폐한 열두 살 앙투안의 불안과 공포, 혼란이 전반을 차지한다.

  

삶은 결국 승리해야 한다……. 이것은 그녀가 너무나 좋아하는 표현이었다. 이것은 삶이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그녀가 바라는 상태로 계속 흘러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현실이란 것은 각자의 의지에 달린 문제일 뿐이고, 쓸데없는 걱정들에 사로잡혀 봤자 아무 소용없으며, 그것들을 쫓아내기 위한 가장 확실한 길은 그것들을 무시해 버리는 것이었다.


  앙투안의 어머니 쿠르탱 부인은 막연한 불안감과 공포에서도 그녀만의 방식으로 타개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들에게는 완벽하게 전수되지 않은 듯하다.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닥친 재난은 어린 레미를 찾는 일을 이차적 관심사로 내려버리고 레미의 죽음을 당연시했다. 그렇게 십이년, 앙투안은 레미의 일을 추억의 한 사건으로 인식하며 살았지만 순간순간 들이닥치는 공포와 고통, 불안으로 시달렸다. 고향을 떠나 살고 있으니 삶은 결국 승리했을지 모르나 그 일을 쉬이 ‘무시’해 버리지는 못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야 하는 일이 생겼고 레미의 유골 또한 발견되었다. 용의자로 추정되는 이의 머리카락과 함께. 다시,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는 ‘성인’ 앙투안의 심리가 이어진다.


동이 텄을 때, 그는 자신이 에밀리와의 그 일을 통해 스스로를 심판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범한 죄에 대한 형벌은 교도소에서 세월을 보내는 게 아니라, 그가 미리부터 혐오해 마지않던 삶을, 그가 끔찍이 여기는 모든 것들로 이루어진 삶을 보내는 것이었다. 보잘것없는 사람들 곁에서, 그가 증오하는 환경 속에서 그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평생을 보내는 것이었다…….

이게 바로 그의 형벌이었다. 그의 삶 전체를 내놓는 대가로 완전한 자유의 몸으로 죗값을 치르는 것이었다.

아침에 앙투안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앙투안이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을 때, 나도 인정했다. 애매하게 있는 내 마음에서 좀더 무게가 실리는 것이 무엇인가를.

  자신도 모르게 살인을 저지른 앙투안에 대해서는 연민하지만 앙투안이 그 죄를 은폐하기로 한 ‘의지’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했다. 어쩌면 나름 앙투안은 죗값을 치르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는 건가 생각해보기도 했다. 마을에 닥친 자연재해가 아니었다면 달라졌을까. 조금 양보해서 자연재해 탓이라고 하자. 자연재해에 따른 위약금이나 환불이 없기도 하니 사흘의 힘겨운 사투를 벌인 앙투안의 일이 덮인 건 자연재해 때문이라고 하련다. 생각하는 바는 성인 못지않으나 ‘고작 열두살’일 뿐인 앙투안이니 이해를 가지기로 하자.

  하지만 ‘성인’ 앙투안에게서는 달라진다. 앙투안은 고작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을 뿐이다. 앙투안의 패배 선언에서 일순간 분노의 감정이 치솟아 레미를 죽게 했던 어린 앙투안처럼 내 마음은 순식간에 냉랭해졌다. 앙투안의 처벌이 십이년 동안 유예된 것이라 한다면 앙투안의 삶은 보다 성실하고 착한 형태였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한순간의 실수도 없이 그는 모범적인 삶을 보여줘야 했다고. 그래서 어린 레미를 때리던 순간의 감정처럼 움직인 앙투안의, 아니 ‘성인’ 앙투안의 행동의 결과에 대해 연민하지 못하는 것이구나라고. 기본적으로 앙투안이 죄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원하지 않는 사람과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이 자신이 레미를 죽임으로써 받는 형벌이라고 여기는 그 마음에 대한 반발인지도.

  어느 날엔가 또다시 레미를 죽인 범인을 파헤치는 일이 생긴다면 앙투안은 어떻게 할까. 또다른 은폐를 위해 어떤 일을 벌이지 않을까. 이 명백한 자기합리화에 나는 떨고 말았다. 그러나 나또한 앙투안처럼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떨림이다. 원하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해야 하는 상황이 될 때면 무언가 잘못한 일에 대한 벌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왔었다. 이 깨달음의 불편함이 길게 갈 듯하다.

  소설은 흡입력 있게 읽혔다. 추리와 스릴러라기엔 애매하고 세밀한 심리묘사가 좀더 눈에 띄었다만 이 책 소개를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과 비교하는 건 너무 심하게 나갔다 싶다. 다행히 책을 다 읽고나서야 그 문구를 보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실망했을 것이다. 아, 그리고…모든 것은 자연재해 탓이라 했지만, 요즘 자연재해의 대부분은 결국 ‘인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
다비드 그로스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물구나무로 버티는 세상

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 다비드 그로스만, 문학동네, 2018.


  난 실격당하지 않았다. 공연을 끝까지 지켜보았고 결코 웃지 않았다. 아니, 웃지 않았으니 관객으로선 제대로 ‘실격’인가. 스탠드업 코미디언 도발레의 공연이 펼쳐지는 동안 웃지 않았음을 빼고 나면 도발레와 나 사이에 감정의 공유라는 건 없다. 그럼에도 자리를 뜨지 않은 건, 뜨지 못한 건, 당혹과 불편함이다.

  준비되지 않은 채 들어오는 훅. 이야기, 이야기. 제 생애를 고백해 오는 이에게 어쩔 수 없이 당하는 감정적 폭력. 당신은 왜 나에게 그 이야기를 털어놓는가, 내게서 무엇을 바라는가, 왜 내 감정을 볼모로 잡는가. 나는 너를 모르기에 고개를 숙여 이야기를 듣기도, 몸을 뒤로 빼어 적당한 때 달아나기도 어정쩡한 몸놀림으로 있어야 한다. 자칫 동정하거나 판단하려 할 지 모르는 자세로 있는 나를, 그런 상태로 몰아가는 너를 이해하기 위해, 편해지기 위해서는 이야기의 마침을 알아야 하기에 그저 듣고 있다.

  스탠드업 코미디의 속성이 조롱과 유머와 음담패설의 극대화라 해도 시작부터 시시때때로 그 대상이 되는 건 늘 여성이다. 158cm의 작고 마른 쉰일곱의 도발레가 그런 공연을 펼치는 동안 익숙한 사람들은 적당히 웃고 즐기고 박수를 보낸다. 그런데 순식간에 열네살의 도발레의 이야기로 전개된다. 폭력에서 폭력이 전이된 것처럼 시온주의자 아버지로부터 폭력을 당하는, 또래들에게도 놀림받고 왕따당하는 어린 도발레가 등장한다.

  작고 마르고 안경을 낀 도발레는 무수한 이들의 발길질과 따귀를 피해 물구나무서서 걷고, 달린다. 그래서 또 아빠에게 폭력을 당하지만 물구나무서기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아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엄마를 위한 도발레의 공연이다. 도발레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애정의 대상인 엄마가 웃기를, 우울증으로 자살을 반복하는 엄마에게 아무도 주목하지 않기를, 엄마가 다른 생각을 잊을 수 있기를 바라는 도발레의 노력이다.

  군사캠프에 가기 전까지 도발레는 아버지의 학대와 어머니와의 유대 속에서 살고 있었다.  열네 살 아이가 군사캠프에서 생활하는 이곳은 이스라엘. 홀로코스트를 겪은 민족의 팔레스타인을 향한 끊임없는 공격은 이렇게 일찍부터 어린 아이들을 착실히 준비시킨 덕분으로  가능했다. 여전히 또래들에게 놀림의 대상인 도발레가 그곳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생애 처음으로 가야하는 장례식 때문이었다. 군용차를 타고 운전병과 집으로 오는 오랜 시간 동안 장례식이 무언지 모르는 도발레가 겪는 궁금증, 기시감, 불안감, 그리고 엄마와 아빠에 대한 기억들이 펼쳐진다. 그리고 그런 도발레를 장례식장으로 데려가는 동안 개그 경연대회 준비랍시고 마구잡이로 유머를 던지는 운전병이 있다.   

  도발레는 인생이야기가 가장 훌륭한 것이라 말하며 그냥 말뿐이나 한쪽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리라고 말하지만 클럽에 있던 사람들은 끝까지 이야기를 듣기를 원하지 않고 떠나간다. 하지만 40년 동안이나 만난 적 없는 옛 친구, 아비샤이 라자르를 찾아내어 공연을 봐 달라고 한 것을 보면 제 이야기를 쉬이 여기지 말라는 도발레의 당부가 느껴진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상실에 빠져 있는 전직판사 아비샤이가 도발레의 초대에 응해 이야기를 듣는 반응은 마치 나의 반응과도 같아서 놀란다. 작가가, 도발레가 아비샤이가 되어 이야기를 듣도록 이끈다. 과거의 삶 속에 등장했던 아비샤이로 인해 도발레의 이야기는 허황된 코미디의 소재가 아니라 실체적 진실을 가진 인간의 삶의 이야기가 된다.

  아비샤이는 도발레가 공연을 펼치는 동안 한때 그들이 우정을 나누었던 사이임을 기억하며 또한 캠프에서 왕따당하는 도발레를 외면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슬픔과 고통속에 살고 있던 도발레로부터 받은 성숙한 위로와 배려, 캠프를 떠나는 도발레에게 닥친 상황을 모른체하던 그 시절, 자신의 현재의 상황과 대비하며 내면으로 들어가 이야기를 펼치는 아비샤이는 무대 위 도발레와 대비된다. 마침내 아비샤이는 깨닫는다. 도발레의 ‘광적인 수다와 신경질적인 개그’에서 자신이 잊어버렸던 것을 찾았음을. 누구도, 무엇에게도 받지 못한 위로를 도발레를 통해 받았음을.

  

개성의 광채, 나는 생각했다. 내적인 빛. 아니면 내적인 어둠. 비밀, 진동처럼 전해지는 고유성. 어떤 사람을 묘사하는 말 너머, 그 사람에게 일어난 일과 그 사람에게서 잘못되고 뒤틀린 것들 너머에 놓인 모든 것. 오래전, 내가 판사 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 순진하게도 피고인이건 증인이건 내 앞에 선 모든 사람에게서 찾겠다고 맹세했던 것. 절대 무관심하지 않겠다고, 나의 판결의 출발점이 될 거라고 맹세했던 것.


  공연이 끝나고 난 뒤, 비로소 도발레와 ‘나’ 사이에도 감정의 공유가 있음을 알게 된다. 불편함과 당혹함은 그것보다 더 큰 감정으로 인해 구석으로 밀려난다. 역사의 흐름 속, 어찌할 수 없는 구조적 시스템에서 파괴되는 개인의 삶이 물구나무서기를 하면서, 슬픔을 생각하지 않도록 유머를 건네는 이들로 인해서 버티어 올 수 있었구나 싶은.


저 사람한테 잘해줘, 엄마가 다시 내 귀에 대고 말했어. 모든 사람이 짧은 시간만 살다 간다는 걸 기억하고, 그 사람들이 그 시간을 유쾌하게 보낼 수 있게 해줘야해.


  도발레의 직업 선택에 분명 엄마의 말과 운전병의 개그가 영향을 미쳤음엔 틀림없다. 그렇다 해도 타인이 유쾌하게 시간을 보내도록 하는 일은 잠시 멈추어도 좋지 않을까. 도발레가 유쾌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기 위해선 그가 마음속에 가두었던 감정의 토로가 필요할 것이다. 이야기를 들을 사람을 만든 도발레 자신이 기획한 아비샤이를 초대한 그 공연처럼. 도발레가 진정 슬픔을 나누고 위로할 수 있는 존재를 만나 기꺼이 슬퍼할 수 있는, 화를 낼 수 있는 길로 들어서기를. 존재로 인한 슬픔이 존재로 인해 웃는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06-18 08: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양이가 없는 밤


책을 지키려는 고양이, 나쓰카와 소스케, 아르테, 2018.


  “책 값 비싸도 너무 비싸…성인독서율 역대 최저”

  글쎄, 사람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좀처럼 수긍이 쉽지 않다. 아시아경제 5.28일자 기사는 문화체육관광부가 2월 발표한 '2017 국민독서실태조사' 결과를 인용, 일반도서(교과서,수험서,잡지,만화 등을 제외)를 한 권이라도 읽은 성인 비율 59.9%로 성인 10명 중 4명은 1년 동안 단 한권도 읽지 않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나아가 소비자의 59.2%가 책값이 비싸다고 인식하고 있어 낮은 독서율로 이어진다고 하고 있다. 최근 도서정가제 폐지청원도 있었는데, 도서정가제가 독서를 막는다는 이유였다.

  책값이 비싸기 때문에 독서하지 않는다는 게 정말일까. 책의 종류와 페이지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12,000원 정도의 책값. 영화 한편 값이다. 이렇게만 생각할 땐 내게 영화비는 너무나 비싸다. 그럼에도 영화는 몇십만, 몇백만, 몇천만 영화가 생겨나고 한달에 수십편의 영화를 보거나 같은 영화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는 이들도 있다. 이들에게 영화비는 비싸지 않을까. 물론 영화비는 통신할인 등등의 할인가를 적용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물론 어떤 책은 비싸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상하게 책에 대한 인식 자체가 오래 전부터 늘 ‘비싸다’고 인식되는 분위기인 것 같다. 어떤 식으로든 책값에 관해서는 인색하다.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것은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듯 당연하게 이루어진다. 기꺼이 6~8천원의 커피값을 지불한다. 그보다 저렴한 커피도 있지만 비싼 커피를 선택하는 이들이 전혀 줄지 않는다는 점, 커피는 어쩌다 먹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하루에도 몇 잔을 소비하고 있다. 하지만 오래도록 책값은 그런 대우를 받은 것 같지 않다. 늘 과한 가격이라는 멍에를 뒤집어썼다. 과도한 교육열에 비해 책을 대하는 태도는 항상 뜨뜨미지근, 탐탁치않은 것을 마주하는 형태다.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한 나라의 위대한 작가의 탄생은 그 작가를 알아보는 독자를 가졌기 때문이라는. 우리나라의 독서율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정녕 책값 때문인가. 책을 읽어야 한다, 독서의 중요성, 이런 학습은 있었겠지만 사람들 마음에 자연스럽게 가 닿도록 이루어지는 일이 과연 있었나 싶다. 일찌감치 강요로 이루어진 ‘책 읽어라’. 그러면서도 책을 사서 주는 일이 없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접할 수 있도록 해주지 않았다면 아이는 어떻게 책을 읽는 습관을 형성할 수 있을까. 어떻게 책을 읽을 것이며 책을 좋아할 수 있게 될 것인가. 독서가 학교 진학을 위한 도구로 인식되는 행태에서 책, 책, 책, 독서, 독서, 독서라는 외침이 공허하게 들린다.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하고, 읽어야 하는 이유를 말하고, 좋은 이유를 말하는데 너무 천편일률적인 대답들이 나온다. 바로 정답이네 하면서도 아쉽다.

  심지어 신비하게도 말을 하는 고양이조차도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랄까, 그것에 대해 특별하고 신비한 것을 들려주지 않는다. 책을 지키려는 고양이는 책을 지키려는 강아지보다 더 어울리는 모델이긴 하지만 그 고양이가 이끄는 미궁에 들어갔다 나왔지만 속이 시원하지는 않았다. 엄청 유명한 일본작가로 이름이 각인되어 있었는데 이 책은 동화책 느낌이 들긴 했지만, 만족스럽진 않았다. 책값이 비싼지 싼지에 대한 논쟁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인가. 정말로 책이 사람의 인생을 구하는 것이라면 이 정도의 책값을 과연 ‘비싸다’ 할 수 있을까. 왜 하필 나는 하고많은 취미 중에 ‘이토록 비싼’ 취미를 가지게 되었는지. 취미의 영역이라서인지 책값이 비싸서 책을 읽지 않는다는 이 조사에 굳이 민감해질 것은 또 무언지. 아니, 아는 이들의 책이 안 팔려서인가. 책이 잘 팔리지 않는 시대, 책값이 비싸서 안 읽는다는 소리를 듣는 시대에 책이라는 주위에 머물고 있다는 자괴감인가. 어쨌거나 자본주의 사회, 팔리는 상품이 되어야 하는 시대에 팔리지 않는 상품을 붙잡고 있어서 기분이 가라앉는다.

  이 책 속의 말하는 고양이 얼룩과 책방 소년 린타로는 책을 가두는 자, 책을 자르는 자, 책을 팔아치우는 자를 만난다. 그저 책을 소유하려 하고 읽은 권수로 포장하려는 지식인, 책을 음미하기보다 줄거리만 대충 훑어보는 학자,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책에 집착하며 책을 팔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출판인을 만난다. 이들을 책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경계해야 할 유형으로 꼽는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런 사람들로 인해 책의 판매는 늘어가겠지.

  책을 읽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주는가를 생각하게끔 하는 계기가 되긴 하지만, 더불어 이 할 일 많은 시대에 왜 책을 읽고 있나, 싶은 생각도 하게끔 한다. 뜬금 한량없는 자조가 일어나는 밤. 나를 데려갈 고양이 한 마리 없고. 나는 나홀로 이 미궁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