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일기
김연수 지음 / 레제 / 2019
syo는 운동에 대해서 잘 모르며 걔랑 서로를 더 깊이 알아가고 싶은 애정도 없지만, 이런 대화는 어쩐지 익숙하다. 쌤, 이놈의 뱃살 정말 죽이고 싶어요. 윗몸일으키기를 하루에 몇 개씩 하면 될까요? 회원님, 뛰세요. 근력은 근력이고 유산소는 유산소. 물론 근육량과 기초대사량의 관계라든가, 아무래도 근육이 있으면 옷 위로 봤을 때 훨씬 탄탄하고 덜 뚱쳐 보인다든가 하는 점들로 미루어 보았을 때 근력운동과 살빼기가 완전히 서로 쌩까고 지내는 사이까지는 아닌 것 같다. 그렇지만 역시 배 집어넣을 때는 유산소. 그런데 유산소의 특성은 어느 부위만 집중적으로 빠지는 게 아니라는 것. 온몸이 골고루 빠진다. 고로 배만 집어넣고 싶은 사람은 다른 것들도 같이 집어넣어야 한다. 살 빼는 입장에서 유산소가 이런 고집스런 평등사상을 지녔다는 게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글을(비매품, 증정품이지만) 만지는 사람으로서 가장 부럽고 탐나는 능력은 끝내주는 위트도, 화려한 기교도 아니다. 그저 매일 꾸준히 쓰는 힘이다. 매일 써보겠노라 한동안 끙끙대본 사람은 이 일에 이중의 함정이 깔려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일단 매일 뭔가를 짜내는 것 자체가 어렵다. 하지만 그와 비교도 안 되게 더 어려운 것은 매일의 글을 고르게 써내는 일이다. 짜내려고 들면 포도 씨에서도 기름이 나오고, 여드름을 짜도 손끝에 개기름은 살짝 묻는 법이므로, 짜내는 일이라면 필부필부도 어떻게든 해낼 수 있다. 그러나 오늘의 포도씨유 한 방울, 개기름 1마이크로그램으로 어젯밤 그 광란의 캠프파이어를 재현하는 것은 범인凡人의 일이 아니다. 내공이 필요하다. 하늘의 뜻도 조금은 필요하다. 하늘의 뜻조차 내 편으로 만드는 내공이면 더할 나위가 없다.
쓴다는 마음으로 깝친 것도 어언 3년에 다가간다. 짧다면 짧은 이 기간 동안 얻은 글쓰기에 관한 짧은 지혜가 있다. 글 솜씨는 서로 독립적인 두 가지 형태로 성장한다. 내가 쓸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문장이 더욱 아름다워진다. 그리고 내가 기어이 쓰고야 마는 가장 후진 문장이 덜 후져진다. 한두 번 쓰고 말 사람에게는 첫 번째 솜씨가, 오래 쓸 사람에게는 두 번째 솜씨가 중요하다. 발로 쓰는 문장의 고도, 글발고도를 높이는 일.
어떻게든 매일 뭔가를 쓴다고 밝히는 대작가들의 명단을 나열하는 것은 똥멍청이 인증 받는 고상하면서도 참신한 방식이다. “전 그냥 내킬 때 휙 써버립니다. 그랬더니 퓰리쳐를 받았어요.” 이런 말을 하는 작가의 이름을 쓴 다음, ‘이를 제외한 모든 작가’라고 덧붙이는 방식으로 하면 10분 안에 끝날 작업이기 때문이다. syo는 이 방법이 밑바닥을 끄집어 올리는 가장 유효한 방법이 아닌가 싶다. 매일 글을 쓰는 김연수의 글발고도가 높다. 그도 사람인지라 사건 사고, 감정 상태에 따라 기복이 없진 않으나 미니멈의 고도는 부러울 만큼이다. 김연수의 발은 syo의 손보다 높은데 있다. 뭐, 언젠 안그랬을까마는.
사진을 읽어 드립니다
김경훈 지음 / 시공아트 / 2019
syo에겐 3대 지병이 있었다. 무좀, 복부비만, 그리고 수전증. 지금은 2대 지병이 되었다. 무좀은 일주일 약 먹고 3주 쉬고를 열두 달 했더니 싹 완치되었다. 이렇게 쉬울 것을, 8살 때부터 20년을 넘도록 발바닥 피부 조직이나 흩뿌리며 살았다니. 피부과느님의 막강한 은총. 그 병원은 명동성당 맞은편 YWCA회관 건물에 있는데… 이 더러운 걸 왜 쓰고 있지?
복부비만은 여전히 든든하게 내 핏을 망치고 있다. 미저리 같은 놈,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다. 수전증도 마찬가지다. 국민학교 때던가 초등학교 때던가, 국 먹다가 최초로 발견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 손으로는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사진 안녕, 의사 안녕, 한의사 안녕, 군인 안녕, 경찰 안녕, 안녕 안녕 수전증 때문에 안녕도 참 많았다. 이 손만 아니었으면 막 막, 허준 되고 슈바이처 되고 막 그러는 건데? (수능성적 인서울 공대 턱걸이)
그래서 사진은 일찌감치 이해하길 포기한 예술이었다. 미웠기 때문이다. 사감을 빼더라도 솔직히 저게 왜 예술인지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카파의 저 유명한 사진을 보면서 위험한 데 가서 이런 걸 찍었다는 용기랄지, 반전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 사진의 사회적 효용이랄지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선뜻 인정할 수 있었지만 거기까지였다. syo의 짧은 생각에, 이것이 예술이라면 우리는 저마다의 방법을 동원하여 이것을 ‘읽어야’하는데, 피사체를 너무 직시하는 사진 매체의 특성 때문에 다양한 의미가 녹아들어 해석을 기다리는 공간이 충분하게 확보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장미로 사랑을 은유한 문학보다는 물론이고, 장미를 그린 그림보다도 장미를 찍은 사진은 그 뒤에 숨어 있는 추상이나 감정을 지시하는데 품이 많이 들고, 감상자도 그 이면을 읽어내기가 훨씬 어렵다. 사진 찍힌 장미가 사실 그 자체만큼이나 정교하여 감상자에게 물성으로 강력하게 육박해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syo에게 사진 읽는 법은 그림 읽는 법보다 훨씬 더 어렵고 정신력 소모가 큰 기술이었다. 사진을 읽어 준다는 꼬임에 금방 넘어간 이유가 이렇다.
이 책을 다 읽고, 결국 사진이라는 매체를 협소한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프레임 안의 것을 똑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프레임 밖에 더 신경을 써야한다는 것도 배웠다. 좋은 책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러이러한 이유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이러했다(요건 스포라서 생략). 이 책을 읽고 이런 이런 것을 느꼈다. 참 좋았다.’의 중고등학교식 독후감 구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글을 남기게 되는, 그런 책이기도 했다.
기분이 없는 기분
구정인 지음 / 창비 / 2019
아버지의 병세 악화 소식을 듣고 10일이었나, 긴 휴가를 나갔다. 휴가 기간 내내 병원에 있지도 않았다. 그냥 며칠 들락날락거렸고, 또 마지막 이틀은 마치 그런 일이 없는 것처럼 휴가 기간 맞는 아이들과 신나게 놀다가 복귀했다. 그러고 한 주쯤 지났으려나, 나로호를 쏘아 올린 날인가 그 다음 날인가에 부대로 아버지의 비보가 전해졌다. 이럴 때 주는 휴가를 받아서 급히 장례를 치렀고, 뒷일을 마무리하고 여기저기 감사 인사를 전하고 하느라 말년 휴가를 당겨 붙였다. 그 모든 과정에서 나는 몇 번이나 울었는가를 생각해보면, 명확하다. 딱 한 번 울었다. 나처럼 잘 우는 사람이. 아버지가 가루가 되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공간에서 잠깐이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 묘지 근처 표식도 없는 나무에, 백부의 결정대로 함부로 뿌려졌다. 그따위 것을 수목장이라고 했다. 나는 화가 났다. 모든 절차가 끝나고, 백부는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내 이름으로 들어온 돈이 너무 많아서 안 되겠다며, 챙겨갔던 부조금을 돌려줬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돌아 나오면서 나는 큰집과 연을 끊어냈다.
아버지의 죽음을 둘러싼 모든 과정이 내게는 슬픔이나 연민이 아니라 분노의 시간이었다. 부인에겐 평생의 욕지거리, 아들에겐 결혼이라는 제도의 비합리적이고 가학적인 면을 뼈저리게 가르쳐준 교과서, 딸에겐 철들고는 함께 한 기억조차 하나 없는 남 같은 사람, 그게 내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가 죽음을 코앞에 달고 병원에 입원할 때까지 외면하고 무시하던 형제들은 아버지가 침대에 눕자 그제야 찾아와 눈물로 강을 만들었다. 나는 그 강의 수심이 어이없어 도리어 울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 당신들이 이 남자를 이렇게 사랑했습니까. 당신들의 사랑은 이 남자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왜 그리도 무력했습니까. 상복을 입고, 처음 보는 아버지의 지인들로부터 아버지가 좋은 사람이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허탈하고 화가 났다. 이렇게 수많은 이들이 하나같이 좋은 사람이었다 증언하는 당신은 왜 당신의 가족에게만큼은 그냥 당신이었나, 당신을 감추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는 노력은 왜 가정 밖에서만 이루어지나, 묻고 또 물었다. 영정 사진 속 아버지는 웃고만 있었다. 마치 좋은 사람처럼.
형사로부터 아버지의 고독사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혜진과 아버지의 관계는 나와 우리 아버지의 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애증이라는 말은 그 감정을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평면적이고, 모든 애증은 저마다의 굴곡을 가지고 있으므로 나의 애증과 너의 애증이 겹쳐지지는 않겠으나, 그럼에도 애증을 지닌 이들은 서로의 기분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혜진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절차가 끝난 이후, 끝도 없는 우울에 빠져드는 혜진을 보며, 나는 내가 아버지의 죽음 과정에서 챙기지 못하고 그냥 통과해온 어떤 감정이 있었던 건 아닌지 기억을 뒤적여보게 되었다.
나는 슬프지도 아프지도 않았다. 우울은 한 방울도 없었다. 아버지 쪽 핏줄과 연을 끊고 지내면서는 그나마 있는 분노도 사라졌다. 용서하지도 않았지만 뭐 용서할 게 남았는가 싶다. 내 아버지는 먼지처럼 사라졌고, 우리 가족은 아버지를 기억하기 위해 특별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제 아버지는 어머니의 인생을 망친 주범으로 가끔 밥상 위에서 곱씹히거나, 지랄 맞은 성격의 대명사로 동원되기도 한다.
나는 과연 애도를 한 것일까, 안 한 것일까? 죽은 이에게 쌓여 있던 감정을 먼지로 만들어 날려 버리는 일이 수월했다면, 이것은 애도를 하지 않은 것일까, 애도를 너무나 잘 해낸 것일까? 내 일상은 이리도 평탄한데, 혜진의 삶은 왜 저렇게 망가진 것일까. 혹시 우리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내게 애도하는 법조차 가르치지 않고 그냥 훌훌 떠나버린 것일까?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1
주경철 지음 / 휴머니스트 / 2017
역사가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대중역사서를 쓰는 이에게 말솜씨(혹은 글솜씨)가 필요하다는 것은 명확하다. 역사가 그들만의 리그에서는 “1558년 9월 20일, 카를 5세는 점심을 먹었다. 1558년 9월 21일, 카를 5세는 죽었다.“ 같은 뻣뻣한 진실들이 그 자체로 보배처럼 번쩍번쩍 빛나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다르다. 꾸미고 재간을 부려 읽는 이의 흥미를 돋우는 역사 책이 좋은 책이다. ”1558년 9월 20일 카를 5세가 점심을 먹었지롱! 헉, 근데 다음 날 갑자기 죽었지롱!“ ……죄송합니다.
syo는 죄송하지만 이 책은 하나도 죄송하지 않다. 주경철 선생님이 농담에 능한 것은 아니지만, 역사책이 원체 재미가 없으니까 상대 우위가 있다. 무관심자의 시선을 끌어모으는 데는 왜들 이렇게 관심이 없는지. 주경철 선생님이야 두껍고 근엄한 역사책도 잘 쓰시는 분이니 권위를 의심할 바는 당연히 못 되고.
이 책이 다루는 시기는 온갖 몇 세 몇 세(끼)들이 지들끼리 결혼했다 이혼했다 지지고 볶으면서 유럽 역사에 기웃거리는 아마추어 독서가들의 골치를 아프게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 분탕치는 시기다. 그러다보니 거시적으로 죽죽 설명해나가는 역사책을 보면 도리어 헷갈리고 참다못해 백지를 펴서 프리드리히 3세가 막시밀리안 1세를 낳고, 막시밀리안 1세가 펠리페 1세를 낳고, 펠리페 1세가 카를 5세를 낳았더라- 하고 창세기를 작성하며 읽어야 하는 일이 생긴다. 이럴 때는 우선 인간별로 각개격파한 다음 전체상을 그리는 것도 방법이다. 그래서 이 책이 방법이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김하나, 황선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
뜻밖에 둘이 살아본 적이 많다. syo, 전문 동거남. 그리고 그게 다 하숙이고 자취고 고시원 생활이고 그러다보니 좁은 공간에서 살을 부벼가며 이룩한 생활들이다. syo, 부비부비 전문 동거남. 심지어 남녀를 가리지도 않았다(압도적으로 남자가 많았지만). syo, 바이섹슈얼 부비부비 전문 동거남… 서너 개쯤 더 할 수 있지만 점점 수렁에 빠지는 것 같으니 이쯤에서 그만 둘까. syo, 낄끼빠빠 바이섹슈얼 부비부…….
같이 안 살던 사람이 같이 살기로 결정하는 것은 사실 굉장히 놀라운 일이다. 공간이 겹쳐진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불편함이 따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하고 내가 같이 살아도 물고 뜯고 싸울 판인데, 남이라니! 그러므로 이런 결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그 모든 불쾌와 불편을 상쇄하고도 남을만한 메리트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책과 내 경험을 비교해보니, 남+남이 챙길 수 있는 거라 해봐야 경제적인 요소를 빼면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여+여의 경우 다방면의 이점이 생기는 것 같다. 특히 멘탈적인 부분에서.
"인생이란 멀리서 보며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렇게 바꾸어도 말이 될 것 같다. "사람은 멀리서 보면 멋있기 쉽고, 가까이에서 보면 우습기 쉽다." 충분한 거리를 둘 수 없기 때문에 서로 한심하고 웃기는 순간도 목격하지만 그럼에도 나에게 동거인은 여전히 멋있는 사람이다. 눈속임이 불가능할 만큼 가까이에서 삶에 대한 근면함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내가 시간을 사용하는 방식이나 생활을 대하는 태도 역시 낱낱이 동거인에게 목격될 거라는 자각은, 너무 방만하게만 살지 않도록 나를 다잡아준다. 그 증거로 오늘 글 한 편은 쓸 거라고 큰소리를 치다가 미루고 미룬 밤에 거실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편 건 동거인에게 너무 한심하게 보이고 싶지 않은 긴장의 발로였다. 내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테이블 건너편 자리에서는 동거인이 역시나 잠옷을 입은 채 연재하는 수필을 위한 삽화를 그리느라 애쓰고 있다. 비염이 심해져서 콧물을 막기 위해, 한쪽 콧구멍에 티슈를 길게 말아 꽂은 채로 말이다. 오늘도 내 동거인은 아주 우습고 또 존경스러운, 딱 그만큼의 거리에 있다. (235-236)
요런 대목을 보면 놀랍다. 경험 범위안에서, 남+남의 경우 대체로 서로를 신경 쓰지 않았다. 이 경상도 마초 새끼들은 그런 거 신경 쓰는 놈처럼 보일까봐 도리어 맘대로 막 하고 다녔는데, 우리가 서로를 위해 해 준 배려라고는, 방문을 열기 전에 노크하는 것뿐이었다. 혹시 바지 내리고 뭔가에 열중하고 있을까봐……. 왜 우리는 저렇게 서로를 발전시키는 아름다운 관계가 되지 못하고 그저 서로의 욕정만 존중하는 동거생활을 하고 말았던 것일까.
아마도 몇 달 안에 새로운 동거생활이 펼쳐질 듯하다. 이제껏 모든 동거 중 가장 경제적 여건이 잘 갖춰진 생활이. 이 책을 꼼꼼하게 읽었으니 앞으로는 서로의 하반신 그 이상을 배려할 줄 아는 슬기로운 동거생활을 꾸며 나가야겠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
이렇게 찬사로 가득한 책도 드물어서 입을 떼기가 더욱 조심스럽다. 반면, 나 하나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해서 이 책의 예비독자들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 같아서 안심이 되기도 한다. 물론 좋은 책이었다. 너무 좋은 책이었다.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지혜의 꾸러미같은 주인공 한탸가 실은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동안에만 행복하다는 점이다. 뭔가를 알아채는 순간 그것들은 전부 한탸를 떠났다. 그리고 마침내 한탸는 세상을 알아챘으니 이제 그가 세상을 떠나야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만이 행복하다. 그래서 인간은 고독하다. 행복하려고 고독하다. 그러나 고독 속에서도 들리는 소리가 있다. 사랑을 알려주고, 사람을 알려주고, 세상을 알려주겠노라, 그걸로 너의 행복을 앗아가겠노라며 쉬지 않고 내 고독을 두드리는 너무 시끄러운 소리가 있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 그래서 한없이 위태로운 인간. 내가 이 역설적인 제목을 읽어낸 방식은 그렇다.
하면 좋습니까?
미깡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
그냥 결혼이라면 무작정 싫을 때가 있었다. 이놈의 제도 나부랭이가 빵틀처럼 사랑을 덮쳐서 귀퉁이들을 다 쳐내고 일정한 모양으로 변형시킨다는 인식이었다. 아나키즘에 환장해 있을 때는 더욱 그랬다. 그러나 아나키스트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고드윈조차 결혼하여(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딸(메리 쉘리)을 낳았다는 사실. 허망한데?
허망하긴 하지만 결혼이 사랑에 가하는 압박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변화가 없다. 그럼에도 결혼에 대해서는 좀 온건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는데, 하면 하고 말면 말고라고나 할까.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면 하고 아니면 만다에 더 가깝긴 하다. 굉장히 무책임한 태도긴 한데, 또 굉장히 선명한 저항정신이기도 하다. 어쨌든 내가 원하는 것은 그 사람이고,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라는 생각만 하고 있다. 두루뭉수리하다. 철없다.
없는 철을 만들어주기 위해 이 책이 나섰다. 5년째 만났고 동거도 하고 있는 커플. 어느 날 곱창을 먹다가 대뜸 결혼을 청한 남친 덕분에, 앞으로 300페이지 동안 그들의 연애사는 이전에 없었던 국면에 접어든다. 아무래도 주인공은 여성이고, 조언자들도 여성이다 보니 남자 입장에서는 공감보다는 학습이라 부르기에 걸맞은 태도로 책을 읽게 된다. 이건 안 되고, 이것도 안 되고, 이건 오 쉣, 완전 안 되고……. 그들이 결국 결혼하는지(사실 지금 ‘결혼에 골인하는지’라고 썼다고 화들짝 놀라서 지웠다. 결혼은 골인, 비혼은 노골? 클리셰가 이렇게 무섭습니다)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이야기들은 마지막 페이지까지 오는 길 전체에 알알이 박혀있고, 마지막 페이지에서 건질 것은 남친의 이 대사겠다. ”사랑하는 데 써야 할 힘을 다른 일에 소모하지 말고, 행복할 게 분명한 일들에 집중하자.“
그리고 ‘뭐 이를테면…’이라는 말이 이어지더니 갑자기 방의 불은 어두워지고 카메라 렌즈는 뜻밖에 흐릿한 촛불이나 둥근 달을 비추는데……. 얼레리꼴레리, 누구누구는 좋겠네~ 좋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