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 6호에는 알라딘 이야기를 넣었다. 지난 번 천천히와도돼요 버튼 관련. ㅎㅎ
써둔지 한달도 더된 글. ㅎㅎ 미루다가 이제야 올려본다.



사실 내가 어디 가서 VIP 대접 받을 정도로 놀라운 소비생활을 하는 쇼퍼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런 나를 VIP 대접 해주는 곳이 두 군데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인터넷 서점 알라딘이다. (나머지 한 군데는 부끄럽지만 언젠가 일기를 통해 밝히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다) 대학때까지는 책을 빌려서 보는 일에 익숙해졌으나, 워낙 게으른지라, 도서관에 오가는 일도 쉽지 않을 뿐더러, 책을 '사고 모으는 일'에 적잖은 재미까지 들어버렸다. 게다가 가끔은 절판된 책을 구하고는 기뻐하는 득템놀이를 즐기기도 하고, 남들이 추천해 주는 책, 꼭 읽어줘야 하는 작가가 낸 반가운 신간들, 간간히 올라오는 특가판매 책들을 대책없이 일단 사들이다가, 어느덧 읽지 않은 책 수십권이 책장에 쌓여가는 지경에 이르는 스스로의 모습을 보다 보면, 사실 나는 책의 독자가 아닌 소비자로서의 삶을 더 즐거워하는 게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한다. 암튼, 이 두서없는 자책을 통해 내가 하고픈 이야기는 책을 사고, 또 읽는 일은 나에게 꽤 즐거운 삶의 일부라는 거다.

머리가 나쁜 나는 읽은 책의 기록을 남기기 위해 알라딘에서 제공하는 <서재>라는 이름의 블로그를 개인 블로그로 활용하고 있는데, 얼마 전 다 읽은 책의 구매자 평을 남기기 위해 구매 도서 리스트를 클릭해보고는 내가 며칠 전 두권의 책을 주문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두권의 책의 도착 예정일은 이미 지나 있었다. "뭐야. 아직 안왔네?" 하며 무의식중에 배송신고를 누르고 배송일 지났는데 책이 안왔어요 어쩌고저쩌고 글을 쓰려던 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 그렇게 택배 기사님들 착취에 대해 안타깝다고 말하고 다니는 내가

1. 어차피 지금 이 시간까지 저 책들을 읽을 틈도 없었고,
2. 심지어 저 책을 주문했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있었으면서

조금 늦었다고 불현듯 뿔난 마음이 되어서 얄짤없이 배송이 늦었다며 배송지연 불만 신고를 누르고 있는 거다.

훗.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까탈한 소비자였지?

결국 신고하려던 마음을 접고 다시 하던 일을 하고 있으니 잠시 후 택배 기사님이 오신다. 땀을 뻘뻘 흘리며 오셔서는, 늦어서 죄송하다고 이야기하며 책을 건네주신다. 웃으며 괜찮다고 말하는 마음 한켠이 미안하면서도.....

휴, 다행이다.

그 버튼을 눌렀다면, 나는 아저씨의 얼굴을 보고 또 얼마나 미안했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내가 더운 날씨를 싫어해서인지, 날이 심히 더워지니 책하나 주문하는 일에도 참 마음이 쓰인다. 그래서 그냥 알라딘 서재에 주절주절 글을 남겼다. 가끔은 급하지도 않은 책이 너무 빨리 와서 황송하다. 책 천천히 와도 괜찮아요 버튼 같은 거 있으면 좋겠다, 급한 책들의 배송에 집중할 수 있도록. 그럼 나는 자주 애용할텐데. 뭐 이런 요지의 글이었다. 써놓고 마음이 괜히 소심해졌다. 어머나 재수없어, 당연한 권리 앞에 왠 착한 척? 이런 댓글이라도 달리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내가 원래 좀 많이 소심하다 ㅜㅜ)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호응해주는 것이다.

저도 다른 곳에 선물로 보내는 경우가 아니면 배송에 그렇게 연연하는 편이 아니라서 천천히 와도 되요 버튼 같은 것 있으면 자주 애용할 것 같아요. (알라딘 H님)

천천히 와도 되요 버튼 한 표! 알라딘에 정식으로 요청해보는 건 어떨까요? ^_^ (알라딘 ㅊ님)

제발 당일배송 마케팅같은 것 때문에 택배 아저씨들 8시가까이까지 일하시게 안했으면 좋겠어요.
천천히 와도 돼요 버튼 저도 대찬성입니다!  (알라딘 ㄱ님)

초면에 실례라고 생각함에도, 정말 좋은 의견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남깁니다. 천천히 와도 좋아요~ 버튼! 알라딘에서 진지하게 고려해줬으면 좋겠어요. 택배기사분들의 고생이 그걸로 조금이라도 덜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익명 댓글)

야간이나 휴일밤에도 쉬지못하고 노동해야 한다는 건 그분들이 휴식할 권리를 빼앗는거죠, (휴일저녁에도 상품준비완료 상태가 되어 있더군요.) 물건을 되도록 빨리 건네주고 빨리 대금을 정산하고, 거래관계를 신속하게 매듭지고 싶은 판매자의 입장을 이해못하는 것 아닙니다만. 판매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그 외의 누군가가 과도한 희생을 해야 하는 상황은 저도 원하지 않습니다. (알라딘 ㅇ님)

얼마전 결혼해 미국으로 간 언니와 메신저로 이야기를 하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미국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한국의 서비스가 여러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택배 당일 배송 서비스라고 한다. 심지어 당일에, 무료로 배송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기절할 정도로 놀란다는 것이다. 뭐, 미국이 워낙 넓어서 차이가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확실히 빨리빨리, 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하는 다이나믹 코리아의 국민들을 상대하다 보니 유통 업체들의 배송 경쟁은 제살 깎아먹기식 출혈 경쟁이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물론 그 경쟁의 수혜자가 되는 것은 소비자이다. 하지만 그 과정중에 자신도 모르게 시스템 속에서의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서비스정신, 이라는 건 물론 매우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우리 모두가 상전취급 받는 일에 너무 익숙해진 탓에 서로를 돌아보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소비자로서의 권리도 중요하지만, 고객은 왕이다, 라는 말은 서비스업 종사자가 가져야 할 낮춤의 정신을 일컫는 말이지, 우리가 그들에게 왕으로 군림해야 함을 말하는 건 아닌듯하다. 작은 서비스의 불편 앞에 파르르르 떠는 모습들 앞에 묘한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나 역시 비슷한 상황 앞에서는 습관적으로 같은 행동 패턴을 보이는 스스로를 발견하는 일이 적지 않음을 보며, 내가 얼마나 좋은 서비스를 받는 일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가를 다시 한 번 느낀다. 참 감사한 일이지만, 그게 과연 온당한가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결국 나는 이 서비스를 알라딘에 정식으로 건의했다. 이 서비스가 받아들여질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이 과정을 통해, 이 속도가 곧 정도인 시대에 그것을 거슬러 일부러라도 '빠르게 받지 않겠다'를 선택할 의향이 있는, 그것이 갖는 사회적 함의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고 참 새삼스럽게 기뻐하고 든든해 했다.


* 이 글을 작성하고 며칠 후, 알라딘으로부터 이런 답변을 받았다. 

 

 


내가 꼭 알라딘 유저라서 얘기하는 게 아니라, ㅋㅋ 인터넷 서점은 알라딘이 좀 많이 짱이다. 작은 고객의 소리 하나 그냥 넘기는 법이 없다. 이래서 2년째 외도없이 알라딘만 이용하는 나는 이런 마음이 고맙고, 또 고맙다. 한가지 더 바라는 게 있다면, 이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다른 알라딘 분들에게도 이런 건의를 한 알라디너들의 마음이 잘 공유되길, 단순히 고객의 '배송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날짜를 지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서로 잘 이해할 수 있길. 그리고 더 욕심을 내어 막 거창하게 바라자면, 알라딘은, 시작에 불과한 것이길.

나는 이 서비스를 함께 건의한 알라디너들에게 오른손 왼손 양손 모두 내밀어 새끼손가락 고리 걸고 도장찍고 복사하고 함께 꼭꼭 잘 이용해 보자고 약속을 받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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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08-10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고 나면 알라딘에 회원 가입하는 분들이 많이 생길 것 같은데요.
:)

웽스북스 2009-08-11 22:17   좋아요 0 | URL
힛. 다락방님. 안그래도, 저 아는 분이 이제 알라딘으로 오시겠다며 ㅋㅋ

순오기 2009-08-10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뻐요~ 그 마음이!^^

웽스북스 2009-08-11 22:17   좋아요 0 | URL
어이쿠나. ㅋㅋㅋ 순오기님만할까요

2009-08-10 18: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11 2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머큐리 2009-08-10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저히 추천 한 방 날리지 않고 지나칠 수 없는 글이네요... 웬디양님 처음 댓글같은데..(맞나?) 꾸벅..(사실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웽스북스 2009-08-11 22:18   좋아요 0 | URL
머큐리님. 저도 라대리님 서재에서 이름만 엄청 많이 봤지요.
정식으로, 반갑습니다!!

,,, 2009-08-11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웬디양님이 본문에 인용하신, 익명 댓글의 주인입니다^^; 또 익명으로 남겨서 죄송합니다만 이 얘기를 남기고 싶어서 실례하겠습니다. 알라딘도, 따뜻한 마음을 가진 웬디양님 당신도 많이 짱이십니다!

웽스북스 2009-08-11 22:19   좋아요 0 | URL
어이쿠나. 감사합니다.
죄송할거 뭐 있나요. ㅎㅎ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익명댓글님도 따뜻한 분이신 거 같은걸요

turnleft 2009-08-11 0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웽스북스 2009-08-11 22:20   좋아요 0 | URL
턴레프트님, 덕분에 영화 잘 봤어요!!!!! (완전 사랑스럽게 재밌었어요~~)

레와 2009-08-11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항, 웬디양님 이쁘다..!


알라딘 서비스도 좋아요! ^^

웽스북스 2009-08-11 22:20   좋아요 0 | URL
레와님 레와님. 오랜만이에요. 반가워요. 너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