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콜럼버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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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고발자


굿바이, 콜럼버스. 필립 로스, 정영목 옮김, 문학동네, 2014.8.29.


  1933년생인 필립 로스는 많은 책을 썼다. 가만 보니 핍립 로스의 소설을 제법 읽었다. 어째 필립 로스가 많은 책을 쓴 것보다 그가 쓴 책들을 거의 다 읽었다는 사실이 놀랍게 느껴진다. 그만큼 필립 로스의 책을 좋아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좋아함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확실한 건 필립 로스의 첫 번째 작품이자 청년기 작품인「굿바이, 콜럼버스」를 먼저 읽었더라면 그 뒤로 필립 로스의 책을 읽는 일은 더디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필립 로스의 문장과 이야기하는 방식과 이야기에서 받은 깊은 인상은 오랜 세월 다져진 필립 로스에게서 나온 진중함, 연륜에 있었나보다. 글이, 이야기가 몰입하게 하는 힘이 있어 반복된 주제의식에도 때론 비슷한 상황 설정에도 필립 로스의 책속으로 빨려가게 했다. 긴 호홉의 필립 로스의 글에 매료된 상황에선 청년기, 스물 여섯의 필립 로스의 작품은 재기발랄한 아이러니를 주긴 했지만 장년기 이후의 느낌보다는 확실히 가볍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이후 필립 로스에게 반복되어 나타난 유대인 문제에 관한 주제를 너무나 명확하게, 딱,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필립 로스의 소설 세계가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끔 되었다. 여전히 그의 글 속 등장인물들은 작가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는 듯하고.

  「굿바이, 콜럼버스」는 중편이고 이 책에는 다섯 편의 중단편이 더 실려 있다. 일평생 필립 로스는 유대인들의 비난을 받았는데 그의 작품의 주제가 유대인과 유대교에 대한 풍자와 신랄한 비판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유대인이 아니었다면 더한 공격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유대인이기에 어쩌면 그 자신에 대한 정체성이, 자신을 규정하는 문화에 대한 깊은 고민과 성찰이 글로 표현된 것이라 한다면 이 내부고발자적 시선은 그에겐 고통을 깊이 담은 고통의 글쓰기였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필립 로스의 주제의식에 힘입어 이 중단편 속에서 「신앙의 수호자」와 「유대인의 개종」이 그토록 눈에 띄었는지도 모른다. 담담히 읽은 다른 작품에 비해 「신앙의 수호자」에서는 나도 모르게 감정을 노출하기까지 했다.    

 「굿바이, 콜럼버스」는 필립 로스의 소설에서 더러 봐온 이야기였다. 한창의 젊은 남녀의 사랑이야기, 라고 해야 하나. 그리고 사랑하지만 유대교 교리에 따른 갈등과 계층의 차이를 느끼게 되는 그런. 게다가 잘 사는 쪽은 늘 여자이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화자는 남자인. 그것은 청춘이 갖는 불안함인 걸까, 그들 세계가 주는 어쨌든 여기 등장인물들이 낯설지 않은데 이들이 자라, 결국 필립 로스의 다른 소설 속에 등장한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오지가 알고 싶은 것은 늘 다른 것이었다. 오지가 처음에 알고 싶어했던 것은 「독립선언서」에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고 나오는데 빈더 랍비는 어떻게 유대인을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빈더 랍비는 정치적 평등과 영적 정통성의 차이를 설명하려 했지만, 오지는 자기가 알고 싶은 것은 다른 것이라고 계속 우겼다. 그때 처음으로 그의 어머니가 학교에 왔다.


 「유대인의 개종」은 위와 같이 오스카 프리드먼의 궁금증에서 시작한다. 또한 유대인이 오직 유대인의 불행만을 슬퍼하는 것, 예수의 신성에 대해서도 궁금한 이 소년에게 랍비도 엄마도 아이의 뺨을 때리는 것으로 답한다. 이에 지붕으로 올라가 이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하는 아이. “약속해주세요. 하느님 문제로 누굴 때리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약속해주세요.”라는 아이의 외침이 안쓰럽게 귓가에 남겨져 있다.

 「신앙의 수호자」자야말로 유대인에 관한 가장 풍자적이고 또한 비판적인 단편이 아니었나 싶다. 등장인물인 셸던의 행동과 말로 인해 몇 번을 가슴을 쳐야 했다. 답답함으로. 오직 유대인으로 살고자 하는 이 어린 장병에게서 시오니즘의 절정을 본 기분이었다. 이 위선적인 신봉자의 행태는 그곳이 군대였기에 더욱 더 정점의 감정을 느끼게끔 했다. 생각거리를 주는 것만큼이나 셸던의 철없고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행태에 무조건적인 분노가 솟았다는 점에서 난 종교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구나를 느낌과 동시에 막스의 외할머니과는 아니구나를 함께 느꼈다. 그러니까 셸던의 행태에 대해 자비가 정의보다 우선한다라는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없었다. 군대에서 유대인의 전통과 교리를 들먹이며 유대인이 먹어야 할 음식을 요구하고 유대인의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며 외박을 끊어 중국집 요리를 즐기는, 자신의 인맥을 동원하여 부대 배치를 바꾸는, 그리고 그런 모든 일들이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라고 외치는, 그리고 그 행동에 아무런 거리낌없는 이 셸던에게서 많은 얼굴이 겹치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엡스타인」의 결말은 웃프다. 글쎄, “사람들이 자기 걸 빼앗아 가기 시작하면, 누구나 손을 뻗게 돼. 움켜쥐게 돼…… 어쩌면 돼지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라고 말하는 루 엡스타인은 무엇을 빼앗기고 있다고 느꼈을까. 열심히 일했고 사업에 성공했지만 가업을 이을 아들은 어린 나이에 사망했고 딸은 사회주의 운동이나 하며 말마나 ‘자본가’ 아버지를 비난하고 조카 녀석과 딸은 젊음의 몸매로 각자의 파트너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사랑에 몰두하는데 자신의 아내는 아름다움이 사라진 지 오래. 이웃집 여인에게서 품은 욕망이 자신이 움켜쥐고 싶은 것이었을까.

 「노래로 그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다」. 그렇다. 1950년대의 미국. 인간은 얼마나 개별적인가. 그러나 많은 이들이 누군가를 판별하는데 그렇게 열의를 보이지 않는다. 단편적인 것들로만 판단하며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도 다 예단해 버린다. 이런 일들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알면서도.

 「광신자 엘리」에서는 님비 현상을 느꼈다. 한뿌리인 듯한데, 이 종교의 갈라짐이 인간의 유대를 얼마나 막고 있는가 새삼 느껴진다. 공동체라는 것은 더불어 살아감이 아니라 그들끼리의 삶의 구축인듯하다. 공동체, 공동체 하면서도 갈등하는 집단 사이에서 미친듯한 이 엘리의 절규가 참 안쓰러웠다.

  결국 이 모든 이야기들 속에서 인간의 이기심을 보게 된 것인가 싶다. 소설이 작가의 경험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필립 로스가 얼마만큼의 갈등을 마음 속에 품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글로 자신의 내면을 표출할 수 있었기에 후련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또한 그만큼의 힘겨움도. 이러한 위선이나 허위들을 유대인이 아닌 이가 지속적으로 제기했더라면 그것은 문화에 대한 몰이해와 배타주의적인 사고 등등의 온갖 비난을 들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작품을 작품으로 보지 않는다거나 그 문제의식을 외면하는 일들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러니 문학성과 함께 이러한 ‘문제’들이 있음을 깊이 있는 성찰의 눈으로 보고, 느끼고, 깨닫고, 글로 써준 필립 로스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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