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다 프로이트 때문인가?!


정신분석과 문학비평, 김열규 외, 고려원(고려원미디어), 1996.


  이 책의 문제점은 그 모든 정신분석과 문학비평과의 관계와 흥미로운 관점을 맨 마지막, 논문 하나로 잊어먹게 했다는 점이다. 일단 나에겐 그렇다. 여전히 진지하게 읽으며 정신분석과 무의식과 신화비평에 관해 나름 수긍과 비판을 했건만, 이 책의 마지막 글을 읽고선 정신없이 깔깔거린 기억이 있다. 그러고 책을 덮어 잊고 있었는데 언론에 자주 특정 비서관의 이름이 거론되며 여성비하의 시각을 가지고 있으니 업무를 사임해야 한다는 지속된 주장을 보면서 이 책을 떠올렸다. 뭔 연상작용인지는 모르겠다만. 

  이 책은 문학비평의 정신분석학적 방법에 대한 주제로 10명의 학자·교수가 쓴 논문형태의 글을 모은 것이다. 문학비평과 정신분석은 무엇인가에 관한 개관을 시작으로 정신분석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프로이트와 융의 관점이 문학비평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우리나라 문학에서의 정신분석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실제 작품이나 작가를 대상으로 한 비평을 수록하고 있다. 어쩌면 실제 작품을 가지고 하는 비평이 내용을 이해하기 쉽고 흥미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프로이트 이론 아래 놓인 글인데 「한국 현대시의 정신 분석학적 해석」이라는 표제 아래 8편의 현대시를 해석한 마광수 교수의 분석에 계속 물음표를 달고 있다. 1989년 발표한 논문인데 이 글에 대한 수용이 가능한 이유는 정신분석학적 비평으로 충분히 타당한 견해라는 것일까. 이 글을 읽고 난 생각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을 끌어들여 욕망의 분출을 정당화하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이미 전세계적으로 영향력있는 이의 이론이 든든하게 자리하고 있어 이 이론에 ‘의하면, 따르면, 적용하면’으로 방패를 두르고 성적인 욕망의 표현과 생각을 현학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


정신분석 이론은 성욕과 그 사회적 역할의 관계를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언어가 노리는 것이 무엇인가를 해명한다.


  시인 윤동주, 한용운 시에 대한 저항과 일제에 대한 독립 투사의 해석을 주입식으로 받았기에 정신분석 이론으로 해석하는 방법의 괴리가 너무 커서 놀라는 것이 아니다. 시험문제식, 교과서식 해석에 대해서도 질려 있기는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마광수 교수의 해석 역시도 신선하다거나 놀랍다는 느낌보다는 마냥 우습고 억지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근본적으로, 예술은 「욕구의 대상」으로 설명된다. 한 예술가가 현실에서 좌절된 욕구를 환상 속에서 대신 충족시킨 것이 곧 예술이라고 풀이되는 셈이다. 결국, 문학이나 예술은 「욕구 대상 충족의 메커니즘」의 하나로 범주화되는 것이라고 바꾸어서 말할 수 있게 된다. 이럴 경우에, 예술가는 현실의 실패를 환상 속에서 대신 성취하는 사람, 이를테면 「현실의 실패자 그러나 환상의 성취자」로서 그 개성이 설명되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없었다면, 시에 대한 해석이 어떤 식으로 흘러갔을까. 프로이트 이론은 그 영향만큼이나 지나치게 ‘성’에 대한 해석만을 고수하고 있음으로 비판받았다. 마광수 교수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성욕’에 근원을 두는 것을 수용하여 “음양의 이론으로 모든 사물의 이치를 구명하려고 했던 동양인들의 의식구조에는 프로이트의 범성욕주의가 오히려 더 잘 들어맞는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진정으로 예술가적 기질(또는 시인 기질)을 타고난 사람에게 있어, 예술 창작의 근원적 동기는 ‘성욕의 대리배설’에 있다”고, “예술가 특히 시인들이 작품을 쓰는 근원적인 심리적 동기는 ‘유아기로의 퇴행 욕구’에 있다“고 전제한다.


프로이트는 모든 인간의 성욕이 직접 배설될 수 있는 사회란 문명 이전의 사회, 원시적이고 동물적인 사회라고 보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성욕의 억압 없이도, 예술적 대리배설 없이도, 모든 인간의 직접배설이 가능한 문명사회는 가능하다. 성에 대한 우리의 편견과 모든 이데올로기를 없애 버리고 문명 발전의 지표를 오직 “인간의 쾌락”에 둘 때, 미래의 유토피아는 원시 상태로의 복귀가 아닌 진정한 문명 상태로 우리 앞에 다가올 것이다.


  이 글에서 마광수 교수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매저키스트로서의 여성의 심리가 반영된 것이라 해석하고 있다. 왜냐, 꽃이 개나리꽃이 아니라 “진달래꽃”이기 때문이고 “여성 화자가 님과 헤어지더라도 ‘밟히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지막까지 님과의 격렬하고 비정상적인 교합을 꿈꾸는 것이며” “꽃이 되어 님에게 마음껏 밟히고 싶은 심정이나 님에게 일방적으로 버림받는다는 것이나, 모두 다 매저키스트로서의 피학적 변태심리를 충족시켜 그녀를 황홀경에 이르게 해주기 때문”이라고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한다.

  윤동주의 「십자가」에선 배설욕구를 읽는다. 피를 흘리고 싶다는 표현이 시인의 잠재의식속에 숨겨진 배설의 욕구라는 것이다.


사실 윤동주가 살았던 시대만 괴로웠던 것은 아니다. 어두운 현실 상황이라고 해서 본능이 그 작동을 멈추지는 않는다. 이 시를 쓸 당시의 윤동주가 한층 정력이 솟구치는 젊은이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작품을 “성욕의 매저키즘적 대리배설”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욱 많아지는 것이다.


  유치환의 시 <바위>는 페티시즘의 대표적인 예로, 윤동주의 <자화상>은 관음증적 나르시시즘으로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선 매저키즘적 취향을,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에서는 페티시즘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는 성욕의 대리배설 욕구를 읽는다. 이상의 <오감도>를 남녀간 성교를 표현하고 있는 작품으로 정자들의 무한질주라고 해석하고, 김수영의 <폭포>를 “은폐적 대리배설”의 시로 해석한다. “민중적 사디즘, 집단으로서의  군중이 갖고 있는 폭발적 분노의 심층심리적 근원은 성욕이 충족되지 못한 짜증이 뭉쳐져 증오심과 분노로 변하여 화풀이의 대상을 찾게 되는 것”이라고.


김수영의 <폭포>는 분명 풍자적 알레고리의 시로서 성공한 작품이지만, 이 시가 갖고 있는 심층심리적 상징의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김수영 자신은 의식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의 잠재의식 안에는 성적 불만족이 뭉쳐져 있어, 그것이 그 시대의 암울한 상황과 결부되어 이러한 공격적 작품을 쓰게 했는지도 모른다.


  시인들도 미처 알지 못한 무의식을 친절히 알려주는 마광수식 정신분석학적 해석을 보면서 해석의 다양성과 특정 이론의 집착적 적용이 가져오는 지나친 오독과 폐해에 대해 생각했다.

  상담을 받는데 의사든 상담사든 프로이트의 이론을 적용하여 나의 모든 표현과 행동 하나하나에 저렇게 해석을 내린다면 난 그 병원을 당장 뛰쳐나올 것이다. 몰랐던 나의 무의식에 대해 놀랄만한 견해를 알려주어 절대적으로 감사하오 따위의 감정이 들지 않을 것은 분명하며 오히려 상담하는 이의 정신에 대해 의문을 표시할 것이다.

  즐거운 사라. 그래서였을까. 당시에도 나같은 이들이 있어서? 이 작품을 읽어보진 않았다. 읽어보고픈 생각도 없다. 다만 이 작품을 통해서 마광수 교수가 법적제제를 받았고 책은 출판금지 되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아주 옛날인줄 알았는데 1992년이다. 불과 25년 전 우리나라의 의식이 소설책 하나를 수용하지 못했다는 데 놀랐다. 그 당시에도 온갖 외설서적은 난립하고 있던 것으로 아는데 마광수 교수의 작품이 문제시된 이유는 도대체 뭘까. 법무부장관 후보자였던 이는 당시 마광수 작품에 대해 ‘법적폐기물’이란 표현을 썼다. 와설, 음란의 기준이라는 것이 수많은 페이지 속의 몇 개의 문장을 통해 알 수 있는 시각은 얼마만큼일까. 사람들이, 대중이 용인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마음’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인가, 예술작품에 대한 판단을 건드리는 또다른 시각이 특정한 ‘이유’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일들이 너무 많아졌다.

  문학작품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하지만 ‘누가’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그 해석이 수용되느냐, 더 널리 인정되느냐가 발생한다. 그저 특정인이나 미디어의 힘으로 평가가, 인지도가 상승하는 것을 떠나서 문학이 정치적인 이유로 ‘구속’되어야 할 일인가. 문학적 표현과 수사를 글쓴이로 동일시하는 일이 얼만큼 적정한가. 이런 의문이 계속 맴돈다.

  문학적 표현이든 그냥 일상의 말이든 특정한 표현에 휘둘리는 일은 있다. “세상에, 그런 말을 하다니. 용서할 수 없어. 앞으로는 그 사람과는 말하고 싶지 않아” 그런 생각이 드는 일들이. 이럴 때 시간이 지나 이성과 감정의 조화로움을 발휘한 적절한 생각의 정도는, 방향은 어떤 형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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