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엘리엇 브래드쇼


  사진을 보자마자 종교 관련 서적에서 봄직한 인물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저자가 실제 사제 수업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서는 놀랐다. 왜냐하면…. 조금은 사이비로 보였기 때문에. 그리고 신부보다는 개신교 느낌이 물씬 풍겼기 때문에. 개신교에서도 조금은 이단으로 봄 직한…. 이런 생각의 전반은 책을 읽어가면서 느낀 이미지 때문이다. 대체로 상담치료 관련 책들의 느낌이 몽롱함을 주는 느낌은 있다. 놀라움을 안겨줬던 사티어의 치료도 그러했고 다양한 상담기법과 치료기법들은 명확함보다는 신비스러움으로 무장한 듯하기도 했으니까.

  존 브래드 쇼는 가족치료사이자 내면아이 치료 전문가로서 이 책은 베스트셀러이기도 하다. 수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었고 이 책을 통해서 상처받은 어린 시절의 자아를 마주하고 치료를 이어가고 있다. 저자는 심리학과 신학과 영성을 전공하고 이것들을 접목하여 그의 치료에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특히 이것이 녹여진 이 책의 엄청난 인기로 미국의 PBS(교육방송) 텔레비전 '인간성장의 8단계'의 진행자와 대중강연가로서 활동하고 가족치료와 내면아이치료 워크숍의 인도자로서 활동하고 있는데, 그것이 벌써 20년도 넘었다. 그러니까, 이 분야의 완전 전문가다. 한 권의 책으로 그를 ‘사이비 종교가’로 보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가 상처받은 내면아이에 관심을 기울인 것이 그의 경험을 통해서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어릴 적 무시당하고 상처받은 아이였다. 그의 아버지는 경계선이 없는 사람으로서 마음 속 수치심이 깔려 있는 알콜중독자였고 그의 어머니는 의무감에 매인 사람이었다. 그는 성직으로 갈 것을 준비했지만 어느새 자신도 알콜중독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그의 인생을 통틀어 다양한 분야의 기관에서 강의와 워크샵을 통해 치유의 세계로 인도했다. 자신과 같은 알콜중독뿐만 아니라 다양한 중독자들의 치료를 위해 연구했고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러한 그의 연구와 노력이 TV 프로그램에서도 그의 치유 프로그램에 대한 인정을 높여 주었고 그는 대중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끈다. 그를 통해 치유받고 이른바 구원받은 사람이 전세계적으로 무수할 것이다.

   그가 아버지로부터 학대받고 버려진 것에 비해 착실하게 공부를 하며 학위를 취득했고 장학금뿐만 아니라 각종 메달도 수여받았다. 그의 공부에 대한 열정은 이론에 머물지 않고 실질적으로 많은 중독과 문제를 가진 이들을 치료하는 데까지 이어졌다는 점에서 그의 공로를 치하한다. 그의 공로를 먼저 치하한 이들은 그의 동료들로서 '20 세기의 정서적 건강에 가장 영향력있는 100 인 작가 중 하나'로 지그문트 프로이트, 칼 융, 조셉 캠벨, 에리히 프롬과 이름을 나란히 하기도 했다.

  그는 책에서 자아를 초월하기 위해선 더 강한 자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말이 그의 인생을 얘기해주는 말이 아닐까 한다. 알콜중독자인 아버지로부터 버려져 역기능적인 가정에서 자라난 그가, 알콜중독자가 되어 오래도록 중독상태였던 것을 벗어나 이제는 중독을 중단시키는 일에 몸담기까지, 그의 강한 자아가 필요했을 그의 어린 생애와 그 생애를 기억하는 성인의 그의 모습을 생각하며 한편으론 아련해진다. 


■ 존 엘리엇 브래드쇼(John Bradshaw) ■

출생/사

1933.6.29 미국 텍사스 휴스턴

•활동 분야

교육자, 가족치료사, 내면아이 치료전문가, 신학자

•발 자 취  

•저 서

토론토 대학교에서 신학과 심리학, 영성 분야에서 3개의 학위 취득

신부가 되기 위해 캐나다에서 사제 수업

1975. 저자의 인생에 영향을 주었던 아버지 사망

PBS '인간성장의 8단계'의 진행자와 대중강연가로서 활동

각종 기업 및 사회기관에서 중독 치료 연구 및 프로그램 개발

 

Television:

Spotlight: weekly program (host), 1969-1972

The Bradshaw Difference: syndicated talk show produced by MGM, 1996

Speaking the Truth in Love: Independent Production 2009

PBS Television:

The Eight Stages of Man: eight-part series, 1982

Bradshaw On the Family: ten-part series, 1985

Where Are You Father?: one-hour program, 1986

Healing the Shame that Binds You: one-hour program, 1987

Adult Children Of Dysfunctional Families: two-hour program, 1988

Surviving Divorce: ninety-minute program, 1989

Bradshaw On Homecoming: ten-part series, 1990

Creating Love: ten-part series, 1992-1993

Eating Disorders: three-part series, 1994-1995

Bradshaw On: Family Secrets: six-part series, 1995

Homecoming: Reclaiming and Championing Your Inner Child

(Bradshaw on: The Family)

Healing the Shame That Binds You

Bradshaw On: The Family - 1986

Bradshaw on the Family: A Revolutionary Way of Self Discovery. Deerfield Beach, Florida: Health Communications. 1988.

Bradshaw On: Healing the Shame that Binds You. Deerfield Beach, Florida: Health Communications. 1988.

Homecoming: Reclaiming and Championing Your Inner Child. New York, NY: Bantam Books. 1990.

Creating Love. New York, NY: Bantam Books. 1992.

Family Secrets. New York, NY: Bantam Books. 1995.

Bradshaw On: The Family: A New Way of Creating Solid Self-Esteem. Deerfield Beach, Florida: Health Communications. 1996.

Reclaiming Virtue: How We Can Develop the Moral Intelligence to Do the Right Thing at the Right Time for the Right Reason. New York, NY: Bantam Books. 2009.

……

자아를 초월하기 위해서는

강한 자아가 필요한 것이다.

……

참고 자료

•http://www.johnbradshaw.com/johnsbio.aspx

•John Bradshaw Media Group - Home

•http://en.wikipedia.org/wiki/John_Bradshaw_(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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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가드너의 생애


 오랫동안 IQ에 길들여져 스스로를 한없이 무능함의 대명사로 여기며 지낸 많은 사람들에게 하워드 가드너의 다중지능이론은 빛이었을 것이다. 1등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문제풀이식의 교육 현실에서 하워드 가드너의 이론은 많은 아이들의 능력을 일깨워주는 길잡이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아직은 우리나라는 하워드 가드너의 이러한 이론들이 빛을 보기에는 IQ라는 지능검사가, 1등이란 단어가 갖는 힘이 더욱 크게 울리고 있는 듯해 안타깝다.

 하워드 가드너, IQ에서 벗어나 어떻게 다중지능이론을 창시하게 됐을까. 그에 의하면 다중지능은 인간은 IQ와 같이 인간의 지능D 하나가 아니라 최소 8개 이상 존재하는 교육과 훈련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독립적 지능을 말한다. 처음 그가 다중지능을 제시했을 때에는 언어, 논리수학, 공간, 음악, 신체, 자기성찰과 인간친화 지능 등 일곱 가지로 지능을 구분했다. 그리고 15년 뒤에 자연 지능을 추가했다. 그리고 현재 그는 여기에 실존 지능이란 개념을 추가할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한다. 실존지능은 좀 더 근원적인 질문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그는 여전히 지능이란 그것과 같은 종류의 신경 구조를 발견할 수 있을 때 가장 설득력이 있다는 생각을 고수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하버드 대학의 교육심리학과 교수, 보스턴 의과대학 신경학과 교수로  하버드 대학에서 인간의 예술적이고 창조적인 능력의 발달과정을 분석하는 Project Zero 연구소의 책임자이자 운영위원장이다. 30년 동안 연구소를 이끌며 인간의 지능과 창조성, 리더십, 교육 방법, 두뇌개발 등에 관한 저술과 연구를 하고 있다. 그가 제시한 교육심리 이론은 여러 나라에 도입되었고 다중지능이론을 교육 현장에서 실천하기 위한 학교와 연구소가 세계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하워드의 부모 역시 학자라고 한다. 하워드는 미국 펜실베니아에서 태어났지만 그들의 부모는 독일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이었다. 하워드의 부모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1938년 그의 형을 데리고 독일에서 탈출했다. 그리고 그의 형은 사고로 어린 나이에 죽었다. 하워드에게는 이 두 가지 사건, 즉 형의 죽음과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가드너는 어릴 때는 피아니스트를 꿈꿀 정도로 피아노를 잘 쳤고 책을 좋아하는 소년으로 처음에는 변호사를 꿈꾸던 소심한 유대인 소년이었다고 고백한다. 하워드의 강연에 참가한 이의 후기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가워드가 강연 시작에서 한 말이다. “사람들은 저를 심리학자, 교육학자라고 부르지만 제 삶의 베이스는 음악입니다.”

  피아니스트를 꿈꾸었고 다시 변호사를 꿈꾸던 소년은 결국 역사학 공부를 위해 하버드에 진학한다. 그런데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 끌려 심리학을 공부하게 된다. 그리고 에릭슨과 피아제 이론을 접하고는 인지 심리학을 공부하게 된다.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그는 천재들만 받는다는 맥아더 펠로십(MacArthur Prize Fellowship)을 수상하며 연구지원금을 받는다. 이 외에도 다양한 상을 수상한다.

  하워드는 대학교수이자 학자로서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그의 대표적인 활동은 프로젝트 연구소 이외에도 1990년대 중반부터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윌리엄 데이먼과 함께 하고 있는 ‘굿 워크 프로젝트’ 활동이다. 이 활동을 통해 바른 사람, 바른 노동자, 바른 시민을 길러 사회를 변화시켜나가는 데 열정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하버드대학교 프로젝트 제로의 책임자이자 운영위원장으로 활동하며 교육이론들을 연구하고 있다. 그는 다양한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29권의 책을 출한했고 그의 책은 전세계 32개 언어로 번역되고 있다.


*굿워크란 세 가지 E, 즉 Excellence(뛰어남), Engagement(참여), Ethics(도덕성)의 조합이다.



■ 하워드 가드너(Howard Gardner) ■

 

•출    생

1943.7.11. 미국 펜실베니아 스크랜톤 (72세)

 

•활동분야

교수, 다중지능이론 창시자, 심리학자, 교육학 이론가

 

•발 자 취

미국 하버드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심리학 교수, 미국 보스턴대학교 의과대학 신경학과 교수

 

 

미국 하버드대학교 프로젝트 제로 연구소 책임자, 운영위원장

 

 

1990년 중반부터 굿 프로젝트 활동

 

 

1961. 역사 전공 위해 하버드 입학. 에릭슨 강의 수강 후 social relation으로 전공 바꿈

 

 

1965. 학사학위 후 런던대 경제학과에서 1년 수학

 

 

1971. 하버드대에서 발달심리 전공하여 박사학위 취득

 

 

하버드 의과대학과 보스턴대에서 Postdoc 과정(두뇌손상 환자들의 인지적 문제 연구)

 

 

1981. 맥아더 펠로십(MacArthur Prize Fellowship) 수상

 

 

 

1983. 다중지능이론 제안

……

제 삶의 베이스는 음악입니다.

……

 

 

1990. 미 교육 분야에서는 처음으로 그라베마이어상(Louisville's Grawemeyer Award)

 

 

2000. 2000구겐하임 펠로우십(Guggenheim Fellowship)

 

•저    서

1983. 마음의 틀: 다중지능(Frames of Mind: The Multiple Intelligences)》

 

 

1993.《다중지능의 이론과 실제(Multiple Intelligences : The Theory in Practice)》

 

 

《훈련된 마음(The Disciplined Mind)》

 

 

2009.《세계의 다중지능(Multiple Intelligences Around the World)》

 

 

<열정과 기질>, <통찰과 포용>, 

<체인징 마인드>, <미래 마인드> 

 

 

<마음의 틀> <비범성의 발견> <진선미> 등


참고 자료

•경향신문, [문명, 그 길을 묻다 - 세계 지성과의 대화](3) 하워드 가드너 미국 하버드대 교수, 2014.1.27

http://howardgardner.com/biography

http://infed.org/mobi/howard-gardner-multiple-intelligences-and-education

http://www.infed.org/thinkers/gardner.htm


“행복한 사람은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사랑하고

불행한 사람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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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 정신과 삶, 인생을 지배하다 


 아니타 로딕 Anita Roddick, <영적인 비즈니스><지구의 생명물의 위기> 저자


  


  영국의 리틀햄프턴에서 태어난 그녀의 부모님은 영국으로 이민 온 이탈리아인이다. 이러한 환경이 어린 시절부터 영향을 미친 것인지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교사생활을 하면서도 히피들과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다는 그녀다. 히피들에게서 느껴지는 것이 자유로움, 아웃사이더, 방랑이 떠오르는 것처럼, 무언가에 정착하려 하지 않는 그녀의 기질은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 도드라진 우리 삶에서 자신만의 기질과 특성을 잘 버무려 살아낸 듯하다. 스스로가 선택하려 하는 것인지 깊이 내재되어 있는 아웃사이더 기질이 자연 발휘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녀 자신도 인생의 기준에서 이 아웃사이더를 말한다. 이것은 자신이 되고 싶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라고.  


 아직도 왕이 존재하는 영국이란 나라에서 2003년 엘리자베스 2세로 부터 작위를 수여받다!

 2007년 9월 10일, 64세에 뇌출혈로 사망하자 영국 전체가 추모 열기에 휩싸이다!

 고든 브라운 총리가 직접 나서 추모하였고, 공영방송 BBC는 메인뉴스 두번째 꼭지로 보도하였고 영국 굴지의 기업 총수들이 TV에 나와 그녀를 애도하였고, 그린피스 사무총장은 ‘사업이란 어떤 것인가를 제대로 보여준 인물’이라며 로딕을 치켜세웠다.


  이렇게 아니타 로딕이 영국에, 세상에 유명해진 것은 그녀가 기업을 운영하면서이다. 그녀는 ‘바디샵’이라는 기업을 운영한 CEO이며 그녀의 바디샵은 영국에서는 두번째로 신뢰받는 기업이자, 세계에서 28번째로 높은 브랜드가 되었다. 그리고 전세계 1,800개 매장에서 24개국어로 운영되고 있다. 이러한 바디샵은 규모뿐만 아니라 바디샵의 운영방식으로 더 유명하다. 그녀의 바디샵은 ‘윤리적인’ 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바디샵은 1976년 시작되었다. 영국 해변 도시 브라이튼의 구멍가게가 첫 출발이었다. 어린 시절 그녀의 부모님은 이혼했고 새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했지만 그 때마다 “남와 같은 길을 가지 말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해라”라는 어머니의 따스한 가르침을 생각했다고 한다. 그녀의 어머니는 먹고 살기 위해 해변에서 밥과 술을 팔며 딸 셋과 막내 아들을 키운 억척 어머니였고 10살에 돌아가신 그녀의 새 아버지는 알고 보니 자신과 남동생의 친부였다. 그녀는 선생이라는 안정된 생활을 그만두고 세계를 경험하고 싶어 배낭여행을 떠나고 그러한 생활 속에서 느끼고 배운 것이 자신의 신념을 만들었고 실제 생활로 이어졌다. 여행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에 충격을 받아 스위스에 가서 국제 비정부기구(NGO) 활동을 하다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때 완전 거지꼴로 나타난 딸을 보고 어머니는 찍어둔 사윗감 고든을 소개했고 그날로 그들은 같이 생활했다.

  어느날 그녀의 남편 고든이 2년 계획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뉴욕까지 말을 타고 여행을 하고 싶다고 말을 했다. 이 여행계획은 그가 어릴 때부터 꿈꾸어 왔던 것이었기 때문에 로딕은 무작정 반대할 수만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4세와 6세 아이를 양육해야 하는 현실을 안고 있었다. 남편은 어릴 적 낭만적 꿈을 펼치는 동안 아니타는 자녀 양육을 위한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그녀의 화장품 샵은 겨우 테이블 하나 들여놓을 만큼 좁은 점포였다. 물론 그녀는 여기에 익숙하다. 그녀의 부모님은 카페를 운영했던 것이다. 25파운드를 들여 디자인한 로고가 그려진 라벨을 전부 손으로 붙이고 내용물은 부엌에서 그녀가 직접 만든 것으로 프라스틱 용기는 병원에서 소변검사를 할 때 사용하는 것이었다. 화장품 용기에 대해 미적인 디자인을 요구하고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그녀의 화장품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부터 바디샵의 창업자 아니타 로딕의 창업 이념과 기업 윤리가 드러난다. 그녀는 열악한 환경과 사업 비용으로 이러한 용기를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 한번 쓰고 나면 버릴 용기에 돈을 들이는 것이 바보짓이라고 생각했다. 나아가 화장품 산업을 ‘혐오’했다. 이 악마같은 산업이 여성들에게 허영과 이룰 수 없는 꿈을 팔고 속임수로 착취한다고 보고 있었다. 이러한 그녀가 화장품 샵이라니.

  그녀는 아름다움은 패션잡지에 나올 얼굴과 몸매라기보다는 건강한 활력과 자존심 같은 것이라 생각하며 자신의 사업이 이런 아름다움을 추구할 때 존재가치가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인간답게 사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며 돈을 벌기 위해 동물을 학대하고 자연을 파괴하며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은 이기적이고 야만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들은 그녀의 사업에 고스란히 적용되었다. 화장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전혀 화학 원료를 사용하지 않고 코코아 오일, 아몬드, 알로에 베라와 같은 천연 원료를 사용하였다. 생산에서 폐기되는 과정에서 쓸데없이 에너지를 소비하는 상품을 만들지 않고 동물이나 개발도상국에 나쁜 영향을 주는 상품 등을 만들지 않는다고 선언한 ‘더바디샵 헌장’으로 발전했다. 새로운 제품의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 아프리카와 남미의 밀림 속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살고 있는 여성들이 하는 것처럼 자연을 소재로 한 화장품을 개발해냈다.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 상품이라는 컨셉은 판매활동에서도 그대로 적용됐다. 더바디샵은 환경보호에 맞추어져 운영되고 있다. 꾸준히 환경보호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실천하고 있다. 화장품 실험에 동물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동물 실험 반대 캠페인을 벌였고, 천연 재료를 활용한 제품만들기, 화장품 용기의 리사이클과 리필 서비스들을 실시했다. 이와 같이 더바디샵은 기업의 경영목표를 달성하는 것과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운영되고 있다.

  또한 아니타 로딕은 바디샵의 성장에 공동체의 성장을 함께 녹여 내고 있다. 그녀는 사회적 빈곤층과 소외계층, 사회적 약자, 여성과 인권을 존중하도록 이끄는 캠페인에 앞장서는 등 억압받고 핍박받는 사회의 부조리를 타파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녀는 이윤을 목적으로 기업을 운영하기 보다는 사회적 가치에 중점을 두는 비즈니스 방법을 펼쳤다. 이를 위해  재단을 설립해 180여 개의 단체에 350만 파운드 이상을 기부하였다(1990년 루마니아의 고아원에 방문한 뒤 COTE(Chiledren On The Edge)라는 기관을 설립해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는 아이들을 도움). 또 인권상을 설립하여 인권 단체에 상금을 수여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아니타 로딕은 별볼일없는 여성 주부에서 비즈니스우먼으로, 인권활동가로, 환경보호운동가로 활동해 왔다. 당시 단지 그녀가 비즈니스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그녀의 창업에 대해 의문을 표한 듯하다. 하지만 그녀는 교사생활을 하였고 UN에서 일하기도 했다. 특히 그녀가 기업의 이념으로 제시하고 있는 생각들은 UN의 여성인권부에서 일했던 경험이 큰 것으로 보인다. 물론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배운 근검절약 정신도 스며 있었을 것이고 평화를 부르짖으며 세계를 떠돌아다닌 히피 생활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그녀 스스로도 바디샵의 성공은 제품이 아니라 ‘이념’이라고 말하듯 그녀는 상거래에 관해 초짜였을 뿐이지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는 초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측면에서 가치를 잘 판매한 기업가로 남을 것이다.

  2007년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나이 65세였다. 2004년 간경변증과 c형 간염 진단을 받고 c형 간염 예방운동을 벌이기도 했는데 그녀의 사망 원인은 급성뇌출혈이었다. 그녀는 자녀에게 유산을 남기지 않겠다는 생전의 약속대로 평생 모은 전제산 5,100만 파운드를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참고 자료 


•알라딘, yes24 저자소개

•바디숍의 전설, 아니타 로딕, 한겨레21 , 2005. 12.6

•http://www.changup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7650 

•http://ko.wikipedia.org/wiki/아니타 로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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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이, 사망과 사랑이 맴도네. 그것은 사랑이었을까

- 작가 괴테에 대한 주절주절



나에게 혼자 파라다이스에서 살게 하는 것보다 더 큰 형벌은 없을 것이다

-괴테-


  <괴테와의 대화>의 저자 에커만에게 연민을 느낀 난, 성격 뭐 같고 제 자랑 심하고 말많은 할아범 괴테를 떠올린다. 괴테란 이름에 괴자 하나 들어간다고 괴상을 떠올리지를 않나, 파우스트에서 스크루지를 혼합한 노인 괴테까지를 막 그리고 있다. 대문호로 칭송받는 괴테를 이토록 곱지 않은 눈으로, 처음부터 완고한 그 모습의 노인으로 바라보는 건 앞서 말한 에커만에 대한 연민 때문이고 ‘노인’ 괴테를 먼저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쩌면 그에 대해 부족한 이해가 크게 한몫 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괴테의 책을 처음 접한 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먼저였지만 당시에 괴테에 대한 기억은 어느덧 사라지고 없다. 이십년도 더 되었으니까 그런가 싶다가도 어떻게 젊은 베르테르의 괴테를 잊어먹었을까. 아니, 그 베르테르가 어쩌다가 저런 파우스트 노인으로 변해버렸을까. 

  괴테는 평생 경제적 어려움이 없었다고 했다. 그의 부모님 덕분이기도 하다. 괴테의 아버지는 황실 고문관으로 법학을 공부한 부유한 인사였다 하고 그의 어머니는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딸이라 하니 그는 탄생에서부터 경제적 어려움과 맞닥뜨린 적은 없는 것 같다. 더구나 그의 아버지는 황실고문관이라는 명예직을 돈 주고 샀다고 한다. 귀족 신분에 대한 갈망이 컸던 모양이고 그것을 얻을 만큼의 돈을 가지고 있었으니, 뭐 다행인가.

 이러한 부유함과 지식에 대한 욕구를 가진 아버지는 괴테가 여러 교육을 받을 수 있게끔 해 주었다. 괴테의 부친은 괴테를 법률가로 만들기 위해, 라틴어를 비롯한 다른 나라의 말과, 수학, 역사, 지리, 미술, 승마, 피아노 등 다방면의 교육을 하도록 해 주었다. 또한 부유한 부친은 집안에 서재와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으로 화랑을 꾸몄고 또한 여행에서 얻은 기념물로 집 안을 장식했다. 괴테의 수많은 저작 속에 나타난 다방면의 학문과 지식은 일찍부터 받은 이러한 교육과 집 안에 가득한 다양한 예술품들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괴테는 이러한 지식 외에 어머니로부터 문학에 대한 열정 또한 배울 수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재치있고 발랄한 성격에 교양이 풍부하였고 어린 괴테에게 재미있는 동화를 들려주었기에 로마 고전 작가들의 작품을 읽었고 어려서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가 8세 때 쓴 조부모에게 보낸 신년시는 여전히 보관되어 있다. 13세에는 첫 시집을 내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이렇게 문학과 예술에 관심이 많은 문학청년이기에 문학으로 기우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아버지의 권유로 법학을 공부하고 20대 초반 변호사로 개업을 했지만 그는 계속 문학과 관련된 독서와 공부를 지속하고 문인들과 교제한다.


  괴테의 연보를 보다 보면 유독 눈에 띄는 단어가 ‘사망’과 ‘사랑’이다. 이 두 가지 단어는 모두 사람과 연결되는 말이다. 그의 긴 생애에 만난 수많은 사람들은 그가 사랑하였고 그가 사랑하였기에 그들의 부재는 괴테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먼저,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는 동생들을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에겐 다섯이나 되는 동생들이 있었지만 여동생 크로넬리아 한명을 빼고는 모두 태어나 얼마되지 않아 사망했다. 그들의 부모가 받았을 충격이 무지 컸으리라. 그리고 또 어린 괴테 역시도 일찍부터 상실감을 겪었을 듯하다. 그것이 누가 괴테와 결혼할까? 괴테는 누구를 사랑했나?와 같은 생각을 들게 할 정도의 많은 여성들을 ‘사랑’하는 경험을 하게 한 것일까. 아무튼 적어도 13명 이상의 여인들을 사랑했다 하는데, 과연 사랑일까? 욕망일까?


 1) 파우스트 구원의 여인 그레트헨

 참, 조숙하기도 하지. 하긴 일찍부터 시를 짓는 감수성이 그렇게 이끈 것일까. 괴테의 첫사랑은 파우스트에 나오는 여인의 이름과 같은 그레트헨이다. 로미오와 줄리엣보다 더 빠른 세의 이 사랑이 깨어진 후 그는 대학에서 법률 공부를 하면서 자유분방한 생활을 보낸다.

  그녀는 술집에서 잔심부름을 하고 있었고 괴테를 어린이처럼 취급했다하는데 괴테는 이 소녀를 ‘믿기 어려울 정도의 아름다움’이라 예찬했다. 아마도 미화의 측면이 있었던 게 아닌가 사람들은 비판하기도 했다고. 왜냐하면 실제로 어린이 취급에 매우 분개해 잊을 때까지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2) 안나카타리나 쇤코프

 첫사랑과 헤어지고 1765년 9월말 공부하러 떠난 도시에서 괴테는 식당 주인의 딸 쇤코프를 만나 사랑한다. 그녀에게 <아테네>라는 시집을 바쳤고 그녀와의 사랑과 연애경험을 통해 로코코풍의 시와 희곡, 목가조의 희극 <애인의 변덕>, <공범자>와 같은 글을 쓰게 된다.

 이 때 그리스 연구가 벵겔만이 살해되는 일이 일어나는데 괴테는 벵겔만의 작품을 자주 읽어왔 터라 벵겔만의 살해 소식에 큰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이내 폐결핵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3) 스산네 폰 클레텐베르크

1768년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젊은 열정으로 또다시 사랑하고 그녀를 위해 시를 짓던 그는 자유로운 생활을 했음에도 병을 얻었던 것이다. 요양생활을 하면서 파우스트가 그러했던 것처럼 신비주의와 중세 연금술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어머니의 친구인 클레텐베르크 양과의 교제를 통하여 경건한 신앙에 접근하게도 되는데 그녀는 <아름다운 영혼의 고백>의 모델이 되었다 한다.


 4) 프리데리케 브리온

 죽을 때까지 참회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던 여성으로 지센하임의 목사 딸이라고 한다. 괴테가 21세 때 열렬히 사랑했다 하며 그녀 역시 결혼을 원했지만 괴테는 그녀를 버리고 떠났다고. 파우스트에게 유혹당했다 버림 받고 자식을 죽여 사형에 처해지는 처녀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는 프리테리케의 일과 다른 여성들에 대한 참회의 마음이 담긴 것이라 볼 수도 있다고.  ‘시골 하늘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세상에서도 아름다운 별’과 같이 그녀를 예찬하는 말은 많이 하지만 떠난 이유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헤어질 때 말 위에서 손을 내밀자 그녀의 눈에 눈물이 넘쳐 흐르는 것을 목격하고 그녀의 슬픔을 알게 되었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한다. 프리데리케 브리온에 대한 사랑으로 민요풍의 소박한 서정시를 만힝 썼는데 슈베르트의 작곡으로 알려진 <들장미> <환영과 이별> 등이 있다.


 5) 짝사랑, 이상의 여인, 샤를로테 부프

  몸이 회복되고 1770년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법률박사 학위를 얻었다. 이 무렵 괴테는 고트프리트 헤르더를 만나면서, 문학의 본질에 눈뜨고 성서, 민요, 호메로스, 셰익스피어 등에 친숙해진다. 귀양 후 변호사 개업을 하지만 문학에 더욱 관심을 가지며 <괴츠(Gottz)>의 초고를 쓴다. 다름슈타트의 메르크와 친교를 맺었다. 1772년 법률 실습을 위해 베츨라 고등법원으로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그는 그의 오랜 사랑이자 이상인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곳에서 그가 사귄 요한 케스트너라는 친구의 약혼자인 샤를로테 부프이다. 괴테는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 짝사랑하게 된다. 그녀와는 이후 12년에 걸친 연애를 하게 되는데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모델이 된 여인이다. 이 작품의 폭발적 인기로 괴테는 엄청난 유명 작가가 된다.


 5) 약혼녀, 릴리 쇠네만

  1775년 4월 프랑크푸르크 은행가의 딸인 릴리 쇠네만과 약혼을 하지만 가을에 파혼한다.  그는 많은 여인을 사랑했는데 갑작스런 결혼 결심은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다. 더구나 릴리 쇠네만과 약혼하기 전 그는 16세의 소녀 맥시밀리아네를 사랑했다는데 곧바로 프랑크푸르크로 돌아오자 약혼을 한 것이다. 이 약혼이 정착하고 싶었던 때문이라고 얘기되는 듯한데 그런 정착 결심이 계절 하나를 지나 사라져 버리다니.

 당시 18세였던 바이마르 공 카를 아우구스트의 초청으로 11월 바이마르에 가게 되는데 가을 파혼한 괴테에게는 얼마나 위안이 되는 일이었을까 한다. 이곳에서 지내는 10년의 기간 동안 괴테는 정무를 참당하여 추밀참사관, 추밀고문관, 내각수반의 정치적 활동을 하기도 하고 다양한 연구에도 매진한다. 물론 정치적인 영향을 갖춘 괴테가 보다 많은 사람과 교류했을 것은 당연하다. 아우구스트공의 모후 안나 아말리아, 시인 빌란트, 고전적 교양미가 풍부한 크네베르 소령, 궁정가수 코로나 슈레타 등 궁정 안의 많은 사람들과 친교를 맺으면서 자연과 인생에 대해 배우며 이른바 질풍노도의 슈투름 운트 드랑의 격정을 지나 보다 평안하고 원숙한 변화를 이루었는데 거기엔 당연 샤를로테 부인의 영향 또한 있었다. 그녀 역시 시간의 변화와 함께 일곱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고 지적이고 우아한 여성이었다 한다. 그러나 1786년 갑작스럽게 떠나야겠다는 생각으로 남몰래 괴테가 이탈리아로 떠나면서 샤를로테 부인과의 관계는 종지부를 찍게 된다.


6) 괴테의 아내,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

 수많은 여성을 사랑한 괴테가 갑자기 결혼을 결심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의 자식의 어머니이니까 그럴 만도 하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결혼을 한 것이 아니었다. 1788년 바이마르에 돌아온 괴테는 그의 나이 38세에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를 만난다. 그녀는 괴테보다 15세 어린 바이마르 조화 공장에서 일하는 여공이었다. 원래는 좋은 집안의 신학자이자 법률가 집안의 딸이었으나 그녀의 아버지의 알콜 중독으로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다 한다. 그녀는 23세에 바이마르 공국 추밀관인 괴테에게 일자리를 부탁하러 갔다가 만나 동거에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 해 그들의 아들 아우구스트가 태어나는데 아들이 17세 성인이 된 것을 계기로 1806년 가을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크리스티아네가 병으로 사망하기까지 28년의 세월을 함께 했다.

 그가 그의 아내를 만나며 사랑도 보다 안정되던 1974년 실러와 만나게 된다. 괴테는 실러에서 많은 영향을 받게 되는데 파우스트의 집필에 실러의 지속적인 독려가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그들의 우정은 괴테의 작품에도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실러와의 교류 중에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헤르만과 도로테아>와 같은 작품을 썼다. 1805년 실러의 죽음은 괴테에게는 더할 수 없는 충격을 주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충격과 상실감을 극복하고 창작에 몰두하고 자연과학 연구에도 몰두하고 있을 때 그의 아내 크리스티아네의 죽음은 또다시 그를 쓸쓸한 인생을 보내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816년 그의 아내가 죽은 후 쓸쓸했던 괴테는 시안 하피스의 작품을 읽고 자극을 받아 창작열을 불태웠고 또다시 빌레머 부인을 사랑하게 되어 그녀를 사모하여 읊은 <서동시집>을 발표하게 되는데. 그때가 1819년이다. 사랑한 인생의 동반자가 죽은 지 3년도 안 되어 또다시 사랑, 정말 괴테는 사랑이었나. 하긴 그의 아내가 있고 그가 좋아하던 실러의 죽음으로 힘들어하던 그 시기에도 괴테는 또다른 사랑을 하고 있었다. 미나 헤르츨리프와의 사랑인데, <친화력>이 이 소녀를 모델로 한 것이라 한다. 그리고 이 소설ㄹ은 1809년 출간되었다. 그러니...

 

7) 마지막 여인, 울리케 폰 레베초프

 72세의 괴테는 자신이 잘 가는 휴양지 마리엔바트에서 17세의 이 소녀를 만나 구애한다. 구애의 과정이 웃긴다. 그는 72세의 나이로 결혼을 하면 몸에 독이 되는지 의사에게 물었고 의사는 걱정할 게 없다고 한다. 그러다 2년 후에 청혼을 하는데 울리케는 거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 후에 수녀가 되었다 한다.

 

 수많은 여인들을 사랑한 괴테의 특징이라면, 그녀들을 사랑하고 그녀들을 위해서인지 그녀들과 헤어져서인지 꼭 관련된 작품들을 남긴다. 마치 자신의 사랑을 꼭 기록해야 하는 것처럼 혹은 작품을 위해 여인이 뮤즈인 듯이 행동하는 괴테의 기질을 뭐라 말할 수 있을까.

 아무튼 많은 사랑을 하며 자유로운 생활을 누리던 괴테는 돌연 이탈리아 여행을 떠나게 된다. 1786년부터 1788년까지의 3년 동안이었지만 이 여행이 괴테에게는 많은 변화를 일으키는 일이었다. 일단, 여행부터가 갑작스런 떠남의 욕구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몰래 떠난 여행, 이때 오랫동안 사랑하던 여인 샤를로테 부인과의 관계도 있었는데 이 여행으로 그녀와의 만남도 소원해지고 괴테의 문학적 성향도 고전주의로 변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1832년 3월 22일, 괴테는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평생의 친구 실러의 무덤 옆에 묻혔다고 하는데 괴테의 마지막까지 함께 한 에커만은 “평안한 기색이 고귀한 얼굴 전면에 깊이 어려 있었다. 시원한 그 이마는 여전히 사색에 잠겨 있는 듯했다.”라고 그의 작품에 기록하고 있다.



•이원용, 세계를 움직인 12인의 천재들, 을유문화사, 1996.

 

 이 책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천재 12명의 천재성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책이다. 딱 괴테에 대한 내 생각을 확정짓듯이 괴테의 천재성을 사랑, 괴테의 창작의 창조성은 사랑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피카소의  뮤즈와 같다고 볼 수 있겠다. 한편으로는 천재 혹은 창작자들의 뮤즈는 '여성'인 것이 도식적이기도 하고 여성편력에 대한 자기변명같기도 하다. 그러나 어쩌랴. 많은 여인들을 만나고 나서 그림을 그렸다 하고 글을 썼다 하는데......다른 11명이어야 어떻든....


 •네이버 지식백과, 네이버캐스트, 위키백과

•괴테, 파우스트, 민음사

•페터 요한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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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이목구비(耳目口鼻)를 뜯어보다


   


  



  연암은 어떤 글자가 가리키는 대상의 생생한 움직임과 미묘한 내적 본질을 꿰뚫어볼 때 비로소 그 글자를 아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열하일기 속의 사물에 대한 묘사는 24시간 카메라가 돌아가듯 생생하며 그것을 묘사함에 있어 전하고자 하는 바 역시 명확하고 명쾌하다. 그의 글쓰기가 완결되는데 있어 그가 바라보는 세상, 그의 몸에 체득된 사상이 당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즉 그에게 내재한 가치체계를 통해, 그는 사물을 보고 사물에 대해 인식하며 사물과 연관된 또 다른 관계를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바라보는 시각, 그의 프레임들은 어디서부터 연유한 것일까. 그의 삶 속에 스며들어 그의 사고를 정립시킨 그의 세상을 찾아본다.


1) 눈(目) - 세상을 보다


 박지원은 1737년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8세기 조선 후기, 연암은 영・정조 시대를 살아 내었다. ‘살아 내다’라고 말하는 것은, 수많은 역사서에서 기록하듯이 그 시기가 혼란과 변화의 흐름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혼란의 흐름 속에서 연암이 보던 세상은 어떤 것일까. 연암의 집안은 당대 명문 양반인 반남(潘南) 박씨 가문이었으며 청빈과 청렴결백을 생활화하였고 연암 또한 이러한 생활을 유지하였다. 그와 함께 재산 축적에 관심이 없는 할아버지와 별다른 벼슬을 하지 못한 아버지였기에 집안 형편은 좋지 못하였다. 연암은 5세부터 할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공부를 배웠고 16세에 결혼하여서는 장인으로부터 맹자를 배웠고 외삼촌 이양천에게 사마천의 글을 배웠다. 어린 시절부터 이들에게서 배운 사상과 학문은 연암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연암은 권세와 이익만을 좇는 세태를 미워하였으며, 이용후생(利用厚生)학, 경세제국(經世濟國)학, 명물도수(名物度數)학 등의 학문을 소홀히 한다는 점, 그리하여 잘못된 지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며 그 학문이 몹시 거칠고 조잡한 점을 병통으로 여기며 자신의 사상을 수립해 나가고 있었다.


2) 귀(耳) - 세상을 듣다


 연암은 훤칠한 풍채를 가지고 있고 목소리 또한 우렁찼다고 한다. 연암의 우렁찬 목소리에 귀신붙은 여자의 병이 나았다는 일화까지 전해지고 있고 나아가 연암의 사상의학적으로 태양인의 기질이라는 분석까지 내놓고 있다. 이렇게 타고난 성품이 호방하고 고매하였던 연암은 명예와 이익이 몸을 더럽힐까봐 극도로 경계하고 삼갔으며 한양 근교의 산사를 찾아다니며 과거 공부에 전념하였고 담헌 홍대용, 석치 정철조, 강산 이서구와 교류하였다.

 언뜻 우람한 풍채와 호탕한 기개, 사람들과의 사귐을 좋아하는 연암에게 있어 세상은 무엇하나 거칠 것 없어 보인다. 열하일기 속, 무수한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유쾌한 기개와 더불어 익살과 해학의 인자를 가지고 있고 천지사방을 유람하는 이에게서는 끊임없는 에너지가 흘러 나온다. 그런 사람은 이미 오래 전 자기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전진만을 할 듯하다.

 그런데, 연암이 보는 것에서 나아가 ‘듣는’ 삶으로서의 여정이 이미 어린 날부터 시작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접하게 된다. 연암의 저서 《민옹전》에 “지난 계유・갑술년 사이에 내 나이는 열에 일고여덟 살이었다. 병에 오랫동안 시달리어 음악, 서화 혹은 칼, 거문고, 골동 등 모든 잡물을 제법 좋아했을 뿐더러 더욱이 지나는 손님을 모아놓고 익살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옛이야기로써 마음을 여러 모로 위안시켰으나, 그 깊숙이 스며든 울적한 증세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라고 쓰여 있는 것이다. 이 무렵의 연암은  사나흘씩 잠을 이루지 못하거나 거식증으로 오랜 기간 고생하였고 스스로 기록하였듯이 밤새워 가며 머슴부터 기인까지, 여러 부류의 사람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다. 이처럼 연암은 울적한 병증을 이기고자 연암은 거리로 나갔고 익살과 해학을 통해 자신의 병을 치유하고자 노력했으니 그가 이처럼 거리에서 만난 이들로부터 많은 것을 들었으며 이들의 이야기는 연암의 소설의 소재가 되어 있다. 이때 쓴 글이 《마장전》《예덕선생전》《민옹전》《양반전》《김신선전》《광문자전》《우상전》《역학대도전(학문을 팔아먹은 큰 도둑놈전)》《봉산학자전》의 9가지 전이다.

 연암은 젊을 때부터 벗들과 모여 글 짓고 술 마시며 질탕하게 노는 일이 쾌 있어 사람들은 이를 두고 연암이 번화함을 좋아하며 몸 단속하기를 싫어한다고 평하였으나 연암은 타고난 성품이 물욕이 없어 한가롭게 지내며 고요히 앉아 이치를 궁구하고 관찰하기를 좋아하였다.또한, 연암은 노론으로서 소론인 이광려와의 친분을 유지하기도 하였다. 당파가 심한 그 시기, 이에 대해 사람들은 비난할지언정 무조건적인 비난이 아니라 적확한 비판과 자신과의 공감, 사람됨을 보는 것이다. 보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열린 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3) 코(鼻) - 세상을 욕망하다 

 

 연암의 아들 박종채의 자기 아버지에 대한 기록인 《과정록》에 의하면 점쟁이에게 박지원의 사주로 길흉을 물은 적이 있는데, 연암의 ‘사주는 마갈궁(磨蝎宮)으로 반고와 사마천과 같은 문장을 타고났지만 까닭없이 비방을 당한다’라고 했다 한다. 과연 그 점쟁이가 영험하였는지 연암은 그의 ‘문장’으로 세상으로부터 온갖 비난과 질시를 받게 된다.

 가장 크게 나타난 사건은 한 국가의 왕으로부터 이른바 ‘찍혔다’라고 할 수 있는 문체반정 사건이다. 정조가 이덕무가 지은 <왜적 방비에 대해 논함>이란 글을 보고 연암의 문체를 본떴다라고 할 정도로 연암의 문장은 나름의 특성과 개성을 가지고 당대의 문장가들의 시기와 질투를 불러일으킨다. 당시의 지배적인 질서를 어지럽히는데 있어 글쓰기가 하나의 역할을 한다면 그의 대표적인 선두에 연암이 있고 대표적인 글로 열하일기가 지목되었다. 이미 10년 전에 성행한 열하일기가 문제의 근원지로 최종 낙찰되면서 이에 대한 사대부들의 평가는 엇갈리게 된다. 그것은 오히려 이렇게 왕으로부터의 지목이 글에 대한 은근한 비호일지도 모른다며 당시에 그러했던 것처럼 문책에 따른 반성글을 지어 올리라는 것이다. 이에 연암은 당시의 문인들이 일신을 위해 고문주의로 회귀하여 글을 지은 것과는 달리, 반성문을 제출하지 않았다. 

 연암은 과거 시험에 일등으로 뽑히기도 하고 그의 문장에 대한 칭송으로 시험을 주관하는 자는 연암을 과거시험에 합격시키고자 하였으나, 연암은 시험 답안지를 제출하지 않거나 붓가는 대로 그림을 그리고 시험장을 나오고는 다시는 과거를 보지 않았다. 이에 사람들은 연암을 어리석다며 비웃기도 하였지만 이는 연암이 과거 보는 일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연암이 생애를 통해 전혀 관직에서의 생활을 수행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벗 유언호가 이조 판서로 있으면서 천거한 덕분으로 선공감 감역에 임명되어, 벼슬길에 나서게 되었다. 그의 쉰 살이었다. 또한 선공감 감역은 연암의 이용후생과 직접 관계되는 직책으로 연암은 이후에도 안의 현감에 임명되는 듯 몇 번의 벼슬을 맡게 된다. 연암은 엄정한 판결로 송사를 처리하여 백성들 간에 분쟁을 일삼던 풍조를 바로잡고, 아전들의 상습적인 관곡 횡령을 근절했다. 관아에까지 침범하던 도적을 퇴치하고 흉년에 굶주린 고을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의 녹봉을 털기도 하는 등 온 힘을 다했다. 특히 청나라의 수레와 벽돌 만드는 데 관심을 가졌던 연암은 안의현감 시절, 관공서 전각을 세울 때나 창고를 세울 때 중국의 벽돌 제도를 써서 벽돌을 손수 굽고 쌓고 하기도 하였다. 즉, 쉰 살의 나이에 수락한 그의 벼슬은 그가 생각하고 있는 이념을 실제로 적용하는 기회였다. 실제로 그는 욕심으로 가득하여 큰 자리에 연연한다거나 이치에 맞는 행동을 보이지 않았고 진정 백성을 위한 실사구시에 힘쓰는 벼슬아치였다.


4) 이(口) - 세상에 내뱉다


 연암의 약력을 정리하다 보니, 유독 가족이나 벗들의 사망이 많았다. 연암이 69세를 일기로 서거하는 날까지, 조부와 부모, 형님과 형수님, 아내와 자식에 이르기까지 또한 그가 사랑하는 벗들까지 연암에 앞서 세상을 떠났고 연암은 이를 지켜보며 통곡해 했다. 연암은 아버지가 병환이 위중할 때 칼로 왼손 중지를 베어 약에 자신의 피를 타서 올렸을 정도였다. 이처럼 사랑하는 가족과 벗들을 보내며 통곡할 때마다 연암은 묘비명을 짓거나 시를 지으며 마음을 달래었다.

 많은 소설들을 쓰며 기존의 부조리한 사회질서에 대해 맹렬히 비판하고 풍자하였고, 만민이 평등하여 직업에 귀천이 없음을 보여주었고,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한 상업과 공업이 활성화되어야 함을 피력하기도 하는 등, 연암은 거침없이 그의 사상과 가치를 글로써 풀어 내었다. 당시 선비인 체하면서 권세와 이익을 구하는 자를 풍자하기 위해서 지은 특히 <역학대도전>은 실제 모델인 자가 죽자 박지원은 스스로 남을 비판하여 명성을 얻은 자가 있지만 자신이 그런 명성을 얻을 필요가 없다하며 그 글을 불태워버렸다 한다.

 팔촌형인 금성도위 박명원이 중국 사행의 정사(正使)로 임명되어 연암을 개인 수행원으로 참여케 하여 연암은 대망하던 중국 여행의 기회를 얻게 된다. 6개월 여의 여정 동안 열하를 여행하면서 열하일기를 기록하였고, 돌아와서, 다시 연암 골짜기에 들어가 《열하일기》 25편을 지었다. 또한 연암은 정조의 명으로 《과농소초》의 농서를 지었으며 여기에는 청나라의 발달한 기구, 수리의 방식과 기재 등에 대해 기술하였다.

 이처럼 연암은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글쓰기를 통해 세상에 끊임없이 내어 놓으며 글쓰기를 주저하거나 마다하지 않는다. 비록 벼슬에 대한 큰 뜻은 없으나 세상의 변화에 대한 큰 뜻을 가진 이로써 변화와 개혁에 대한 끊임없는 욕망을 글로써 세상에 전하는 것이다.


5) 얼굴 - 세상과 소통하다


  ‘연암’은 스스로가 부여한 호칭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닉네임이다. 흔히, 닉네임은 자신의 의지, 자신의 목표, 자신을 대변하거나 좋아하는 것을 사용하게 된다. ‘연암’이라 자호한 것은 연암골에 정착하여 살고자 하면서이다.

 박지원은 벼슬에 큰 뜻이 없었고, 부를 위해 정진하지도 않았다. 늘, 길도 언덕도 아닌 사이의 그 경계점에 머물러 있었다. 세상의 아웃사이더인 것처럼 세상을 살던 연암에게 있어 유일한 세상과의 호흡, 소통처는 ‘연암골’이 아닌가 한다. 연암은 이 곳을 터전으로 하여 유언호, 홍대용, 정철조,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과 교제하면서, 자신의 사상과 문학을 더욱 더 심화해 나갔다. 이들 중 몇은 서얼이었으나 이들은 당파나 신분의 차이에 개의치 않고 서로 진정한 우정을 추구했다. 문학에 대한 논의뿐만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연암의 경우 이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얻기도 했다.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배우고자 하는 '북학'(北學)을 지향한다는 점이었다. 특히 연암은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이라는 문하생을 두어 그의 뜻을 나누고 함께 했다. 이들이 연암과 그들 벗들의 뜻들을 계속 이어갈 터였다. 나아가 이들 또한 문장으로 칭송받고 있으니, 이는 연암의 덕이 클 터이다. 연암이 세상과의 유대를 거부한 채 살아가는 듯이 보였으나 그의 벗들과 제자들을 통해 경계 저 멀리에 머물지 않고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며 세상과 소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미숙,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그린비, 2003.

•고미숙/박지원 원저, 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 아이세움, 2007.

•김지용, 박지원의 문학과 사상, 한양대학교 출판원, 1994.

•박종채 저/고미숙 역, 나의 아버지 박지원, 돌베게, 1998.

•박지원 저/김혈조 역, 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 학고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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