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여진 우리


   

  애완의 시대라니. 뒤에 ‘동물’을 붙이는 것이 가장 널리 활용된 예라 이 ‘애완’이란 단어 속에 왜인지 ‘길들임’이라는 말이 내포된 느낌을 받는다. 도대체 무엇을, 왜, 애완의 시대라고 말하는 건가.

  두 명의 저자는 베이비부머 세대의 자녀들을 애완의 ‘자식들’이라 말한다. 그들은 부모들에 의해 돌봄과 배려의 대상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 행복하게 이 돌봄에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길들여진’ 젊은이들은 조금만 어려워도 힘들어하고 스스로 삶의 길을 나서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제껏 부모들이 알려준 길을 걸으며 그 길에서 안정된 삶을 길어 올리지 못하자 부모세대에 분노한다. 그리고 부모들은 자신들이 그 빈곤 속에서도 자식들에게 ‘해준 것’에 보상받지 못하고 외면당하자 분노한다.


 삶이라는 것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과 씨름하는 것,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혼란스러움과의 싸움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대리인’의 삶이란 이런 질문을 해본 적도, 받아본 적도 없는 삶을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대리인의 삶은 가장 효율적으로, 가장 효과적으로 주인의 의도를 이뤄내는 것이니 말이다.

 대리인의 삶은 주인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주인의 의지대로 고분고분하게 말 잘 듣는 애완견과 다르지 않다. 애완견은 나이는 먹지만 성장하지 않는다. 애완견은 보살핌은 받지만 존엄의 대상은 아니다. 그렇게 태어났고, 그렇게 길러졌으며 그 이상 성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서적인 지체와 정신적인 미숙함의 문제를 제대로 성찰해보지 못한 채 미성숙한 어른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들의 부모처럼. p72~73


  인류학자 진 리들로프는 “사회에 세대차이가 있다는 것은 그 사회가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신호”라고 보았다. “어린 세대가 그 사회의 어른처럼 되는 것에 자부심을 갖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이미 삶의 연속성과 안정성을 상실했으며 문화라고 부를 만한 문화가 없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 말을 곱씹으면 부모와 자식들이 서로 다른 생각 속에서 서로를 비난하는 이 상황에서 한국은 제대로 된 ‘문화’가, ‘가치’가 전수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 부모 세대는 ‘빈곤’으로 가로막혀 인권도 배려도 함께 살아가는 것도 잊은 채 살아왔다. 배불리 먹기 위해 ‘순응하는 국민’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오늘날의 풍요로움을 일구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기꺼이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나 자신들 또한 전쟁과 빈곤 속에서 보내면서 오로지 ‘궁핍에서 벗어나는 것’에 주시하였기에 궁핍하지 않은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빈곤을 벗어난 삶에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지 못한 채 제가 살아온 삶만을 고수하며 “이기적이고 속물적인 부모”가 되었다. 무엇보다 그들이 살아온 전쟁과 빈곤과 경제성장과 산업화 시대라는 ‘애환의 역사’에서 그들은 국가의 착취에 길들여져 있었다.


우리는 항상 더 나은 삶을 원한다고 했지만, 사실 우리가 원한 것은 더 많이 가진 삶이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풍요로운 재산이었지 풍요로운 정신은 아니었던 것 같다. 더 많이 갖고 싶은 것은 배려심이나 삶의 기품이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더 힘센 사람이 되고 싶어 하며, 그런 사람을 숭배하고 그와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이 보호받는다고 믿는다. p22


  우리는, 지금 우리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건가. 부모 세대도 자식 세대도 서로에게 겨누는 날카로움만큼의 정신적인 성숙을 지녔다. 결국 모두가 애완의 세대 애완의 자식이 되었다. 애완이 애완을 되물림하며 풍요로운 정신적 문화를 물려주지 못함은 지난 대선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이 사상적 빈곤이, 과거의 길들여짐에 익숙한 정신이 미래까지 과거 속으로 소환하는 것이다. 이것이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이고 저자들이 묻고자 하는 바다. 애완은 결코 의문을 갖지 것이므로.


우린 여전히 국민이라는 ‘상상의 공동체’ 밖에서는 우리 자신을 상상하지 못한다. 우린 여전히 ‘지배받지 않는 삶’을 상상하지 못한다. 자신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개발이나 성장 말고는 미래를 말하는 다른 이름을 알지 못한다. 다른 삶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면서 여전히 손쉬운 대안이나 전망을 바란다. 결국 우린 낡은 시대의 한계를 모두 확인한 다음에야 대안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직면하게 될 것이다. p235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맞는가. 지금 우리가 가는 방향은 어디인가. 애완의 시대를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과연 무엇인가를. 그것은 애완과 애환의 과거를 끊어내는 일이다. 국가가 ‘우리’를 지켜주는가? 그 답은 명확하다. 그럴 리 없다는 것. 이제, ‘길들여짐’에서 벗어나는 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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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치고 정치

 

  김어준은 자신의 이름 자체로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기승전결이 일관되어 그와의 정치성향이 맞지 않다면, 스킵하면 된다. 그의 책도 팝캐스트도 그의 말도. 대부분 그렇다. 교류가 잦고 친한 경우라도 특정한 부분이 맞지 않으면 굳이 그 부분을 꺼내어 함께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업무적인 부분이나 사적인 일에서나. 아마도 후자의 경우는 보다 맞는 사람과 어울리려 하지 굳이 맞지 않는데 어울리려 애쓰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이유’가 있지 않고서는. 그 맞지 않음을 감내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감내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 일이다. 내가, 감내해야 할 ‘이유’는 과연 있는가. 정치라는 것은 특정 정치인의 정치행위가 아니다. 그 정치로 인해 파생된 결과를 내가 온 몸으로 받기 때문에 나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스킵’할 순 없는 일이다. 집권 정치인의 정치행위를 ‘무시’할 수 없는 이유다. 관심 없다고 보기 싫다고 클릭하지 않는 기사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래도 몇 개쯤은 클릭하지 않는다. 대략 내용과 결과가 예상되는 기사는 ‘스킵’. 그럼에도 온 몸으로 받는 기사는 수두룩하고 그 결과는 참담하다. 최근에도 끊임없이 각종 사고와 사건 소식이 상위를 오르내리고 있다. 교통사고, 화재 및 안전사고, 자살, 성폭행, 아동학대·유기, 살인….

  아무리 정보사회라지만 지나치게 사고가 잦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대형 사고가 빗발친다. 오늘을 장식한 사고가 어제의 사고가 아니라 지명을 달리한 채 전국에서 들끓고 있다. 마치, 폭정의 시대 농민봉기처럼. 차라리 봉기라도 되면 좋겠다. 안타까운 사고들을 볼수록 안쓰럽고 답답하다. 안전한 대한민국은 점점 멀어져간다. 부주의라고 말하지만 공사 현장의 잦은 사고들이 과연 우연일까. 개인의 안전이 위협받고 보장되지 않는 사회, 사회면의 무수한 기사들은 정치면의 허무개그식의 ‘정치행위’의 결과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비약이 되나?

  기사들을 보다 역시 김어준이라는 생각이 든 것은 ‘닥치고 정치’라는 제목이 어쩜 이리 어울릴까라는 생각때문이었다. 물론 김어준은 어쨌든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을 이 제목 하나로 표현했다. 하지만 정치권도 이에 답하고 있다. 그냥 ‘닥치고’ 막가는대로 정치행위에 몰두하고 있다. 집권시기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더욱 더 그러할 것이다. 사실, 기가막힌 일들이 한두어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사소한 하나에 폭발이 되고 마는 것은, ‘닥치고’ 정치에 익숙해져서이다. 하지만, ‘으레 그렇지 뭐’라는 말이 나오는 엄청난 사건들에 반초연했다가 ‘반’을 떼어버리도록 울분이 터진 것은 장관 임명 사건이다.

  어쩌면 집권 정권 통틀어 반복된 일이기도 하고 다른 일들에 비해 아주 사소한 일이다. 그럼에도 이 시점에, 여전히 신뢰를 주지 못하고 있는 이 정권에서 한 나라의 장관을 선발하는 일에 여전히 ‘닥치고’를 실현하다니. 기본이고 예의다. 이럴 거면 인사청문회의 필요성이 있는가.

    

박근혜의 사사롭지 않음은 사사로울 필요가 없어서 사사롭지 않은 거야. 아버지가 국가고, 정치는 제사고, 생활은 관념이니까. 사사로울 이유가 없는 거야.

생활을 전혀 겪어보지 못했어. 정치는 결국 생활이 대상인 건데. 생황이 관념이니 정치도 관념인 거지. 사람들은 그걸 결국 구분해낼 거라고 봐. 우리 모두는 생활인이니까. p69.70 


  이렇게 나의 일상은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일로 사소해소는 안되는 일로 파열을 맞는다. 오구아 에이지는 <사회를 바꾸려면>이라는 책에서 “사회운동이 어떤 이슈로든 대대적으로 공론화되는 계기가 있다”고 했다. 이상하게도 지난 정권도 마찬가지로 그럴만한 ‘이슈’는 무수히 많았음에도 ‘공론화’되는데 실패했다. 실패했다고 본다. 생각하는 지점들이 너무도 달랐던 것일까. 그 이슈들이 구조적 쌓여 있던 불만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 될 정도가 아니었던 걸까. 김어준이 5년 전에 이 책에서 말한 것들이, 5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나와야 하는 이 암울함. 아주 시국이 엄중하거든. 그렇네.


그냥 다이렉트하게, 폼 잡는 이론이나 용어 빌리지 않고, 일상의 언어로 정치를 이야기해보자고. 평소 정치에 관심 없는 게 쿨한 건 줄 아는 사람들에게, 그 놈이 그 놈이라는 사람들에게, 좌우 개념 안 잡히는 사람들에게, 생활 스트레스의 근원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정당들 행태가 이해 안 가는 사람들에게, 이번 대선이 아주 막막한 사람들에게, 그래서 정치를 멀리하는 모두에게 이번만은 닥치고 정치,를 외치고 싶거든. 시국이 아주 엄중하거든, 아주. p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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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은 니 맘이야


오구마 에이지 저, 사회를 바꾸려면

  저자 오구마 에이지는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문학자라고 한다. 저자의 <사회를 바꾸려면>은 일본의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갖는 사회문제에 주목하는 책이다. 이 책 역시도 일본에서 폭발적인 반응과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그만큼 일본인들도 사회를 바꾸고 싶은 갈망이 강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일본인들이 책도 많이 읽는 모양이고. 많은 이들이 주목한 책, 그리고 영향력 있는 학자가 말하는 사회를 바꾸기 위한 방법은 무얼까.

  사회를 바꾸려한다는 것은 지금 현재의 사회에 ‘바뀌어야 할 요인’이 있다는 말과 같다. 즉 지금 현재 처한 상황이 문제를 안고 있고 보다 나은 사회를 갈망하는 욕구가 있다는 말이다. 일본 사회는 왜 이토록 변화를 갈망하는지, 변화에 대한 갈망이 한국사회에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이 책을 통해 얻고자 하는 바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영향력있고 이 책이 인기있다고 하더니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재미있고 쉽게 쓰여진 글이다. 그래서 이해가 빠르게 되고, 같은 문제를 공유하고 있어서인지 감정이입도 잘 된다. 선동기도 다분하고.

  총8장으로 나누어 저자는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먼저 “제1장 우리 사회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는 소제목에선 현재 일본 사회의 현황과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다. 정치, 경제의 모든 부분에서 문제가 드러나고 있다. 사실 일본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일본은 고용, 교육, 사회보장 등의 여러 부분에서 한계에 이르렀다. 특히나 일본은 세계에서 고령화가 심각한 나라로 손꼽힌다. 이런 문제들은 산업이 탈공업화로 변화하는데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원인이 크다. 심각한 경제상황으로 빈부 격차는 심해지고 이에 따라 사람들이 소외감이 증가되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사회를 바꾸기 위해선 현재의 상황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

  “제2장 사회운동의 변천”에선 선진국의 사회운동의 형태를 살펴보고 있다. 공업사회 초기에는 노동운동 형태가 주를 이루었으나 후기에 이르러 학생운동, 여성해방운동, 소수자 운동 등 다양한 사회운동으로 발전했다. 사회운동은 사회를 바꾸는 대표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이 증가할수록 연대는 옅어져 간다. 탈공업화 사회 불안정한 사회는 이처럼 연대의 부족이 낳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저마다의 ‘자유’를 누리면서 연대 의식이 옅어져 ‘우리’라는 생각을 갖지 못하며, 자연히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탈공업화 사회에서는 가족이나 정치 또한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불안정해지는데, 운동 또한 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p50 


  제3장에선 “민주주의란?” 제목으로 민주주의 체제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고대 그리스는 시민 전원이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 체제였고 현대는 대의민주주의다. 민주주의의 기원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왜일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이다. 현대의 투표로 대표를 뽑는 것이기에 다른 정치행위, 특히 데모에 대해 소용없음, 부정적 의견이 더해진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저자는 소속감, 함께한다는 것 집단의식의 중요성을 말한다. 통합력이 강력한 사회에 소속되어 있으면 자살이 줄어든다는 뒤르켐의 실증 내용을 거론하며 저자가 말하고픈 바는 이것이다.

 

데모에는 왜 사회를 바꾸는 힘이 있는 걸까? 설명 10만 명의 데모대가 모였을지라도 “저들은 별스러운 일부 사람들일 뿐이야.”, “비례대표로 그저 한 사람 당선시킬 정도의 숫자에 불과해.”라고 형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설령 소수일지라도 “저 사람들로 우리 사회의 의견이 대변된다고 봐.”, “저기에 내가 느끼는 분노심도 대표되고 있어.”라고 인식될 때에는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현저히 다르다. 책임 있는 정책대안을 내놓고 있는가 아닌가는 그다지 관계가 없다. p72


  제4장에선 “근대 자유민주주의와 그 한계”를 다룬다. 시대마다 사상이 있었고 기술의 발전은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민주주의, 자유주의, 경제자유주의 등 그 시대의 사조가 변화하며 흘러 왔고 최근에는 자유민주주의가 대세인 듯이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오일쇼크, 리먼 브라더스 사태 등으로 한계에 부딪혔다.


기술이라는 것은 그것을 쓰는 발상과 사회기반이 없으면, 사회를 바꾸는 힘이 없다. 다만 일단 그것이 굴러가기 시작하면, 기술을 손에 넣은 사람의 발상이 바뀌고, 사회를 바꿔나가게 된다. p121


새로운 발상이 등장하는 시대는 대체로 불행한 시대이다. 인간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때가 행복한 경우가 많다. p124~125


  하지만 끊임없이 사회에는 새로운 발상이 나타나고 있다. 관건은 누가 그 ‘발상’을 주도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대표’에 대한 주체가 누구인지가 핵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변화해 가는 사회에서, 사회구조에서 ‘우리’라는 개념이 형성되고 있고 그 속에 포함되지 않는 이들의 목소리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제5장 “또 다른 세계를 향한 사색”은 대의제 자유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사상적인 모색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화와 참여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선거만으로 사회가 바뀔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정권을 잡고 정책을 선언한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왜 그런가.


오늘날의 사회는 어딘가에 중앙제어실이 있어서 거기를 점령하면 사회 전체를 조작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구체적으로 이 법률이 바뀌면 이렇게 된다는 것 정도는 말할 수 있겠지만, ‘자유’와 재귀성의 증대에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설사 효과가 곧바로 나오지 않는다 해도 의회와 지역에서, 행정과 운동을 통해서, 즉 사회의 모든 곳에서 발상과 행동과 관계를 바꿔나가 그것이 연동해가며 사회를 바꾸는 수밖에 없다. p252


  제6장 “일본 사회문제의 상징, 원자력발전”은 일본 사회운동의 주된 의제로 확산된 후쿠시마 원전 운동에 대해 이야기한다. 일본에서 원전 운동이 확산된 이유와 그 상징성은 이것을 계기로 사회를 바꾸는 경험을 한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부당한 것에 대해 항의하고 그리고 그것이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그것이 체화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그만큼 사회는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제7장 “전후 일본의 사회운동”에서는 전후 일본 사회운동의 역사와 현대에 필요한 사회운동은 어떤 형태여야 하는가에 대해 기술한다. 저자는 사회운동이 어떤 이슈로든 대대적으로 공론화되는 계기가 있다고 말한다. 특히 이슈가 사회 속에서 구조적으로 쌓여 있던 불만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 될 경우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국사회에 대입해보면 이른바 “갑질”사건이나, 고위층의 기만적인 행위들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종합하여 제8장 “사회를 바꾸려면”에서 결론을 내린다. 선거가 한창이기도 했고 그래서 대안이 선거뿐이었기도 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투표가 해답이다”하고 한국사회는 외쳤다. 하지만, 저자는 단순히 선거만으로 정권을 바꿨다고 사회, 또는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한편으론 수긍이 되기도 한다. 선거를 통해 ‘희망’을 가졌다가 크게 변한 것을 느끼지 못할 때 ‘절망’하게 되고 이것은 ‘분노’와 ‘외면’으로 바뀌니까.

  또한 현대사회에서는 “사회를 바꾼다”라는 것에 대해 100% 맞출 수가 없다. 사람들은 각자의 욕망이 있기에 그렇다. 하지만 누구나 공유하는 문제의식, 그것을 바꾸는 것이 ‘사회를 바꾸는 것’이 되지 않을까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누구나 공유하는 문제의식, 그것은 바로 ‘나는 무시당하고 있다’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 공유된 문제의식을 발판삼아 “대화와 참가를 독려하며 사회구조를 바꿔 ‘우리’를 만드는 운동으로 연결”시켜 나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그 운동의 방식 또한 다양하다. 거기엔 틀은 없으니까. 그저 사회를 바꾼다는데 부합하면 되는 것이다. 투표, 로비활동, 데모, NPO, 인터넷이나 신문 등 방식은 무한하고 다양하다.

  저자는 사회를 바꾸는 것이 필요한 일이고 그러므로 즐거운 일이 되도록 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사람, 꼭 있다. “필요없는 데요?” 혹은 “안 바꾸고 싶은데요”라고. 이에 대해 저자는 사회를 바꾸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도 바꾸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리고 이미 사회는 바뀌고 있다고, 피해랄 수 없노라고. 침묵하다 침몰하거나 대파국을 맞이하거나 그건 니 맘이라고.


 몸소 나서는 것, 활동을 벌이는 것, 타인과 함께 사회를 만드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훌륭한 사회, 훌륭한 가족, 훌륭한 정치는 기다린다고, 그저 바꾼다고 나타나지 않는다.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수밖에 없다.

    귀찮다, 이상론에 불과하다, 믿을 수 없다, 두렵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지금처럼 살아갈 수 있고, 이대로 견뎌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줄곧 그렇게 지내기 바란다. 그것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당신의 미래는 당신이 결정하는 것이다.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당신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 당신이 바뀌기 위해서는 당신이 나설 것. 낡아빠진 말 같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말의 의미가 새롭게 재활용되어야 할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p427~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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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의 목소리



인류가 존재한 이래, 온 세상을 향해 자신의 목소리를 외치는 사람들은 항상 존재해왔다.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신분제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소수의 지주들이 땅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구습에 정하하거나 한 사람의 존재가 다른 사람의 존재만큼 평등함을 외치는 사람들은 늘 존재해왔다. 때로 그 외침은 생명을 담보로 하고, 젊은 나이에 수감되고 일신의 안락을 포기해야 하는 힘겹고 거친 삶이었다. p13


  그렇다. 이런 사람들은 늘 존재해왔다. 안타까운 건 이런 이들은 끊임없이 존재할 것이고, 이들이 저항할 수밖에 없게끔 하는 이들도 끊임없이 존재할 거라는 거다. 그들은 불합리와 부조리한 억압의 틀을 계속 만들어왔고 만들어 나갈 것이다. 이 틀을 깨부수기 위해 노력했고 다양한 방식으로 그 저항을 표현한 이들, 이름 없는 이들의 기록들이 이 책에 담겨 있다. 그들은 책뿐만 아니라 연설문, 법정에서의 최후 진술, 슬로건, 대자보, 낙서, 팸풀릿, 가요 등 다양한 형식으로 자신들의 분노를 표현했다. 이 책, <저항자들의 책>은 이들의 목소리를 역사적 상황 설명과 함께 연대기 순으로 엮은 것이다.


   백성을 억압하는 왕의 잔인한 통치는 살인자의 흉포함보다 더 가혹하다.

p31 티루쿠랄, 티루발루바르, BCE 200년경


   저항과 분노의 목소리가 있었다는 것이 꼭 좋은 일만은 아닌 것은 그러한 일이 발생하는 사회였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에서 도대체 민중을 억압하지 않은 나라는, 권력자는 없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한번이라도 이런 목소리가 없었다는 것도 안타까운 일일 것이다. 그렇다고 보면 대한민국의 저항의 기록을 외국인의 저서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만적의 난(1198), 동학농민운동(1894), 4·19혁명(1960), 광주민주항쟁(1980)에 관한 기록이 그리고 한국의 시인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에 실린 시가 이 인류 4000년의 역사의 기록에 포함되어 있다. 어쩌면 우리나라의 특정 교과서에서는 제대로 만날 수 없을 지 모르는 기록들일 것이다. 


 여기 그대와 나 외에 공범은 없소.

   그대는 압제자, 나는 해방자요.

p70 해방자가 압제자에게, 투팍 아마루 2세, 1781


   들여다보면 저항자들의 목소리는 그 울림이 같다. 억압의 이유와 방식이 같기 때문일 것이다. 억압하는 이들이 같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저항자들의 목소리는 그 아픔을 알기에 같고, 그들이 바라는 것이 다를 수 없기에 같다.


    말씀해보십시오. 어떤 것이 당신의 것입니까? 당신은 어디서 당신의 행복을 길어왔습니까? 당신은 마치 극장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다른 사람들은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고 모든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도록 만들어진 것들을 마치 자신만의 것인 양 다루는 사람 같습니다. 부자들이 바로 그렇답니다. 그들은 공공의 재화를 선점했기 때문에 그 재화를 마치 자신만의 것인 양 취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남은 것들을 부족한 사람들에게 돌려준다면 아무도 부자가 되거나 가난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부자는 도둑입니다. 

        p36 어떤 것이 당신의 것이오?, 카이사리아의 바실리오, 300년경.


  물론 압제자가 권력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오랜 인류 역사에서 여성과 동성애자에 대한 탄압, 이민자에 대한 탄압, 유색인종에 대한 탄압, 그리고 어린 아이에 대한 탄압 또한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들의 저항의 목소리 또한 울린다.


    결혼은 고대 인간사회가 만들어낸 가장 큰 오류입니다. 결혼한다는 것은 곧 노예가 된다는 뜻입니다. … 따라서 결혼은 자유도시에서는 더 이상 묵인될 수 없습니다. 결혼은 범죄로 간주되어야 하며 가장 혹독한 수단에 의해 제압되어야 합니다. 누구도 자신의 자유를 팔아넘김으로써 다른 시민들에게 나쁜 본보기를 보일 관리는 없습니다.

p138 여성동맹에서의 연설, 파리코뮌 지지자


  인류의 멸망이 도래했고 위기라며 전세계가 협력해야 한다고 외치면서도 각 나라를 대표하는 이들은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고, 자국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우선시한다. 그들이 바로 혁명을 유도하는 이들이다. 위험과 위기를 극복하고 노력해야 한다지만 그 노력의 주체는 늘, 민중이다. 위험하니까 그 위험을 모두 감수해야 하고 모든 위험의 순간에 뛰어들어 위험을 몸으로 막아야 한다. 하지만, 자세히 알지 못할 때도 많다. 왜, 위기인가를. 무엇이 위기를 불러 왔는가를. 알고자 하지만 알 수 있는 것은 제한되었고 그렇게 수천년을 저항자의 이름으로 살아왔다. 무명씨의 기록처럼 “지식인이면 어떠냐 / 노동자면 어떠냐 / 농민이면 어떠냐 / 우리는 민주시민이다.”  이 하나의 문구로 민중은 뭉친다. 이 하나로 민중은 혁명가가 된다.


    혁명가가 된다는 것은 세상을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고, 행복해진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혁명가는 삶으로부터 도피해서는 안 된다. 혁명가는 투쟁을 위해서 사는 것이 의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삶을 즐겨야 한다.

     p371 내 피는 붉은 투쟁의 강으로, 우고 블랑코, 1966 


  이 역사 속의 모든 기록들은, 결국 실제로 일어난 일들에 관한 기록이다. 그리고 그것은 언어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 기록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행동이 있었다’.


     나는 세상을 변화시킬 도구로서, 단결의 힘을 철석같이 믿는다. 또한 대화의 힘도 믿는다. 그러나 말을 증명하는 것은 행동이다.

      p523 말을 증명하는 것은 행동이다, 헤닝 만켈, 2010



저항자들의 책 

4000년 인류 역사에 울려 퍼진 분노와 저항의 앤솔러지


타리크 알리 서문, 앤드루 샤오・오드리아 림 공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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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의 ‘네’, 성격의 ‘아니오’


이얼 프레스., 양심을 보았다-분노할 것인가, 침묵할 것인가 


   

  인생에서 나는 ‘예’와 ‘아니오’ 중 어느 단어를 자주 내뱉었을까. 습관처럼 ‘네’를, 성격처럼 ‘아니오’를 더 말했을까. 습관이든 성격이든 그 말은 진심이었고, 그 말이 나가기까지의 상황은 평범한 것이었을까. 바뀌었어야 할 ‘네’와 ‘아니오’ 때문에 잠들지 못한 밤은 없었을까. 후회로 뒤척이는 것을 떠나, 나의 그 대답으로 심각하고 심각한 어떤 일이 파생된 적은 없을까.

 

   이 글은 부드럽다. 하지만 내용은 강직하다. ‘아니오’라고 말하는 사람을 찾는 이야기이니까. 그 ‘아니오’는 이유없는 반대가 아니라, 지랄맞은 성격때문에 일단 무조건 ‘싫어’부터 내뱉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행위를 강요받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내뱉는 ‘아니오’”니까.

  탐사보도 전문기자이기도 한 작가는 이렇듯 ‘집단의 획일성에 반대’하는, ‘초월적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 나섰다. 어떤 경우라도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고, 설사 그런 저항의 행위를 했다고 해서 그것이 큰 사회적 변화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가치있는 저항이었을까라는 물음에 사로잡혀 버렸으니까. 저자는 집단의 지시를 거부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불가능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평범한 사람들이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와 과정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해소할 수 없는 긴장이 가득하다. 현실에서 우리는 모두, 마음속 깊은 곳에 세워둔 자신이 충성심 혹은 다른 사람들이 기대하는 의무와 충돌하는 상황을 마주한다. 우리는 양심을 깨끗하게 간직한 채 과연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고민해왔으며 지금도 고민하고 있다. 솔직하게 말해보자. 우리 머릿속에 있는 어떤 목소리가 우리에게 말한다, 양심을 지키라고. 그러나 또 다른 목소리는 경고한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적으로 돌리지 말라고, 자신의 상관을 당혹스럽게 만들지 말라고. 혹은 자신의 경력과 명성, 나아가 가족의 평온함과 목숨을 위험하게 만들지 말라고. p13


   저자는 총4장에서 이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건넨다. 1장에선 거부자의 삶이다. 이들은 당연히 집행해야 할 법을 의도적으로 어김으로써 무고한 사람들을 구한다. 2장은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의 인종적·민족적 분열 상황에서 경계를 초월하여 행동한 세르비아이인의 일화다. 저자는 이 이야기를 ‘법보다 결코 약하지 않은 공동체라는 압박에 저항’한 이야기로 전한다. 3장은 이스라엘 군대의 점령지 근무를 하지 않겠다 결심하는 보다 내면적 투쟁을 행한 군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4장은 투자전문가의 이야기다. 3장까지의 흐름을 볼 때, 투자가의 이야기에 아니, 이게 뭐지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어쩌면 이 이야기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쉽게 맞닥뜨리는 상황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금융상품이 고객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으리란 판단에 상품 판매를 거부한 투자전문가의 이야기니까.

  사실,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 많은 경우 직장과 군대와 국가의 권위에 대한 대항을 얘기한다. 전쟁을 얘기하며 특히, 특수한 상황이란 전제를 가지고 그 상황에서를 강조한다. 하지만, 어떤 상황이든 일상에서도 ‘예’가 길들여진 사람이라면 어떤 경우인들 ‘아니오’라는 말이 아닌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양심의 문제이기 전에 개인의 신념과 정체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개인의 신념과 정체성이 너무도 사회에 길들여지고 제도화된 채 마음에 심어지는 까닭에 개인의 ‘참’생각을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최근 반복되는 대한민국의 행정관료들이 행하는 그 모든 악행과 막말들이 분명히 보여준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논리와 패권의식의 생활에 길들여져 ‘아니오’라는 말이 있다는 것조차 모른채 “예스맨”이 되고 있지 않은가. 개인의 신념이나 정체성이 보편성을 잃고 1%의 사회 속의 행동패턴에 길들여져 있지 않은가. 대한민국 행정관료들 중에선 대한민국의 사람들 중에선, 이 책의 주인공이 될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런지…. 바우만이 이렇게 주장했다. “잔인함은 개인의 개성보다 사회적인 상호작용의 특정한 유형들과 훨씬 더 놓은 상관성을 가진다.” 어째, 그런 종류의 인간들과는 상관없는 삶을 사는 것이 더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만도 하다. 하지만 상관을 할 수 없는 게, 그들이 내 생활의 모든 제도들을 만들고 있는데, 어떻게 무관심, 무심해질 수 있을까. 그냥도 아니고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고 있는데.

  그들은 똑똑하고 머리 좋다고 하는데 변화의 조짐이고 양심을 추스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심리학자 앙드레 모딜리어니와 르랑스와 로샤는 “권위에 저항하는 행위는 추상적인 대의명분을 따지는 장엄한 행동으로 시작되는 게 아니라 당사자들에게는 전혀 특별할 것도 없는 어떤 ‘작고 소박한 행동들’로 흔히 시작한다”고 한다는데, 그들은 “장엄한 행동”에 눈을 더 돌리고 있다는 게 문제다.

  소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온갖 기계 장치들이 성공적으로 잘 돌아가는 일에 대해 나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유일한 의무는 언제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엉뚱하고 어이없는 것을 옳다고 생각하는 것도 모자라 그것을 추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추진할 위치에 있는 사람의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의와는 유리되어 있을 때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소로는 양심적 명령 거부자로서 였지만. 바로 이런 것 아니겠는가.


 법의 틀을 깨는 행위는 자기 목적에 부합할 때는 좋지만 다른 편의 목적에 부합할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p213- 이스라엘 한 예비군


  대한민국은 양심에 따라 저항하는 이가 원체 없는 관계로 정치인, 관료와 권력가들 특정 소수만이 나날이 행복하게 살기 편한 곳이다. 그렇기에 양심에 따라 법을 거부하는, 저항하는 사람이라는 존재조차 되지 못한 채, 보다 보편적인 정의와 합리적인 법에 대한 요구를 하는 정말이지 평범한 보통 사람들은 그저 “찌질하게 정부에게 대드는” 별볼일 없는 특정세력으로 규정된다. 그래서 수전 손택은 저항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가장 저항을 많이 하는 보통 사람들, 민중들이니까.


"우리가 국가의 법률을 부정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하는 보다 높은 차원의 법의 존재를 요구하는 것은, 정의를 위한 고귀한 투쟁만이 아니라 범죄 행위까지 정당화하는데 사용될 수 있다. 저항의 가치와 저항의 도덕적 필요성을 결정하는 것은 저항의 내용이다.“ p237


  그렇다면 저항의 가치는 무엇일까. 어떤 경우에 ‘저항’이란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것일지. 이 말이 와 닿았는데, 고통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늘어간다는 생각이 든다는 점이 아이러니다.


 무엇이 사람의 성격을 결정하는지 알아요? 내가 가르쳐줄게요. 그건 바로 고통이에요, 고통. p283


물론, 현실에서 고통이 언제나 성격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개선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고통을 격고 나서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에 무관심해질 수도 있다. 또 고통 때문에 독불장군이 될 수도 있고 원한을 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레일라의 경우에 고통은 그녀를 강하게 만들었다. 유복하긴 했지만 은둔 생활을 해야 했던 어린 시절 동안 그녀의 내면에는 수동적인 기질이 생겼다. 그런데 고통이 그것을 말끔하게 털어냈다. p283


   이 책에서 저자의 관심을 따라가다 보면 불편한 진실과 맞닥뜨리면서도 마음이 평온하다. 이 책의 느낌이 그렇다. 편안하게 읽히는 문체가 그렇게 이끌어주고 생각을 하게끔 하는 지점의 여러 의문들이 점층적으로 나아가 단편적인 사고에 머무르지 않게 해준다. 그로 인해 복잡다단한 생각들이 더욱 많아지기도 했지만. 이 책의 원제는 양심을 보았다가 아니라 Beautiful Souls이다. 읽다 보면 힘차고 강건한 <양심을 보았다>보다 <Beautiful Souls>이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는다. 양심에 따라 저항한 이들의 이야기, 그들의 고뇌와 행동들에서 이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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