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청 주관 미술영재 시험이 있는 날이다.

작년에 처음 미술영재원에 도전한 딸은 그 무시무시한 3차 실기 시험에 합격하고, 면접까지 갔다가 그만 탈락하였다.
실기까지 되었다가 마지막 관문에서 탈락하니 더 안타깝고 아까웠던 기억이 난다.
교육청 미술영재원은 5,6학년 20명으로 구성되는데
작년에는 5학년 아이는 달랑 1명만 되고, 19명이 6학년으로 구성되었다.
아마 우리 딸처럼 작년에 고배를 마신 아이들이 이번에도 재도전한 예가 많을 거라 생각한다.
우리도 일 년을 기다려왔다. 그렇다고 영재원 시험을 위해 특별히 노력한 것도 없고, 학원 다닌 것도 없다.
다만 이 날을 기다려왔다는 것일 뿐.

그런데 아침부터 일이 꼬였다.
준비물을 다 챙겨서 나왔는데 실내화 주머니를 빠뜨린 것이다.
차에 있겠지 싶어서 차 안을 살펴 봤으나 없어서 결국 집으로 올라갔다. 12층이라서 오고가는데 시간이 걸렸다.
"그러길래 어제 좀 일찍 자고 준비물을 미리 좀 챙기지. 늦게까지 안 자고 동생이랑 게임만 하더니..."
그나마 내가 문자 온 걸 확인해서 출발하기 전에 알았다. 차를 못 가져가서
택시를 기다리는데 택시는 오지 않고,
겨우 탔더니 기사 아저씨가 <수암초등학교>도 모르시고, 네비도 없는 거다.
중간에 내려서 다른 택시를 기다리는데 택시는 올 생각을 안 하고.
입실 시간은 다 되어가고... 완전 폭발 직전이었다.
" 영재 포기해, 시험장에 들어가지도 못하겠다" 이런 말이 나왔다.
겨우겨우 택시를 타고 가는데 신호에 다 걸려서 시간은 거의 입실 시간을 임박하고 있었다.
내리자마자 뛰어서, 교실을 확인하고 마지막 격려의 말을 해 주고 들여 보냈다.
우리는 양반이었다. 더 늦게 오는데 여유를 부리며 오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학부모대기장소에 내려와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딸이 수험표가 없다며 뛰어 온 것이다.
" 야, 내가 너 줬잖아? 아까 들어올 때 선생님들께 확인했고, 가방에 없어?"
" 가방에 없어." 
순간 열이 팍 났다.
이 아가씨가 도대체 오늘 무슨 정신으로 여기 와 있는 건지.....
같이 시험장으로 올라갔더니
시험장 입실을 도와주는 선생님께서 바닥에 떨어진 수험표를 주어서 교실로 보내셨다고 한다.
아까 실내화 갈아신으면서 또 떨어뜨린 것이다. 으~ 진짜 이 덜렁이를 어쩌면 좋아?
이렇게 덤벙거려서 시험이나 제대로 볼까 싶었다.
본인도 많이 놀랐을텐데 긴장을 풀고 시험을 보는지 걱정이 되었다.

10시부터 13시까지 장장 3시간에 걸쳐 실기시험이 이뤄졌다. 
그동안 학부모들은 주최측에서 보여주는 영재 관련 dvd를 시청하였다.
들을 만한 내용도 있었다.
아이들 시험이 종료될 무렵 영재 담당자님께서 질의 응답 시간을 허락해 주셨다.
작년에는 이런 것도 없었는데.
작년에 차마 물어 보지 못했던 말을 용기 내어 물어봤다.
" 작년에 실기까지 합격하고, 면접에서 떨어지니 더 억울했어요. 미술 영재들이 굳이 말까지 잘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말로 치면 6학년 아이들이 아무래도 5학년보다 나이가 더 많으니 말도 논리적으로 잘해서 더 유리한 것 아닌가요?" 하자
" 실은 실기 때 등수가 다 결정이 나고, 면접은 통과의례적인 면이 많습니다. 혹시나 결격사유가 있는 아이나 결원이 있을 것을 대비하여 1,5배수로 뽑는 것입니다. " 답변하여 주셨다.
"작년에는 예년과 다르게 뽑아 놓고 보니, 6학년이 19명이나 되어 깜짝 놀랐습니다." 하신다.
왜 내가 그런 질문을 드렸냐면
다른 부문의 영재들은 학년을 구분하여 영재를 선발하는데-5학년 10명, 6학년 10명 이런 식으로-
유독 미술부문만 학년구분없이 영재를 뽑기 때문이다.
그걸 물어봤어야 하는데 이제야 생각이 나네.
아무래도 학년구분 없이 선발하면 경험의 기회가 많은 고학년이 많이 선발될 확률이 높아지겠지. 
초등학교에서 1년 차이가 어딘데?

그렇담 우리 딸이 정말 대단한 것이다.
일단 사교육 없이 실기를 통과한 것이야말로 대단한 거라고 생각한다. 
또한 작년에 6학년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실기를 통과한 것이니 1.5배수 안에 든 것만 해도 영재성을 입증한 거나 다름없다.
그런 생각을 하니 아침에 딸에게 심한 말 했던 것이 마구마구 미안해졌다.

드디어 시험이 끝나고 현관에 내려갔다. 딸이 먼저 내려와 날 찾고 다녔다.
버스를 타고 어떤 문제가 나왔는지 들었다.
작년에는 처음 실기를 보니 좀 당황했는데 이번에는 그래도 경험이 있어서 별로 당황을 안 했나 보다.
즐겁게 실기를 치렀다니 그걸로 됐지 뭐. 합격 , 불합격은 이제 신의 뜻이고.
" 엄마가 아침에 심한 소리 하고, 짜증 내서 미안해"하자
" 다 잊어버리고 노래 부르면서 시험 봤어" 한다.
" 그래, 너는 그 점이 좋아. 뒷끝이 없다는 것"
어떤 문제가 나왔는지 이야기 나누며 노원역에 내려 요기를 좀 했다.
집에서 기다리는 아빠와 동생에게 먹을 것을 사다 주려고 하는 찰나,
수험표가 든 가방을 버스에 두고 내린 것을 깨달았다.

아침에 그 난리를 쳐 놓고, 이번에는 가방을 놔두고 내리다니? 정말 내 인내심 시험을 치르는 날인가 보다.
언성을 높여 딸을 나무랐다.
"어쩌면 가방을 놔두고 내릴 수가 있냐?
시험에 합격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수험표가 없으니...."
딸도 문제의 심각성을 눈치 채서인지 표정이 어두워졌다.
버스 회사에 연락해서 분실물 들어오면 연락을 주십사고 부탁을 드리고,
우리는 우리가 탔던 버스가 되돌아오길 기다렸다.
번호가 같은 버스가 오면 기사님께 물어보고, 차에 올라가 가방을 찾아봤지만 없었다.
4-5대를 그렇게 보내고, 하는 수없이 집으로 왔다.
지난 번에도 딸이 버스에다 내 양산 겸 우산-선물 받은 것-을 놓고 내려서 용서하고 넘어갔는데
또 이런 일이 반복되니 오늘은 정말 참기 힘들었다.
아침일도 겨우겨우 용서하고 넘어가려고 했건만, 수험표가 든 가방까지 잃어버리니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집에 와서 전후사정을 이야기하니
다혈질인 아빠는 나보다 더 노발대발
딸을 향한 직격탄이 나가고,
딸은 죄인처럼 울고.....
남편이 너무 심하게 야단을 치자 이번엔 내가 남편을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 당신은 그런 말 할 자격이 없다. 영재시험 치르는데 일어나서 배웅도 안 하고, 차로 픽업도 안 한 주제에 무슨 야단을 치냐고?" 나도 내 할 말을 다했다.
" 다른 아빠들은 다 데려다 주고, 데리러 오고 하더라. 당신이 무슨 아빠라고 애한테 그런 심한 말을 하냐?" 고 했다.
부부싸움까지 번질 태세였다.
" 영재시험같이 중요한 게 있으면 온 가족이 합심해서 도와줘야지 늦게 까지 게임하자는 동생이나 일어나보지도 않은 아빠나 다 똑같다. 야단 칠 자격 없다." 고 말이다.
그럴 때 버스회사에서 가방을 보관하고 있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여러 번 했는데 전화를 안 받았다며 위치를 알려 주셨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전화로 인사를 했다.
남편은 나보고 또 
" 왜 전화를 안 받아서 이 사단이 나게 하냐?" 고 억지를 부린다.
나 원 참. 
일단 가방부터 찾고, 부부싸움은 갔다 와서 하자고.

딸과 함께 택시를 잡아타고 버스종점으로 갔다.
시험을 치렀던 곳과 가까운 곳이었다.
우리가 전화하고 나서 15분 후에 기사분이 가져오셨다고 한다. 승객 중의 한 분이 기사님께 갖다 드린 것이겠지, 
십년감수했다.
기사님께 박카스 2박스를 사다 드렸다. 이걸 찾지 못했으면 아마 우리 집은 오늘 초토화가 되었을 것이다.
그 가방이 또 동생 가방이었으니 동생은 자기 가방 잃어버렸다고 징징거리겠지.
남편과 나는 또 자격 운운하며 싸우겠지. 
다시 택시 타고 집에 오면서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 아까 딸에게 심한 말 한 것 사과하라"고 했다. 
딸은 아빠의 사과를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하여튼 못말리는 부녀지간이야.

아까 영재 관련 dvd에서 본 내용 중에서
부모가 자식의 단점을 욕하곤 하는데 따지고 보면
자식의 문제점은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거란다. 
그러니 누가 누굴 욕하겠는가!
덜렁대는 건 아빠 닮았겠지. 정리 못하는 건 나 닮았겠지.

딸은 진짜 뒷끝이 없다. 가방을 찾고나자 금세 풀려서 헤헤거리고 웃는다.
뒷끝 없는 것도 지 아빠 닮았다.
그래서 99% 싱크로율을 자랑하는 부녀는 더 잘 부딪히곤 한다.
딸은 지금, 동생과 신 나게 <별의 커비>를 하고 있다.
난 하루 종일 긴장하고, 폭발하는 것 참느라 머리가 욱신욱신거리다가
이렇게 글을 쓰니 좀 안정이 된다.
아마 예전의 나 같았으면 장소에 상관 없이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댔을 것이다. 그래도 많이 참았다.
하지만 더 참을 걸. 그런 말은 끝까지 내뱉지 말 걸 하는 후회가 생긴다.
오늘 사건을 통해 딸도 뭔가를 깨닫고 배웠을 테다. 나도 마찬가지다. 나도 배웠다. 

딸이 미술영재 시험을 본 것인지
내가 인내심 시험을 본 것인지 헷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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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찬샘 2012-12-17 1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합격 소식으로 이 날의 일이 멋진 추억이 되기를...
집집마다 비슷하다는 사실에 왜 이리 안심이 되는지!!!

수퍼남매맘 2012-12-17 14:53   좋아요 2 | URL
하루가 이렇게 길게 느껴지기는 처음인 듯해요. 정말 다사다난한 하루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