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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앓다 - 문학은 상처에서 출발하고 상처 위에 존재한다 ㅣ 민음의 비평 5
강유정 지음 / 민음사 / 2016년 6월
평점 :
공통의 상처
타인을 앓다, 강유정, 민음사, 2016.
타인을 앓는 일은, 불쑥 일어난다. 의도하지 않음에도 들이닥치는 감정의 풍랑이다. 그것은 오래도록 가슴에 머물러 종내는 머리를 지배하기도 한다. 가령 외벽 작업 중 사망한 가장의 다섯 아이와 아내, 노모를 향한 모금 행동도 타인을 앓는 일에서 시작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가해자에 대한 분노와 고인과 남겨진 가족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에서 행동으로 이어지는 일은 ‘정’이 많아 일컬어지는 한국인들에게는 더러 볼 수 있는 일인 듯하다. 어쨌든, 그렇다면 이처럼 타인을 앓는다는 것은 사회를 살아가는데 꽤나 중요한 힘이다.
평론은 문학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그냥 그 자체로 서 있다. 대체로 서두에 시작하는 온갖 학자들의 명언이나 문구들을 보면 늘 특정한 이의 이름과 문구가 인용되고 평론들 마다마다에 사용된다. 그러니, 문학을 읽는 방법이 학자나 타인의 문구를 통한 해설이 되어 평론은 문학을 매개로 한 비평가들의 세계로 느껴질 때가 많다. 그래도 제법의 학자들을 평론을 통해 알게 되었으니 비평이 준 장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평론에서 사용하는 용어나 언어의 틀은, 오히려 소설 또는 시에 대한 이해를 저 멀리로 보내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굳이 비평집을 찾아 읽은 것은 오로지 제목 [타인을 앓다] 때문이다.
이 제목에서 전하는 바를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민이라 여겼기에 어떤 학자들의 말들이 줄줄줄 이어진대도 견디어 볼 수 있다 생각했는데 굳이 견딜 필요가 없었다. 쉽고 평이하게 소설들을 비평하고 있어서 저자가 말하는 관점에 유의해서 소설을 생각해보는 재미를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이 비평집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1부에서는 문학과 사회비평을 다루고 있다. 소설의 재미는 무엇인지, 당대 소설의 주요 서사 소재지, 출판시장의 기획형 상품, 청소년 소설 장르란 무엇인지, S.F라는 장르 등에 대해 깊이 있는 통찰과 의견을 건넨다. 2부는 2000년대 이후의 작품을 중심으로 비평을 서술하고 있다. 그렇기에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젊은 작가들에 대한 비평을 확인할 수 있다.
31편의 평론을 관통하는 기본적인 바탕은 제목이 함의하고 있는 것처럼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민이다. 생각해보면 어떤 소설을 읽었을 때 ‘좋다, 재미있다’를 적극적으로 말할 때는 등장인물, 특히 주인공에게 공감했을 때이다. 인물에 공감하지 못하면 소설에 대한 평가가 박해지는 듯하다. 책제목이 [타인을 앓다]인 것에 대해 저자 강유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타인을 앓는 것, 문학을 읽는 것과 문학을 하는 것의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믿는다. 타인을 앓는 것, 깊은 공감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 그게 바로 미련하지만 두터운 문학의 길일 것이다. 이해하고자 애쓰는 내가 먼 곳의 다른 고통과 소통하는 초월적 인식의 공간, 그게 바로 문학의 공간이다.
문학의 공간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점은 수용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소설속 세계는 현실의 반영이라 아무리 외면하고픈 사건의 연속일지라도 무엇 하나라도 이해의 고리를 발견하고픈 욕구가 있다. 저자는 최근의 젊은 작가들에게서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성적 도덕’이란 동시대성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우리 근현대사의 흐름에 문학은 그 궤를 같이 했다. 그 역사를 증언하고 기록하는 것을 넘어 알지 못했던 이들의 사연들을 재현하며 소설속 인물이나 그것을 읽는 독자 모두 상처를 치유하기를, 고통을 내 고통처럼 여기기를 바라는 작품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저자는 타인에 대한 공감을 위한 소설은 기존과는 다른 플롯과 서술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시대정신의 구현’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나’라는 특정한 소설적 주체가 아닌 불투명한 타인들의 고통을 목격하고 공감하는 자가 타인을 앓는 윤리적 작가이고 시대의 보편적 감정을 목격하고 재현하는 것이 바로 지금, 여기 소설의 존재 이유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다면 지금, 시대의 보편적 감정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이 필요하다. 저자는 최근 젊은 작가들의 소설이 “그냥”이라는 단어 사용과 인물이 추상적이라고 지적한다. 물론 인물의 직업도 명확하지 않다는 이 상황을 20대의 독특한 세대적 고민이거나 서사적 관점의 부재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리하여 이들의 소설에서는 부정과 무위와 냉소와 욕망의 부재가 자리잡고 있다고 파악한다.
최근의 시대를 관통하는 공통의 관점이 없다는 것이 소설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50년대 소설 속 인물들은 한국 전쟁과 절대적 가난, 1960년대 대학생들은 4·19 세대의 정서적 박탈감과 가난, 1980년대는 민주화운동이라는 맥락에서 인물들을 이해할 수 있다면 2000년대 이후의 20대 작가들의 작품에서는 이러한 면들을 발견할 수 없다. 마냥 사용되는 “그냥”과 “습관”이라는 방관의 태도에서 무엇을 읽어야 하는가란 질문을 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시대를 관통하는 어떠한 ‘정신’ ‘상처’가 없다는 것이 오히려 작가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 된다. 작가들에게 동시대의 상처없음이 결핍이 된다. 왜냐하면 문학은 타인을 공감하는 것, 그러니까 필연적으로 ‘상처’가 필요하니 말이다. 2000년대 이후의 동시대가 경험하는 상처의 부재가 작가들에게는 긍정의 요소가 될 수 없음이다.
문학은 상처를 필요로 한다(2007년 젊은 작가 대회에서 한유주는 자기 세대의 특징으로 거대 담론, 대문자로 기록된 역사적 상처의 부재를 꼽았다. 그는 공통의 상처가 없는 세대에게, 9·11 테러는 신선한 시적 충격으로 다가왔다는 고백을 덧붙였다). 중심의 상처가 부재하다는 사실에 가벼움의 향락을 느낄 것이라 기대했던 것과 달리 이들은 환부 없는 상처의 곤란을 증언했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공통의 상처를 기억하게 된 것인지 모른다. 세월호라는 상처, 그리고 촛불혁명이라는 벅찬 불빛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상처…. 그러니 이제 동시대가 함께 느끼는 상처를 가졌으니, 활발하게 활동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기대해도 좋으련가. 저자가 지적하는 대로 문학은 상처를 필요로 한다는 것에 공감한다. 상처를 어떻게 풀어가는가는 작가의 역할이다. 거기에서 “타인에 대한 공감”이라는 바탕이 흐른다면 읽는 독자는 더없이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