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괴테와의 대화, 요한 페터 에커만, 장희창 옮김, 민음사, 2008.


  저자에 대한 기록이라면 『괴테와의 대화』의 머리말과 시작 전 자신이 기록한 이야기, 책 속에 부분 부분 들어 있는 그의 생각들이 전부다. 니체라는 대작가가 “현존하는 독일 최고의 책”이라 칭한 책의 작가임에도 에커만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물론 내가 독일인이 아니다 보니 그에 관한 자료를 찾는데 어려운 점이 있었으리라. 그러나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고라도 수백 년 동안, 전세계적으로 널리 읽혀지는 책의 작가에게서 느껴지는 위치가 그에게 없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그가 아니라 사회가 그에게 부여해준 위치 말이다. 그의 책은 에커만의 책이 아니라, 괴테의 책이고 괴테에 관한 책이었다. 괴테를 빼고서는 에커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기록한 그를 보면서, 연보를 보면서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단편적인 것이겠지만 나는 참으로 안쓰럽고 아련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에커만이 괴테를 만나 성장하고 변화되었다고 말하지만, 나는 에커만이 가난하기 때문에 그렇게 살았다고 느껴진다.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하고 그만큼의 위치를 점했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가난했기에 길을 더 나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생애를 곱씹는 동안 신경림의 시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라는 구절이 계속 맴돌았는지 모른다. 이 시의 부제가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이다. 1800년대 가난한 독일 젊은이의 쓸쓸한 생애가 내 이웃의 이야기인 것 마냥 책을 덮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괴테와의 대화』를 출간하였음에도 부채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 혹여 사치스러운 젊은이인가 오해하였더랬다. 오랜 세월 자신의 의지와 꿈들을 조금씩 내려놓고 괴테의 전집과 자서전을 도우며 생계를 이어가던 에커만. 자신의 작품으로서 『괴테와의 대화』의 저자가 되어 이 책을 보다 일찍 출간하고자 했으나 결국 괴테의 뜻으로 인해 출간하지 못했다. 그리고 괴테의 전집을 도우며 유고작을 정리하는 편집자의 역할을 한 에커만은 그렇게 많은 보수를 얻지 못했다고 한다. 어쨌거나 그가 따랐던 괴테도 죽고 그의 아내도 비슷한 시기에 사망하여 그를 떠났다. 그는 그들보다 20여년을 더 세상에 머물렀지만 『괴테와의 대화』이후 괴테와 관련된 서적 이외에 그의 이름으로 된 다른 책은 출간되지 않았다. 


1) 가난하다고 해서 꿈조차 없겠는가


 에커만은 1792년 독일 빈젠에서 태어났다. 너무나도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에게는 어린 시절 일이 곧 놀이였으며 이삭줍기, 도토리 열매 모으기 등을 통해 집안의 생계를 도우며 자란다. 그 와중에도 틈틈이 학교를 다니며 읽기와 쓰기를 익혔다. 우연한 기회에 그림을 그리게 되고 그의 그림이 지방 유지들에게 전해지면서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게 된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에겐 그림이 무엇인지, 화가가 무엇인지, 그것을 직업으로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는 세계이기에 그림에 대한 그의 꿈은 사라져갔다.

  그러나 배움에 매료된 에커만은 이 때부터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러나 곧 경제적인 문제로 학업을 지속하기 어려워지자 법원의 서기로서 기록과 잡무를 맡으면서 일을 했고, 이후 감독청과 군청 등 관공서에서 일을 했다. 그렇게 일하며 공부를 하다 의용군에 입대하게 된다. 그때 네델란드 그림을 접하며 그림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된다. 제대 후 홀로 그림을 그리다 스승에게서 배우기로 결심하며 눈쌓인 길을 40여 시간 동안 걸어 람베르크에게 배움을 청한다. 그러나 6개월도 되지 않아 전장에서 얻은 병으로 치료가 필요하고 생계가 어렵게 되자 다시 회사에 취직한다. 즉 상황에 의해 예술가로의 길을 포기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현실적인 여건에 따른 예술가의 삶에 대한 포기는 괴테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에겐 자주 나타나는 일이기도 했다. 병으로 휴식을 취하며 많은 책들을 접하다가 전장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시를 지어 자비로 시집을 내게 된다. 이 시가 잡지에 실리고 여러 지방에 출간되면서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이후 괴테의 책을 접하고는 그에 대한 존경심으로 더 많은 배움을 위해 일하는 틈틈이 라틴어, 그리스어 교습을 받았고 더욱 더 배우기 위해 스물다섯의 나이에 김나지움에 입학한다. 순수한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일을 병행하며 잠을 줄여가며 공부를 하면서 지냈다. 그렇게 생활을 하다보니 다시 병을 얻게 되고 체력의 한계를 느끼며 결국 학교를 그만둔다. 생계 때문에 직장을 그만둘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그에겐 후원자가 있었지만 그들은 돈이 되는 학문을 하는 경우에만 협력을 약속하였다. 배우고 싶은 열정, 학교를 가고 싶은 열정으로 시집을 내고 수입을 얻게 되자 약혼녀를 두고 괴팅겐으로 떠나 공부를 시작한다. 그리고 후원자들의 도움을 얻을 수 있는 법학공부를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바라던 일이 아니었으므로 그는 줄곧 그가 원하는 공부를 병행하고 있었고 종국에는 법학 공부를 그만두고 원하는 공부를 하게 된다. 그 과정에 『시학논고』가 탄생되었다. 에커만에게는 이를 통해 충분한 원고를 받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것이 그에겐 어느 정도 생계를 보장하고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 책을 괴테에게로 보냈고 이후 직접 괴테를 만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가 살고 있는 골짜기를 걷고 걸어서 괴테가 있는 바이마르로 가게 된다. 극심한 더위로 힘든 고비를 수없이 넘긴 열흘 간의 기간을 지나서였다. 그 길로 괴테의 문학 조수가 되어 1823년부터 1832년까지 10여년 동안 괴테와 교류한다.

 에커만은 그 자신도 생계로 인해 꿈을 포기한 일들을 얘기하며 아무도 자신을 탓하지 못하리라 얘기하고 있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는 가난으로 꿈을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가난하여 그것을 지속적으로 하지 못했을 뿐, 늘 그는 꿈을 위해 내달리며 배우고 또 배워갔던 것이다. 그림을 배우고자 할 때도 스스로 스승을 찾았고, 문학에의 열정이 가득찼을 때에도 배우고 공부하며 시를 썼다. 그리고 또한 힘든 여정들을 거치며 괴테를 찾아 나섰다. 그가 진정 가난으로 예술가의 길을 포기한 자라면 여전히 그는 법학이나 군청에서 일을 하는 자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문학사에서 그의 이름은 여전히 남아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후세에 전하고 있고 그가 남긴 『괴테와의 대화』는 니체를 통해 칭송받는 작품으로 이어지고 있다.

   

2) 가난하다고 해서 이 모든 것을 버릴 수 없음을


 문학에의 열정으로 끊임없이 배우고자 하며 스스로 스승을 찾는 여정을 떠난 청년은 시간이 지나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었을까.

 에커만은 지금으로 봐선 아직 청춘인 시절인 62세에 사망하였다. 그의 삶에 많은 시간을 괴테와 함께 했고, 괴테의 작품과 함께 했고, 괴테의 목소리와 함께 했다. 그가 괴테의 작품을 읽고 괴테를 만나 그와 함께 삶과 예술과 다양한 학문들에 관한 주제로 이야기하는 동안 에커만은 정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성숙했으며, 이를 통해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에커만에게 있어 괴테는 지적 동반자이자 절대자였던 것이다.

 괴테 역시 그의 유고작을 에커만이 편집해 주기를 바랐고 괴테가 세상을 뜰 때까지 에커만은 괴테의 원고를 정리하며 <예술과 고대>라는 잡지의 편집을 맡았고, 괴테 사후에는 <유고 전집>을 펴냈다.

 그의 삶에서 괴테의 자리가 크기에, 그리고 떨쳐버릴 수 없는 가난으로 더디게 도달한 자리였기에 애정이 남달랐을 수 있다. 그러하기에 또 한편 외롭게 외면받았을 존재가 있다면 그의 약혼녀이다. 에커만은 괴테를 만나기 전 요한나 베르트람과 약혼하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결혼은 하지 못했고 에커만의 공부를 위해 떨어져 지내게 되었다. 괴테의 아들과 여행을 떠난 에커만은 여행 속에서 많은 생각들을 하고 인생에 대해 고뇌하던 중 약혼녀와 함께 하며 안정된 생활을 꾸리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느끼게 된다. 마침 대공의 자제를 교육하는 일을 제의받아 기쁨으로 여행에서 돌아오지만 그와 같이 여행하던 괴테의 아들이 여행에서 사망하게 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이 일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여전히 에커만은 결혼하지 못하고 괴테의 건강을 걱정하며 괴테의 일을 돕게 된다. 이후 1년이 지나 약혼 12년 만에 드디어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그녀의 아내는 하늘나라로 가 버렸다.


3) 그는 벽 속에 갇혔다


 어쩌면 에커만에게 괴테는 끊임없는 벽이었다. 오직 괴테의 작품에 대한 감탄과 괴테에 대한 존경으로 가득찬 한 사나이의 순수한 열정들을 가두는 벽 말이다. 그 자신 어려움 속에서 남의 도움을 얻기 위해 적당한 거짓을 배웠다고 얘기했지만 괴테와의 만남 속에서 그것은 발현되지 않았다.

 오히려 피터팬 증후군을 앓는 사람처럼 에커만은 괴테 앞에서 너무 작아진 듯하다. 게다가 주눅든 아이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청년 시절까지만 해도 당당했고 열의가 넘쳤던 그였는데 말이다. 괴테를 만나기 전까지 끊임없이 학구열에 불타올랐고 그 자신 또한 창작열에 불타는 문학도로서 그는 시를 짓기도 하고 『시학논고』를 펴내기도 했던 그였는데 말이다. 반면 ‘장인님, 이제 장가보내줘유‘를 외치는 ’나‘에게 자꾸 점순이의 자라지 않은 키를 얘기하며 외면해 버리는 김유정 소설 <봄봄>의 장인처럼 괴테는 심술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어쩌면 에커만의 생애마다 괴테라는 존재로 막혀 있었던 듯도 하다.

 에커만은 괴테의 작품을 정리해주는 조수이자 동료로 만년의 괴테에게는 동반자였다고 얘기된다. 물론 에커만에게도 괴테는 절대적인 존재였으며 자신의 의지로 괴테와의 관계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진정 그들이 동반자였다면 같이 성장할 수 있었어야 한다. 그러나 괴테는 성장하기에는 이미 다 자란, 그리고 원숙하게 성장해 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에커만은 스스로 성숙하였다고 말하고 있고 그러한 면이 책 속에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젊은 시절 그가 행한 만큼의 강렬함이나 열정이 덜하게 보인다.

 자신의 곁에서 오랜 시간 함께 하며 자신을 존경하고 우러러보는 한 젊은 청춘의 재능을 보았다면 그의 재능을 더욱 이끌어 주었으면 좋았으련만. 에커만이 좀더 자신의 순수한 창작물을 생산해 낼 수 있도록 해 주었으면 좋았으련만, 괴테의 그러한 점이 아쉽고 애석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재능과 소질을 발견하게 되었다면 그가 재능을 더욱 펼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참 스승의 역할이 아닐까. 그러나 괴테는 오히려 그를 가두었다. 그의 재능을 확실히 인지하고서야 그를 동료가 아니라 정말, 조수로 부린 듯한 인상이다.

 어쩌면 에커만의 재능을 알아봐주고 이끌어주었다고 말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에커만의 재능을 평가한 시점, 중요한 지점은 여기다. 그가 이러한 말을 한 시점이다. 그것은 괴테가 아픈 동안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던 기간이었다. 그때 괴테는 에커만에게 일을 맡겼고 에커만은 충실히 그 일을 해내었다. 괴테는 에커만의 재능과 소질을 발견하며 진심으로 기뻐한다. 물론 처음 에커만이 논문을 보냈을 때도 호의적이었기에 그들의 만남이 시작되었긴 하지만 말이다. 일단 그가 아픈 기간 동안 에커만이 대신한 일을 두고 괴테는 재능이 있다며 환호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자네에게 말해 두겠네만 만일 다른 곳에서 문학과 관련된 청탁을 받는다면 거부하게. 아니면 최소한 나에게 미리 말해 주게나. 자네는 일단 나와 연을 맺었으니 다른 사람과 관계를 가진다는 게 그리 달갑지 않아.”(괴테와의 대화 1권, p102)


  이뿐만 아니다. 오랜 시간 괴테와 함께 하고는 있지만 자신의 문학은 창작하지 못했던 에커만은 드디어, 자신에 대한 각성에 이른다. 진정 익숙한 곳과 결별하고 낯선 곳에서는 자아를 만나게 되는 것인지, 여행을 떠난 에커만은 여행길에서 어느 길을 가야 할 지 모르는 난관에 부딪치게 된다.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자신의 내면으로 파고들어 그의 욕구와 마주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지식을 늘리고, 그의 삶을 개선시키고자 하고팠고 의미 있는 일을 하고자 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괴테와의 대화』를 출간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욕구가 강하여서인지 그는 여행에 대한 감흥은 사라지고 오직 원고를 마무리짓고자 하는 갈망으로 가득찼다. 바이마르로 되돌아가면 자질구레한 일들에 시달리며 시간만 뺏기고 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조용히 약혼녀 곁에 머무르며 원고를 마치기를 간절히 바랐다. 문학적인 영역에서 영향력을 얻고 어느 정도의 명성을 얻고자 하는 바람도 가지며 글을 쓸 때에 스스로 자유로움을 느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가 편지에서 밝혔듯이 오랫동안 자신의 삶이 정체되어 있음을 느끼면서 그는 스스로의 변화를 필요로 하였기도 했다.

 그러나 괴테에게 전한 이 강렬한 열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떠나 있었기에 진실한 그의 마음을 말할 수 있었을 그 고백들은 괴테의 거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괴테는 대화록을 빠른 시일 내에 발간하려는 나의 생각을 승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순수한 문학적 이력을 성공적으로 개시하려던 나의 구상은 더 이상 생각할 수가 없게 되었다." (괴테와의 대화 1권, p623)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약혼 후 10여년을 떨어져 지낸 이유도 있지만 에커만의 책을 내고 싶은 강렬한 욕구의 좌절이 아마도 약혼녀를 만나고 싶은 갈망으로 그녀와 함께 살고 싶은 마음으로 대체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가 그러한 생각을 품고 있을 무렵 여건도 그에게 좋게 진행이 되기도 했다. 만약 그때 괴테의 아들이 사망하지 않았다면 그는 약혼녀와 함께 하며 안정된 생활을 하고 싶다는 갈망을 이루지 않았을까. 그의 생에서 조금은 괴테라는 인물이 중점이 되어 돌아가던 삶의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그렇게 갈망을 품고 되돌아 온 에커만은 아들의 사망이라는 슬픈 격랑 속의 괴테를 걱정하며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괴테의 일을 돕는다.

  너무나 높은 곳에 있는 괴테를 만나, 스스로를 너무 낮추었던 에커만의 청춘이 아스라이 느껴진다. 그토록 경외하던 괴테가 사라지고 난 후 그의 남은 생애가 어떠한 모습이었을지 괴테와의 대화를 출간하고 난 이후에도 그에 대한 그리움 속에서 음울하게 있지는 않았을지 궁금하다. 그의 생에서 괴테로부터 많은 교양을 얻고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그가 그의 생을 돌아보며 흔들릴 때, 그는 괴테에게서 독립을 꿈꾸었다. 물론 괴테의 허락을 구하고 그의 격려 없이는 무엇도 시작하기 어려움을 토로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는 좀더 괴테라는 벽 속에서 튀어 나왔어야 했다. 그 벽 속에 그가 열 수 있는 문을 만들었어야 했다. 그의 생에, 괴테라는 벽 속에서 문을 만들지 못하였다는 점, 그 자신이 문을 여는 주체가 되지 못했다는 점이 매우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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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살아가겠구나!

 

 ■ 고병권에 대한......

 

 책을 읽다가 문득, 생각했다. 그는 잘 살아가겠구나…. 그렇겠구나.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존재함을 과시하듯 좀 멀리 사는 이웃 사촌 덕분에 나는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분명 그것은 질투와 부러움의 배아픔은 아니었다. 다만……좀 서글퍼졌을 뿐.

  삶의 온갖 어려움이 내게 기댈 때 우리는 철학자가 되어 간다. 그리고 철학은 진리를 찾는 것이라 말하는 만큼 삶에 대한 길잡이가 되어 주노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삶의 복잡성이 그에게는 명쾌한 논제로 풀리지 않을까. 철학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그의 일상이 철학적이기에 또한 단순 이론적인 떠벌임으로 머물지 않기에, 아주 편안하고 행복해 보이기에 비록 피상적으로 엿보는 그의 삶을 환하게 하고 있었다. 그의 글을 읽어 가면서 느낀 자기 연민이 나의 철학적 지식의 모자람에 대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지식이 삶을 더욱 더 명확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지만 삶의 혼란을 명쾌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의 철학적 지식이 그의 삶을 보다 더 밝은 곳으로 이끌고 있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별로 흔들려 보지 않았을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결코 선한 거짓말도 해보지 않았을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조용하고 담백한 얼굴의 사진을 쳐다보며 나는 그에게 묻고 있었다.

  어떻게 세상을 살고 있으신가요.

 

   그에 관한 객관적인 자료는 그가 그동안 쓴 저서와 그의 학력이 전부였다. 그것이 그의 삶을 말해주는, 아니 이 세상에서 특히 우리나라에서 개인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것은 직업과 학력이란 것을 알기에 뭐, 이 정도면 다 알았지 싶다. 다시 보니 그는 철학 전공자가 아니었다. 학부는 화학이었고 대학원에서는 사회학을 공부했다. 그러니까, 철학은 그의 관심사였던가. 아니, 철학이라고 하기에도 그렇지 않은가. 그는 니체에 관한 논문을 썼고 니체에 관한 책들을 썼다. 사람들은 그를 니체 전문가라 말하고 그는, 자신을 철학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어쨌든 그는 수십년 동안을 재야연구소에 머물며 연구하고 강의해 왔다. 그가 오래 도록 활동하고 있는 연구공동체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는 추장, 이른바 공동대표를 맡기도 했다. 그곳에서 그는 니체뿐만 아니라 마르크스, 스피노자, 들뢰즈 등의 철학을 공부했고,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에 대해서도 글을 써서 공저와 번역서를 포함한 그의 저서는 25권이 넘는다.

   저자 고병권은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이었다. 초3때 보이스카우트 캠프에 가고 싶었으나 어머니가 허락하지 않았는데, 그의 어머니는 거기에 내는 돈이 부담되기도 하고 꼭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듯하지만, 어린 그는 길에서 구르며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그 캠프에 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는 어릴 적 야구를 좋아했다. 그가 초등학교 5학년일 때 우리나라에 처음 야구가 생겼고 전남 출신인 그는 해태 타이거즈 팬이었다. 그가 야구를 좋아하는 만큼 그는 야구와 관련된 모든 기록들을 찾아 읽었다. 친구들 앞에서 아는 척하기 위해 정말 공부를 많이 한 것인데, 초등학생임에도 어른들이 보는 신문, 잡지, 책을 가리지 않고 읽었다.

서른 넘어서는 인라인스케이트를 배웠다. 친구들과 한강시민공원에서 인라인을 타다 한남대교 근처에서 돌멩이에 바퀴가 걸리며 쓰러진 적이 있다. 머리에 피가 흐르고 얼굴이 부어 오른 채 공사용 철재 밑에서 기어 나왔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곳에 철재가 없었으면 한강에 빠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사고 후 인라인을 그만뒀단. 같이 배운 그의 친구들은 지금 인라인에 고수가 되어 있다고.

   성인이 되어 대부분을 재야연구소에서 보낸 그는 학부 4년, 석사 2년, 박사 2년의 기간, 8년을 대학에 적을 두고 공부했고 15년 동안 대학 언저리를 맴돌았지만 대학이 싫단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대학 강의를 가급적 하지 않으려 한다. 이유는,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먹고 사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니 그나마 그거라도 해야 할 것인데 줄이는 이유는 다행히 강의를 줄여도 먹고살 수 있는 공동체적 기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불쾌한 기억 때문에 그는 강의를 줄이고 있다 한다. 6-7년 전쯤 교양과목 첫 시간에 강의 계획서를 나눠주며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는 시간에 맨 뒷줄에 앉은 세 명이 가방을 책상에 올려놓고 엎드렸다. 그는 첫 시간이고 강의 시작하기 전이라 무시할까하는 생각에 그대로 두었다가 강의 내내 신경이 쓰여 결국 바로 앉으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이래도 다 들려요.” 그때 그는 화가 났고 그 자리에서 강의를 위해 서 있어야 하는 것이 서글펐다고 한다. 그래서 그 이후로 강의를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이 노력은 대학 강의를 말한다. 대학이라는 곳에 들어와 비싼 등록금을 내고서 공부하는 이들의 열정이나 태도에 대해 그는 실망하지만 결코 강의 자체에 대해 회의를 느낀 것은 아니다. 여전히 그는 대학이 아닌 곳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수유너머, 교도소나 야학에서 강의를 지속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대학에서 강의하는 것보다 더욱 많은 느낌을 가진다.

   그가 강의를 하게 하는 토대인 연구소 수유너머는 연구하는 이들이 모인 공동체다. 그는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살아왔고 살아갈 것이다. 그가 여기서 공동대표를 맡았기에 공동대표는 추장이라 부르기에 그는 ‘고추장’이라 불린다. 그는 이 공간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을 동료들에게 감사하며 행복해하고 있다. 결코 혼자서 행복할 수 없다는 친구들과 함께여서 행복하다는 그의 행복론은 공동체 연구공간인 수유너머의 삶에서 터득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또한 자신에게 끊임없이 삶에 대한 철학과 정치와 앎의 가치를 되묻도록 해준 이들에게 감사하며 사유하고 행동하기 위해 여전히 연구하고 강의하며 살아가고 있다.

    

참고 자료

 

•고병권, 생각한다는 것, 너머학교, 2010.

•고병권, 살아가겠다, 삶창, 2014.

•니체는 자신을 어떻게 변신시켰는가, 오마이뉴스, 2003.2.27

•뉴 파워라이터, 수유너머R 연구원 고병권, 경향신문 인터뷰, 2014.2.17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254&contents_id=57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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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비디우스의 네 시대



 변신이야기의 작가, 오비디우스에 대해여


  변신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작가에 휘둘린 나는 그의 언어를 따라가고 그가 표현해 낸 세계 속에서 한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부랴부랴 이러한 세계를 그려내는 작가의 실제적 모습을 찾아본다. 나름 머릿속에 그려지는 오비디우스의 자신감 넘치고 유려한 언변은 그의 발걸음마저 유쾌하고 활달했을 것이라 느끼게 한다. 바닥을 치고 끌고 가는 무거움과 진중함이 아니라 발뒤꿈치를 들고 엉덩이마저 약간 흔들며 걸어가는 모습이랄까. 기사 가문에서 태어나 관리직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는 남성의 발걸음으로는 어색하지 않으냐 할 지 모르나 내게 그 발걸음은 오비디우스의 언변에서 느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쾌활함과 유쾌함 속에 본질적으로 스며있는 경박함이 코믹스럽기까지 하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이미지는 유배지에서 쓸쓸히 생을 보내는 그의 모습에서도 지워지지가 않으니 그에 대한 첫 이미지가 너무나 각인된 탓이다. 명확히 알려지지 않은 채 여러 갈래로 나오는 추방 원인에 대한 이야기들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유배지에서 애타게 권력자에게 띄우는 그의 시와 서한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그 스스로에게는 피말리는 생존의 문제였겠지만) 변신이야기의 종결이 결국 권력자에게 띄우는 아부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수천 년이 지나 여러 가지 떠도는 이야기들로만 그의 생애를 접한 나이기에 그 세월 동안의 오비디우스의 고통, 슬픔, 분노, 억울함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 내가 어찌 그것을 가늠한다 할 수 있으랴. 다만, 욕심에 그의 말년이 좀더 당당하고 덤덤했기를 바라는 것이다. 한 시대를 ‘오비디우스의 시대’라 칭송받던 그이다. 정말로 그의 추방 이유가 <사랑의 기술>에서 나타난 사랑에 대한 묘사때문이라면 후대뿐만이 아니라 당대에도 뛰어난 문학적인 역량을 칭송 받던 그이기에 <비가>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내가 잘못했소’, ‘다시는 그러지 않겠소’라며 아우구스투스에게 돌려보내달라고 애원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변신이야기>의 끝을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치는 찬가로 둔갑시키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하는 아쉬움이다. 그것이 작가적 자존심 아니겠는가.


1) 황금시대 - 그의 문학은 봄이었다   


 오비디우스는 호메로스, 3대 비극시인인 소포클레스・아이스퀼로스・에우리피데스, 베르길리우스와 더불어 로마 시대를 넘어 중세와 르네상스, 현대에 이르기까지 대표적인 작가로서 명성을 드날리고 있다. 루드빅 트라우베라는 학자는 서양의 12~13세기는 오비디우스의 시대라 불릴 만큼 오비디우스의 영향력이 강렬했다고 얘기할 정도이다. 예술가들이 당대에는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후대에 이르러서야 칭송받는 것과 달리 오비디우스는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로마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시인이었고 그가 죽고 난 후에는 홀로 로마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시인이 되기도 했다.

 그가 시인으로서 금방 명성을 얻었다. 그의 탁원한 묘사력과 수사학이 그의 작품에 녹아 있으며 그의 작품은 상상력과 풍부한 독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로마신화 뿐만 아니라 융을 비롯한 많은 작가와 화가, 예술가와 인문학자들이 오비디우스의 작품으로부터 영감을 얻고 그들 작품에 인용하거나 새로운 창작을 하기도 했다.


2) 은의 시대 - 계절이 생겨나 집을 만들다


 사투르누스가 암흑의 타르타로스에 갇히고 세상의 지배권이 유피테르의 손으로 넘어가면서 계절이 생기고 인간들은 집으로 들어가고 곡식을 뿌렸다. 오비디우스는 이 시대를 은의 시대라 말한다. 오비디우스는 자기의 계절을 만들어 집에 정착을 했을까.

 그는 이탈리아 펠리그니의 술모의 기사 가문에서 태어나 나름 유복한 생활을 했다. 대다수의 시인들이 아우구스투스로부터 경제적 후원을 받던 것과 달리 안정된 기반에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의 어린 시절은 아버지의 뜻에 충실했다. 아버지의 바람대로 아테네로 유학하여 웅변술의 대가였던 아우렐리우스 푸스쿠스와 포르키우스 라트로에게서 수사학과 법률 공부를 했다. 관리가 되기 위한 공부였고 실제로 관리생활도 조금은 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식이 아버지를 이기는 시간이 오는 법, 그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결국 관리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그가 하고 싶은 작품을 쓰는 것을 선택한다. 물론, 지금과 마찬가지로 정치가, 관료가 되는 것이 안정된 생활과 명예를 주는 직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로마는 문학을 핍박했던 시대가 아니라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팍스 로마나’가 꽃피던 시절이다. 화려한 문화예술의 번영은 현실적인 여건에 구애받지 않고 문학적 재능을 펼칠 수 있었다. 그의 아내 역시 유명한 여류 시인인 술피키아라고 한다.

 이에 대한 개인적인 기록은 찾아보기 어려우나 그는 세 번 결혼을 했고 두 번 이혼을 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이혼이 어떤 인식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술피키아가 그의 마지막 부인이라는 것만 전한다. 그리고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딸었고 손자들을 둔 것으로만 알려졌다. 술피키아는 그처럼 문인 보호자인 메살라의 식객이었고 그가 유배로 인해 고통받을 때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주었다 한다.


3) 청동의 시대 - 무기를 쥐었으나 범죄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비디우스의 문학적 재능을 주목한 사람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이다. 그는 시인이자 장군으로 당시 가난한 시인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경제적 후원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오비디우스는 자신이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었기에 당대 아우구스투스로부터 경제적 후원을 받는 다른 작가들과는 그 작품의 경향에서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오비디우스의 작품은 연애와 사랑을 다루고 있으며 그 경향도 상당히 자유스러운 연애를 주창했다는 것이다.


4) 철의 시대 - 오로지 기만과 계략과 음모와 폭력과 저주받을 탐욕이 들어찼다


 철의 시대에 인간은 순결, 정직, 성실성 같은 덕목을 기피하고 오로지 기만과 부실(不實)과 배반과 폭력과 탐욕만을 좇았다. 기간테스들이 신들에게 도전하자 유피테르는 대홍수를 내려 모든 인간들을 죽게 한다. 신실한 노부부 데우칼리온과 퓌라만 살아남아, 이들이 던진 돌에서 인간들이 다시 생겨난다. 철의 시대의 이 모양은 오비디우스가 겪은 말년의 사건과 유사하다. 이 때의 오비디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입장에서 보건대 황제가 내린 율리아법을 무시하고 오로지 기만을 일삼으며 황제에게 도전했다. 그리하여 황제는 그에게 추방령을 내리고 그의 작품 역시 외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오비디우스는 유배지에서도 그가 가진 필력으로 끊임없이 작품을 쏟아내어 후대에 이르러서도 그의 명성을 이어나갔다.


▷ 이 도시를 떠나라


 추방이다. 원로원 재판이나 다른 정식 재판 절차는 없었다. 오로지 왕,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에 의해 집행되었고 그 희생자는 오비디우스였다.

 로마로부터 멀리 떨어진 토미스, 지금의 루마니아에서 10여 년을 보내던 그는 귀향을 꿈꾸다 사라져갔다. 그곳의 야만인들 사이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비참하고 쓸쓸한 만년을 보냈다고도 하고 나름 적응을 잘했다고도 전한다. 오비디우스의 시신 매장 장소는 정확이 알 수 없으나 토미스 인근 도시 카나라로 추정된다고 하다. 루마니아의 코스탄차 광장에 오비디우스 동상이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아우구스투스의 이 추방원인은 아우구스투스가 율리아 법을 제정한 그 시기, 지나치게 외설적으로 표현한 그의 시 때문이라고 알려졌다. 윤리적인 문란을 바로잡으려는 황제에게 이러한 금서를 작성한 오비디우스는 당연히 죄를 물어야 할 것이었다. 그렇기에 금서를 작성한 오비디우스는 그의 작품의 경향 때문에 추방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추방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론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오비디우스는 끊임없이 황제에게 자비와 애정을 갈구하였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는 시들을 쓰고, 아우구스투스의 건국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변신이야기>를 쓰며 로마로 되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노력과 염원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그를 다시 찾지 않았고 추방당한 오비디우스는 누구도 그를 아는 체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기에 유배지에서 10년을 보내다 혼자 죽어갔다고 전해진다.


▷ 네 작품도 함께 떠나라


 그러면 표면적으로 추방의 원인이 된 그의 작품, <사랑의 기술>은 어떠한 내용들을 품고 있는가. 오비디우스의 작품의 전반적인 경향이 ‘사랑’을 다루고 있다. 오비디우스는 주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랑을 이야기했다. 그 사랑의 시는 고귀하다거나 진정성보다는 ‘유혹’과 ‘연애’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초기 작품인 <사랑도 가지가지>나 <여류편지>에서도 여성을 중심으로 한 연애의 노래나 편지를 담고 있는데 상당히 자유로운 연애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주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랑’을 이야기 했고, 사랑에 대한 시를 많이 썼다.  그는 사랑의 고귀함이나 사랑에 대한 진정성 같은 것 보다는 사랑의 ‘유혹’에 대한 부분에 중점을 두어 작품을 써내려 갔다. 율리아간통법은 간통한 자는 서로 다른 섬에 추방하고 재산의 일부를 몰수하며 아버지는 간통한 딸과 상대를 죽일 수 있는 내용의 법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러한 법을 제정하면서 당시 보수적이고 엄격한 기강을 세우고자 했다고 전해진다.


"여자의 남편을 네 편으로 만들려고 애를 써라. 그녀의 남편과 친구가 되면 너와 그녀의 관계에서도 손해보다는 이득이 많이 생길 것이다. 술자리에서 제비를 뽑아 네가 마실 차례가 되었어도 그에게 양보하라. 네가 먼저 받은 화관도 그의 머리에 씌워주라. 신분이 너보다 못하든 같은 개의치 마라, 그가 모든 일을 항상 너보다 먼저 하도록 하라, 대화에서 발언할 기회도 그에게 먼저 양보하라“ - 사랑의 기술


 그러나 위에서처럼 사랑이 기술은 자유분방한 연애를 다루며 마치 아우구스투스의 이 법을 조롱하듯이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그 내용 역시 연애의 기술을 알려주지만 실제로는 간통을 부추기는 말들을 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추방의 원인으로 지목된 이 책은 법 제정 이전부터 발표되었으니 오비디우스의 추방의 이유에 대한 논란이 가속화된 건 당연할 지 모른다.


▷ 유배지에서 보내는 편지


 그는 추방당한 뒤, <비가>와 <흑해로부터의 편지>를 쓰게 되는데 여기에는 변방으로 유배된 시인의 불행과 도시에 대한 귀환을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끝내 귀국은 허락되지 않았다.

 이 책에서 그 스스로 추방의 원인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비가>에서 자신의 추방은 ‘시와 실수’ 때문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 중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살인보다 더 나쁘고, ‘시’보다 더 해롭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신의 이 잘못은 대해서는 누구도 알고 있는 문제이지만 아우구스투스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언급하지 않겠노라 말하고 있다. 그는 <비가>에서 발생한 악재들 중 일부는 자신과 더불어 소멸할 것이라며 본인 스스로 그것을 감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모든 비밀들을 다 얘기해왔던 옛 친구에게조차 자신을 파멸시킨 그 비밀에 대해서만은 함구했다는 오비디우스는 그 자신의 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간단치도 안전하지도 않은 일이라면서 자신이 입은 상처의 성격에 대해서나 원인에 대해서 묻지 말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러한 침묵이 사람들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부추기는 요인이 되어 버린다.

  그리하여 추론된 이야기 중의 하나는 오비디우스가 유배될 당시 로마 황실에서는 차기 대권과 관련하여 암투가 일어나는 과정에서 오비디우스가 보아서는 안되는 아우구스투스의 외손녀 율리아의 간통 현장을 우연히 목격했거나, 혹은 아우구스투스 자신이 황제 음모에 간접적으로 연루되었다거나, 율리아와 연애를 일으켰다고 보는 추론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황실 내부의 수치스런 사건을 목격했다고 유배를 당한 것은 설득력이 떨어져 정치적 음모에 그 자신이 가담한 것이 아니냐고 하기도 한다. 특히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은 티베리우스 황제가 오비디우스의 사면 복권 요청을 묵살하고 그를 로마로 다시 불러들이지 않은 것도 이런 주장에 힘을 보태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자주 거론되는 것은 시에서 표현하고 있듯이 황제의 공공연한 왕실 위상을 세우는 데 애를 쓰는 있음에도 공공연히 오비디우스가 황제의 손녀 율리아와 연애를 일삼고 황제를 조롱하였다는 것이다.

 ㅊ어느 이야기가 정확한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하진 않다. 그저 매우 궁금할 뿐이다. 다만, 황제의 근엄한 사회분위기 조성에도 불구하고 자유분방한 영혼으로 당 시대를 살았던 오비디우스가 있었고, 그의 작품이 있었고, 오늘날까지 읽혀지고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참고 자료

•오비디우스, 사랑의 기술

•최혜영, 오비디우스 추방 원인과 언론 자유의 한계, 역사학보, Vol.172, No.0, Startpage 249, Endpage 278, Totalpage 30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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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신화 조셉 캠벨



조셉 캠벨[Joseph John Campbell] 에 대하여


금주법의 시대, 술을 만들어 먹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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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e as a young man at the University of Paris (1928)

Working on A Skeleton Key to Finnegans Wake (1944)

At home in Hawaii (1985)

 

At the National Arts Club receiving Medal of Honor (1985)

 


사람이 어찌할 바를 모를 때에는 정말로 어찌할 수 없다. 내겐 아무런 철학도 없었다.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무슨 영문인지 우리는 함께 존 듀이를 공부했다. 카멜 도서관에서 나는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두 권짜리 『서구의 몰락』을 꺼내 들었는데, 이런, 세상에! 거기 적힌 내용은 벼락과도 같았다. 슈펭글러는 말했다. “젊은이여, 만약 그대가 미래의 세계에 있고 싶다면, 자신의 그림붓과 시 쓰는 펜일랑 선반 위에 얹어 두고, 멍키 스패너나 법전을 집어 들어라.” 나는 스타인벡에게 말했다. “저기요, 이것 좀 한번 읽어 보세요.” 나는 책의 제1권을 다 읽은 다음에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잠시 후에 내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다. “아, 나는 이 책 절대 못 보겠는걸. 아, 내 예술은 어쩌나.” 그는 거의 2주 동안이나 한방 먹은 사람처럼 넋이 나가 좀처럼 글을 쓰지 못했다.

        - 신화와 인생, p92~93 -


   

   캠벨이 말하는 '아무런 철학도 없었다.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라는 말이 한편으론 미심쩍긴 하지만 가만히의 생을 들여다보면(물론, 그렇다고 그의 생을 충분히 알 것 같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지? 라는 말이 나오려 한다. 그의 생을 조금 들여다보기 전에는 그는 그는 샌님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잘 자란 가정에서 소위 사회적인 지위를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나아가는 청년의 모습. 일견 반듯하고 이성적인듯하지만 그것보다는 좀 차갑고...

  그러나 내가 보게 되는 캠벨은 자유주의자적 기질이 다분하고 인생에 대해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유쾌하고 낙천적인 기질이 다분한 사람이다. 위트가 있고 경쾌함이 그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느낌이다.


 슈펭글러의 책을 읽은 것이야말로 내겐 중요한 경험이었기 때문에, 나는 에드에게 이렇게 말했다. “있잖아요, 에드.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지금껏 평생 삶에 대해 ‘아니’라고 말해 왔는데, 이제부터는 ‘그래’라고 말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그가 말했다. “그래, 근데 그렇게 하려면 술에 취해야 되니까 일단 파티를 열자고.” 그 당시는 대공황의 시대일뿐만 아니라 금주법의 시대이기도 했다.  -신화와 인생, 93.


    금주법의 시대, 신나게 술을 만들어 먹는  모습을 상상하면 그의 그 기질에 동참하고프다. 주위 사람도 같은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해줄 듯하다. 더불어 신화에 대해 깊이있는 이야기도 나눌 수 있고 말이다. 그래서 그가 없는 것이 참 안타깝다.


   캠벨은 미국인이다. 뉴욕에서 태어났고 게다가 상위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다. 가톨릭 가정에서 자라 부모님의 지원과 사랑을 받고 자랐다. 그의 긍정성은 어릴 적부터 이런 포용적 가정에서 자란 이유도 있을 듯 보인다. 특히 그는 아버지와 함께 미국자연사박물관을 구경갔다가 아메리칸 인디언에 대해 매료된다. 이후 인디언에 관한 신화와 민담들을 섭렵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신화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공부하던 그는 14세 때에는 병으로 집안에 머물며 자연과학을 공부하였고 대학에서도 생물학과 수학을 전공하였다.



참고 자료

•신화와 인생, 갈라파고스, 2009.

•신화의 이미지, 살림, 2006.

•신화의힘, 이끌리오, 2003

•조셉캠밸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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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전환’이 나를 스토커로 만들다



How to Live 갈림길에서 삶을 묻다의 저자

윌리엄 브리지스



■ ‘가장 영향력 있는’???


  세계적인 유력 일간지 중의 하나로 꼽히는 『월스트리트 저널』은 기업과 금융관계 기사 보도를 1차적 목적으로 창간한 신문이다. 미국 뉴욕시에서 발행되는 이 신문은 정확한 보도와 넓은 취재범위, 작은 것에 대해서도 세심한 취재가 신문의 호평과 성공을 이끌고 있다. 이 신문은 자주 ‘가장 영향력 있는’ 시리즈를 선정한다. ‘가장 영향력 있는’ 리더십 전문가, ‘가장 영향력 있는’ 경영사상가,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기업인, ‘가장 영향력 있는’ 비즈니스 철학자 등등……. 그리고, ‘가장 영향력 있는’ 컨설턴트???

  기업과 금융 쪽에 관심이 별로 없기에 이런 주제에 흥미를 갖지도 못하고 너무 자주 월스트리즈 저널발 ‘가장 영향력 있는’ ○○인 리스트를 들어왔기에 여기 10인의 컨설턴트라는 글에도 별로 놀라움을 가지지 않은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나의 관심이었다. 나의 머리가 얼마나 따로 놀았는가를 알려주는 것은, 분명 아내가 사망했다는 글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진을 보고 순간적으로 ‘남자야?’라고 했다는 점이다.

  어느 때는 작가 소개나 책의 소개에 내용이 아닌 이러한 외형적인 수식어와 홍보가 글을 읽는데 방해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읽기도 전에 놀라야 하나? 다른 사람들은 다 놀라워하는데 내 맘에 안들면 그만큼 내가 부족한 건가? 따위의 생각도 들기도 하고 말이다. 반면, 당연 그렇게 대단한 사람의 생각을 읽게 된다는 데 대한 기대도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저러한 수식어로 홍보된 이 책은 내게 기대에 대한 충족과 만족을 줄 것인가, 과도한 홍보만도 못한 감흥을 줄 것인가!?


■ 그의 ‘전환’이 나를 스토커로 만들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전환’의 모든 것을 아내와의 사별로 이야기한다. 그리하여 나는 제법 일찍이도 아내와 사별했나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무려 37년간이나 아내와 함께 했고 황혼 무렵의 아내와의 사별은 충분히 충격적이고 쓸쓸하겠거니 했다. 그러다 어느 글에선가 ‘아내와 살고 있다’라는 글을 보고 내 머리가 멈춰버렸다. 이것이 무언가. 분명 아내의 사망으로 쓸쓸함과 인생의 전환을 주구장창 나열하던 상황에 그 무슨 아내와 함께 살고 있다는 말인가. 그 때부터 쓸데없이 나는 이 사람의 스토커가 되어 기록을 찾게 되었다. 저놈의 ‘영향력 있는’이라는 조사 때부터 탐탁치않은 마음이 폭발한 것이다. 도대체 이 사람의 기록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 거야. 겨우 위키피디아에서 작년에 사망했다는 것만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나이 79세. 잠시 경건한 마음으로 애도하고 다시 뒤적였다. 정말, 아내가 죽고 ‘전환’을 열렬히 주창하더니, 새로운 아내로 ‘전환’한 것인가?

  아내와의 사별이 자신의 인생에서 ‘전환’에 이르게 되는 그 모든 이야기들이 그의 재혼이야기로 옮겨가면서 이 ‘변화와 전환’에 관한 개념과 이야기는 지극히 윌리엄 브리지스의 지극히 개인사적인 결혼과 재혼이야기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는 아내와 사별하기 전에도 충분히 ‘전환’에 대한 개념을 강조하고 이야기를 하던 컨설턴트였다. 왜 갑자기 ‘전환’에 대한 그의 논점이, 아니 그에 대한 설명이 개인사적으로 흘러가며 변하게 되었을까. 물론 나는 그의 다른 책을 읽어보지 않았다. 그러나, 대략의 책 검색을 통해 그가 이 분야로 직업전환을 하면서 가졌던 그의 기본적인 생각, 메시지는 같았다.

  나는 이 책이 왜 그가 재혼을 한 당위성(?), 필연성(?)을 지나치게 알리기 위한 글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는지 모르겠다.


■ 윌리엄 브리지스의 인생 전환


직업 전환 : 영문학 교수 → 변환관리 컨설턴트


 마흔이란 나이는 서양의 남성에게도 흔들리는 시기인 걸까. 저자는 사회에서 사회적인 지위를 충분히 얻은 영문학 교수의 직을 포기하고 새로운 삶의 전환을 이룬다. 자신이 살고 있던 거주지까지 바꿔가며 그가 하고자 한 것은 ‘전환관리’에 관한 컨설턴트였다. 그는 학생들에게 영문학을 가르치는 대신 경쟁 시장에 뛰어들어 기업인들에게, 조직에게, 개인에게 삶의 변화와 전환에 대해 조언하는 일을 진행하게 된다. 그리고, 보란 듯이 성공한다. 그가 이러한 결심을 하고 실행에 옮긴 그때는 그의 나이 마흔이 넘은 때. 그의 삶의 마흔이 지나면서 그의 생에 찾아온 어떠한 흔들림을 그는 잘 이겨내었다.

  분명 영문학 박사로서, 교수로서도 그는 전문직 종사자로서 전문가였다. 그러나, 어느날 문득 ‘변화와 전환’에 관심을 가지고 새로운 일에 몰두하기까지 곧바로 성공이 보장된 길은 아니었다.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그의 저서가 베스트 셀러가 되고 이를 바탕으로 강연과 컨설팅을 더욱 확장하면서 그는 확고하게 이 ‘전환관리’ 분야에서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인생 전환 : 사별, 그리고 재혼


 이쯤되면 이 작가를 부러워할 사람이 많겠다. 아니 부러워할 남자들이 많겠다. 26세에 19세의 아내를 만나 37년간 결혼생활을 했다.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농담이 들어가 있는 진담으로 남편은 아내가 죽으면 울지만 화장실에서 웃는다고 하지 않는가!

 육십이 넘은 나이에 암으로 사망한 아내에 대한 안타까움과 상실감이 없지 않았다고 하진 않겠다만, 어쨌든 그 나이에 너무나 잘 극복하고 19세 연하에게 적극적으로 대시하여 결혼에 성공한다. 과정이야 어떠하든, 그냥 표면적인 상황을 놓고 보자면 참 성공한 인생 아닌가.

  사실,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는 일이 쉽지 않다고 하는데 오랜 세월 함께한(실질적인 갈등도 물론 있었고, 힘들었다고 토로하고 있긴 하지만) 아내가 있었고 그리고 육십이 넘은 적지 않은 나이에 새로운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 또한 약 20년 정도의 생활을 함께 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성공했다. 물론 그는 그의 아내와의 관계가 그렇게 좋지 않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뉴잉글랜드 출신인 자신과 캘리포니아 출신인 아내는 시작부터 하나가 되기 어려웠다고 한다. 미국의, 미국인의 특성을 잘 모르기에 이 차이가 우리나라의 지역적인 편견이 가득한 경상도와 전라도의 관계쯤 되는가 생각해봤다. 이런 지역적인 차이 이외에도 성격적으로도 맞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뻣뻣하고 합리주의자였고,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며 논쟁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그의 아내는 외향적이었고 에너지가 넘치고 카리스마가 있는, 그러나 왠지 모를 그늘이 있는 여자였다고 말한다. 정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다른 부류의 사람, 그것이 그가 말한 아내와의 관계였다.

  또한 그의 아내는 결혼 당시 매우 어린 나이였다. 그리고 성격적으로 맞지 않은 저자와 37년을 사는 동안 한번의 외도경험이 있었다. 저자는 아내의 이 외도를 받아들이지 못해 10년여 동안 제대로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하고 그녀가 위급한 상황에 도움을 청할 때 무시했다고 한다. 나아가, 암으로 사망하는 아내가 죽기 2년 전, 이미 아내와의 관계를 정리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는 구구절절 아내를 잃은 슬픈 남자의 심정을 토로한다.


p90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심정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경험이 매우 특별한 일이라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아내가 죽은 이후로 하루하루는 완전히 텅 빈, 그러나 완전히 꽉 차 있는 시간들이었다. 삶은 공허했지만,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많은 시간 동안 나는 처리해야 할 일들 사이에서 몽유병환자처럼 아무 생각 없이 지냈다. 생각이 너무 마비된 나머지 가끔은 주변에서 무슨 일들이 일어나는지 까맣게 잊고 지내기도 했다. 마치 피노키오가 되어 거대한 고래에게 삼켜진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 어둠 속에서 나는 ‘내 인생’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과 단절한 채 지냈다.

 

p96 사별의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이상한 행동을 한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내가 이런저런 파멸의 징후들을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중요한 것은 이미 깨어진 관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애쓰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해 보려는 나의 마음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의식의 저 깊은 곳에서 나는 온전하게 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놓아버린다는 것은 잡고 있던 것을 놓는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깨어진 관계를 다시 회회할 수 있느냐 없느냐와는 상관없이 길고 긴 탐험의 과정이다.


p98 그때까지 그녀의 존재가 나를 얼마나 성장시켰고 돌아보게 했으며, 좀 더 믿을 수 있게 만들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내의 죽음으로 인해 알게 된 두 번째 사실은, 아내와 처음 만났을 때는 외롭고 고립된 청년이었던 내가 결혼을 통해 성장했다는 것이다. 아내의 죽음으로 오랫동안 알고 있던 단 하나의 친밀한 관계를 맺는 방법을 잃었다. 아내는 천성적으로 세상에 ‘무심하게’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불평하기도 했다. 많은 부분을 아내와 감정적으로 공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항상 우리 주위에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p99 나에게는 그녀의 죽음이 곧 현실의 시간으로 다가온 것처럼 여겨졌다. 나 자신을 반만 믿게 된 상실감은 사랑하는 사람을 갖게 된 유일한 경험이었다. 따라서 아내의 죽음은 우리의 관계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는 능력까지도 없애는 일이었다. 아내의 사랑뿐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능력까지 없애는 일이었다.

      아내가 떠나면서 내가 경험한 외로움과 영원히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는 단 한 사람(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이 죽었다고 느꼈을 때 느낀 치명적인 외로움을 구별하는 데에도 마찬가지로 시간이 필요했다. 아내는 나와 인간을 연결하고 나와 내 자신을 연결해 주는 그 자체였기 때문에 아내를 잃은 것은 처음에는 넓고 무서운 세상에 버려진 채 홀로 모든 것을 막아내야 하는 어린 시절의 환상같이 생각되었다... ‘마치 추방당한 기분이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p100 아내가 죽자, 일상적인 현실에서 느끼고 흥분할 수 있는 연결고리와 단단한 기반을 잃은 것 같았다.


  이렇게 생활한 그이기에 그가 재혼하게 된 것은 확실한 ‘전환’ 아니겠는가. 상실감으로 세상과 단절한 이가 아내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1년 반 정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결혼하기까지 놀라운 전환이다. 특히 두 번째 재혼에서의 적극성은 놀랍다. 그가 말한 성격을 가늠하고 죽은 아내와의 관계를 생각해보면과 18살 연하의 수잔에 대한 사랑과 재혼은 그의 적극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물론 그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의식하고 나이차에 대한 고민도 하고 주저하지만 결국 그녀에게 전화를 걸고 데이트를 하며 나아가지 않았는가. 그토록 상실감이 커서인지, 그는 아내가 죽은 지 1년 반만에 수잔과 재혼한다.


p290 아내의 죽음과 나의 재혼에 연관된 전환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성공적인 전환에 대한 그 어떤 가르침도 따르지 않았다.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싶어 하지만, 정답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우리의 삶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와 같은 인간들이 필요 없는 세계가 되기 때문에, 그 책은 존재 이유를 없앤다. 유일한 존재로 사는 방법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역경의 여정을 지나고 그러면서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이다. 세계와 부딪히며 살면서 자신의 방식으로 살지 않는 것은, 자신의 삶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옷걸이에서 내려져 새로운 코트처럼 입혀지길 기대하면서 옷장에 걸려 있는 밝고 신선한 삶은 없다.

  

   그는 자신의 첫 번째 아내를 용서하는 방법을 발견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마지막 숨을 거두기까지 이것저것 적어 놓은 글을 그녀가 죽자 태워버렸다. 볼 수가 없었노라 이야기했지만....전환이 필요한 시점에 변화를, 전환을 거부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이 책의 주장과 작가의 개인적 경험이 어색하다고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그냥 아내와의 관계에서의 에세이는 에세이대로 그의 경력에 맞는 '전환'에 대한 주제는 분리시켰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묘하게 아내에 대한 반감이 아직 정리되지 않은 듯한 글을 보며, 요즘은 스토리텔링기법이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지만 왜인지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스토리...경험의 내용은 다르고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변화하는지는 물론 개인적인 것이긴 한데, '전환'에 있어 탁월성을 인정받은 것은 그의 경력일까, 아니면 이 책과도 연관이 있을까. 그의 전환에 대한 활동은 40세즈음에 시작되었음을 보면 아내의 사별 이후 '전환'에 대한 각성이 아니라 '전환'에 아내의 이야기를 스토리텔링한 것은 아닌지....이게 중요한가..아무튼, '전환'이 필요한 .그 시기에 전환을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이자! 이것이 그의 메시지다.


참고자료

∙위키피디아 http://en.wikipedia.org/wiki/William_Bridges_(author)

∙윌리엄브리지스 컨설팅 홈페이지 http://www.wmbridges.com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echorental&logNo=110187473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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