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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 씨, 출근하세요?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어린이책 작가 모임(더작가) 지음 / 사계절 / 2012년 10월
평점 :
얼마 전, 서울 강남 모 아파트에서 경비로 일하시는 한 분이 부당 해고에 항의하기 위하여 혹한에도 불구하고 굴뚝에서 시위를 하는 뉴스가 있었다. 관리비 절감을 위해 아파트측에서 경비들을 일방적으로 해고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다행이 일이 잘 타결되어 굴뚝에서 내려오셨지만 이처럼 잘 다니던 직장에서 느닷없이 해고 통보를 받는 일이 흔해도 너무 흔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북유럽처럼 재취직이 수월하다거나 사회보장이 전반적으로 확충되어 있어서 해고 이후에도 생활의 안정적인 지속이 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더욱 직장에 가족의 전 생계를 매달릴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해고는 살인이다'하는 말이 우리나라에서는 그냥 하는 구호가 아닌 것이다. 혹한의 바람을 무릅쓰고 굴뚝에 올라가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단순한 일자리가 아니라 생존의 동아줄인 것이다. 바로 그 절박함이 굴뚝 위에 서게 했던 것이다.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어쩌다 이리도 쉽게 다니던 사람을 단칼에 자를 수 있게 되었을까? 요즘은 그래도 말로 통보해주는 것만 해도 양반이란다. '내일 안 나오셔도 됩니다.'라는 문자 하나로 끝내는 것도 허다하다고 한다. 잘려진 자의 절박함은 아랑곳하지 않는 자르는 자의 무심함. 이것이 잘려진 자의 앞에 놓여진 인생을 더욱 아득하게 하는 것임을 알기는 아는 것일까?
그런데 이 비정규직이라는 말. 생각해보면 듣게 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 같다. 난 93년에 처음 직장을 가졌는데 그 때만 해도 비정규직이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러한 비정규직이 생겨났던 것일까? 일부러 찾아보니 1997년. 그러니까 IMF 이후였다. 그 IMF를 해결하느라 갑작스럽게 경기 부양에 집중하게 된 정부가 훗날의 여파는 제대로 고려하지도 못하고 비정규직을 만들었던 게 사단이었다. 그 당시에도 노동계나 시민단체들이 앞다투어 거센 반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공적 자금을 받고도 여전히 이대로라면 '이익을 낼 수가 없다'고 앓는 소리를 해대던 대기업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바람에 생겨난 것이었다. 국민들은 자신이 가진 금붙이 하나라도 더 내어 함께 살아가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자체를 살리려 했지만 그 피같은 국민들의 돈을 흡혈한 대기업들은 그러한 순간에도 오로지 자신들의 주머니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정규직은 헌법상 보장되는 노동3권을 보호해주지 않아도 되니 더욱 적은 비용으로 높은 이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은 일대로 시켜놓고 정식으로 절차를 밟지 않고도 얼마든지 쉽게 자를 수 있다는 것을 '노동의 유연화'란 말로 포장하고 '힘든 시기이니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다 어느정도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애국심에 호소하여 비정규직은 온갖 우여곡절을 거쳐 뿌리를 내렸고 그렇게 15년이 지났다.
이제 우리나라 비정규직은 전체 근로 인구 절반을 넘어선다. 일하는 사람들 두 명 중 한 명은 비정규직인 셈이다. 대선이 있을 때마다 비정규직 문제는 커다란 이슈였다. 모든 대선 후보들이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공약했었으나 그것이 허울좋은 말뿐이었음은 작금의 상황으로 여실히 드러났다. 5년마다 존재했던 정부들은 비정규직을 줄이겠다고 천명해왔다. 하지만 지금도 정규직으로의 전환은 채 10% 정도 수준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에 있어 직장은 가족의 생계 유지를 위한 유일한 동아줄인 경우가 많다. 거기에 있어 비정규직이란 여기저기 좀이 쓸어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동아줄이라 할만하다. 다시 말해 생존이 위태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나 기업은 '경기가 좋이 않아서', '아직은 더 성장해야할 때라서' 등등의 이유로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미적거리고 있다. 2012년의 한국 경제 규모는 세계에서 15위라고 한다. 그러나 상시 해고 위협에 시달리고 회사로부터의 근로 복지와 처우 개선은 기대도 할 수 없으며 더구나 법정 근로 시간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늘 초과 근무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비율은 세계 최고다. 이 정도로도 부족하다면 도대체 얼마나 성장해야 해결할 수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문제는 비정규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들의 인식이다. 그들은 근로자를 사람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 같다. 오로지 경제 변수로만 취급하는 것 같다. 한 사람의 노동자에게 결부된 가정 역시도 바라보지 않는 것 같다. 쌍용자동차 대량해고 사태에서 보듯이 해고는 가정의 파탄까지 불러올 중차대한 일이다. 하지만 해결할 수 있는 그들에게는 단지 통계 상의 숫자 하나에 불과한 것 같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인식의 변화가 아닐까 싶다. 비정규직이라는 것이 그냥 경제의 한 변수가 아니라 삶의 문제, 그것도 생존의 문제로 바라보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도 지금 우리가 비정규직이 아니라고 해서 강건너 불구경 할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나라의 비정규직 비율을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언제 우리 역시 그 중 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의 문제로 여기고 이 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야 할 절박성을 느낄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아이들에게도 이 비정규직 문제를 솔직히 이야기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앞으로 이대로 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의 아이들 중 하나는 자신의 당면한 문제가 될 것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비정규직이 사실은 바로 우리 삶의 문제라는 것을 어떻게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까? 이 책, '비정규 씨 출근하세요?'는 그러다 만나게 된 책이었다.
이 책이 눈에 들어온 것은 이 책의 지은이들 때문이었다. 이 책은 한 사람이 쓴 것이 아니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어린이 책 작가'들의 모임인 '더-작가'의 소속 작가들이 모여 십시일반을 하듯이 쓴 책이다. 이 모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희망버스'를 위해 사인회를 열었을 때였는데 그 후로도 용산참사, 4대강 사업, 쌍용자동차 해직 노동자 지원 등 꾸준히 사회적으로 목소리를 내어 어린이 책 작가들도 이런 일을 하는구나 하고 내심 놀랐고 그래서 관심있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비정규직 이야기라서 더욱 신뢰가 갔다.
여러 작가가 모여 만들었기 때문에 이 책의 표현 형식은 참 다양하다. 아이가 쓴 그림일기의 형식도 있고 그림책 스타일도 있으며 만화나 동화 형식으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림은 그림대로 글은 글대로 다양한 작가들의 개성이 다채롭게 빛을 발해 지루함 없이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종종 이러한 다양한 변화는 자칫하면 산만해져서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경우가 있다. 작가들도 그런 위험을 예상했는지 설정을 통해 이러한 다채로운 변화들이 하나로 잘 묶여 조화될 수 있도록 했다. 그 모든 변화들을 이 시대를 살아가는 비정규직이 있는 가정 하나하나의 모습으로 만든 것이다. 이 책은 여러 가정이 모여있는 다세대 연립주택을 배경으로 한다.
101호 유정이네- 간병인 할머니, 대학 시간강사인 엄마, 프리랜서 방송작가인 이모,
102호 해준이네- 정리해고 당한 아빠
103호 김태희 씨- 생활고에 찌든 말라깽이 남자 대학생
201호 우혁이네- 갑자기 해체된 오페라합창단 이모
202호 은수네- 마트 판매직원인 엄마, 편의점 알바생인 대학생 오빠, 화물운전사인 아빠
301호 해단이메-공무원 아빠, 프리랜서 편집디자이너 엄마, 기공소 배달원 할아버지
301호 옆 쪽문- 해담이 삼촌으로 자칭 일본어 번역가인 강대희 삼촌
옥탑방-인형 디자이너 미미 씨
이렇게 그 모든 가정에서는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비정규직들이 있으며 바로 그들의 애환 하나하나를 각 작가가 맡아서 자신의 스타일로 풀어간 것이 바로 이 책인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비정규직의 만화경이라 할 만하다. 작가들은 비정규직이 왜 문제인지 설명하기 보다는 비정규직 사람들의 삶을 충실히 담는다. 독자 스스로 그들의 삶과 함께 하면서 그들이 삶이 가지는 애환과 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비정규직의 오해 같은 것들을 느끼게 해주고자 함이다. 이를테면 첫 머리에 나오는 울산과학대 비정규직 청소노동자 김순자 할머니의 에피소드가 그렇다.
화장실 청소를 하고 있는 중에 어떤 남자 아이가 소변을 누면서 할머니에게 묻더란다.
" 할머니, 공부 못 했어요?"
아니, '할머니 공부 많이 했는데' 대답해주고는 나중에 동료 직원들에게 그 얘기를 들려주며 한참 웃었단다. 하지만 씁쓸하거나 서글픈 웃음은 아니었단다. 세상이 어떤 눈으로 청소노동자를 바라보는지 잘 알고 있있기 때문이다. 아이 역시도 그렇게 물어 본 것은 어른들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할머니의 고백은 왜 우리가 비정규직의 문제를 우리 자신의 문제로 느끼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것 같다. '비정규직 = 공부 못하는 사람'의 공식은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절대 비정규직이 되지는 않을꺼야 하는 생각과도 통한다. 그렇게 우리가 그들을 어떤 편견으로 선 바깥에 놓아두고 있었기 때문에 비정규직이 바로 우리의 삶과도 직결된 문제인데도 그들의 문제일 뿐이라는 식으로 강건너 불구경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작가들은 비정규직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데 중점을 두는 것이다. 이들의 삶과 우리의 삶이 그리 다르지 않음을 보여 그들의 문제가 바로 우리의 문제일 수 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더욱 아이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비정규직 문제가 자꾸 수수방관 되는 이유가 바로 우리가 가진 비정규직에 대한 편견에 기인한 탓도 있으니 아이들만이라도 하루빨리 그런 편견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편견은 비단 직장 차원에만 있지 않다.
과연 삶 그자체를 바라보는 시각엔 어떤 편견도 없을까? 우리가 지금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좋은 삶'의 모습도 사실은 어떤 편견이지 않을까? 이 책의 작가들은 아울러 여기까지 짚어간다. 왜냐하면 그들에 대한 우리의 편견 역시도 천편일률적으로 통하는 '좋은 삶'이라는 모습에 우리가 너무 길들여져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행복을 알아보는 다큐멘터리에서 조사해 보니 한국인들이 바라는 삶의 모습은 똑같다고 나왔다. 예외없이 모두 부자가 되기를 원했다.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들보다 경쟁이 훨씬 치열한 것도 그만큼 바라는 모습의 삶이 똑같아서라고 한다. 그렇게 우리는 확고한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평가한다. 비정규직을 바라보는 편견 역시도 바로 여기에 기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곧잘 말한다. 사람들의 개성은 다 다양하다고. 일란성 쌍생아조차 개성과 원하는 것이 다 다르다고 하니 여기에 다른 말이 필요할 것 같지 않다. 그렇게 다 다른데 왜 원하는 삶의 모습은 똑같은 것일까? 그게 과연 자기가 바라는 삶이긴 한 것일까? 혹시 남들이 다 그것을 원하니까 덩달아 자기도 따라서 원하는 것은 아닐까? 이건 저마다 다른 다양한 개성과 한결같이 똑같은 이상적인 삶의 모습이 가지는 모순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떠올리게 되는 의문이 아닐까?
작가들이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도 그것이다. 모두에게 다 다른 개성이 있는만큼 모두에게 어울리는 삶의 모습 또한 다르다는 것 말이다. 이 책이 무지개 빛깔처럼 저마다 다른 다양한 개성들로 넘치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각 자에겐 각 자의 색깔이 있다는 것. 그것을 잊지말자는 의도다. 어른들뿐만 아니라 아이들 역시도 그렇다. 어른들이 주입한 삶이 아닌 각자의 개성으로 충만한 삶을 꿈꾸고 거기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마지막에 나오는 두 편, '강대희'와 '미미씨'의 이야기는 주목할만하다. 이 이야기들은 일종의 대안과 같다. 다른 삶의 방식을 살면서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중 한 이야기의 주인공 강대희씨는 자칭 일본어 번역가이지만 월수입은 겨우 40만원에 지나지 않는다. 그 중 월세로 10만원을 내고 아버지의 집 방 한 칸을 빌려서 산다. 수입이 있다고 하나 이런 처지이기 때문에 그는 거의 백수나 다름없다. 같은 다세대 주택의 사람들도 그렇게 여긴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런 처지에 전혀 주눅들지도 않고 당당하게 자신은 행복하다고 말한다. 높은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늘 고된 아르바이트에 시달리며 우울한 대학생 김태희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자기 최면에 빠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강대희씨는 진심이다. 그는 왜 자신이 행복한지 김태희에게 이렇게 들려준다.
"백수라기보다는 자발적 취업 거부자 라고 할까나! 나는 사람을 돈의 노예로 만드는 자본주의 시스템과는 안 맞는 사람이야. 그래서 최대한 그 안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거지. 나는 최소한의 노동을 하고, 최소한의 소비를 하며, 최대한의 행목을 누리고 살고 있어. 중략 나는 불행한 돈의 노예보다는 행복한 게으름뱅이의 삶은 선택한 거야, 난 가난뱅이이지만 행복해"
" 가난한데 어떻게 행복해요?"
" 돈 없어도 행복한 나라가 있더라고. 돈 없어도 행복한 나처럼"
" 말도 안 돼! 그런 나라가 어디 있어요?"
" 바로 부탄이라는 나라야, 강대국인 중국과 인도 사이에 끼어 있는 아주 조그마한 나라인데 국민총생산도 고작 6000달러 정도밖에 안 돼. 하지만 행복지수는 세계 1위를 차지했어. 웃기지 않아? 몇 만 달러의 강대국들이 당연히 행복지수가 높아야 하는 거잖아. (중략) 물질의 풍요보다는 정신의 풍요를 내세워 심리적인 안정을 찾는다는 거야."
(본문 138-139쪽 인용)
강대희씨의 이 말은 우리가 얼마나 경마장의 말처럼 한 곳만 보고 달리는지 깨닫게 한다. TV 프로그램 중에 '힐링 캠프'도 있듯이 요즘 우리 사회는 '힐링' 열풍이다. 책들도 온통 위로를 주는 것들이 대세다. 자살율도 이제 명실공히 세계 1위라고 한다. 왜 다들 힐링을 찾는지 저절로 이해되는 부분이다. 다들 아프고 우울하다. 우리는 부탄 보다 훨씬 잘 사는 나라인데도 왜 그럴까? 그것도 역시 경마장의 말처럼 눈마다 옆에 세워둔 칸막이로 가려져서 하나의 결승점 밖에는 못 보아서 그러는 게 아닐까?
왜냐하면 대부분 우울과 아픔의 원인들은 '남보다 뒤쳐졌다'하는 상대적 박탈감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모두 다 같은 곳을 항하여 레이스를 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나보다 앞서는 사람들만 눈에 들어오고 내가 얼마나 뒤쳐져 있는지만 각인되는 것이다. 서로가 각자 자기가 가진 개성에 어울리는 삶을 향하여 달리면 어떻게 앞과 뒤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강대희씨가 정말 들려주는 것은 이 말이다. 우리 주위에 많은 가능성들이 널려 있으며 그 가능성들을 찾고 싶다면 단순히 한쪽만 보게 만드는 칸막이만 치워버리면 된다는 것이다. 강대희씨의 말이 김태희가 생각하는 대로 자기 합리화가 아닌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내 생각에 지금 우리들 삶의 우울은 대부분 '눈'으로 부터 나오는 것 같다. 어디를 보고 있는가, 무엇을 보고 있는가가 결국 우리의 우울과 고통을 낳는 게 아닐까? 그래서 더욱 이상하다. 왜 그렇게 우울하고 아파하면서도 왜 유독 그런 것만 바라보게 되는 것인지, 혹시나 우리의 눈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지 않는게 말이다. 강대희씨의 말은 바로 거기에 대해 우리 스스로 의문을 가지게 만든다. 말하자면 이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고 인식의 전환을 넌지시 권하는 것이다. 그렇게 강대희씨나 미미씨의 이야기를 통해 이 책의 저자들은 비정규직에 대한 인식 전환 못지 않게 우리 삶에 대한 인식 전환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그러한 인식 전환이 비정규직을 오로지 개인의 문제로만 바라보는 편견을 제거해 줄 것이며 또한 그런 편견을 낳도록 만드는 마치 공장에서 규격화되어 만들어진 제품처럼 똑같은 우리들이 추구하는 삶의 모습에 있어서도 그것만이 정답이 아님을 일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이 책이 소중하지 않을까 싶다. 부모는 언제나 아이들의 행복을 바란다. 하지만 그럴 때 조차 어쩌면 우리들은 은연중 오로지 남에게만 맞춰진 행복의 기준을 그들에게 강요하고 있을 지 모른다. 행복이 성적 순이 아니듯 행복의 기준치는 저마다 주관적인 것으로 매우 다르다. 강대희씨는 강대희씨만의, 미미씨에겐 미미씨만의 행복이 있듯이. 아이들에게 이런 행복이 최고인거야 일러주기 보단 어떤 게 정말 네가 생각하는 행복이라고 생각하니 먼저 물어야 되지 않을까? 우리가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먼저 그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귀기울여 들여야 하듯이 말이다. 그렇게 부모와 아이가 서로 정말 원하는 삶이 어떤 것일까 같이 생각하고 나누는 데 있어서도 이 책은 정말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