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연애하기

 

 

 ‘편독’을 한다. 그것에 대해 부끄럽게 여기기도 하고 고쳐야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올해 생각을 바꿨다. 편독은 부끄럽지 않고 고쳐야 할 것도 아니라고, 다만 그것이 문학이라면! 연초엔 같은 장르를 연달아 읽는 것은 지양하던 터였다. 지금 생각하면 왜 읽었나 싶은 자기계발서도 포함되어 있다. 할 일 없어 책을 읽던 시기였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봄이 오면서 바뀌었다. 많이 읽기 보다는 좋아하는 책을 골라 읽었고, 장르를 구별하여 순서를 정하기보다는 그저 내 마음 가는대로 읽고 싶은 책을 읽기로 했다. 그러다보니 자연 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다. 그 계기가 된 것은 기다리던 시집을 기분 좋게 읽으면서부터였다. 시집을 읽으며, 내가 이 좋은 문학을 굳이 왜 걸러서 읽었나 싶은 후회가 들었다. ‘문학, 참 좋은 거구나.’하고 새삼 느껴지는 것이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라는 시집의 제목처럼 ‘우리는 문학을 사랑해’라고 달콤하게 말하고파 지는 것이다.

 

 

 

 

오은 시인의 말놀이를 정말 좋아한다. 그래서 작년에 [너랑 나랑 노랑]이라는 산문집이 나왔을 때에도 제목만 보고도 ‘역시 오은!’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번 시집은 그런 기대와는 달랐지만 마음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의 제목이었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라니! [호텔 타셀의 돼지들]에서 느껴진 명랑함이 [너랑 나랑 노랑]에서 달달한 느낌을 더하더니 이번 시집은 자그마치 성숙하기까지 하다. 소년이 남자가 된 느낌이라고 하면 실례가 될까? 어쨌거나 난 이 두 번째 작품이 무척 좋다. 몇 번을 읽어도 어느 시를 읽어도 좋다는 말이다. 특히, <이국적 감정>의 시작되는 부분은 읽을 때마다 설렌다. 설레는 마음으로 첫 질문에 답을 기다리며 시를 읽다보면 어느 찰나 다르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정체성에 대한 자문도 하게 된다. 자고 일어나 생긴 쌍까풀에 대해, 자기 전 다시 돌아온 외까풀에 대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많은 감정들이 생긴다. 내 안에 있었던 수많은 감정들이 이국적으로 들떠 오른다. 그런 경험을 해주는 시가 고맙다. 이번 시집에 그런 시들이 많아 무척 반갑다. 시인의 시가 더 좋아졌다. 다음 시집을 기대하게 하는 것, 그 역할을 그의 두 번째 시집은 내게 충분히 해 주었기에 나는 잠자코 그의 새로운 시집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이국적 감정

 

자고 났더니

눈에 쌍까풀이 생겼다

자, 누구한테 고백해야 할까

 

- 시 <이국적 감정>

 

 

새삼 독서의 재미를 찾았지만 읽고픈 책에 비해 시간은 늘 부족하다. 그러니 시집이 아니고서야 두 번 세 번 읽는 것은 하지 못했다. 그러다 구효서 소설집의 독자모니터를 맡게 되었고, 그 소설집을 세 번 넘게 읽으며 재독의 묘미를 알게 되었다. 그 책은 지난 9월 [별명의 달인]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나는 이 소설집 이후 구효서 작가의 팬이 되었다.

구효서 작가님의 소설은 [별명의 달인]으로 처음 읽게 되었다. 젊은 소설가들의 소설을 즐겨 읽은 탓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별명의 달인]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느꼈던 점이 ‘젊은 작가 구효서!’였다. 이후 여러 소설들을 읽다 보니 다른 작품에서 느낀 매력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는 작품이 바로 [별명의 달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식함과 단단함으로 무장된 <바소 콘티누오>, 인간의 내면에 대한 질문을 던진 표제작 <별명의 달인>을 비롯하여 수록 작품들은 음악과 영상이 흐르는 듯도 하고 정지된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듯도 하다. 또 문장이 세련된 느낌이 드는가 하면 구수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내게 [별명의 달인]은 이쪽 아니면 저쪽이 아닌 그 경계에서 좌우가 모두 틀리지 않다고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해주었다. 다만 한 번 멈춰 서서 돌아보라고 말하는 듯 했다. 재독은 그 느낌을 더 풍성하게 해 주었다.

소설을 여러 번 읽는다는 것, 그것은 새로 읽을 때마다 삶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는 과정이었다. 지금 앨리스 먼로의 [디어 라이프]를 읽으면서도 다시 읽겠다 마음먹게 되는 것도 [별명의 달인] 덕분이다. [별명의 달인]은 내게 구효서라는 ‘젊은 작가’를 알게 해주고, 재독의 맛을 알게 해 준 고마운 경험이었다.

 

 

좋아하던 시인의 깊어진 모습을 발견하고, 처음 만난 소설가에게 점점 다가가는 나의 모습이 왠지 연애를 하는 사람의 몸짓처럼 느껴진다. 조금씩 익숙해진 우리, 이제는 좀 더 깊어질 차례인가?

김영하 작가는 내가 스물두 살에 [호출]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고 지금까지 꾸준히 읽어왔다. 하지만 꾸준히 읽되 꾸준히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연애할 때처럼 초기의 작품에 흥분되고 설레었다가 [검은 꽃]에 이르러 눈에 콩깍지가 씌고 이내 권태기가 찾아왔다. 그러다가 올여름 [살인자의 기억법]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제목만 보고도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기존의 책들을 넘는 소설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한 작가의 소설을 십여 년간 꾸준히 읽은 독자의 직감이라고도 할 수 있고 오래된 연인의 육감 같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직감이든 육감이든 예감이든 구리에서 숭실대까지 가는 지하철 안에서 이 책을 다 읽고 많이 흥분했다. 그리고 속으로 외쳤다. ‘김영하가 돌아왔다!’고. 그랬다. 김영하가 돌아왔다. 그것도 가장 김영하 다운 작품으로.

 [살인자의 기억법]은 짧기에 흡입력이 강하고 앉은 자리에서 두세 번도 읽을 수 있을 만큼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읽고 나서 많은 물음들이 생겨난다. ‘그래서 지금까지 김병수의 기억이 모조리 틀렸다는 거야?’, ‘그럼 은희의 통화를 엿들은 것도, 은희의 결혼도 모두 환상이었다는 거지?’에서 시작한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책을 앞뒤로 많이도 펼쳤다 넘겼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환상과 현실이 하나로 연결된 듯 했다. 그에게 살인은 무엇이었기에 이런 증상을 남기는 것일까? 자신에게 던진 물음처럼 그는 악마 아니면 초인 혹은 그 둘 다인 것인가? 아버지를 죽인 것과 은희 엄마를 죽인 것의 이유가 그 물음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까? 등등의 질문들이 이어졌다. 결국 이런 저런 물음들만 만들고 아무런 답을 내지 못한다. 다만 막연히 추측할 뿐이다. 읽으면서 혹은 읽고 나서 수많은 물음을 만들어 내는 것, 그거면 족하다.

 

 

오래된 연인마저 14년 만에 멋진 이벤트를 해 주었고 나는 이것저것 재지 않고 마냥 기뻐할 만큼 아직은 그를 좋아한다. 하지만 여자의 마음은 다음 이벤트를 기대한다는 것, 오은 시인과 구효서, 김영하 작가도 알고 있으려나? 세 편의 작품은 각각 다르게 내게 다가왔지만 나의 대답은 같다. “작가님, 다음 작품은요?” 그들의 다음 시집, 소설을 내가 상상할 수는 없지만 그 책들을 무릎 위에 펼쳐놓는 상상은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나는 문학을 사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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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 김치를 가지러 시댁을 가면서 [디어 라이프]를 가져갔다. 가고 오는 차 안에서 읽다보니 많이는 못 읽었다만 아이가 크게 엄마를 찾지 않아 몇 편의 단편을 읽었다. 그리고 지금도 읽는 중이다.

밑줄을 그은 부분을 정리해 본다. 순서는 내가 읽은 순서이다. 딱히 정해놓은 것은 아닌데 표제작을 먼저 읽고, 그 이후엔 제목에 끌리는 순으로 읽는 중이다.

 

 

 

 

 

 

 

#기차

소설이 시작될 무렵의 한 문단에 밑줄을 그었다. 꽤 긴 단편이었는데 무척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잭슨의 여정을 따라 가다보면 소설은 끝이 나는데 초반에 밑줄 친 그 문단을 다시 읽게 된다.

 

기차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무언가를 취소하는 행위다. 몸을 각성시키고 무릎을 준비시키고 다른 공기의 세계로 뛰어든다. 당신이 기대한 것은 공허다. 그런데 오히려 당신이 얻은 것은 무엇인가? 곧바로 새로운 환경이 당신을 덮쳐, 당신이 기차에 앉아 창밖을 바라볼 때는 결코 몰랐던 방식으로 당신의 주의를 끈다. 당신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어디로 가려고? 당신이 몰랐던 존재들이 당신을 지켜보는 느낌. 방해자가 된 듯한 느낌. 주위의 존재들이 당신은 볼 수 없는 곳에서 당신에 대해 자기들끼리 결론을 내린다. (232-233쪽)

 

이 소설을 읽으며 앨리스먼로의 소설에서 두 행을 띄운 부분들이 많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 여백이 주는 묵직한 여운이 어떤 깊은 숨을 내쉬게 했던 것 같다. 사진 상의 밑줄 그은 부분도 무척 맘에 드는 문장이다.

 

 

#자존심

앨리스 먼로가 [디어 라이프]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한다. 일단 흥미롭고 잘 읽혔다. 건조하게 서술하는 것 같은데 단편이 줄 수 있는 최상급의 생각의 여백을 주는 작가 같다.  왜 그녀의 노벨 수상 이유가 '현대 단편 소설의 거장'이라는 짭은 수식어로 끝이 났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책의 시작을 '자존심'으로 시작하는 것도 좋았겠다 싶다. 많은 문장들에 밑줄이 그어져 있다.

지금 생각하면 내 학창 시절은 내가-내 얼굴이- 어떻게 보이는지에 익숙해지다가,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익숙해지다가 다 가버린 것 같다. (189쪽)

 

"이번에도 나는 그 생각을 더 일찍 해내지 못했네요." 그녀가 말했다. "살면서 늘 그랬던 것처럼요. 나한테 뭔가 문제가 있나봐요. 나는 늦장을 부리며 자꾸 생각하는 걸 미뤄요. 늘 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195쪽)

 

오래 살다보면 많은 문제들이 그냥 해결된다고. 선택된 사람들만 들어가는 모임에도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어떤 장애를 가지고 살았건 그 시기에 이르면 많은 문제들이 상당수 해결된다. 모두의 얼굴이 고통을 경험했다. 당신의 얼굴만이 아니라. (197쪽)

 

얼마나 아름다운가. 여기서 번쩍 저기서 번쩍 춤을 추듯 움직이지만, 서로의 길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 (중략)-우리는 그 순간 한없이 즐거웠다.  (200쪽)

 

#안식처

네 편의 단편을 읽었는데 이 단편의 마지막 장 하단에 적힌 작품 제목에 별을 크게 그려놓았다. 네 편 중에는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안식처'라는 건조한 제목에 마찬가지로 건조한 내용으로 이렇게 내 마음에 파동을 만들 수 있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단편집에 '작업실'이라는 제목이 있던데 그 작품도 이런 느낌일까?하는 기대가 든다.

지적인 면에서는 진지하지만 환경은 어수선했던 우리집에 대해 내가 가졌던 애착은 차츰 희미해졌다. 이만한 안식처를 유지하려면 여자가 자신의 에너지를 모두 쏟아야했다. (149쪽)

 

"남자의 집은 그의 캐슬castle이지." 그녀가 말했다. (163쪽)

 

이모 부부와 함께 사는 동안 내 생각은 얼마간 바뀌었다. 예컨대 나는 모나 같은 사람들에 대해 더는 무비판적이지 않았다. -(중략)- 바이올린과 그것을 들고 있는 다소 바보 같은 자세 때문도 아니었다. 음악 자체와 음악에 대한 그녀의 헌신 때문이었다. 여자들은, 무엇에 헌신하든 그것 때문에 바보 취급을 받는다. (166쪽) 

 

정리하다보니 그녀의 문장에는 여백만큼이나 쉼표도 많다. 쉼표 따라 나도 쉬어 본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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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애정을 담아 [디어 라이프] 문장들
    from 책만 먹어도 살쪄요 2013-12-20 01:08 
    누군가를 위해 옮겨 적어 본 [디어 라이프] 속 문장들. 12월을 이 한 권과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젠 물리적 안녕을 고해야 할 시간.
 
 
 

[헤밍웨이의 글쓰기]라는 책은 우연히 도서관에서 책구경을 하던 중에 눈에 띄여 골라본 책이다. 사실 글쓰기에 대한 책들이 무척 많은데 다들 나와는 맞지 않는 글쓰기법을 너무 세세하게 기술하여 몇 장 읽지도 못하고 덮어버리는 경우가 많아서 이번엔 얇고 가볍게 그러나 '헤밍웨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선택했는데 지금까지는 잘 읽고 있다. 글쓰기 법을 문화강좌에서 말로 할 것을 글로 길게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헤밍웨이가 각종 글에서 글쓰기에 대해 언급한 글을 엮은 책이라 뭘 배운다기 보다는 느낀다는 마음으로 읽고 있다. 다만, 엮은이의 글은 그렇다쳐도 옮긴이의 글이 왜 헤밍웨이의 글보다도 앞서 위치했는지 알 수가 없다. 소설도 아니고 번역이 유달리 어려울 것 같지도 않은데 뒤에도 없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엮은이의 말이면 충분하다.

 

밑줄(실제로는 도서관 책이라 밑줄 긋지 않고 다이어리에 옮겨적었다.)그은 부분을 정리해 본다. 원본 출처는 책을 참고^^

 

생쥐 : 그럼 상상력은요?

Y.C. : 정직성과 더불어 좋은 작가가 반드시 갖춰야 할 요건이지. 경험을 통해 더 많이 배울수록 더욱 참된 상상력을 가질 수 있지. 그리고 신뢰할 수 있는 상상력을 펼쳐 보임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말하는 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라 믿게 만들 수 있다네.

 (17쪽)

-> '신뢰할 수 있는 상상력'이라는 말을 새겨야겠다.

 

  처음부터 장황한 글을 쓰거나, 뭔가를 과시하려는 것처럼 글을 쓰기 시작하면 복잡한 무늬와 장식들을 잘라내고 처음에 썼던 단순하고 진실한 평서문 하나로 다시 시작하면 된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25쪽)

->헤밍웨이의 말이 무슨 말인지는 이해하겠다만 번역만 두자면 뭔 소린지...우려가 현실로!

 

생쥐 : 하루에 집필하는 양이 얼마나 되나요?

Y.C: 가장 좋은 방법은 글이 잘 풀리고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있을 때, 바로 그때 중단하는 걸세. -----항상 글이 잘 풀릴 때, 멈추게.  (47쪽)

->선입견을 깬 그 한 마디 '글이 잘 풀릴 때, 멈추게'

 

  연필로 글을 쓰면 세 가지 관점에서 내가 원하는 것이 독자에게 전달되는지 확인할 수 있다. 먼저 글을 전체적으로 다시 읽어볼 때이고 그 다음은 타이핑을 할 때 글을 손 볼 기회가 한 번 더 있다. 그리고 교정지를 볼 때 다시 고칠 수 있다. 처음에 연필로 글을 쓰면 교정할 수 있는 기회가 3분의 1이 더 많아진다. 3할대는 야구의 타자에게도 무척 높은 승률이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글의 호흡이 길어져서 더 쉽게 개선시킬 수 있다. (61-62쪽)

-> 나도 연필 사랑하는데...?라며 막 끼워 맞추기 하는 중^^

 

  나는 글쓰는 일이 정말 좋습니다. 글을 쓸 때처럼 행복할 때가 없어요. 내가 매일 쓴 글자 수를 세는 걸 보고 찰리가 놀려대는 건 나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글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아니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422단어를 정확하게 썼을 때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지 모르기 때문일 겁니다.

  1,200단어나 2,700단어를 쓴 날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행복감을 느낍니다. 400-600단어 정도가 내가 훨씬 더 잘 쓸 수 있는 속도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그 정도에 늘 만족합니다. 하지만 320단어밖에 못썼을 때도 기분이 좋습니다. (68-69쪽)

->정말 아름다운 문장이다. 이 글로도 충분히 헤밍웨이의 글이 얼마나 훌륭한지 알 수 있다.

 

"먼저 작가에게 해를 입히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것이 무엇인지 말해주시겠어요?"

나는 심오하게 말했다.

"정치, 여자, 술, 돈, 야망이지. 그리고 정치, 여자, 술, 돈, 야망이 결여된 것이라네." (95쪽)

글쓰는 일은 정말 어려워요. 산문을 쓰는 일은 전적으로 매달려 해야 하는 일이고 가장 좋은 글들은 모두 잠재적 의식 속에서만 만들어집니다. 그러니 잡무, 서평, 평론 등등의 일로 바쁠 때에는 아무것도 쓸 수가 없지요. (107-108쪽)

-> 그러니까 나는 지금 아무것도 쓰지 않는 상태라는 말씀이시다...

 

칸타나 호텔이나 팜플로나 또는 스페인에서 편지를 써주게. 자네는 편지를 쓰고 싶지 않나? 나는 편지가 쓰고 싶네. 편지를 쓰는 건 일은 하지 않으면서도 뭔가 해냈다는 느낌을 주는 아주 멋진 방법이거든.(109쪽)

-> 아, 그렇구나. 그래서 내가 편지를 쓰는 것일 수도 있겠구나. 결국은 불안을 숨기기 위한 제스처라는 말이구나.

 

생쥐 : 그건 대학에서 가르치는 글쓰기 방식이 아닌데요.

Y.C. :  난 그런 건 잘 모르네. 대학에 다녀 본 적이 없거든. 하지만 글을 쓸 줄 안다면 어떤 빌어먹을 놈이 대학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겠나. (126쪽)

-> 글쓰기 어쩌고 저쩌고 책이나 강좌에 대한 의문들이 확 올라온다.

 

상징적 표현이란 건 없다는 거죠. 바다는 그저 바다입니다. 노인은 그저 노인일 뿐입니다. 소년은 소년이고 물고기는 물고기입니다. 상어는 그냥 상어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상징적 표현이란 것은 모두 헛소리입니다. 그 이상의 의미란 자신이 알고 있을 때, 그 이상을 보는 것이지요.(139쪽)

-> 또 한 번 헤밍웨이에게 퐁당!

 

개인적인 비극은 잊어버리게. 우리 모두 애초부터 실패한 인생이네. 특히 자네는 지독하게 상처를 입어야 진지하게 글을 쓸 수 있을 걸세. 지독한 상처를 입으면 그걸 활용하게. 숨기려 들지 말고, 과학자처럼 그 상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게. 자네 자신이나 자네 가족들에게 생긴 상처라고 해서 그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네. (152쪽)

-> 사연팔이라고 생각해서 드러내지 않는 것이고, 그런 글들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중요해서 숨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혀 중요하지 않아서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헤밍웨이와 처음 생각이 반대가 되었다.

 

신비주의는 불가사의하고 알 수 없는 일을 의미한다. 세상에는 많은 신비가 있다. 하지만 능력 부족으로 쓴 애매모호한 글들은 신비롭고 불가사의한 일이 아니다. 사이비 서사적 특질을 주입하여 부풀려진 저널리즘 역시 문학이 될 수 없다. (180쪽)

 

사실 명언집 같은 책 별론데, 이 책을 읽으면서 헤밍웨이에 대한 애정이 더 깊어졌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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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들 친구 엄마에게 책선물을 받았다. [엄마, 내가 행복을 줄게]

평소 우리 모자를 좋게 보아주시는 분인데 자신이 좋아하는 책에 나오는 엄마와 아들의 모습이 마치 우리 모자의 모습과 느낌이 비슷해서 선물하셨단다.

 

오소희 작가는 [사랑 바보]로 많이 알려진 작가인데 언뜻 보기에 육아서로 보일(본인도 글 초반에 이 책이 육아서로 분류될 것임을 짐작하셨다^^) 이 에세이에는 그녀의 아들 중빈이와의 일상이 담겨져 있었다. 아직 처음만 읽어본 터라 구체적 내용은 다 알지 못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정말 따뜻했다. 이렇게 아이와 살아가고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선물해 주신 분이 이 두 사람을 우리 모자에 비교해주시다니 황송해졌다. 내가 그 정도는 아닌데? 뭐 그런 부끄러움이랄까, 난처함이랄까, 송구함이랄까 하는 감정이 들었다.

 

초반에 나오는 에피소드 중 감기에 걸린 엄마를 치료(?)해주는 아들의 이야기를 소리 내어 아들에게 읽어주었다. 아들이 귀를 쫑긋하면서 듣는데 입꼬리가 점점 올라가더니 다 읽고 나니 얼른 와서 나를 안아준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라고.

 

 

 

 

 

 

 사실 오소희 작가에 대한 큰 궁금증은 없었는데 이 책을 선물받고 나니, 또 선물해주신 분이 좋아하는 작가라고 하니 궁금증이 갑자기 일어났다. 그리고 검색을 해 보니 무척 많은 책을 쓰신 에세이스트였다. 기회가 되면 다른 책들도 함께 읽어보고 싶다.

 

 

 

 

 

 

 

 

 

 

 

그나저나 온라인 카페나 서점, 출판사가 아닌 실제로 일상 속에서 자주 만나는 누군가에게 책선물을 받은 것은 실로 백만년 만의 일처럼 느껴졌다. 인터넷 세상에선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왜 내 주변엔 나와 취향이 맞는 책을 함께 읽을 사람이 없는지, 두고두고 아쉽다. 그러하기에 책선물이 더더욱 고맙다.

 

 

 

 

내가 선물 받은 책은 구판, 12월 16일 북하우스에서 개정판으로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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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작가의[ 4월의 미 7월의 솔]이라는 제목에 기대어 보자면 11월은 그 둘을 합쳐 '미솔의 달'일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계산을 한 적이 있다. 근데 책구매의 경우만 보자면 11월 나의 책구매는 조화롭게 미와 솔을 동시에 치지 못하고 미만 쳤다. 그냥 미친 구매의 달이다.

 

얼마 전 북펀딩한 [다시 태어나다]를 샀다.  북펀딩에 참여한 책이기도 하고, 북펀딩 당시 2쇄에 독자북펀딩 명단이 기재가 된다고 하여 기왕 살 거면 기념이 되는 2쇄를 사고자 해서 미뤄두었었다. 혹시 몰라 이후출판사 블로그에 여쭤보니 다음 주 2쇄를 찍을 예정이지만 명단은 1쇄에 기재되어 있으므로 '지금이 적기'라는 조언을 받아들여 어제 휴대전화로 구매했다.

 

이 책 말고도 몇 권 더 살 책이 있었고 늘 그렇듯 5만원을 넘기고 일력을 받을 예정이었는데 어찌저찌해서 주문 취소를 하고 다시 결제를 하려고 했는데 무슨 책이 장바구니에 담겼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거다.  당황했다. 나 자신에게 실망하기도 했고 뭔가에 맞은 듯 했다. 세 권은 분명했다. 그리고 나머지를 어찌저찌 생각해냈으나 다시 담으려고 보니 굳이 당장 읽을 일이 없었다. 그 즈음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너, 일력 필요해?" 아니다. 휴직 중이고 집에서 굳이 일력을 쓸 일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채웠던 책들 중에 몇 권을 빼고 꼭 사고자 했던 3권만 구매했다.

 

 

오래도록 기다렸던 [수학자의 아침]이 기다린 동안 출간이 늦어져서 때를 놓쳤다. 그리고 장바구니 채우기 버릇 때문에 또 늦어진 것이다. 산 책 중에 가장 속상한 책이다. 더 일찍 만날 수 있었던 책인데....오늘 내일 올 것이니 반가운 마음으로 맞이할 테다.

 

 

 며칠 전 교감 선생님과 통화를 했다. 아름다운 문장과 삶에 대한 통찰력이 있는 작품을 좋아하는 그분께 선물을 하기 위해 [별명의 달인]을 구입했다. 잘 잊어버리시는 그분은 아마 이번 주 내라 식사를 함께 하자는 언약을 또 깜박하셨겠지만 전혀 서운하지 않다. 오히려 그 모습마저도 사랑스럽다고나?^^ 이번 주 약속이 진행되지 않는다면 우편으로 보내드려야겠다.

 

 

3권을 구입하고 나서도 스스로 대견했다. 이 나이에 이걸 가지고 스스로를 대견해한다는 것이 말이 될까 싶어 어이없기도 하지만 요즘의 나의 책구매는 살짝 무분별하다. 지갑 사정은 둘째로 치더라도 책을 사기 보단 읽는 일을 더 사랑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그 길로 가려는 아주 사소한 몸짓이 내게 읽힌다. 늘 잘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작은 몸짓도 소중한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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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1-20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이끄는 대로 즐겁게 장만하고 즐겁게 읽겠지요.
언제나 좋은 마음 되어 책빛 누리셔요~

그렇게혜윰 2013-11-22 10:15   좋아요 0 | URL
밖에 휘둘리기 보단 안의 의지로 결정해야 더 빛나는 것 같아요^^

단발머리 2013-11-21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수학자의 아침]을 맞아보고 싶군요.
지금은 오후지만요~~^^

민음사 팸세는 잘 다녀오셨어요?

그렇게혜윰 2013-11-22 10:32   좋아요 0 | URL
육체적 노동의 시간을 거쳐 70%할인가로 구매했어요! 갈때마다 힘드네요^^:

수학자의 아침은 어제 늦은 밤에 와서 아직 펼쳐보지도 못했네요^^ 조만간 좋은 시 올려보도록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