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선생님께서 작업하신 책이 출간되어 제자들이 함께 이를 기념하는 모임을 가졌다. 책에 대한 질의와 응답을 하던 도중 나는 선생님께 이런 질문을 드렸다.

"지금 이 세계를 살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대안이라는 것을 이룩해나가기 위해서는 중간에 타협이라는 지점을 한 번 거쳐야 하는 현실이 참 안타까워요. 선생님. 그저 순수한 치열함만으로는 무언가를 이루어나가는 것조차도 참 어려운 것 같아요."

언제부턴가 '지혜'라는 말에 담긴 그 묘한 어감이 몸서리치도록 싫어졌다. 특히나 어른들이 경험을 바탕으로 스스로를 정의하고 강요하는 지혜라는 말은 세월에 의해 마모된 자기 자신의 곡학아세를 지혜라는 이름으로 교묘히 치장하는 도구로 쓰여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내가 살아봤더니, 세상은 꼭 그런 게 아니더라, 내가 살아봤더니, 순수함만으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더라, 내가 살아봤더니, 내가 살아봤더니, 내가 살아봤더니. 그 말은 어른들이 스스로의 마모를 위로하는 고도의 자기위로이자, 그들보다 어린 열정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놀라운 힘을 지닌 말이다. 물론 그들이 삶으로 쌓은 경험을 깡그리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해버리고 싶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경험이 쌓인다는 것이 꼭 더 나은 방향으로 흐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리하여 내가 그들보다 조금 더 가지고 있었던 마땅히 분노하는 마음들이 그저 한 순간의 치기어림으로 제단되는 순간에, 나는 좀 더 분노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살면서, 이명박 옆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황석영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고는 정말이지, 꿈에도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다. 이런 미미한 일기를 쓰는 나도, 이 사소한 일기 속 다짐조차 삶으로 살아내지 못하면서, 작가로서 좋아하는 이들의 글과 삶을 분리하는 일은 내게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던 것 같다. 그는 내게, 삼포 가는 길을 쓴 작가였고, 오래된 정원을 쓴 작가였고, 손님을 쓴 작가였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였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좋아하던 작가였다. 나는 순수하게도, 그 책들을 통해 그가 하는 말들이 고스란히 그의 삶이고, 그의 신념일 것이라 생각해왔던 것이다. 얼마 후, 그가 손학규 지지를 선언했을 때, 네이버에 소설 연재를 시작했을 때, 무릎팍 도사에 출연했을 때, 나는 설마설마 하며 그의 세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저 분의 삶의 노선은 미시적으로, 당시의 세계 안에서, 가장 주목받을 수 있는 경로를 좇아왔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마음. 결국 조심스레 가졌던 의혹이 눈앞에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설마설마하던 것이라 하여 결코 착잡함이 덜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이명박의 중앙아시아길 순방에 동행한 그는 자신은 남북관계를 풀려는 순수한 의도에서 그런 일을 했다며 자신을 변호한다. 그의 지혜에 의거하면, 그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대안을 이루어나가기 위한 어떤 안착 지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생각하는 것이 맞는 것이라면, (나는 남북관계에 대한 지식은 미미하기에 그가 주장하는 것이 남북 관계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얼마나 바람직한 대안이고 비전인지 판단하기 어려우므로 이에 대해서는 유보해 둔다.) 이렇게 타협하는 것만이 그가 생각해낼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손잡지 않고 싸우기를 택하는 것이 얼마나 멀고, 지난하고, 위험한 길인지, 너무나 지혜로운 그는 아마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어른의 지혜가 곡학아세로 이어지는 일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묵묵히 그 멀고, 지난하고, 위험한 길을 걷고 있던 이들이 한 순간 '바보'가 되어버리는 것 역시 당연한 귀결이었다. '몰랐어? 여기, 지름길이 있잖아. 응?' 그렇게 말하는 것이 지혜라면 나는 그런 지혜 같은 것, 죽을 때까지 거부하겠다.

함께 성경을 공부하는 이들끼리 '잠언'에 대해 나누면서 '지혜'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나는 지혜란 그 시대를 가장 현명하게 사는 법을 지칭하는 것이기에, 시대의 논리에 부합하는 경우가 많고, 하여 현 시대의 지혜란 처세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고 이야기하며, (비슷한 이유로 나는 잠언서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시대를 초월하는 진정한 지혜란 그 시대를,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바보같이 사는 삶에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남들이 잘 가지 않는 길, 어쩌면 그가 사는 동안 끝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길, 영영 없어질 지도 모르는 길,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하게 그 길을 걷는 그 마음이 곧 지혜인 것 같다고. 그래서 살아서 바보소리를 들었던 노무현의 죽음이 우리에게 이토록 큰 울림을 주는 것 같다고. 어떤 소설가의 말처럼, 그는 멈춰버린 수레바퀴를 말없이 힘겹게 끌고 가던 바보였으니까. 지난 5월은 실은 바보였던 한 지혜자 때문에, 또 지헤자였던 한 바보 때문에 참 많이 속상하고, 참 많이 먹먹했던 것 같다.

여전히 내 책장 한구석에는 아직 읽지 못한, 그러나 문학적으로 훌륭할 것이 분명한, 그래서 더욱 속상한 황석영의 중단편들이 꽂혀 있다. 아. 진작 읽었어야 했다. 이제는 아무리 객관적으로 보려 해도 그 작품들을 대하는 마음이 전과 같을 수는 없기에. 그저 안타깝고, 또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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