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이다. 이렇게 가슴 뭉클해지는 그림책은...
지인이 아들 생일 선물로 그림책을 보내 주었다. 아이들과 같이 읽었는데 감동은 정작 내가 더 받았다.
감동의 크기가 거의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맞먹는 것 같다.
장정인 작가의 '가지를 나르는 나무'가 그 주인공이다.
제목부터 흥미로웠다. 나무가 스스로 가지를 자르다니? 왜 스스로 가지를 자르는 것일까?
잔뜩 호기심을 느끼며 첫 장을 열면,
멀리서 묘목을 가득 실은 트럭 하나가 과수원으로 달려온다. 과수원 주인의 트럭이다.
트럭에서 내린 주인은 싣고 온 묘목을 심는다. 봄이 되자 나무들은 하얀 눈 같은 꽃망울을 터트리고 나비와 벌이 모여든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하얀 꽃들로 가득한 그림에선 어쩐지 그 향기마저 전해져 오는 듯 하다.
그런데, 어? 한 구석에 별로 표정이 좋지 않은 작은 나무 한 그루가 있다.
가지도 별로 없는데다 짧아서 인지 꽃들도 얼마 피지 않았다.
이 나무가 제목에 나오는 그 나무일까?
저 짧은 가지는 나무가 스스로 잘라낸 탓일까? 왜 그러는 것일까?
하지만 그림책은 그 이유를 속시원히 들려주지 않고 대신 다른 주인공 하나를 초대한다.
어느 날, 한 마리의 새가 과수원으로 찾아오는 것이다.
달콤한 사과꽃향기에 취해서일까?
이리저리 비틀비틀, 두리번 두리번...
그렇게 과수원을 휘젖고 다니더니 결국 한 쪽 귀퉁이 가지 잘린 나무를 발견하고는 거기에 앉는다.
그리고 그 가지 위에 자기 둥지를 만든다. 아무도 찾아와주지 않아서 외로웠던 나무는 그 새가 반가웠고
결국 둘은 친구가 되어 매일 신나게 보낸다.
찡그렸던 나무는 행복해져서 참으로 오랜만에 웃는다.
휘엉청, 참 달이 밝았던 밤.
새가 조심스레 나무에게 이렇게 묻는다.
" 작은 나무야, 왜 스스로 가지를 자르니?"
".........난 사과를 맺지 못하니까"
" 그게 무슨 소리야?"
" 어렸을 때 작고 약한 나를 보고 주인은 사과를 맺을 수 없을 거라 했어. 물도 충분히 주지 않았고, 큰 나무 옆에 있는 나를 잘 돌봐 주지 않았어."
" 그래서 난 가지를 잘라버리기로 했어. 어차피 사과도 맺지 못할 테니."
이제야 우리는 궁금증을 풀게 되었다. 알고보니 주인 때문이라는 걸...
그가 미리 사과나무의 미래를 단정하고는 말과 행동으로 그렇게 해버렸기에 사과나무조차 지레 포기해 버린 것이었다.
새는 작은 나무의 마음을 위로한다. 그러다 알을 낳는다.
작은 나무는 친구의 알을 보호하기 위하여 되도록 바닥에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짧은 가지에 잔뜩 힘을 준다.
그런데 이 둘 앞에 엄청난 어려움이 다가온다. 어느 날 강한 비바람이 몰아닥친 것이다.
비바람이 너무나 세차게 가지들을 흔들고 있기에 작은 나무는 잔뜩 걱정스럽다.
이러다 그만 가지가 부러져 알이 깨지기라도 하면 어쩌지 하면서 작은 나무는 더욱 가지에 힘을 준다.
과연 그 나무는 친구의 알을 지켜낼 수 있을까?
때로 감동은 그동안 미처 내가 생각지 못했던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을 때에도 찾아온다.
이 책은 그랬다. 난 작은 나무에 대해 과수원 주인이 했던 말에 충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 과수원 주인의 말은 알고보면 나역시 자주 아이들에게 했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사과나무가 그말에 충격을 받아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망가뜨려 버렸을 땐 그래서 더욱 모골이 송연해지기도 했다. 내가 아이들의 가능성을 섣불리 단정하고 생각없이 내뱉었던 말들 역시 아이들에게 그런 상처를 주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새 작은 나무는 내게선 그런 말을 들었던 아이들의 모습과 겹쳐져 있었다. 그래서 더욱 작은 나무를 응원할 수 밖에 없었다. 비록 그런 상처를 가졌지만 그것을 딛고 일어나 강한 비바람에도 훌륭히 친구의 알을 보호하기를 바랐다. 그렇게 아이들도 이 못난 선생님의 잘못에 기죽지 말고 훌륭하게 성장해 주기를 염원했다. 이러한 나의 반성까지 있었기에 나중에 받은 감동이 더 클 수 밖에 없었다.
말은 때로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우리는 그것을 너무나 잘 알지만 여전히 말을 쉽게 할 때가 많다. 남에 대한 판단 역시도 그러하다. 아이에게 잠재된 가능성을 제대로 헤아리지도 않고 단순히 드러난 결과만을 놓고 아이의 전부를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얼마나 쉬이 저지르는지 모른다.
오늘 오전만 해도 그렇다. 딸 아이가 수학문제를 잘 못 풀길래 답답해서 " 넌 왜 그리 수학을 못하니? 그것도 나눗셈을 말이야. 매번 못 해요. "라는 말을 아이가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도 해버렸다. 그저 내 답답함을 풀어보려고 상처를 입힌 것이다. 못났다. 참으로 못났다. 이 책은 그렇게 나를 더욱 더 부끄럽게 만들었다.
이 그림책은 아이들 보다도 부모들에게 더욱 시사하는 바가 큰 것 같다. 자식을 키워보니 알겠는데 부모는 아이들에 대해 조급증이 있다. 농작물도 1년의 시간을, 그것도 아주 정성들여 가꿔줘야 비로소 결실을 맺는데 부모들은 아이들을 마치 3분이면 완료되는 인스턴트 식품처럼 다룰 때가 참 많다. 밥도 뜸을 들여야 하는데 아이들은 이상하게 이 '뜸'이라는 게 용납이 안된다. 그래서 부모가 원하는 속도에 아이가 맞추지 못하면 답답하고 결국 그것을 일방적으로 상처 입히는 것으로 풀고야만다. 그걸로 나는 속이 편해질지 모르지만 아이는 그렇지 않다. 아이들은 종종 되묻는다. '왜 잔소리를 하냐고?' 그럴 때 우리 부모들은 늘 모범답안이 있다. '다 네가 잘 되기 위해서라고' 정원사는 때로 멀쩡한 가지를 자르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도 다 나무가 제대로 자라게 하기 위함이다. 잔소리나 야단도 그런 것이라 부모는 아이에게 말한다. 하지만 솔직해져 보자. 그렇게 가지를 쳐 줄 때, 과연 나는 아이의 입장을 보고 있었을까? 꾸준히 자신의 속도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아이의 속도에 대해서 과연 생각하고 있었을까? 우리나라 청소년 자살율은 OECD 국가 중 1위라고 한다. 그렇게 많은 아이들이 그림책의 작은 나무처럼 스스로 가지를 꺾어 버렸던 까닭은 우리의 다그침 속에 아이의 속도를 배려하기 보다는 부모의 속도만을 강요하는 비중이 훨씬 많았음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듯 하다.
동물을 키울 때나 화초를 키울 때, 우리들은 언제나 동물의 속도 그리고 화초의 속도에 나를 맞추려 하지 나의 속도에 그들을 맞추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소중한 우리 아이들에 있어서는 왜 그럴까? 왜 자꾸 나의 속도대로 맞추고 싶은 조바심이 나는 것일까? 그 차이가 비단 동물이나 화초가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조바심이 나는 결정적인 이유는 거기에 나의 욕심이 끼어들기 때문일 것이다. 내 뜻대로 아이를 완성시키고 싶다는 욕심 말이다. 부모는 아이를 뒷 좌석에 태우고 운전대는 자신이 잡아 자기가 원하는 속도와 방향으로 운전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누구나 다 알듯이 인생의 운전대란 누가 대신 잡아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게 하면 아이만 점점 더 자기 인생의 방관자로 만들 뿐이다. 아이에게 바람직한 부모의 모습은 그래서 정비사가 아닐까 생각된다. 철저하게 현재 차의 상태가 어떤지 차의 모든 것을 중심으로 관찰하고 좀 더 자신이 낼 수 있는 속도로 최대한 잘 달릴 수 있게 도와주는 정비사 말이다. 결국 동물을 키우는 자세나 화초를 키우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아이의 속도를 인정하고 그것에 맞추어 아이들에게 잠재된 가능성을 더욱 잘 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자는 의미다.
이제야 깨닫는다. 나의 욕심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걸. 이제부터라도 아이들이 가진 속도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는 눈을 기르고 그것을 최대한 존중하는 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