것, 것, 것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 한국 사회의 변화를 갈망하는 당신에게

 강인규 저, 오마이북, 2012.

 

  이 책이 기분 나쁜 건, 하나다. ‘너 때문에’라며 탓을 돌리다 문득, ‘내가?’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너’가 90이상이고 난 0.00001%만 하련다. 그게 솔직히 맞다고 본다. 그런데 기분 나쁘게 0.00001%에 발목 잡혀 버린다. 나의 %가 결정적인 한방일 수 있음을 넘치지 않고 잘 버티는 컵에 내가 떨어뜨린 한방울에서 물이 넘쳐흐르는 상황을 목격한 기분이랄까.

 

“한두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거짓말이다. 사실은 “한두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는 생각이 세상을 바꿀 수 없게 만든다. 사회는 개인의 집합체이기에 한두 명의 개인이 바뀌면 그 사회는 그 몫만큼 바뀌게 된다. 나 혼자만 바뀌어도 세상은 한 사람만큼 바뀌는 것이다. 게다가 사람은 관계망 속에서 살고 있기에 나의 변화는 항상 주변의 변화를 몰고 온다. p5~6


 지금, 우리는 망가진 사회에 살고 있다. 지금이라니, 주욱 지금이었다. 지금은 늘 현재진행형이었다. 망가진 사회에 여러 가지가 포함되어 있다. 정치, 경제, 교육, 복지, 모든 것들이 개판이다. 망가진 것은 내 책임이 아니었으니 복구의 책임도 내 몫이 아니라고 하면서 열심히 지켜봤다. 사실, 망가진 것들을 탓하는 것 말고 할 게 뭐 있었겠나 싶다. 아니 그거라도 해야지.

  수많은 지표들이 최하위로 곤두박질치고 그나마 유일하게 총기사고는 거의 없는 나라에서 사는 것은 다른 나라로부터 ‘치안이 안전한’나라로 부각되고 있다. 당장 총기자유가 되면 이것도 사라지겠지만, 체감하는 입장에선 치안이 안전한지 잘 모르겠다. 그것만이 자주 없을 뿐이라는 걸 아니까. 망가진 것들을 하나 하나 열거하고 있는데 하나씩 정리되어 보니 이토록 많았었나 싶은 것이 망가지지 않은 것을 꼽는 것이 더 쉬울 텐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포털 메인화면 뒤로 재빨리 숨어버린 당장의 전기, 가스 민영화 소식이나 ‘혐오’와 ‘분노’를 기반한 사건들, 기하급수적으로 벌어지는 안전사고들도 ‘망가짐’을 더하는 요소가 되겠지.

  망가짐의 이유는 결국 망가진 ‘의식’이 결정적인 건가. 망가뜨리는 주체와 더불어 망가짐을 방치하고 망가짐에 익숙한 사고들은 권력과 자본에 종속되어 진행된다. 약자가 되는 것은 권리는 사라지고 권력이 힘을 펼치기 때문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뭐, 권리를 챙기며 산다는 것이 쉽지 않게 되어버린 것을 어쩌라고.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를 따지는 것만큼이나 물고 물린 이 약자의 삶과 권력의 세상.

  우리가 망가진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패배주의에 물든 공명심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상실된 것도 있지만 인터넷 상에서 비난이 속출하고 조롱이 난무하는 것은 공명심마저도 망가져 있기 때문이라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패배의식 때문이다. 공명심은 느끼고 싶지만 정말 중요한 사회문제를 바로잡을 용기가 없을 때 하는 짓이 ‘만만한 상대 물고 늘어지기’다. 이는 한국 주류 언론의 고질적 병폐이기도 하다. p87~88


 이러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저자는 외친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많이 들어온 소리지만 투표해야 한다고. 지금 당장은 총선도 끝난 마당이라......마냥 투표를 끝내 놓은 시점에서도 ‘가시적’인 것이 아직은 보이지 않아 답답하긴 하다. 당장 내년이 대선인데 ‘투표’가 답이 될 수 있는 사회적인 여건과 상황이 만들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쨌든 저자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말에 속지 말라고 강조한다.

  안타깝게 한국사회의 문제를 진단하는 모든 사회학 서적들은 ‘투표’를 강조한다. 나 또한 모든 것들에 결국 답은 투표이고 의식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너무 자주 듣고 자주 말하다보니 어느 순간 이것에 대한 정당성이나 진실성이 조금씩 빠져나가는 느낌마저 들 때가 있다. 이것은 실체 없는 구호에 지나지 않는 걸까, 아닐까.

  수많은 사람들이 변화를 갈망한다. 하지만 이렇게 망가진 사회에서의 ‘변화’에 대한 갈망은 일단은 나 자신의 삶의 변화가 우선될 것이다. 당장 내가 취업하는 것이 우선이고, 내가 명퇴당하지 않는 것이 우선이고, 내가 무얼 더 가지거나 내가 현재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는 것을. 눈 앞이 아득한 상황에서 내 안정을 먼저 취하지 않은 상황에서 더 먼 곳을 바라볼 수 있을까. 내 눈 앞의 안전을 확보해야 그 다음의 안전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 본능인걸.

  그래도 저자는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라는 말은 거짓말이니 내 삶이 절박할 때에 다른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라고 말한다. 내 삶을 다른 이가 보아주길 원한다면 말이다. 이렇듯 역지사지의 심정을 가지고 한국 사회의 변화를 이루어가자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한국사회, 희망이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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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몇 차원적 인간인가

    

   마르쿠제는 현대를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를 공통 존재로 하는 일차원적인 '고도산업사회'라고 명명한다. 이러한 사회에서 인간은 억압된 현실을 비판하는 힘이 되는 내적 차원을 상실하고, 의식의 일원화에 이른다. 결국 인간은 문화가치와 기성질서가 동일화하는 일차원적인 문화와 사고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처럼 마르쿠제는 점점 사회에서 인간 소외와 인간 상실이 되는 상태를 그리고 있다.

   3부 10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1부에서 고도산업사회의 모습인 1차원적 사회의 모습을 그려낸다. 2부에서 이러한 사회에서 획득된 1차원적 사유의 상태를 그리고 마지막 3부에서 이 사회에서 새로운 철학의 가능성에 대해 논하며 이 사회를 개조한 새로운 세력에 대해 논하고 있다. 다만, 확실하고 분명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선진산업사회에서의 인간은 모든 “과학적・기술적인 합리성과 조작은 새로운 사회 통제의 형식으로 함께 결합”되어 인간을 소외시킨다. 1차원적 인간은 이렇게 다차원적 사고를 배제한 채 기술적 합리성에 의해 노예화되어 가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논리 전개는 비슷한 패턴을 보이는 듯하다. 저자에 대한 이해없이도 목차를 훑어보거나 몇 장을 읽고 나면 아, 이 사람은 마르크스와...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전반적으로 거의 모든 철학과 정치, 경제사가 마르크스의 생각과 저작에서 뗄 수 없는 영향을 받고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일단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논거의 방식이나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기본적 사상의 이해, 개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인지 일단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책이나 프랑크푸르트 학파들, 그러니까 독일 출신의 철학가들의 책을 읽으려면 일단 숨을 크게 들이쉬고 읽어야 한다. 1차적인 내용의 흐름을 알고 세세한 것까지를 완벽히 습득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시간이 부족하다. 핵심적인 한 문장만을 뽑아내기 위해 무수한 페이지를 넘기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하다.

   마르쿠제의 저작들은 1968년의 혁명에 어떠한 역할을 했을까. 그때의 학생들은 무엇으로부터 행동력의 힘을 얻었을까. 어떠한 형태로든 ‘필요’가 발명을 낳는다는 말처럼 ‘필요’한 이들의 힘은 그것의 어려움을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20세기 후반에 정치적 좌파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사상가,라고 마르쿠제를 말한다. 그의 생애를 들여다보려니 온통 공부와 연구한 이력만이 넘쳐난다. 그의 일생은 학자적인 관심과 연구의 나날인 모양이다. 특히 그는 헤겔, 마르크스, 프로이트의 연구가, 고도산업사회의 비판적 이론가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러시아와 소련 연구에 집중하기도 했다.

   어느 특정한 시대를 살았다는 건 그 시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역시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다. 그의 철학이 그의 사상이 그의 생애가 어떠했을지는 어느 정도 짐작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역시도 이주와 망명의 연속된 생활이었음을 보건데....

   1968년 일어난 세계적 학생 운동의 분노 물결에 마르쿠제의 영향력이 강했다고 한다. 그의 저서들의 영향력이 컸음이다. 그런 것을 보면 ‘운동’ 역시도 ‘사상과 철학’이 동반되어야 함을, 행동력에 미치는 ‘인식’의 역할을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시대의 사회에 대한 비판적 철학자로서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일차원적 인간』은 현대의 고도산업사회가 기술적 진보에 매몰되어 인간에 대한 몰가치화를 양산하고 있는 것을 비판한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물질적 풍요 속에 정신적 풍요를 잃어버리고 몰살당하면서 욕구마저도 제거된 채 그것을 모르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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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정치가들의 모든 모순과 아이러니

   

  오랜기간 동안, 우리는 마르크스주의 및 혁명적 투쟁사상에 관하여 거부감을 가지도록 길들여져 왔다. 이러한 환경속에서 길들여진 사람에게 있어 마르크스주의적 내용은 두가지 반응을 낳게 한다. 첫째는 반동적인 도서로서의 취급이며 둘째는 그 내용의 논리적인 전개 및 사물을 꿰뚫는 학자의 통쾌한 시각에 대한 경이와 새로운 글에 대한 호기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모순되는 감정을 가지고서 글을 읽는 과정이었다면 모순론의 내용에서처럼 반드시 주요한 모순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글을 읽도록 이끌어 나갔을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나에겐 후자쪽이 조금은 강한 듯하다. 다만 마르크스주의에서 주장하는 부분과 모순론의 차이점, 마르크스주의론을 어떤 식으로 해석하고 마오쩌둥이 이를 수용, 확장하였는지를 중점으로 내용을 살펴보게 되었다.

  중국의 정치가이자 공산주의 이론가 마오쩌둥은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시절에는 농사일을 도우며 아버지의 반대로 진학하지 못했고 16세때 학교에 갈 수 있었다. 양창지에게 유물론적 철학과 윤리학 강의를 받았고 비밀학생단체들과 접촉하면서 무정부주의에 관한 책을 많이 읽으며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로 기울게 되었고 또한 러시아혁명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이후 국가주석이 되었고 국가주석을 사임하고 죽을 때까지 당주석으로만 있었다. 1964년 《마오쩌둥어록》을 간행시켰고, 1965년 10월 이후에는 당내에서 완전 고립되어 연금상태에 있었으나 문화대혁명을 지휘하였으며, 1960년 이후의 중소논쟁과 문화대혁명 기간을 통하여 마오쩌둥사상을 높이 내걸었다. 1970년 헌법수정초안을 채택하여 1인체제를 확립하고 중국 최고지도자로 군림하였지만 사망하기 직전인 1976년 4월 천안문사건으로 완전히 고립된 채 사망했다.

  모순론에서 마오쩌둥은 이론적인 부분에 대하여 중국의 상황을 예로 들어 설명을 함으로써 당시의 중국상황에 대한 이해와 함께 보다 이론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마오쩌둥에 의해 정의·정리된 이른바 마오이즘 사상의 기본은 교조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인 것으로 보인다. 마오쩌둥은 교조주의자들의 이론과 사물에 대한 해석이라는 것이 상당히 왜곡되고 본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의 이론과 상황에 대한 해석에 대하여 교조주의자들의 해석을 질타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논지를 주장하는 자들의 특징이 무조건 “나는 옳다. 네가 그르다”는 식의 논리를 편다는 점을 생각할 때 어느 정도 자신의 주장에 대한 설득력 있는 근거와 예는 주장에 대한 동조를 떠나 일부분 타당성을 인정할 수 있게 하고 또 다른 반박을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보다 발전적인 토론을 할 수 있게 한다.

  발단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기본인 모순의 운동법칙에서 시작한다. 모순은 모든 현상에 존재하며 또한 모순 속에는 특수성이 존재한다. 이 특수한 모순은 다른 사물과 한 사물을 구별할 수 있게 하는 본질을 구성한다. 모든 사물에는 모순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보편성은 특수성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양자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교조주의자들은 보편성만 앞세우고 있다. 모든 사물에 내재하는 모순의 해결방식은 당연 다를 수밖에 없으며 그 사회의 특수성에 기초하여 달라져야 한다.

  중국사회의 경우 특수한 모순은 제국주의-특히 일본-와 중국인민간의 모순이다. 따라서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국내의 각 계급의 단결로서 민족해방전쟁을 행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다른 점을 마오쩌둥이 정통적마르크스주의라고 부른다면 결국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결국 마오쩌둥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에서 기초한 수정된 마르크스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가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명철한 논리를 펼치는 이론들에 대한 관심은 그것이 실질적으로 적용되는 부분이다. 따라서 『모순론』에서 마오쩌둥이 주장하는 내용들이 그가 중국사회에 대한 적용을 어떤식으로 이루어갔느냐였다.

  이에 대하여 여러 책에서는 마오쩌둥이 『모순론』에서 얘기한 이론들을 실질적으로 1940년대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 전개하였다고 하고 있다. 이른바 정풍운동으로서 그의 지위에 위협이 되는 인물들을 제거하는데 성공하였다고 한다. 또한 마오쩌둥의 이론은 전파되어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쳤다고 하고 있으므로 마오쩌둥의 저술의 영향력과 그의 주장의 어느 정도의 실효성을 얻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단순한 논리적 전개뿐만 아니라 그의 생활과의 접목에서 이 글을 이해하면서 마오쩌둥의 부분적 논거에 수긍하는 점이 없잖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적극적인 지지자로서의 나를 설득하지는 못했다. 다만 그가 마르크스주의라는 거대한 사상가의 이론을 자기 나름의 해석틀로 수용하고 이해하였고 이를 변화시켰으며 또한 자기화한 것을 적용하였다는 것만은 기억한다.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그에 대해 좋은 것을 기억하는 자와 그의 독재를 기억하는 자들이 엉키어 있다. 난 모른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나 그가 만든 것들에 대해서나 그가 파괴한 것들에 대해서나. 독재에 조금 더 방점이 찍혀 있는 것 같긴 하다. 그의 생의 마지막처럼 자기 속에 고립된 정치가들에 대해서 도대체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것은 무얼까 궁금하다. 그가 자기이론을 전개하고 적극 실천한 것은 중국사회엔, 중국공산당에겐 독이었을까 힘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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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 청년 논객 한윤형의 잉여 탐구생활



 한윤형 저, 어크로스, 2013년 04월.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제목에서 보듯 이 책은 세대론에 관한 담론이다. 청춘, 이십대의 목소리를 보여주는데 저자가 2007년부터 2013년까지 일간지와 계간지에 쓴 칼럼과 기고문 등을 바탕으로 한다.

  저자는 청년 세대가 가지는 냉소와 무기력을 발견하고 이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지금 사회는 ‘청년’ 문제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고 저자는 이것은 청년들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청년 집단의 문제가 아니라 후기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사회적 충격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좌절되는 이 시대에 대한 청년들의 냉소와 열폭과 무기력을 낳은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탐구하면서 청년들을 바라보는 청년세대가 말하는 진짜 청년들의 모습이다.

  저자는 청년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1부에서 청년 문제를 이야기하며 자신의 일상을 드러내고 2부에서는 청년 문제에 대한 담론을 이야기한다. 3부에서는 사회문제와 청년 문제를 함께 바라보며 어떠한 인식이 필요한지를 이야기한다.

  이 책이 출간된 것은 2013년도 초반이다. 저자가 2007년부터 쓴 글에서 시작되었다 하니, 1983년생인 저자가 20대였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러니 정말로 20대가 쓴 20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20대에서 30대가 말하는 자신들의 이야기보다 다른 세대가 보는, 이삼십대의 이야기가 많았다. 그리하여 걱정스럽고 우려스러운(같은 말인가^^::) 이십대 담론이 즐비했다. 더불어 암울한 미래를 염려하며 그들은 청춘들에게, 젊은 세대에게 좀더 열정적으로 살 것을 채찍질하거나 좀더 이기적이지 않기를 주문했다. 혹은 그들의 삶을 반면교사로 삶아 자신들의 삶과 비교하여 새롭게, 미래에 대한 다짐을 하거나 새로운 자신들의 역할을 정립하거나.

  그러한 비판과 혹은 격려를 들어야 했던 이삼십대의 목소리는 어떠할지, 이 책의 저자를 통해서 그들이 바라보는 이 시대와, 그들의 세대의 관심사를 들을 수 있었다. 뭐, 어찌보면 결론은 다르지 않은 듯한 이야기이다. 어쨌거나 지금 세상살이는 힘들다는 것이고, 문제가 많다는 것이고, 누구든 나서서 이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러려니 여러 여건이 안 된다는 것이고, 그런 사회 속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지쳤다는 것이다.

  진보논객, 청년논객이라 불린 저자 한윤형은 박가분과 함께 데이트 폭력의 가해자로 시끄러웠다. 자숙한다며 사회를 말할 자격이 없다며 글을 접겠다고 했는데, 당분간인지 완전히인지는 모르겠다. 그때 이후 두 사람의 글을 안 읽었는데 꼭 그것이 영향이 아니라, 어차피 읽을 책들도 많았으니까. 그런데 예전에 읽은 이 책의 제목이 그냥 생각났을 뿐이다.

  청춘을 위한 나라도 없고, 노인을 위한 나라도 없고, 여성을 위한 나라도 없고, 아이들을 위한 나라도 없고....요즘 올라오는 기사들을 보면서...아, 나라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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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독재 세상을 꿰뚫는 50가지 이론

강준만 저, 인물과사상사, 2013.


  저자, 강준만은 감정독재를 이야기한다.

  원래 인간이란 감정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지만 인터넷 등으로 과거보다 훨씬 더 견고한 감정독재에 살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주장과 함께 감정 독재에 해당되는 50개 사례를 제시한다. 이 사례들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들이며 저자는 ‘왜’라는 질문을 통해 이에 관한 이론으로 연결한다. 이러한 사례들을 제시하며, 이론을 연결하여 저자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생존과 번영에 유리한 길을 찾아 진화해왔으며, 속도가 생명인 인터넷과 SNS로 대변되는 커뮤니케이션 혁명의 결과로 과거보다 더욱 견고한 ‘감정 독재’ 체제하에서 살게 되었다. 속도는 감정을 요구하고, 감정은 속도에 부응함으로써 이성의 설 자리가 더욱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최근 ‘감정 노동’과 ‘감정 자본주의’가 주요 이슈로 등장한 것도 바로 그런 변화와 무관치 않다. 감정 독재가 심화되면서 자본이 감정을 활용해야 할 ‘감정 식민지화’의 필요성이 더욱 커진 것이다.


싸움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감정 독재’와 ‘싸우는 법’은 사실상 ‘타협하는 법’이다. 정면 승부를 해선 결코 이길 수 없으며, 감정과 이성의 와전 분리가 가능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감정이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니다. 큰일을 이룰 수 있는 동기와 정열은 감정의 몫이 아닌가. 누구 말마따나 “이성의 적이 아니라 동료로서 감정을 바라보는 시각”을 갖고, 타협이 가능한 것들을 긍정적으로 살려나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싸우다 불리해지면 “너 몇 살이야?”하는 것은 어떤 것? 이것은 주의전환의 오류. 마시멜로의 유혹을 참아낸 아이가 승리하는 것은 만족지연이론. 큰 부탁보다 작은 부탁을 먼저 하는 것이 더 유리한 이유는 문전 걸치기 전략의 유효성으로 설명될 수 있다.

  저자는 다양한 감정의 화두를 잘 분석하고 있다. 이론의 틀로 잘 설명하고 있는데 가끔 생각한다. 이론 때문에 행동이 따라가는 건 아닐까. 많은 사례들을 설명하기 위해 이론을 만들어 그의 심리를 알아보고자 한다지만, 가끔 이론이란 이론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서 분석하여 이론을 만들어낸 것인지 선후가 어느 것인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이미 딱지가 붙어 있다는 걸 생각하면, 그러니까 결국엔 모든 것이 이렇게 하나하나 분석이 되는 것이라면 참 설명하기 쉬운 인간의 행동에 대해 혼란스러워할 필요가 없을 텐데하는 생각도 든다. 

  문제는 어떤 행동들이 하나의 이론의 틀 안에 갇혀 버리게 되면 그 행동이 강화된다는 점에 있다. 설명이 되고 납득이 되기에 행동에 대한 일종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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