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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단편선 - MBC 느낌표 선정도서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인디북(인디아이)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고등학교 때 노란 표지의 '한권의 책'(학원사) 시리즈 가운데 톨스토이의 <바보 이반>(물론 내용은 단편선이다)이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왜 눈물이 나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이후 친구들에게 선물할 기회가 생기면 항상 이 책을 사서 선물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톨스토이 단편선은 언제나 서점가에 있었다. 여러 출판사에서 내고 있었고. 그런데 2003년 들어 갑자기 톨스토이가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는 느낌표 선정도서란 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리뷰를 쓸 때 앞 사람이 지적한 측면을 가급적이면 답습하지 않으려 한다.(만일 새롭게 쓸 내용이 없다면 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감성적인 책이라 그랬는지... 138개나 되는 리뷰의 상당수는 '독후감'에 가까웠다. 참고할 만한 것은 미디어천국 님과 평범한여대생 님의 것 정도.
많은 분들이 이 책이 기독교적 색채가 짙다고 하시는데, 내 생각은 정반대다. 오히려 기독교권 문학 가운데에서는 가장 동양사상과 가까운 작품이다. 비록 신과 천사의 이미지가 사용되긴 하지만, 가만히 보면 서사의 중심은 내면의 영적 성장과 의식의 각성이다. 심판하는 신, 교회중심주의, 선민사상, 신과 인간의 이원적 이해 등을 내용으로 하는 현대 기독교 교리와는 코드가 맞지 않는다.(톨스토이는 불교를 비롯한 동양 종교들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특히 <세 은자>(이 책은 아니고, 2권에 실린 작품)는 선불교의 우화 모티브와 놀랄 만큼 닮아 있다.(개인적으로 이 책을 '문학'이 아니라 '뉴에이지 자기계발서'로 분류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어떤 분들은 공산주의, 사회주의적 측면을 지적하시는데 그것 역시 동의하기 어렵다.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면 때문에 혼동하신 듯한데, <바보 이반>에서 나타나듯 이상적 사회를 국가권력에서 일탈한 농촌공동체로 설정하는 사상은 노자의 소국과민(小國寡民) 사상과 공명하며, 아나키즘에 가깝다.(실제로 톨스토이 사상은 아나키즘으로 분류하는 사람들이 많다) <촛불>에서 잘 나타나는 억압에 대한 비폭력 평화주의 사상은 불교의 아힘사(ahimsa) 사상과 다를 바가 없다. 바로 이런 점들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은 톨스토이를 격렬하게 비난했다.(당연한 일 아닌가? 이따위로 착취계급에 대한 투쟁의지를 희석하려는 작품이 널리 퍼진다면 혁명이 가능하겠는가!) 재미있는 건 <바보 이반>이 제정러시아 시기에도 금서였다는 사실이다. 국가주의에 반대하는 사상을 담고 있다고 해서...(그러니까 검열관들도 이 작품에 담긴 아나키즘의 '위험성'을 꿰뚫어본 것이다)
나는 '러시아의 혼'이라 불릴 수 있는 그 무언가를 느낀 적이 여러 번 있다. 딱히 꼬집어 말하긴 어려우나 음악, 미술, 문학, 영화... 모든 부문에서 러시아인들은 다른 민족보다 더 영적인 깊이가 있다는 느낌이다. 톨스토이의 문학이 그랬고, 집시 음악(러시아어로 부른)이 그랬으며, 로에리치의 그림이 그랬고, 타르코프스키의 영화가 그랬다.(타르코프스키는 죽을 때까지 자신을 '소련 사람'이 아니라 '러시아인'으로 불러달라고 했다) 톨스토이의 단편선 중 상당수는 1879년 야스야나 폴랴나를 방문한 이야기꾼에게서 차용한 러시아 민담이고, 어떤 것들은 자신이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고 밝혔다. 따라서 여기 실린 단편선은 사실상 톨스토이라는 필사자를 통해 발현되긴 했지만 '러시아의 혼'을 생생하게 노래하는 작품들인 것이다.
이 작품들이 세상에 나온 지 100년이 넘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사랑받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건 영적인 깊이가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특히 요즘 이런 책들을 사람들이 찾는 건 몸과 마음, 영혼이 조화를 이룬 삶, 진정한 의미에서의 웰빙을 갈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톨스토이는 어쩌면 너무 일찍 왔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