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사회 - 증오는 어떻게 전염되고 확산되는가
카롤린 엠케 지음, 정지인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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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방위를 고민하며


혐오사회-증오는 어떻게 전염되고 확산되는가, 카롤린 엠케, 2017-07-18.


  생각해보니까 2017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후딱 지났다. 극도의 긴장감이 떠나지 않았던 한해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이 되니 길었다보다는 역시 짧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지나갈 해에 대한 아쉬움이려니 싶다. 더구나 한해동안 맑고 밝은 긍정적인 단어보다 칙칙하고 어둡고 부정적인 단어 속에서 살아왔으니 해결치 못한 찝찝함이 가득하다.

  올 한해도 여전히 혐오의 프레임 속에서 살았다. 삶이 힘겨워서인지 가치가 실종되어서인지 타자에 대한 혐오는 끊이지 않았다. 문제는 이런 혐오의 프레임은 대중에게서 퍼져나가기도 했겠지만 정치권에서 끊임없이 조장하고 이용했다는 점이다. 혐오와 증오의 감정이 확대되고 구조화되어 타인에 대한 멸시와 폭력을 당연시하고 나의 편을 가르는 이 과정을 너무도 좋아하기에 정치권은 이 혐오를 계속 이어갈 것이다.

  카롤린 엠케는 「혐오사회」에서 이 점을 이야기한다. 혐오가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형성된 감정”이라 얘기한다. “혐오와 증오는 느닷없이 폭발하는 것이 아니고 훈련되고 양성된다.” 그렇기에 이것을 자발적이고 개인적이라 간주하는 한 이 감정을 양성하는데 기여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기본적으로 이 주장에 동감하기 때문인지 이 책은 책장이 쉽게 넘어갔다. 현학적이지 않아서 저자의 글을 현실과 대입해 생각해볼 수 있는 여유도 있다. 저자 카롤린 엠케는 오랜 시간 동안 세계 분쟁지역을 취재한 저널리스트이고 성소수자라고 한다. 저자의 경험이 구조화된 혐오와 증오의 현상을 분석하는데 바탕이 되었기에 그 시선을 포착해내는 것이 달랐으리라 본다. 그렇기에 좀더 생생한 사례들과 그에 대한 명민한 생각들이 기술될 수 있었다고 본다.

  혐오에 대한 현상은 비슷비슷하고 분석도 비슷하다. 결국 같은 것을 겪으면서 이유를 알지만 해결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 생각하게 된다. 해결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해결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습관이란 늘 생각도 변화도 하기 싫은 법이니까. 올 한해도 반복된 혐오의 뉴스는 지역과 대상만을 달리해서 내년에도 이어질 것이다. 더구나 당장 크나큰 선거가 눈앞에 있으니 얼마나 이 치열하고 저열한 혐오의 언어들을 맞닥뜨리게 될지,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어떠한 혐오의 언어에는 휩쓸려가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생겨난다.


증오는 그저 존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만들어지는 것이다. 폭력 또한 단순히 거기 있는 게 아니다. 준비되는 것이다. 증오와 폭력이 어느 방향으로 분출되는지, 누구를 표적으로 삼는지, 또 그러기 위해 먼저 어떤 장벽과 장해물을 제거하려 하는지, 이 모든 것은 우연하거나 단순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된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여성혐오와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확산되고 상대적으로 인종에 대한 혐오는 덜한 것처럼 보이지만 한국사회 역시 다문화가정과 새터민에 대한 멸시와 차별을 진행해왔다. 상대적으로 노출이 덜 되었을 뿐. 세계적인 인종차별과 혐오에서만큼은 한국은 비켜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인만큼 순수혈통, 단일민족에 대해 자부심을 치켜세우는 민족이 또 있을까. 가시적으로 보게 될 혐오의 언어를 미리부터 걱정하고 있는 것도 참 미련스럽게 보이지만 혐오가 가지는 힘을 무시할 수 없기에 그렇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순수성’ ‘표준’에서 벗어난 것은 예외없이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 개입되어서다. 한번 잘못된 이 인식을 돌리는 것은 어마어마한 폭력이 지나간 후에도 이뤄질까 말까하다. 지난 대선 토론에서도 성소수자 논쟁이 곧 무시할 수 없는 혐오확산으로 이어지는 현장을 봤다. 동성애자가 에이즈를 확산한다는 그 인식과 더불어 다른 사람이 싫어하니까 맹목적으로 혐오에 동조하는 모습들을 보았다.

  누군가 지속적으로 욕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참으라고 한다. 그 폭력에 맞대응하면 쌍방폭력이 된다. 정당방위가 아니라 쌍방폭력이 되고 마는 현실 때문에 혐오와 증오에 관한 개인적인 감정이 아닌 구조적 차원에서 접근하고 해결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혐오에 혐오로 대응하는 것이 한순간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해봤더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욕설에 욕설로서라도 맞대응하지 않으면 그것은 일방적이 되고 만다. 특별한 일이 되지 않은 채 넘어가는 일상적인 일로 치부되고 만다. 맞대응해야 보는 사람도 흥미롭게 관전한다. 세상이 그렇다.


증오와 순수의 광신주의에 맞서려면 시민사회와 시민들이 나서서 배제와 포함의 기술들에, 어떤 사람은 보이게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보이지 않게 만드는 인식의 틀에, 개인을 집단을 대표하는 표본으로만 보는 시선의 체제들에 저항해야 한다. 모든 사소하고 저열한 형태의 멸시와 굴욕에 용기 있게 이의를 제기해야 할 뿐 아니라, 배제된 이들을 지원하고 연대할 수 있는 법률과 실천도 필요하다. 그밖에 다른 관점들과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인식시킬 수 있는 다른 서사들도 필요하다. 증오의 틀을 무너뜨려야만, “전에는 서로 다른 것들만 보였던 곳에서 비슷한 것들을 발견할” 때에만 공감이 생겨날 수 있다.


  「혐오사회」에 대한 이 맞대응 방식에 대해 저자는 모두가 맞서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사회제도적 차원에서 이 혐오와 증오의 구조자체를 변화시켜야 한다. 사회문제를 바라보고 그에 대한 대안을 얘기할 땐 항상 이렇게 끝이 난다. 인식과 구조의 변화. 그래서 어떻게라고 그 세세한 방법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더 큰 고민의 장으로 넘겨버린다. 책을 읽을 땐 그 현상에 대한 분석자체에 힘이 실리며 만족스러움을 느끼다가도 현실로 넘어오면 뭔가 아득하다. 실천과 변화를 너무나 어렵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생각하게도 된다. 어쨌든 문제인식을 명확히 하고 난 후에 대안을 찾아 나가는 것이기는 하지만 혐오의 상황은 너무 깊고 넓으니까. 그럼에도 혐오와 증오가 형성되고 확산되는 일련의 매커니즘을 잘 보여주고 있어서 「혐오사회」를 읽는 내내 카타르시스는 최고조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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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폐허를 응시하라 - 대재난 속에서 피어나는 혁명적 공동체에 대한 정치사회적 탐사
레베카 솔닛 지음, 정해영 옮김 / 펜타그램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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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이 주는 축복


이 폐허를 응시하라 - 대재난 속에서 피어나는 혁명적 공동체에 대한 정치사회적 탐사 


  미국 캘리포니아 산불이 일주일째 지속되고 있다. 사망자와 피해자도 계속 증가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가장 강력한 허리케인 어마가 카리브해 섬나라와 미국 플로리다에, 그 이전에 허리케인 하비가 미국 텍사스에 엄청난 피해를 안겼다. 인도네시아 발리섬에서는 아궁화산이 분화로 하루에도 천여 건의 화산 지진이 일어나 주민 12만명 이상이 대피 상태이기도 했다. 지난 몇 달간 허리케인과 지진 등 세계는 재난이 끊이지 않았다. 자연재해는 나라를 가리지 않고 속속 이어졌다.

 자연재해만이 아니다. 10월에만도 총기난사 사건이 계속 발생해 역사상 최악의 총기 난사라는 미국 라스베가스를 비롯해 스웨덴과 버지니아 주립대에서도 사건이 발생했다. 14일 소말리아 자살 폭탄테러는 수백만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세계 곳곳에서 각종 테러 역시 끊이지 않고 있다. 

  뉴스는 끊임없이 세계에서 발생한 재난을 보도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온갖 사건 속에서 ‘재난’이 멈추지 않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리베카 솔닛의 『이 폐허를 응시하라』는 최악의 재난 속에서 사람들이 보인 행동을 조사하고 해석한 책이다. 100년이란 시간 동안 일어난 재난, 그 상황을 겪은 사람들은 분명 다르지만 그들의 행동에는 분명 공통의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리베카 솔닛은 이 점에 주목한다. 관점은 재난의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유토피아, 휴머니즘 관점이다. 그리하여 이 책의 주제를 리베카 솔닛은 서론에 명시한다.


이 책은 평범한 사람들이 재난에 훌륭하게 대처한 이야기를 다루며, 그러한 대처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다룬다. 지금은 널리 이야기되고 있지 않지만, 이 주제는 최악의 상황이 닥쳤을 때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말해줄 수 있는 주제다.


  수많은 재난이 있었고 이로 인해 사회질서가 무너지는 일 또한 허다했다. 정신의학은 재난의 영향을 트라우마로 일컬으며 약한 인간을 가리키고, 재난 영화는 재난에 직면해 흥분하고 광폭한 모습의 인간을 주로 묘사한다. 하지만 재난 연구를 통해 리베카 솔닛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발현되는 인간본성이 있으며 두드러진 본성은 “회복력과 임기응변 능력, 관대함, 동정심, 용기 같은 것”이라 말한다.

  저자가 주로 조사한 대표적인 다섯 가지의 재난을 보면 재난이 발생 후 권력자·지휘부는  재난에 처한 사람들을 ‘문제’로 규정하며 대응 방식을 편다. 곧 이들을 폭도로 간주하며 또다른 폭력을 행사하는 식이다. 하지만 평범한 시민들은 패닉 상태에 빠진 가운데서도 점차 이를 이겨내고 무료급식소, 응급처치소를 세우는 등 다른 이를 돕고 재난을 복구하기 위한 즉각적인 활동을 한다. 이러한 이타주의의 사례는 언론에서도 자주 다루는 소재이기도 하다. 폐허 속에서는 어김없이 평범한 “영웅”들이 발생하고 이들의 동기는 재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와 이타주의의 발현이다. 엄청난 재난을 겪은 후의 사람들은 단순히 서로를 돕는 것에 그치지 않고 좀더 구조적이고 체계적인 형태의 조직을 갖추는 것으로 나아간다. 이로써 다양한 형태의 운동조직이 갖추어지고 서로 연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른바 ‘강력한 시민사회’로의 성장이다.

  언제나 재난에는 보통의, 시민들이 있었다. 하지만 재난 극복에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재난의 심각성을 부추기거나 특정한 이들을 문제시하는 방법으로 위기를 타개하려는, 프레임 전환을 활용하기도 한다. 그들은 연대의식보다 위기극복보다 그 상황에서도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이익, 정권유지를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보통의 인간에 기대어, 그들의 인간 본성의 순수성을 이타성을 믿으며 우리는 재난을 극복해 간다. 물론 소수 이기성을 보이는 사람들은 있을 지라도.


위계질서와 기존의 제도는 이런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위기를 극복하는 데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시민사회는 이타주의와 상호부조를 정서적으로 훌륭하게 입증할 뿐 아니라, 도전에 대처할 수 있는 창조성과 자원을 실천적으로 동원하는 데에도 성공적이다. 대재난에는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결정을 내리는 이런 분산된 권력구조가 적합하다. 재난이 엘리트들에게 위협적인 한 가지 이유는 권력이 현장의 민중에게 넘어가기 때문이다.


  리베카 솔닛이 꼼꼼하게 조사하고 재난을 경험한 이들의 인터뷰를 통해서 이러한 특징들을 알려주었지만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언제나 재난이 닥쳤을 때 우리가 기댈 곳은 네 이웃들이었다는 점을 말이다. 인간의 선함에 이타성에 측은지심에 기대었다고 말이다. 리베카 솔닛은 이러한 시민들의 연대의식, 공동체에 대해 “축제” 또는 “혁명”과 같다고 말한다. 재난이 주는 축제로 재난상황에서 제대로 된 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넘어서서 조작을 일삼는 지도층이나 체제를 무너뜨린다는 점이 있다. 체제의 변화, 이것이 바로 혁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긴박한 순간들에 대하여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할 수 있다. 첫째, 재난은 가능한 것,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잠재되어 있던 것을 입증해 준다. 우리 주변 사람들이 가진 회복력과 관용, 다른 종류의 사회를 즉석에서 꾸려가는 능력이 바로 그것이다. 둘째, 재난은 우리들 대부분이 연대와 참여와 이타주의와 목적의식을 얼마나 간절히 갈망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재난 속에 경이로운 기쁨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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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0-16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은 휴머니즘입니다. 재난속에서 피어나는 자발적인 시민들의 연대와 관용, 그리고 인류애.

모시빛 2017-10-16 19:48   좋아요 0 | URL
넵. 동감입니다. 자발적 시민들의 연대로 상까지 받은 국민들이 있죠 ㅎㅎ
 


국민의 복지를 확대하는 것은 급하지 않습니다.


복지국가를 향한 짧은 안내서 

- 국제적 관점으로 쉽게 쓴 사회정책입문

존 허드슨·스테판 쿠너·스튜어트 로우, 나눔의집, 20100.

  

  9월 7일은 사회복지의 날이다. 사회복지 관련된 곳에서는 오늘을 기념하며 행사가 이뤄지고 있겠지만 언론은 관련된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형식적이라고 해도 특정한 날이 되면 그에 관한 의미를 짚어보고 여러 문제들을 지적하는 게 지금까지 이뤄져 온 방식이었다. 가령 장애인의 날엔 그 전후로 장애인에 관한 기사가 들끓고 부부의 날엔 부부관계에 관한 기사가 들끓는 것처럼, 이런 특정한 날을 지정해야 관심받는 그런 영역들이 있기 마련이다. 다른 때라면 복지대책에 관해 집중조명이 될 터인데 여러 이슈로 언론은 바쁘다.

  하긴 전쟁이 어쩌고저쩌고 하루종일 떠들어대는 상황이니까 심각한 상황은 맞다. 그렇게 봐야 하나? 이런 상황을 자주 맞닥뜨려 양치기 소년이 외치는 ‘늑대가 나타났다’처럼 반응하게 되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서, ‘안보’ 외치는 기사는 안보이고 이런 기사들만 눈에 띄나 보다.

국민의 복지를 확대하는 것은 급하지 않습니다.

  9월 7일자 바른정당 원내대표 주호영의 교섭단체 대표연설의 한 문장이다. 이 문장을 말하기 위해 늘 노력해온 결과 평소에도 이 말을 하는데 주저함이 없었지만 오늘은 더욱 더 당당하게 소리 높여 외쳤다.


“다층 미사일 방어 체계를 갖추는 데 약 10조원이면 된다고 합니다. 국민의 복지를 확대하는 것은 급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의 안전과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구축 가능한 방어체계를 포기하는 것은 대통령의 치명적인 직무유기입니다.”


  무분별한 복지 포퓰리즘이란 프레임은 항상 ‘복지’가 달고 살아야 하는 말이다. 우리나라 사회보장지출은 OECD 국가와 비교했을 때 거의 최하위이고 국내 다른 지출비의 절반의 절반도 안되는 수준이다. 그마저도 늘 삭감되는 수모를 당한다. 도대체가 ‘무분별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럼에도 늘 특정 정당은 사회복지예산이 0.1%만 올라도 기겁을 한다. 그래 놓고서는 선거때면 노인들 관련 복지 공약은 하늘 드높은 줄 모르고 올리려고 기를 쓴다.

  10조원이라. 나라를 핑계대고 해먹은 돈이 많아서 10조원이 많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지경인데 그동안 그렇게 안보를 중시하면서 각종 군사 무기를 위해 그토록 불량품을 쓰려 안달이었을까. 왜 그토록 방산비리를 저질러 갖추어야 할 것을 갖추지 않았을까. 툭하면 꺼리를 만들어 복지를 세상에서 가장 불필요한 것으로 취급하는 이들의 생각에 대해 묻는다. 복지는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는 것과 상관없는 일인가. 그래 놓고서 국민은 나라를 위해서는 언제든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한다.

  너무 고전적인 이야기지만 매슬로우는 의식주의 생리적 욕구를 안전의 욕구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인간의 욕구라고 말했다. 가장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가 충족되지 못한 이들이 증가하고 있는데 ‘안전’하게 해주겠다며 마지막 밥알을 빼앗고 굶주리고 헐벗은 몸과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몸바치라 말한다. 그것이 나라와 국민을 위해 역할을 하겠다고 나선 이들이 행하고 있는 모습이다. 

  한국이 복지국가였던 적이 있던가. 복지국가가 되는 것이 혐오국가로 가는 길이라도 되는 양 하는 이들의 머릿속에서 복지국가가 나올 수는 없다. ‘복지’를 늘 없는 이들에게 날리는 적선으로 생각하는 이들에게서 ‘복지’는 게을러서 굶게 생긴 이들에게 야, 먹고 떨어져라 던지는 제 침묻은 밥을 던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에게 ‘복지’란 단어는 이해할 수 없는 단어이고 세계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 자신의 ‘복지’를 위해서 타인의 ‘복지’를 빼앗는 일엔 열심이고 더러 그것을 하는데 늘 ‘국민’이란 단어를 핑계한다.

  『복지국가를 향한 짧은 안내서』 이 책은 사회보장, 고용, 보건의료, 교육, 주거의 사회저책에 대해 설명하고 쟁점을 논하고 있다. 특히 몇몇 나라가 아니라 70여 개 나라의 사례를 비교분석하고 있어 정책에 대한 이론적인 접근뿐 아니라 실제 적용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게 해준다. 정책이란 ‘생물’과 같기에 각 나라가 처한 상황에 따라 실제 적용에서의 많은 차이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회복지정책은 다각적인 시각을 가지고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기본적인 가치와 추구하는 목표는 갖춘 상태로 말이다. 마냥 특정한 나라의 정책만을 쫓다 보면 실패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어쩌면 시의원, 도의원, 국회의원 할 것 없이 선진정책을 배우겠다며 늘 외유성으로 관광하고 돌아와 이런 식으로 정책들을 가져다 그대로 CTRL+C 해서 CTRL+V 했을 것이다.

  이 책은 사회보장에 관한 기본 이론서이다. 이야기가 가득하고 재밌게, 가볍게 읽을 수 있다기보다 사회복지전공자들을 위한 기본서로서 더 충실하다. 하지만 이 책 속에서 다루는 사회보장, 고용, 보건의료, 교육, 주거에 관한 내용들이 전혀 우리 생활과 유리된 내용들이 아니기에 오히려 정책에 대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다보면 한국이 왜 ‘복지국가’가 아닌지를 알 수 있을지도….

  어떤 ‘날’엔 그것을 기념하며 그것에 대해 예의를 갖추기 마련이다. 부족한 부분을 생각하고 수정해야 할 것을 더 돌아보며 말이다. 사회복지의 날, 늘 그래왔지만 오늘마저도 철저히 무시된 ‘사회복지의 날’에 복지국가는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다. 국가까지는 나아가지 않더라도 나의 복지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씁쓸하다. 세금은 꼬박꼬박 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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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뜨거운


100℃ -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창비, 2009.


  분명 촛불혁명 이후 민주주의에 대한 시각은 변했다. 민주주의가 실체가 잡히지 않은 채 피로 쟁취해야 하는 이미지에서 평화적이고 질서 있는, 수준높은 우아함으로 요구할 수 있음을 보여준 국민들은 이제 민주주의를 다시 쓴다.

  그래서인지 민주주의의 국민 의사표현 방식으로으써 새롭게 ‘문자’에 대한 공방이 오가고 있다. 말끝마다 국민을 들먹이는 정치인들은 국민의 문자를 특정 집단의 테러로, 폭탄으로 규정하며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행위라 명명했다. 반면 국민들은 정보혁명 시대에 맞춘 새로운 의사표현 수단으로서 문자를 정의하며 당당하게 개인의 번호를 노출한 만큼 문제테러범, 폭탄투하범이라 규정하는 정치인들의 행태에 분노하고 있다.

  어쨌든 분노는 좋다. 분노는 새로운 에너지로 전환되는 힘이다. 다만 그 표현방법에 있어서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어쨌든 민주주의의 발전은 깨어 있는 시민의 폭압적 권력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국민들의 대응방식은 변화했고 여전히, 정치인들의 인식은 변하지 않은 채다.

  100℃는 1987년 민주화운동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날의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운동이 어떻게 지금까지 이어져 올 수 있었는가를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정신의 계승이다. 대한민국의 근대사는 평탄할 새가 없었다. 전쟁과 독재가 연이어지고 폭력과 폭압 속에서 짓눌리며 살아야 했다. 경제마저도 피폐한 상황에서 국민으로서의 당연한 권리 또한 폭압아래 허물어졌다. 그 피폐한 삶에서도 사람들은 인간의 존엄을 부르짖으며 목숨과 민주화의 가치를 바꾸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소리소문없이 스러져갔고 빨갱이란 딱지를 붙이며 시뻘건 피를 빼내는 일이 당연한 듯 권력에 의해 휘둘려지던 그 때. 삶은 삶이 아니었다.

  1980년의 광주민주화운동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감추고 거짓으로 꾸며댄 이야기만이 권력의 입맛에 맞도록 전해졌다. 그렇기에, 사실과 진실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수많은 이들이 충격과 죄책감을 가졌다. 그리고 여전히 죄지은 자는 죗값을 치르지 않았고 세상은 여전히 독재가 휘두르고 있었으니, 국민들이 분노의 함성을 일으키는 당연한 일이었다. 모두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었고 깨어 있는 이들이었고 내 가족과 내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들이었기에 그렇다. 영호가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고 학생운동에 뛰어들게 되면서 보이는 가족들의 반응이 그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대학생 영호의 이야기라기보다 영호의 어머니 이야기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가 노동운동에 뛰어들게 되는 모습을 생각나게 하는. 어머니는 여러 의미로 정말 강하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100℃는 그리고 있다. 아들의 학생운동에 반대하며 빨갱이에 대한 트라우마가 강하게 서린 어머니가 진정, 민주화운동에 열성적이게 되는 모습은 평범한 사람들을 투사로 만드는 강력하고 불합리한 억압이 만드는 것이다.

  눈물과 피와 목숨으로 이룬 민주주의가 어이없게도 무너지는, 독재로 회귀하는 현상을 경험한 이들의 분노와 허탈은 얼마나 강했을까. 그럼에도 촛불을 들어 민주주의를 향한 발걸음이 꼭, 피가 아닐 수 있음을 보여준 이 역사가 잘 이어져가기 위해선 또한 피흘렸던 그 시간들을 오롯이 기억해야 한다. 민주주의라는 나라에서 자행된 폭압적인 시위 진압방식을 보며 이 나라의 독재적이고 무식한 권력은 정말로 다른 나라에서처럼 국민들이 폭탄 테러를 자행하지 않는 것을 축복으로 여겨야 한다. 이제까지의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우리나라 국민은 개인은 희생했지만 타인을 죽이면서 ‘민주주의’를 외치지 않았다.


물은 100도씨가 되면 끓는다네. 그래서 온도계를 넣어야만 불을 얼마나 더 때야 할 지 언제쯤 끓을지 알 수 있지. 하지만 사람의 온도는 잴 수가 없어. 지금 몇 도인지, 얼마나 불을 더 때야 하는지. 그래서 불을 때다가 지레 겁을 먹기도 하고 원래 안 끓는 거야 하며 포기를 하지. 하지만 사람도 100도씨가 되면 분명히 끓어.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네.

 

  『100℃』가 보여주는 세계는 시민의 힘을 보여준다. 1980년, 1987년. 그리고 또한 무수한 나날들. 그리고 처음 촛불을 들기 시작한 때부터 지금까지. 지난 겨울부터의 경험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지나치게 경직되고 엄숙한 분위기가 좀더 밝고 명랑한 분위기가 가미되었다. 민주주의는 시민의 의식으로 점점 변화되고 발전되어 간다. 영원히 ‘완성’ ‘완결’형이 아닌 만큼, 계속 지켜보고 관심을 쏟으며 내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와 의무가 있음을 이 만화는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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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의 결말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최규석, 이미지프레임, 2004.


  시각은 변한다. 재밌게 둘리를 보던 시절을 지나, 둘리 때문에 웃고 울던 때를 지나 고길동에게 연민을 느낀 시절이 있었다. 세월은 흘렀다. 말썽많은 객식구를 갑작스럽게 돌봐야 했던 고길동의 밉살스러움이 이해가 되기도 하던 시절을 지나왔다면, 아 정말 나이가 들었구나 싶다. 내가 나이가 든 만큼 강산은 여러 번 변했고 강산이 변한 만큼 세상은 외적 변화와 더불어 내적인 면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사람에 대해 가치에 대해, 아닌 것처럼 하면서 변해서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순정만화가 더 좋았던 시절이라면 이런 그림체의 만화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 같지만 세월은 취향에도 변화를 주기 마련이어서 공룡둘리의 나이듦을 보고 싶었다. 아기공룡은 다행히, 누구의 관점에서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멸종하지 않았고 나이들었다. 익살스럽던 그 아기공룡의 현재는 고개를 돌리면 무수히 보이는 수많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공룡 둘리. 그런 이야기를 닮은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주민등록증만 주어진다면 어김없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의 모습을 그대로 밟고 있는 둘리. 주민등록증이 없다면 영락없는 이주노동자, 불법체류자인 공룡 둘리다. 여전히 둘리가 만화의 세계라면, 둘리의 이야기가 환상이려면 둘리의 손가락에서 발휘될 초능력의 존재다. 그렇게 둘리의 손가락을 제거함으로써 이 이야기는 완전한 현실의 이야기가 된다. 그 손가락마저도 다른 이유가 아닌 프레스기에 잘리게 함으로써 둘리는 엄연한 이 땅에 살아가는 노동자의 모습으로 변모한다.

  이 만화가 나온 시기는 신자유주의, IMF를 지나 구제금융이 촉발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받아들이던 시대에 그려진 것이라 당시의 피폐한 분위기가 더욱 드러난다. 그러나 가려져서 그렇지 여전히 이 억압적 노동환경은 진행되고 있으며 둘리의 친구들의 삶 역시도 둘리와 다르지 않다. 몸을 파는 또치의 삶, 공갈젖꼭지는 벗어버리고 감옥을 들락날락하는 희동이, 친구들을 해부용으로 팔아넘기는 철수. 어릴 때 보던 그 아이들은 모두 변했다. 낯선 것에 호기심과 연민을 가지고 돌보던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가 던져준 환경에서 그 환경의 길들임에 맞게 변화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또한 도우너의 사기로 인해 빚에 쪼달리다 사망한 길동이나, 그래서 이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철수 또한 손을 잡고 함께 하는 친구들, 가족들의 존재가 놓인 환경을 헤쳐나갈 수 없게 하는데서 더욱 변화하게 한다. 더 구렁으로 들어가도록 만드는. 좀처럼 명랑만화의 분위기를 생각할 수 없는 황량한 둘리의 시대.

  말안장에 앉으면 돈이 마구 쏟아지는 정유라가 송환되어 5월의 마지막날 한국으로 입국한다. 대한체육회도 한국마사회도 어떻게 흘러온 구조인지 권력에 아첨하고 돈놓고 돈먹는데에 전력을 쏟는 사이 마필관리사가 사망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이야기도 흘러나오고 확정되기도 하는 분위기이고 무엇보다 닫힌 환경이 아니라 문제가 있으면 합리적인 개선방안을 수립할 수 있는 정부의 분위기가 흐르고 있는데 39살 마필관리사는 자살을 선택했다.

  역시 구조적 환경이 만든 인간적이지 못한 처우 때문이다. 태생이 그렇게 변화되지 않을 인간이 있기도 하고 한계단이라도 위에 서 있으면 ‘갑’의 본능을 끄집어내는 이들이 있다. 구조가 인간의 합리적인 인식마저도 도태되게 만드는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 시스템과 싸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이 만화는 둘리에 관한 이야기 외에 여러 편의 만화가 수록되어 있다. 하나같이 현실과 그 현실을 이용하고 현실에 이용당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날카로운 사회풍자는 아픈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병든 사회에선 역시 쉽사리 병들 수밖에 없는 거 아니겠는가. 끊임없이 자살을 시도하는, 그럼에도 아무도 모르는, 그저 비품취급받는 의자처럼 우리의 존재가 구조속에 갇혀, 아무것도 아닌 취급을 받게 되는 것. 지극히 인간적인, 인간적인 사람의 마음이 삶의 위안이고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함에도 사회의 변화는 처절하고 아프게 흘러간다. 더 나은 사회를 기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공룡의 시대가 다가오지 않기를. 공룡시대의 끝은 종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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