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연애하기

 

 

 ‘편독’을 한다. 그것에 대해 부끄럽게 여기기도 하고 고쳐야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올해 생각을 바꿨다. 편독은 부끄럽지 않고 고쳐야 할 것도 아니라고, 다만 그것이 문학이라면! 연초엔 같은 장르를 연달아 읽는 것은 지양하던 터였다. 지금 생각하면 왜 읽었나 싶은 자기계발서도 포함되어 있다. 할 일 없어 책을 읽던 시기였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봄이 오면서 바뀌었다. 많이 읽기 보다는 좋아하는 책을 골라 읽었고, 장르를 구별하여 순서를 정하기보다는 그저 내 마음 가는대로 읽고 싶은 책을 읽기로 했다. 그러다보니 자연 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다. 그 계기가 된 것은 기다리던 시집을 기분 좋게 읽으면서부터였다. 시집을 읽으며, 내가 이 좋은 문학을 굳이 왜 걸러서 읽었나 싶은 후회가 들었다. ‘문학, 참 좋은 거구나.’하고 새삼 느껴지는 것이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라는 시집의 제목처럼 ‘우리는 문학을 사랑해’라고 달콤하게 말하고파 지는 것이다.

 

 

 

 

오은 시인의 말놀이를 정말 좋아한다. 그래서 작년에 [너랑 나랑 노랑]이라는 산문집이 나왔을 때에도 제목만 보고도 ‘역시 오은!’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번 시집은 그런 기대와는 달랐지만 마음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의 제목이었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라니! [호텔 타셀의 돼지들]에서 느껴진 명랑함이 [너랑 나랑 노랑]에서 달달한 느낌을 더하더니 이번 시집은 자그마치 성숙하기까지 하다. 소년이 남자가 된 느낌이라고 하면 실례가 될까? 어쨌거나 난 이 두 번째 작품이 무척 좋다. 몇 번을 읽어도 어느 시를 읽어도 좋다는 말이다. 특히, <이국적 감정>의 시작되는 부분은 읽을 때마다 설렌다. 설레는 마음으로 첫 질문에 답을 기다리며 시를 읽다보면 어느 찰나 다르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정체성에 대한 자문도 하게 된다. 자고 일어나 생긴 쌍까풀에 대해, 자기 전 다시 돌아온 외까풀에 대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많은 감정들이 생긴다. 내 안에 있었던 수많은 감정들이 이국적으로 들떠 오른다. 그런 경험을 해주는 시가 고맙다. 이번 시집에 그런 시들이 많아 무척 반갑다. 시인의 시가 더 좋아졌다. 다음 시집을 기대하게 하는 것, 그 역할을 그의 두 번째 시집은 내게 충분히 해 주었기에 나는 잠자코 그의 새로운 시집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이국적 감정

 

자고 났더니

눈에 쌍까풀이 생겼다

자, 누구한테 고백해야 할까

 

- 시 <이국적 감정>

 

 

새삼 독서의 재미를 찾았지만 읽고픈 책에 비해 시간은 늘 부족하다. 그러니 시집이 아니고서야 두 번 세 번 읽는 것은 하지 못했다. 그러다 구효서 소설집의 독자모니터를 맡게 되었고, 그 소설집을 세 번 넘게 읽으며 재독의 묘미를 알게 되었다. 그 책은 지난 9월 [별명의 달인]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나는 이 소설집 이후 구효서 작가의 팬이 되었다.

구효서 작가님의 소설은 [별명의 달인]으로 처음 읽게 되었다. 젊은 소설가들의 소설을 즐겨 읽은 탓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별명의 달인]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느꼈던 점이 ‘젊은 작가 구효서!’였다. 이후 여러 소설들을 읽다 보니 다른 작품에서 느낀 매력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는 작품이 바로 [별명의 달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식함과 단단함으로 무장된 <바소 콘티누오>, 인간의 내면에 대한 질문을 던진 표제작 <별명의 달인>을 비롯하여 수록 작품들은 음악과 영상이 흐르는 듯도 하고 정지된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듯도 하다. 또 문장이 세련된 느낌이 드는가 하면 구수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내게 [별명의 달인]은 이쪽 아니면 저쪽이 아닌 그 경계에서 좌우가 모두 틀리지 않다고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해주었다. 다만 한 번 멈춰 서서 돌아보라고 말하는 듯 했다. 재독은 그 느낌을 더 풍성하게 해 주었다.

소설을 여러 번 읽는다는 것, 그것은 새로 읽을 때마다 삶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는 과정이었다. 지금 앨리스 먼로의 [디어 라이프]를 읽으면서도 다시 읽겠다 마음먹게 되는 것도 [별명의 달인] 덕분이다. [별명의 달인]은 내게 구효서라는 ‘젊은 작가’를 알게 해주고, 재독의 맛을 알게 해 준 고마운 경험이었다.

 

 

좋아하던 시인의 깊어진 모습을 발견하고, 처음 만난 소설가에게 점점 다가가는 나의 모습이 왠지 연애를 하는 사람의 몸짓처럼 느껴진다. 조금씩 익숙해진 우리, 이제는 좀 더 깊어질 차례인가?

김영하 작가는 내가 스물두 살에 [호출]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고 지금까지 꾸준히 읽어왔다. 하지만 꾸준히 읽되 꾸준히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연애할 때처럼 초기의 작품에 흥분되고 설레었다가 [검은 꽃]에 이르러 눈에 콩깍지가 씌고 이내 권태기가 찾아왔다. 그러다가 올여름 [살인자의 기억법]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제목만 보고도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기존의 책들을 넘는 소설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한 작가의 소설을 십여 년간 꾸준히 읽은 독자의 직감이라고도 할 수 있고 오래된 연인의 육감 같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직감이든 육감이든 예감이든 구리에서 숭실대까지 가는 지하철 안에서 이 책을 다 읽고 많이 흥분했다. 그리고 속으로 외쳤다. ‘김영하가 돌아왔다!’고. 그랬다. 김영하가 돌아왔다. 그것도 가장 김영하 다운 작품으로.

 [살인자의 기억법]은 짧기에 흡입력이 강하고 앉은 자리에서 두세 번도 읽을 수 있을 만큼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읽고 나서 많은 물음들이 생겨난다. ‘그래서 지금까지 김병수의 기억이 모조리 틀렸다는 거야?’, ‘그럼 은희의 통화를 엿들은 것도, 은희의 결혼도 모두 환상이었다는 거지?’에서 시작한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책을 앞뒤로 많이도 펼쳤다 넘겼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환상과 현실이 하나로 연결된 듯 했다. 그에게 살인은 무엇이었기에 이런 증상을 남기는 것일까? 자신에게 던진 물음처럼 그는 악마 아니면 초인 혹은 그 둘 다인 것인가? 아버지를 죽인 것과 은희 엄마를 죽인 것의 이유가 그 물음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까? 등등의 질문들이 이어졌다. 결국 이런 저런 물음들만 만들고 아무런 답을 내지 못한다. 다만 막연히 추측할 뿐이다. 읽으면서 혹은 읽고 나서 수많은 물음을 만들어 내는 것, 그거면 족하다.

 

 

오래된 연인마저 14년 만에 멋진 이벤트를 해 주었고 나는 이것저것 재지 않고 마냥 기뻐할 만큼 아직은 그를 좋아한다. 하지만 여자의 마음은 다음 이벤트를 기대한다는 것, 오은 시인과 구효서, 김영하 작가도 알고 있으려나? 세 편의 작품은 각각 다르게 내게 다가왔지만 나의 대답은 같다. “작가님, 다음 작품은요?” 그들의 다음 시집, 소설을 내가 상상할 수는 없지만 그 책들을 무릎 위에 펼쳐놓는 상상은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나는 문학을 사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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