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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 때는 그렇게 통학버스를 타고 다니는 친구들이 부러웠었다. 회수권이라는 걸 가지고 다녀본 적도 없고 차비라는 걸 받아본 적도 없는 나는 (이렇게 말하니 무슨 기사 딸린 차타고 다녀서 '버스가 너무 타고 싶어요' 하는 부자집 외동딸 모드스럽지만 그건 절대 아니고) 두 발로 뚜벅 뚜벅 걸어 집에서 90도 방향으로 15분 거리에 있는 초등학교, 집에서 60도 방향으로 20분 거리에 있는 중학교, 집에서 30도 방향으로 20분 거리에 있는 고등학교를 나란히 졸업했다. 게다가 대학생 때는 기숙사에서 살게 되는 바람에, '통학'이라는 것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 때 나는 통학이라는 건 매우 낭만적이고 신나는 게 아닐까, 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어리석었다. 통학대신 통근이라는 것을 하게 된 나는 아침마다 지하철의 놀라운 인파에 몸을 맡기며, 왜 도무지 우리는 이런 짓들을 계속해서 해야만 하는 걸까. 나는 언제까지 이런 지하철을 타고 다녀야 되는 걸까. 꽉꽉 들어찬 인파 속에 쓰러질 것 같은 졸음이 가득한 아침, 피곤이 가득한 밤을 우리나라 최대의 곤란한 코스라는 '사당-강남 코스'와 함께해야 하는 내게 최근 가장 슬픈 뉴스는, 너무 답답해 사람들 내리는 길 비켜줄 겸 잠시 내려 공기 좀 마셔보겠다고 숨을 고르던 방배역사에서 발암물질이 검출됐다는 뉴스였다. 아. 슬픈 지하철 인생이여. 이런 처절한 출퇴근 길을 늘 다니다 보니 나는 저절로 '출퇴근길 빈자리'에 대한 집착을 갖게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지하철에서 노약자석이 비어 있는 현상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수년 전에 있었던 ㅂ모 음료 광고의 영향이 컸으리라. 어떤 사람들은 텅 비어 있는 노약자석을 볼 때마다 우리 사회가 참 아름다운 곳이라는 것을 깨닫는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사실 이런 분위기에서 이 말을 한다는 것은 커밍아웃 수준으로 굉장히 어렵지만,

나, 가끔은 노약자석에 앉았던 적이 있다.

물론 몇가지 원칙이 있다. 그 원칙에 의해 스스로를 약자로 규정할 수 있는 날. (그러니까, 뭐 아픈 날 정도가 되겠다) 그럼에도 세 자리이상의 노약자석이 비어 있어 다른 노약자분이 (특히 노약자임이 티가 나지 않는) 나로 인해 힘들게 서서 갈 일이 없을 상황에서 가끔 노약자석에 앉는다. 물론 이런 상황이 자주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언제였던가. 쓰러질 정도로 피곤했던 날, 죽을 것 같은 얼굴로 문가 기둥에 기대어 허우적대는 나에게 노약자석에 계신 할머니가 자리를 양보하려고 하신 적도 있었다. 쓰러질 정도로 힘들었지만 아픈 건 아니었고, 노약자석이 비어 있지 않았으므로 그 자리에 앉을 수는 없었다. 가장 최근 노약자석에 앉았던 적은 얼마 전 식중독으로 며칠간 고생하던 때였다. 너무 힘들어 텅 비어 있는 노약자석에 앉으면서도 나는 어쩔 수 없이 최대한 자리에 앉아 '나 지금 아파요'의 포스를 폴폴 풍겨줄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나 지금 아파요'의 포스를 풍길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타인의 시선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아, 저런 새파랗게 젊은 녀석이 노약자석에 앉아 가다니. 라는 눈으로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지금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젊은이들이여. 눈치 보지 말고 당당하게 노약자석에 앉자, 뭐 이런 얘기를 하려는 건 당연히 아니다. 다만, 나와 그대가 노약자석에 앉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나 가끔은 노약자석에 앉았다고 당당히 얘기해놓고는 그럴 만한 상황이었다고 번지르르한 변명을 늘어놓을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좀 본질적으로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1. 진정한 노약자를 위한 배려인지
2. 자신의 고결한 도덕성을 유지하고 싶기 때문인지
3. 혹은 타인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인지.

뭐 어느 하나가 단일한 이유로 작용한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사실 나를 두고 생각해보자면, 1번의 이유보다는 2번 혹은 3번의 이유가 더 컸던 것 같다. 노약자가 탈 리가 없을 것 같은 매우 늦은 시간에도 텅 비어 있는 노약자석에 앉지 못하는 이유는 언젠가 탈지 모르는 노약자를 배려하는 마음에서라기보다는 노약자석에 앉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노약자석에 앉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그걸 무심결에 느꼈던 건 아마도 버스를 탔을 때였을 것이다. 나는 한 번도 버스에서 노약자석을 비워둔 채 서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버스보다 지하철을 타는 빈도가 더 높기 때문에 확률적으로 맞닥뜨릴 일이 적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버스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노약자석에 앉아 있다. 나도 버스에서 노약자석에 앉을 때는 상대적으로 마음이 조금 더 편안하다. 그럼에도 노약자석을 피해서 앉는 이유는 노약자를 배려하는 마음이라기보다는 자리를 양보하는 일의 부담으로부터 조금 멀찍이 있고 싶기 때문이었으리라. 만약 그 ㅂ 음료수의 광고가 지하철이 아닌 버스를 배경으로 미디어에 등장했다면, 우리는 같은 현상을 지하철과 버스를 뒤바꾸어 보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내가 졸업한 학교는 'Honor code'라는 것이 존재했고, 그 일환으로 양심시험제도라는 것이 존재했었다. 우리는 그 문화를 우리의 아름다운 문화라고 자랑하고 다녔지만,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그것은 양심에서 기인하는 부분도 없지 않았겠지만, 서로가 서로에 대한 철저한 감시자로 존재했기에 가능한 제도였는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우리 주변의 많은 것들이 이와 비슷하지 않은가.

노약자석에 앉은 젊은이를 바라볼 때의 우리의 시선은 또 얼마나 험악한가. 현재 임신 중인 직장 동료 w대리님은 임신 3개월 정도 됐을 때, 출근길에 너무 힘들어서 배를 쓰다듬으며 ‘아가야, 여기 앉자, 조금만 참아’ 라고 이야기를 하며 노약자석에 앉았다고 한다. 사실 산모가 유산의 위험이 가장 높은 시기는 3개월 전후라고 한다. 그 때가 아기의 조직이 막 형성되는 시기라 가장 힘들다는데, 배가 나오지 않아 그냥 노약자석에 앉게 될 경우 굉장한 눈치를 견디면서 가야 한다고 한다. 그 마음이 편치 않아 차라리 서서 가는 게 더 나을 정도라고 한다. (그 정신적 스트레스가 아이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고보니 노약자석에 앉아 있는 젊은 여성에게 한 노인이 호통을 치자, 그 여성이 항변하듯, 저 임산부에요, 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본 적도 있다. 그래서 몇 년 전엔가, 희망제작소라는 곳에서 임산부 뱃지를 달고 다니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었다. 이런 뱃지를 만들고 달고 다니게 한 것은, 자리를 양보해 주세요, 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노약자석에 앉은 젊은이의 사정을 헤아리기보다는 먼저 험악한 눈초리를 보내고 보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단면이 아닐까. 그런데 또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런 눈초리에는 어떤 도덕적 우월감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노약자석에 앉지 않으니까, 노약자석에 앉는 너보다는 도덕적으로 나은 사람이야, 라는 우월감. 그리고 여기서 비어져나오는 비난 본능. (사실 비난은 타인에 대한 우월감을 확인하려는 본능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으니) 사실 일반적 상황에서 노약자석에 앉지 않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런 작은 경우 하나를 가지고 본인을 짐짓 괜찮은 사람으로 여기며, 이런 것들을 타인의 인성 전체를 평가하는 잣대로 활용하려는 우를 우리는 꽤 자주 범한다. 이 역시 꼭 노약자석만의 이야기는 아닐 수도 있다. 어떤 작은 원칙들을 성실히 지켜나감으로써 스스로의 선함을 규정하면서도 정작 구조 속에서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폭력에 대해서는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우리 안에는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여기서 더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종종 우리가 구석의 노약자석을 노약자들에게 양보하면서, 남은 수많은 자리들은 너무나 당연히 우리의 자리인 양 생각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모든 경우에 그렇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얼마쯤의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는 그런 마음을 갖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얼마 전 노약자석에서 할아버지 몇 분이 싸우는 것을 보았는데, 요는 누가 더 나이가 많은가,였다. 70쯤 된 할아버지가 60대 할아버지께 새파란 것이 노약자석에 앉아 있다고 호통을 치셨고, 60대 할아버지께서는 억울해하시며, 저도 매우 힘들고, 노인이고, 환갑도 지났습니다, 라며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그 자리에서 그 광경을 바라만 보고 있던 우리는 달랑 그 몇 자리 노인에게 내주고는 나머지 자리는 젊고 센 우리들의 것으로 당연히 여기고 있는 사람은 아닌지. 물론 그렇지 않은 순간도 많겠지만,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그런 순간도 있었다. 사실 내가 약자가 아닐 때에는 모든 자리를 노약자석이라 여기는 마음이 더욱 바람직하지 않은가. 지하철 양쪽 구석에 조그맣게 마련된 그 자리를 두고 노인들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만 있다니. 그러면서 그래도 나는 노약자석은 비워두니까 좀 괜찮은 사람이라며 자위하다니, 이건 어째 좀 뭔가 아닌 것이지. 노약자석과 비노약자석을 가르고, 그만큼의 자리 정도는 양보해 놓은 뒤에 우리는 할 바를 다했다며 거기에 머무르는 자신의 도덕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래도 가끔은 꽤 따뜻한 광경을 만날 때가 있다. 얼마 전 출근길 4호선은 평소보다 사람이 조금 더 많았는데, 그 지하철에 키 작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타셨다. 이미 지하철은 만원이고, 노약자석도 꽉 찬 상황. 그런데 할머니는 몸이 불편하셨는지, 할아버지가 매우 안절부절하며 할머니의 자리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꽉 찬 지하철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할아버지를 볼 수도 없었고, 할아버지가 그 사람들의 앞으로 가기도 어려웠거니와, 출근길이었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을 감은 채 잠들어 있었다. 나는 안절부절한 마음이 들었고, 주위를 둘러보니 나처럼 두리번 두리번 안절부절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하지만, 이 안절부절한 사람들은 모두가 서 있는 사람들, 즉 양보할 자기 자리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 때 아저씨 한 분이 앞에 앉은 아가씨에게 상황을 설명했고, 아가씨가 기꺼이 일어나 할머니는 그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순간 지하철에는 안도의 기운이 흘렀다. 나는 분명히 느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많은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그 상황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우리는 한 마음이었던 거야’, 라는 생각을 하며 괜히 좀 든든해하다가 ‘응? 이런 마음 익숙한데?’ 하며 생각하다 보니 이 상황은 얼마 전 다시 봤던 미국의 촉망 받는 젊은 감독 미란다줄라이의 <미앤유앤에브리원>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과 닮아 있었다. 어떤 남자가 딸과 함께 금붕어 한 마리를 사들고 차에 오르는데 차 문을 열며 잠시 금붕어를 차 지붕에 올려둔 것을 깜빡한 채 그 상태로 출발해 버렸다. 이를 다른 운전자가 발견하고는 저 금붕어가 살 수 있는 길은 영원히 그 속도로 달리는 것 뿐이라면서 안타까워한다. 그러던 중 차 위의 금붕어가 기적적으로 다른 운전자의 차 위로 떨어지게 되고, 원래 금붕어 주인이 이 광경을 보게 된다. 그러자 처음에 그것을 발견했던 운전자가 원래의 금붕어 주인과 함께 뒤쪽에 금붕어가 올려져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 달리는 그 차 앞뒤로 붙어 그 차가 계속 그 속도를 유지하며 달릴 수 밖에 없게끔 돕는다. 그러면서 ‘적어도 이 순간 우리는 하나인 거야’ 라는 말을 하는데,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는 약한 존재를 지켜내기 위한 진정성이 느껴져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던 장면이었다.

이 장면을 떠올리며, 노약자석을 둘러싼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며, 내 안에, 우리 안에, 약한 것들을 향한 마음들이 얼마나 순수한가, 때로는 타인의 시선 때문에, 때로는 나 자신의 도덕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짐짓 타인을 배려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러면서 어쩌면 약자일지도 모를 그 누군가에게는 우월성이 가득한 잔혹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건 아닌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다. 물론 가끔은 이렇게 한 마음이 되어 함께 안절부절하고, 함께 안도의 숨을 내쉬기도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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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9-03-06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해보면 노약자석이라는 말도 참 웃기죠? 내가 왠만만하면 어느 자리든 노약자가 탈때 양보하며 일어서는게 진짜 배려일것 같은데... 근데 사람들이 사는게 다들 참 힘든가봐요. 갈수록 그게 잘 안되고 결국 노약자석이라는 것까지 따로 만들어야 하니...

웽스북스 2009-03-07 01:04   좋아요 0 | URL
네. 그런 것 같아요. 사실 저도 가끔 외면하고 싶을 때가 있고. 으흑. 으흑.

전호인 2009-03-06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황에 맞게 융통성 있게 하면 될 것 같아요.
저는 노약자석이 비어 있으면 앉습니다. 그러다가 자리를 찾아오시는 어르신들이 계시면 일어나서 자리를 비워드리곤 합니다. 앉는 사람이 없는 것을 굳이 비워둘 이유는 없다고 보거든요. 앉았다가 대상되는 분이 나타나면 양보(?)하면 되는 거죠. ㅎㅎ

웽스북스 2009-03-07 01:06   좋아요 0 | URL
아. 역시 전호인님. ^-^ 사실 가끔은 비어 있는 노약자석을 볼 때 시민 에너지총량 뭐 이런 게 있다면 지금 낭비되고 있는거야, 이런 생각도 했었어요 그러면서 내가 가서 앉지는 못하고 ㅋ

바이런 2009-03-06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공감되는 글입니다^^ 저는 보통 지하철에 자리가 없으면 노약자석 주변에 서곤하는데 가끔씩 어르신들이 '자리 비니까 앉아가라. 사람들 오면 일어서면 되지' 라고 종종권하곤하세요. 어르신말씀이 맞다는걸 알면서도, 그놈의 시선이 뭔지, '괜찮습니다' 라고 말하고는 스스로 몸을 혹사시키곤 하죠 ㅠㅠ 정말 망할놈의 ㅂㅋㅅ선전이 뭔지 ㅋㅋㅋ 정말 노약자석이라도 자리가 비면 앉고, 노약자석이 아니더래도 양보할 필요가 있으면 기꺼이 자리를 내어드리는 분위기가 왔으면 좋겠어요~

웽스북스 2009-03-07 01:06   좋아요 0 | URL
처음 뵙겠습니다. 고꼬스님. 공감해주셨다니 감사드려요. ㅂㅋㅅ광고의 힘이 정말 대단하죠. 거기에 영향 받는 우리들도 그렇고요.

Alicia 2009-03-06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안에, 우리 안에, 약한 것들을 향한 마음들이 얼마나 순수한가, 때로는 타인의 시선 때문에, 때로는 나 자신의 도덕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짐짓 타인을 배려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러면서 어쩌면 약자일지도 모를 그 누군가에게는 우월성이 가득한 잔혹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건 아닌지,

마음에도 밑줄을 그어봐요- :)

타인의 시선의 감옥,하니깐 갑자기 박정자의 시선은 감옥이라는 책이 생각났어요^^

웽스북스 2009-03-07 01:07   좋아요 0 | URL
시선은 감옥, 제목이 마음에 들어요. 체크체크.

라주미힌 2009-03-06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긴 글 안읽는데 잘 읽었슴당
시선이란 원래 껍데기에 걸려있기 마련이죠...

부평역 아침에 가면 웃겨요..
플랫폼에 4줄씩 서라고 바닥에 적혔있는데.. 그 좁은데에 빡빡하게 들어서 있는 사람들은
2줄로 기라디고 있습니다 -_-;;
3번째 사람의 포지션이 1줄이 되느냐 2줄이 되느냐에 크다란 영향을 끼치잖아요 보통은 2줄이 되어서리 사람은 미어터지는 그곳의 한 가운데는 휑해요... 줄을 선다라는게 1줄이 아니면 웬지 반칙같나봐요;;;

웽스북스 2009-03-07 01:08   좋아요 0 | URL
제 글은 원래 유일하게 가독성이 힘이잖아요. 그런데 사실 좀 애매하긴 해요. 시선도 시선이지만 좀 반칙같기도 하고. 누가 자동으로 정해주면 어떨까, 막 이런 생각도 했었다는. ㅋ 사당역도 마찬가지에요. ㅎㅎㅎ

차좋아 2009-03-06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번 타인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이 보편적이고 결정적인 이유 같아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지하철 좌석 배치의 특수성도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지하철이 버스나 기차와 같이 횡으로 배치 되었다면 나의 부도덕?이 (많은)대중에게 노출되지 않았을테니까요. 다른 대중교통 수단과 비교해 볼 때 지하철 좌석이 개인공간으로서의 안락함이 제일 떨어지죠^^;;
기차를 타보면 좌석표를 갖지 못한 노인분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잖아요. (그런 사람이 없다는게 아니라) 있다하더라도 모든 사람들에게 그 행의가 노출 되지 않는다는 의미도 있구요.

저는 철저히 3번의 이유로 안가요.. 아! 애들을 안고 당당히 가기는 합니다.ㅎㅎ

웽스북스 2009-03-07 01:09   좋아요 0 | URL
크. 향편님다운 덧글. ㅋㅋ 그러고보니 기차에서는 정말 그렇죠. 내가 돈을 더 냈으니 당당한. 그리고 좌석버스에서도 양보하기 쉽지 않아요. 저도 흑.

안젊은이 2009-03-06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긴 글 잘 안 읽는데(2)
전혀 길다고 느껴지지 않게 아주 잘 읽히는 글이, 더불어 내용도 구성도 훌륭합니다.
(추천을 하고 싶지만 외부인이라 자격이 없겠지요..)

웽스북스 2009-03-07 01:10   좋아요 0 | URL
어이쿠. 감사드려요. 추천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왔어요. ^-^
제가 원래 글을 어렵게 쓰는 재주가 없어서 말이죠. 너무 힘이 되는 덧글입니다 ^-^

토깽이민정 2009-03-07 0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있지 원래 2번의 이유에 가까운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지하철생활을 오래하면서 노약자석에 앉는 노인들의 다른면을 보고나니까
2번도 3번도 아닌 '더럽고 치사해서 쳐다도 안본다' 쪽으로 되어버렸어.
웬디가 봤던것 처럼, 노약자석을 놓고 막말이나 고성을 하면서 서로 싸우는 60대 노인과 70대 노인도 있었고, 한번은 노약자석도 아니고 일반석에 앉아있는 고등학생을 훈계하듯이 자리에서 일으켜 세우고는 그 자리에 앉아버리는 할아버지도 봤네.
1호선에 타면 어떤 시간대에는 노약자석이 너무 좁은듯이 느껴지는 시간대가 있잖아. 어떤 공익광고처럼. 딱 그런때였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 할아버지는 오히려 기운이 쌩쌩하고 고등학생은 피곤에 쩌들어서 진짜 지쳐보였는데도 말이지 그 양옆의 할아버지들이 맞장구를 치면서 고등학생을 기어이 자리에서 일으켜 세우더라고. 그거 보니까 정말 질려버렸지. 우리나라 노인분들이 가지고 계신 심리중에 이 나라를 이만큼이라도 먹고 살게 한데는 내가 고생한게 컸지.. 하는 보상심리도 있고, 그동안 너무 고생했던 사람의 그악스러움이 있는 것 같아. 물론 그런것들을 폄하하려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을 하지만.. 정도가 지나친데가 있으니.
미국에서는 나이와는 저언혀 상관없이 그저 처음온 순서대로 앉으니까 공평한것 같긴 하지만 가끔씩은 노약자석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은때가 있어. 너무 민망하리만큼 또 양보라는게 없다보니... 어디서든 너무 극단적이지않고 적당한 해결책이 있으면 좋겠지.

웽스북스 2009-03-12 01:20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모두가 우리의 생각만큼 이상적이지는 않으니까. 물론 나도 그렇지만요. 그런데 미국에서는 어떻게 처음 온 순서대로 앉는게 가능해요? 우와. 그것도 신기해요.

순오기 2009-03-07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름~~ 좋은데요, 의미도 웬디양 글도~ 추천!

웽스북스 2009-03-12 01:20   좋아요 0 | URL
와. 순오기님. 나름 애독자가 되어주세요 ^-^
 



좋아해 마지않는 우리 루시드폴님의 노래 중 '물이 되는 꿈'이라는 제목을 가진 노래가 있습니다. 지난 연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워낙 자주 들었기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그 노래를 듣는데, 노래 중간에 '내가 되는 꿈'이라는 가사가 나오자 마음이 참 새삼스럽게도 콩닥콩닥 신호를 보내는 겁니다. 아. 내가 되는 꿈이라니. 노래의 맥락을 생각해보면 돌이 되는 꿈, 흙이 되는 꿈, 산이 되는 꿈 다음에 나오는 '내가 되는 꿈'은 나로서의 내가 아닌, '강의 절친'이지만 강보다 좀더 작은 '졸졸졸 흐르는 내'가 되는 꿈일 것입니다. 하지만 뭐,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나에게는 이미 나로서의 내가 되는 꿈,이라는 의미로 이 가사가 가슴에 콕 박혀버렸는걸요. 이정도의 오독과 오용은 잘생기고 너그러우신 시대의 훈남 루시드폴님께서는 애교로 살짝 눈감아주실 수 있을 겁니다. 

만약 제가 국민학교(그렇습니다. 국민학교 세대인 것이죠)에 다니던 시절에 "너는 뭐가 되고 싶으니?"라는 선생님의 질문에 "저는 제 자신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답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아마도 성격이 부드러우신 5학년 때의 선생님은 "장난 치지 말고, 잘 생각해보렴"이라 말했을테고, 성격이 거칠었던 4학년 때의 선생님이시라면, "이녀석! 똑바로 말하지 못해?" 하며 군밤을 한 대 먹였을지도 모를 일이죠. 다행인지 불행인지 영악했던 그 시절의 저는 변호사, 스튜어디스 등, 그리 간절하지 않았던, 하지만 그럴듯한 것들을 꿈이라는 이름으로 치환하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 누구도 우리에게 나 자신이 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는 세상 속을 살고 있습니다. 그저 어렸을 때부터 끊임 없이 받아온 "뭐가 되고 싶니?" 라는 질문을 통해, 내가 되야 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아닌, '무엇을 하는 사람'이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강요받아 왔을 뿐이죠. 심지어 돌잡이 때부터요. (여담이지만, 요즘의 돌잡이는 좀 더 직설적이 되었더군요. 얼마 전 보았던 돌잡이에는 '칫솔'이 있기에 저는 당연히 오복의 상징인 '건치'구나, 라고 생각을 했다가 웃음거리가 되었죠. 칫솔의 의미가 치과의사인 줄을 몰랐던 건 정녕 저뿐인가요?)

어쩌면 우리 사회에 혼재해 있는 많은 문제들은 사람들이 '나 자신'이 아닌, '그 무엇'으로 도구화된 채 살아가기 때문에 발생하게 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진정으로 자신이 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으로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없을테니까요. 다른 사람이 될 수 없다면 타인의 입장에 설 수도, 타인의 마음에 공감할 수도, 타인의 아픔에 함께 눈물 흘릴 수도 없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불의'라 이름할 수 있는 것들의 대부분은 이렇게 '내가 되는 것'을 한 번도 꿈꿔보지 못한 자들, 혹은 그 꿈을 일치감치 포기해 버린 자들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들은 대통령이 되고 싶었고, 장관이 되고 싶었고, 국회의원이 되고 싶었고, 꿈이라는 이름으로 그것들을 이루었을지언정, 진정 자기 자신이 되지는 못한 자들입니다. 어쩌면 꿈이라는 아름다운 말이 인생의 성공을 위한 도구가 되어버린 순간부터, 우리는 이런 세상을 예감했어야 했을런지도 모릅니다. 교회에서는 어떤가요? 비전이라는 아름다운 단어를,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사회적 성공의 기회로 여기는 우를 범하는 사람이 여전히 많지 않은가요? 

저는 평범한 직장에 다니는 4년차 직장인입니다. 아마 객관화된 잣대로 바라본다면, 거대한 사회 속에서 도구화된 그 무엇으로 4년째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겠죠. 다행히 대학 때부터 흥미를 가지고 있던 일을 밥벌이의 수단으로 삼고 있고, 그 일이 때로 재미있지만, 밥벌이의 수단이 된 이후부터는 매우 지난한 일상이 되어버렸으며, 그럼에도 이것을 훌훌 떨쳐버리고 좀 더 의미있는데 나 자신을 내던지지 못한다는 사실에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제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작게 느껴지죠. 하지만 '무엇을 하고 있는 나'가 아닌, '나로서 살아가는 나'를 꿈꾸고 있기에, 스스로를 규정하지도, 제한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바랄 것이 있다면, 내일은 오늘보다 좀 더 나다운 내가 되어 있는 것, 그뿐입니다. 

'나름'에서 처음으로 필진 제안을 받았을 때, 사실 조금 고민을 했습니다. 나는 여기에 글을 쓰고 있는 분들처럼 어떤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저 어설프게 여기저기에 조금씩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 공연히 하나의 주제를 맡았다가는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격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쓸 줄 아는 글이 일기와 반성문 밖에 없는데 어떻게 하지요?"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텍스트를 접할 때 자기중심적 오독과 오용을 남발하는 저는 (당장 '내가 되는 꿈'을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오용하는 것만 봐도 그렇지요) 책을 읽고 글을 써도 반성문이 되고, 영화를 보고 글을 써도 반성문이 되고, 연극을 보고 글을 써도 반성문이 되니, 이건 뭐, 어떤 전문성이라고는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는 사람이거든요. 이런 제게 흔쾌히 '그럼 일기를 쓰면 되지'라고 말해주신 '나름'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다행히, 저는 제 자신에 대해서는 여러분들보다 조금 더 알고 있으니, 제 자신의 삶에 놓여 있는 고민과 생각들이, 여러분 삶에 놓여 있는 고민과 생각들과 어떻게 어우러질 수 있을지에 대해서 항상 고민하는 '일기를 쓰는 아가씨'가 되겠습니다. 물론 앞으로 무슨 글을 써야할지에 대해서는 무계획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이건 일기니까요. 다만 바라는 게 있다면, 일기를 쓰는 아줌마가 될 때까지, 많은 것들을 나누고, 공감하며 함께 이 곳을 멋진 장소로 만들어 나갔으면 합니다. 

혹시 저 쪽 한 구석에서 마우스를 내리며 여기까지 읽으며 고개를 끄덕끄덕해주신 당신이 있다면, 정말 고맙습니다. 그 순간 이 글은 당신을 위한 것이 되니까요. 하지만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글은 제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제가 루시드폴만큼이나 좋아하는 김연수님은 (아, 부디 루시드폴과 김연수 중 누가 더 좋으냐는 어려운 질문만은 제게 하지 말아 주세요) 그의 책 '청춘의 문장들'에서 '키친 테이블 노블'이라는 말을 소개하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오만한 반 다인이나 똑똑한 에코와 톨킨을 제외하면 누군가 어느 날 갑자기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고 한쪽 구석에 앉아 글을 써내려가는 장면을 상상할 때 어떤 애잔함 같은 것을 차마 떨칠 수가 없다. 누군가 그런 소설을 가리켜 키친 테이블 노블이라고 말했다. 식탁에 앉아서 쓰는 소설이라는 뜻인데, 전문적인 소설가가 아니라 일반인의 처지에서 쓴 소설이 크게 인정받았을 때 붙이는 이름인 듯 하다. 

키친 테이블 노블이라는 게 있다면 세상의 모든 키친테이블 노블은 애잔하기 그지없다. 어떤 경우에도 그 소설은 전적으로 자신을 위해 씌어지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스탠드를 밝히고 노트를 꺼내 뭔가를 한없이 긁적여 나간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직장에서 돌아와 뭔가를 한없이 긁적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지만 긁적이는 동안 자기 자신이 치유받는다. 그들의 작품에 열광한 수많은 독자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키친 테이블 노블이 실제로 하는 일은 그 글을 쓰는 사람을 치유하는 일이다. 

 
   

물론 저는 소설을 쓰지 못하기 때문에 '노블'이라는 단어를 쓸 수도, 부엌에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기에 '키친 테이블'이라는 말을 쓸 수도 없지만, 애잔하게도 끊임없이 그 무언가를 적어내려가지 않는다면 견디기 어려운 종류의 인간이니, 제가 쓰는 이 일기는 키친을 룸으로, 테이블을 베드로(그렇습니다, 저는 늘 침대에서 글을 쓴답니다 -_-) 바꾼 룸베드 다이어리 정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부디 저의 빈약한 어법에는 지그시 눈을 감아주세요) 그리고 제 다이어리를 좋아해 주실 수많은 독자들에게는 정말 죄송한 일이지만, 이 다이어리가 하는 일은 아마 제 자신을 치유하는 일일 것입니다. 제게 이 글을 쓰는 일은 좀 더 내가 나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끊임 없이 자신을 다그치고, 격려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저는 제 글을 좋아해 주시고, 공감해주시게 될 당신을 진정으로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린 적어도 비슷한 색깔의 영혼을 지닌 사람일테니까요. 그런 당신과 함께할 시간을 저 역시 기대해봅니다. 

(첫 인사여서 존댓말로 글을 썼습니다.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하는 글들은 좀 더 편한 어투를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이건 저의 일기니까요 ^-^)


글쓴이 : 웬디


누가 그랬지, 누구나 삶의 시작은 작다고.
그렇게, 소리없는 작은 시작의 첫발을 내딛어본다. 이 첫발이 앞으로 어디로 어떻게 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기뻐하며, 고마워하며, 감격하며. 그렇게. 시작. ^-^ 




 

아까는, 알라딘 이미지 업로드 쪽에 오류가 있었는지 안되기에.  이제서야 주소 공개.  
아직 창간준비호라 많이 미흡합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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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리 2009-02-18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번에 얘기했던 웹진의 첫글인 모양이구나~
웹진 이름도 '나름' 의미가 있고 그 속의 웬디 글도 참 좋다~^^*
룸베드 일기, 기대하겠어~ 근데 웹진 주소는?
이 글 읽으니까 '꿈이 있는 자유'가 듣고 싶어진다...

웽스북스 2009-02-19 01:51   좋아요 0 | URL
네 언니 첫글이에요. 꿈이있는 자유라니. 아 영광이에요. ㅋ

다락방 2009-02-18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웬디양님. 웹진 주소는요? 무작정 검색창에 '나름' 쳤더니 아무것도 안뜨더라구요.

웽스북스 2009-02-19 01:51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이미지 업로드해놓았어요. ^-^

프레이야 2009-02-18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름' 다이어리 2호,3호 계속 기대되어요.
1호 출범을 축하드려요, 웬디양님.^^

웽스북스 2009-02-19 01:51   좋아요 0 | URL
언젠가는 혜경님만큼 삶이 묻어나는 글을 조곤조곤 쓰게되길 ^-^

마노아 2009-02-19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멋진 일을 시작하셨군요. 주소를 어디에 공개하신 거예요? 못 찾고 있어요ㅠ.ㅠ
2호, 3호 계속 기대하겠습니다. 웬디님 근사해요!

웽스북스 2009-02-19 01:52   좋아요 0 | URL
올려놓은 웹자보 이미지 안에 들어있어요 ㅋ

레와 2009-02-19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양님 화이팅입니다! ^^*
으쌰으쌰~

웽스북스 2009-02-21 12:11   좋아요 0 | URL
으쌰으쌰. 감사합니다.

민정 2009-02-19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와 멋진걸~
앞으로도 화이팅~~!

웽스북스 2009-02-21 12:11   좋아요 0 | URL
으헤헤헤 언니. 고마워요.

순오기 2009-02-22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나름' 멋있어요~ 웬디님 글도 공감하고요.
즐기면서 하는 웬디의 나름~ 기대합니다!

웽스북스 2009-02-22 14:59   좋아요 0 | URL
고마워요 순오기님. 앞으로도 좀 더 열심히 해야할텐데 말이죵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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