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내내 추워서 한발짝도 안움직이고, 새벽까지 피터팬(집구하기 네이버 카페 이름)을 날아다니는 웬디 모드로 눈 시커매지도록 집구경을 하고나니, 뭐, 어느정도 가격이면 대략 어떤 집이구나, 라는 각 정도는 잡혔어요. 저는 생활의 바보이지만, 다행히 스스로 생활의 바보라는 걸 아는 매우 겸손한 생활의 바보이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조언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고, 똑같은 얘기도 듣고 듣고 또 들었고, 드디어 오늘 처음 집을 보러, 아*님의 조언을 따라 어제 미리 전화해둔, ㅂㅂㄹ 어머니 추천 숙대입구역의 부동산 역으로 갔지요. 가기 전 ㄱㅂㅇ언니의 걱정어린 전화. 이토록 많은 사람의 걱정의 대상이 된 것은 처음입니다. 정말.
숙대입구역에서 밥을 먼저 먹으려고 다니는데, 눈이 오는 날의 동네가 그렇게 포근하게 느껴질 수가 없어요. 그냥, 여러동네 볼 생각이었지만, 아, 나 그냥 이 동네 살고 싶어. 라는 생각이 굳혀지는 순간입니다. 출근길이 그렇게 가까운 건 아니지만요. 오밀조밀 작은 옷가게들, 카페들도 마음에 들고, 어디하나 시끄러운 번화가는 없으면서 필요한 건 대충 다 있는. 그냥 마음에 차는 동네들이 있는 것 같아요.
전화한 부동산을 가기 전에, 그냥 다른 동네 부동산에 갔더니, 매몰차게 매물이 없다며 거절합니다. 전세집 구하기 정말 힘들다는 거, 실감에 또 실감을 해봅니다. 그래도, 어제 전화했던 집은 있다고 했으니까. 부동산을 찾아가 어제 전화한 사람이라고 인사를 하고, 아주머니를 따라 나서는데. 아. 이런. 첫집이 너무나 마음에 듭니다. 두번째집. 눈에 안들어옵니다. 세번째집. 눈에 안들어옵니다. 네번째집. 눈에 안들어옵니다. 너무 마음에 드는 티도 내면 안된다는데 표정관리가 안되서 헤죽헤죽, 이미 마음은 첫집에 가있습니다. 이 첫집. 내가 매물로 올라오고 처음 봤다고 합니다. 계약 안하면 바로 나갈 것 같은데, 덜컥 계약금 몇백을 내기엔 가슴이 떨립니다. 일단 회사 근처에 또하나 보기로한 집이 있어서, 그리로 가면서
저기, 이집. 제가 다시 올 때까지 계약 안하시면 안돼요? 저녁에 다시 올게요.
라며 초비굴 모드로 사정사정. 내가 불쌍했는지 6시 전에 연락주면 안내놓겠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함께 집을 보러 다녀준 조웬디독립추진위원회 숙대지부장 ㅂㅂㄹ언니는 이미 하트로 변한 내 눈을 간파해내고는, 일찌기 우리가 이제 동친(동네친구)로 거듭날 것임을 예감합니다. 집도 같이 봐주러 다니고, 이제 대출자클럽이라며 돈도 없을텐데, 하며 밥까지 사준 ㅂㅂㄹ언니에게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ㅂㅂㄹ언니를 보내고 충정로로 넘어가 K를 만납니다. K는 수많은 월세방 전세방을 전전한 화려한 경력과 놀라운 생활력의 소유자. 사실 충정로로 넘어가면서도 나는 얼른 K를 다시 숙대집으로 데려가 숙대집 OK 사인을 받아내야겠다,는 생각뿐입니다. 역시나 아현동집. 눈에 안들어옵니다. 건성건성 보고, 다시 숙대로 넘어와, 다시 첫번째 집으로 달인 K를 데려갑니다. 꼼꼼한 K는 내가 미처 못보던 것들을 다 따지고는, 내가 가진 돈과 모든 조건들을 계산하더니, OK 사인을 보냅니다. 안심하고 계약을 하려고 집에 전화를 걸었더니, 이번에는 아빠가 갑자기 반대를 합니다. 섭섭하신 마음이야 이해하지만, 그래도 이제와서 왜 ㅜㅜ 부모님 허락 없이 덜컥 계약을 하고 갈 수는 없다며 가계약으로 돌려주시면 주말까지 반드시 허락을 받아오겠다는 나의 애절함을 어여삐 봐주시는 부동산 아주머니가 가계약으로 돌려주시고, 나는 돈을 뽑으러 갑니다.
K는 내가 없는 동안, 저아가씨는 몇살이냐는 질문을 들었다고 합니다. 서른 하나라고 했더니 깜짝 놀라시는 아주머니들. K의 표현을 빌자면 애기인줄 알았답니다. 아. 세상에나. 굴욕입니다. 철없이 너무 샤방샤방 좋아서 뛰어다니기는 했지만. ;;;;; K는 저에게 마치 옷사는 것처럼 전세집을 구한다,는 굴욕적인 언사를 행했지만, 나를 걱정하는 부동산 아주머니가 심지어, 그래도 집은 그렇게 보는 게 아니라는 조언까지 해주셨지만, 그래도, 뭐, 마음에 드는 것 앞에 장사 있나요. 예. 제가 원래 좀 표정관리가 안됩니다. 포커페이스는 커녕. 투명표정입니다. 왜 투명해야 할 피부는 점점 안투명해지고 표정따위가 자꾸만 투명해지는 건지 걱정입니다.
불라에가서 사람들에게 집을 구했다고 자랑을 하고, K와 나름의 축배를 들어봅니다. 집을 나올 때만 하더라도, 내가 오늘 집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집에 와서는 초비굴 애교짱모드로 아빠를 다시 설득합니다. 결국 주말엔 집에도 꼬박꼬박 잘 오겠다,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고나니 (뭐 노력을 할 생각입니다) 마지막 조건은. 봄에 가라. 입니다. 추우니까, 따뜻해지면 가라고. 이 뭉클한 조건을 거절할 명분이 없어, 저는 그러겠다고 합니다. 어차피 구정 지나고 들어갈 계획이었으니, 여러 짐들을 천천히 준비하며 이사를 미루지요 뭐. 옵션이 없는 집이라 이것저것 사야할 것들이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말이죠 ㅠㅠ
집과도 인연이라는 게 있다면, 이 집과 저는 좋은 인연으로 만난 게 아닌가 싶습니다. 회사에서 교통이 그닥 편리하지도 않은 숙대입구/효창공원 근처에서 생뚱맞게 살고 싶어진 것도 그렇고, ㅂㅂㄹ언니가 보내준 수많은 부동산들 중에서 하필 딱 그 부동산에 연락했던 것도 그렇고. 매물이 나와, 부동산 아주머니도 그 집이 마음에 들어 다른 부동산에 공유안하고 저한테만 보여주신 것도 그렇고, 쏙 마음에 들어 다른 것들은 쳐다보지도 않게 된 것도 그렇고요. 어쨌든 이 전세난에 전세집을 구하고 나니, 일단 좋긴 좋네요. 대출금액은 맥스로 잡았던 예상액으로 잡게되는 바람에 허리는 좀 휘게 생겼습니다. 대출자클럽 여러분들과 술을 한잔 마실 때도 삼고초려해야할 것 같아요. 그래도,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있으니, 차근차근, 천천히, 하나씩 준비해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