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랜더스의 개 동화 보물창고 49
위더 지음, 원유미 그림, 최지현 옮김 / 보물창고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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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동이 터오는 아침에

길게 뻗은 가로수를 누비벼

잊을 수 없는 우리의 그 길을

파트라슈와 함께 걸었네

하늘과 맞닿은 그 길을

 

초등학교 시절 즐겨 부르던 노래다. 서정적인 이 노래에 슬픈 사연이 담겨 있었다는 걸 안 건 좀 더 자란 후였던 것 같다.  이렇게 맑고 순수한 영혼을 가진 넬로와 파트라슈가 그 추운 겨울, 그것도 크리스마스 이브 날 하나의 눈송이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이 노래를 부르면 좀 애잔해지곤 한다.

 

요즘 나에게 소위 말하는 명작 동화 시리즈가 계속 오고 있다. 학생 시절에 그들을 등한시하였던 것을 이제라도 제대로 읽어보라는 신의 계시로 알고 열심히 정독하고 있는 중이다. 딸을 보니 다른 책들을 추천해 주면 제법 읽는데도 명작시리즈는 선뜻 손에 잡질 않는다. 엄마를 닮았나?   명작 혹은 고전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작품들이 어느 정도의 나이게 되어서야 제대로 읽힐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어떤 분은 <고전 읽기 혁명>이라는 책을 내시면서 고전 읽기의 중요성을 피력하고 계시고, 나를 비롯한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고전을 읽히고자, 읽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지만 그게 그렇게 만만해 보이지 않는다. 우리 애를 봐도 그렇고 내가 가르친 아이들을 봐도 그렇다. 그렇다고 섣불리 완역본이 아닌 축약본을 읽히는 것은 더 위험해 보인다. 얼마 전  반 아이가 <빨간 머리 앤>을 읽는다고 해서 " 이거 너한테 어려울텐데?" 하자 " 엄마가 사 줬어요. "라고 대답한다.  1학년 아이가 읽기에는 아직 무리인데 말이다. 아직도 상당수의 부모들은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예전에 도서관담당자 연수에서 들었는데 지금 30-40대 학부모들은 특히 고전을 읽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고 한다. 그 세대가 어렸을 때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명작동화시리즈가 나왔다고 한다. 그때 명작동화를 읽고 자란 아이들이 부모가 된 지금 명작, 전집류를 굉장히 선호한다고 들었다. 나도 솔직히 우리 애가 명작을 읽어줬음 하지만 그게 어디 부모 맘대로 되는가! 다른 책은 자연스레 읽으면서 명작은 아직 대면대면한다.  그래도 옆에서 계속 재밌다고 감동적이라고 부추기고, 함께 읽어가면 언젠가는 자기 손으로 책장을 넘기는 날이 있겠지 생각해 본다. 읽히고 싶은 책이 있다면 부모가 읽어 줘라는 원칙을 잊지 말자. 그리고 기다리자.  나도 지금 이 나이에 고전을 읽고 있지 않는가!

 

하여튼 서론이 장황해졌다. <플랜더스의 개>는 내 기억으로 두 번 읽은 것 같다. 지난 번 읽었던 책은 완역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번에 다시 읽으니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이 많다. 가령 이 책은 파트라슈의 입장에서 썼다는 것과 넬로의 불행은 몽실이의 불행과 거의 흡사하다는 것 넬로가 그렇게 어리지 않았다는 것(15세) 등이다.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은 한 마디로 벨기에판 몽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조실부모하고, 할아버지와 가난하게 살면서도 순수함과 용기를 잃지 않고 사는 넬로, 그에게 파트라슈가 선물처럼 오고, 그들은 가난하지만 그래도 행복하게 산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정들었던 집을 떠나게 되고, 알로아의 아버지로부터 도둑으로 오인을 받고, 마을 사람들에게 차디찬 냉대를 받으면서도 그래도 끝까지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생을 포기하지 않던 넬로가 마지막 미술대회에서 수상을 하지 못하고 자시의 꿈이 꺾여 버리자 무너지는 것을 보고 맘이 무지 아팠다.

 

자신의 꿈이 꺾인다는 게 그것도 실력이 아니라 돈에 의해 꺾인다는 게 이렇게 절망스러울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 사람들의 모습 또한 돈 앞에 굽신거리며 비굴하게 구는 모습이 인간의 나약함과 인간의 잔인함을 동시에 보여 주고 있어서 인간의 본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만든 동화가 이렇게 비극적으로 끝난다는 것도 그 때 당시에는 대단한 센세이션을 일으켰을 것 같다.  권정생 작가님처럼 우리 어린이들이 읽는다고 해서 반드시 아름다운 이야기, 행복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우리의 진짜 현실을 보여 줄 필요도 있다는 그 말씀이 떠올랐다. 지금의 벨기에를 떠올리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가난함, 배고픔 등이 그 당시 1872년에는 그 곳 에서도 만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며 놀랍기도 하였다. 가난해서 먹을 것을 살 수 없고, 그래서 굶어 죽는다는 것. 그 지경까지 이르게 할 수 있을 만큼 인간이 잔인하다는 생각에 몸서리가 쳐진다. 이웃이 조금만 나눠 줘도 되는데 그러면 생명을 살릴 수도 있는데 말이다.......

 

성당에 걸린 루벤스의 그림을 그토록 간절히 보고 싶어하던 넬로. 그 그림이 루벤스의 그림이었다는 것은 나도 몇 해 전에 남편을 통해 안 사실이다. 그런데 완역본을 보니 진짜 여러 번 루벤스가 거론된다. 그런데 왜 예전에 몰랐을까? 이런 것이 바로 축약본의 문제점이 아닐런지.... 넬로가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루벤스의 그림을 보지 못하자 파트라슈에게 하소연 하는 장면이 이 책에서 찾은 나의 보물이다.

 

" 이 그릠을 못 보다니 너무 속상해.  파트라슈, 그것도 가난해서 돈이 없다는 이유로 말이야. 그분이 이 그림을 그렸을 때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여 주지 않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지. 분명히 그 분은 우리 같은 사람들도 언제든 와서 보라고 했을 거야. 그런데 그림들을 저기 저렇게 천으로 가려 두다니! 저토록 아름다운 그림들을 저 어두운 곳에 말이야! 저 그림들은 빛을 보지도 못해. 부자들이 와서 돈을 내지 않으면 아무도 봐 줄 사람이 없으니 말이야. 저 그림들을 볼 수만 있다면 난 죽어도 좋아. "

 

내가 보고 싶어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 또한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임이 분명한데 넬로는 그 그림을 마지막 죽음에 이르러서야 볼 수 있었다. 넬로의 마지막을 지켜 주었던 루벤스의 그림을 덧붙여 본다. 루벤스도 자신의 그림이 가난하든 부자든 상관 없이 모든 이들에게 보여져 마음의 평안을 주길 원했을 것이다. 가난해서 차별 받고, 못 먹어서 굶어 죽는 일이 없어야 할 터인데 그로부터 140년이 지난 현재도 여전히 가난하다고 차별 받고, 굶어 죽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십자가에 올려지는 그리스도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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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찬샘 2012-06-18 0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랜더스의 개는 생각보다 내용이 짧더라구요. 저는 다른 출판사의 책으로 읽었는데. 루벤스를 몇 번이나 되뇌어 보았습니다. 네로가 그렇게 그리던 작가 이름 정도는 알아 둬야지 하면서요.

수퍼남매맘 2012-06-18 15:16   좋아요 0 | URL
루벤스 자체로도 유명한 화가이지만 넬로가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그림의 작가인만큼 꼭 기억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위 그림을 실제로 보면 어떤 느낌이 들까요? 이렇게만 봐도 감동스러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