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자 - 로베르트 발저 작품집
로베르트 발저 지음, 배수아 옮김 / 한겨레출판 / 201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로베르트 발저를 아시나요


산책자 - 로베르트 발저 작품집 

로베르트 발저, 한겨레출판, 2017-03-15.


    그 누구도 내가 되기를, 나는 원하지 않는다.

    오직 나만이 나를 견뎌낼 수 있기에

    그토록 많은 것을 알고, 그토록 많은 것을 보았으나

    그토록 아무것도, 아무것도 할 말이 없음이여.


  글을 읽을수록 여러 생각의 갈래로 달려갔는데 그 중 하나는 끌림이었다. 끌림의 느낌은 서늘함이었다. 싸늘함과는 다른, 왜인지 모르게 서러움 가득한 기분. 발저의 글 속으로 푸욱 파묻혀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서글픈 설움에 떨렸다. 작가의 생애를 먼저 알았기에 작가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되었을까. 물론 그렇지않다고 할 수는 없다. 분명 작가의 생애로 인해 글과 작가가 일치되었고 길 위의 고독가가 느껴졌다.

  발저의 생애를 보다가 몇몇의 작가가 생각났는데 거리의 작가 찰스 부코스키와 체코 소설의 슬픈 왕이라 불리며 국민작가라 칭송받는 보후밀 흐라발이다. 발저 역시 스위스의 국민작가라 칭송받는다 하며 독일문학사의 중요한 작가라는 위치를 점하고 있다. 부코스키, 흐라말, 발저의 공통점이라면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글을 쓰고 주류라 불리는 분위기로부터 몇발짝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전쟁이라는 외부적인 요인이 그들의 주변에 흐르고 있었고, 물론 그것이 내면에도 영향을 미쳤음은 분명하다.

  로베르트 발저의 마지막은 그의 작품 「크리스마스이야기」에서처럼 크리스마스의 아침, 산책길, 눈밭에 쓰러진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이 작품 「산책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끊임없이 걷고 걷는 이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작가의 인생에서 걷기와 쓰기가 중요한 듯 그의 인생은 걷는 것과 쓰는 것의 반복이었다고 한다. 가난한 그의 생에 종이조각이라면 어디든 글을 썼다는 발저는, 자살을 시도하고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발저의 자살은 원체도 가난한 삶에 전쟁으로 인해 더 심해진 궁핍과 그로인한 우울때문이라 한다. 스스로 정신병원에 들어간 후 절대 글을 쓰지 않았는데, 왜냐면 글을 쓰러 간 것이 아니라 ‘미치기 위해’ 들어간 것이기 때문이라고. 독특한 그의 세계가 가늠이 되지만 내면 깊이 걸어 들어가는 발저의 글맛이 독특한 세계, 그런 것이 어디 있나 싶다.


고독하다는 것. 얼음과 같은, 쇠붙이와 같은 전율, 무덤의 냄새. 자비심 없는 죽음의 전조. 아, 한번이라도 고독했던 자는 다른 이의 고독이 결코 낯설지 않은 법이다.


  이 작품집으로 발저의 글을 처음 접하지만 고독이 짙게 배여 있다는 느낌과 머릿속이 복잡하였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 머릿속을 깔끔하게 정리하기 위한 방법이 발저의 산책으로 그리고 글쓰기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싶었다. 끌림도 글속에 짙게 배인 이 고독과 서정의 나래였다고 생각된다. 100년도 전에 태어난 발저에 대해 책표지의 저자 소개 정도로만 알고, 단지 작품 하나 읽었다 뿐인데도 나는 그의 세계가 이해되는 듯이 굴고 있다. 나는 홀로 산책하듯 발저의 글을 읽다가 그가 내 앞에서 걸어가는 듯이 여기며 글을 읽었다. 어떤 정서나 문체에서 발저의 끌에 한없이 끌린 후 마냥 산책을 하고픈 기분에 시달렸다.


나는 언제든지 할 수만 있다면 몽상에 잠긴다! 그게 무엇인지 알고 하는 건 아니다. 조금도 알지 못한다! 나는 늘 생각하는데, 어디서 큰돈이 굴러 들어오면 나는 일하지 않으리라, 이런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자체가 나를 어린아이처럼 기쁘고 들뜨게 만든다.


   나는 언제나 걷고 싶었고 길만이 아니라 내 내면의 길로도 끊임없이 걸어가고 싶었다. 마냥 걷는 것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는데 탁월하고 두서없이 글을 적는 것 역시 머릿속을 정리하는데 나름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다만 글이 생각을 따라가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발저의 이 산책과 함께 한 글들에 자꾸 맴돌게 되었나, 싶다. 그래서 반가운 글들과 더러는 재밌는, 그리고 아주 많이 서러운듯 느껴지는 글들을 보면서 그의 마지막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나, 아니 그의 선택이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한 생에 또한 우울했던 그의 생에 대해 그 자신, 아름답다 생각하며 눈을 감았을까.


눈으로 덮인 채, 눈 속에 파묻힌 채 온화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자여. 비록 전망은 앙상했지만 그래도 생은 아름답지 않았는가. 


   비가 오지 않는 오랜 가뭄의 날들. 발저의 글을 들여다볼수록 왜인지 서러운 울음이 나는 듯했는데 눈이 쌓여 있지 않기 때문일까. 나는 이 세상에 불만도 불안도 많고 어쩔 땐 전혀 원하는 것이 없기도 어쩔 땐 뭘 원하는지도 모른 채 분노에 휩싸이기도 한다. 한동안은 계속 그랬고, 지금도 역시 분노를 버리면 안 되겠구나, 하며 있다. 그러면서도 때때로 잡고 있는 것도 없으면서 놓아버리고 싶은 기분에 들 때가 있는데…발저처럼 인간과 제도에 원한을 품지 않을 날이 올까. 아직, 확신할 수 없어서 더 서글픈지도 모르겠다.


세월 저편으로 사라져간 아름다움의 색 바랜 고결한 그림이여, 감미롭구나.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지금 이 세상과 이 인간들에게 등을 돌려버리는 것 또한 합당하지 않으니, 그 누구도 역사의 사색에 잠겨 있는 자신의 기분을 고려해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른 인간과 제도에 원한을 품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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