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성과 인술과 인생
1
토요일에는 인성검사라는 것을 받으러 아침부터 서울에 갈 듯. 내가 아는 바, 내 인성이 또 보통은 넘지. 어린 날, 나야말로 13일의 금요일에 태어난 남자라고 뻥을 쳤을 때, 친구들은 털끝만치의 의심도 없이 그 말을 믿곤 했다. 그제야 오랜 궁금증이 풀렸다는 듯, 아~ 그래서~ 하는 그 반응들…….
<< 인성파탄 증거물 1 >>
syo : 강의 안 듣냐.
syo : 이틀 열심히 듣는 척 하더니
syo : 왜 멈춤이지?
三 : 이제 들어야지
三 : 라고 생각했는데 10시라니
三 : 밥먹고 조금 누워있었는데
syo : 그러니까 내년에도 밥먹고 조금 누워 있겠지
syo : 그 후년에도 밥먹고 조금 누워 있겠지
syo : 그런 식으로 조금 누워서 세월 보내다가
syo : 영영 누워있겠지.
syo : 마치 누울라고 태어난 사람처럼…
<< 인성파탄 증거물 2 >>
박곰 : 더운데 잘하고 있나 범벅 ㅇㅅㅇ 요즘 습도 쩔더라
syo : 그럭저럭
syo : 형은
박곰 : 난 더위에 져서 ㅇ_ㅇ 흐느적거리고 있지
박곰 : 비가 안온다
박곰 : 나쁜
syo : 그럼 도서관같은데 나가서 해라
syo : 집에만 있지 말고
박곰 : ㅇ_ㅇ 그럴려고 이제 집은 안되겠다
박곰 : 습도 80퍼 넘던데
박곰 : 가만 있어도 찐득거려 으어어
syo : 냄새날 것 같다
박곰 : 복지회관에 지하독서실 아직 있나보던데 거기 가보고 아님
박곰 : 두류나 남부 도서관 가야겟ㅌ
박곰 : 냄새는 왜
박곰 : 씻거든
syo : 몰라
syo : 당신 그냥 그런 이미지
세상은 참 묘하다. 주는 것 없이 미운 놈이 친절하고, 마음 맞는 친구가 나쁜 놈이라니 사람을 완전히 바보로 만들고 있다. 시골이라서 도쿄와는 모든 게 반대인 모양이다. 뒤숭숭한 곳이다. 조만간 불이 얼고 돌이 두부가 될지도 모르겠다.
_ 나쓰메 소세키, 『도련님』
겉으로만 점잖은 척 단장하고 속마음은 시기와 거짓으로 꽉 차 있는 사람은 좋아하려고 해도 한 푼의 가치가 없고 미워하려고 해도 몽둥이로 때릴 만한 가치조차 없다. 단지 그가 거짓으로 꾸미느라 수고로움을 다하는 꼴이 가련할 뿐이다. 만약 그가 잘못을 뉘우친다면 한 번쯤 가르쳐 볼 수는 있을 것이다.
_ 이덕무, 『선귤당농소』
2
귀가 가려워서 시원할 때까지 후벼 팠는데 어쩐지 면봉이 축축했다. 다음날 도서관에 가는 길에 먼저 이비인후과를 들렸다. 처음 가본 병원이었다. 건물에 들어서는데, 계단으로 반 층 올라가니 있는 화장실이 정말 말도 안 되게 낡았다. 세면대가 없고 손 씻는 호스와 양동이, 바가지가 있었어. 싸했다. 2층으로 올라갔더니 바로 앞에 미용실 유리문이 있었는데, 싸한 게, 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무슨 페이퍼컴퍼니 오피스처럼 음산한 것이다. 바닥의 온갖 집기들이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자기들만의 댄스파티를 즐기다가 syo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는 못 움직이는 물건인 척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그런 양상이었다. 나 병원 들어가면 쟤들 막 문란하게 놀 것 같아, 바닥에서 뒹굴고. 싸했다.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싸했다. 텅 비어 있는 접수대 옆에 도저히 시선을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사진이 한 점 있었는데, 그 안에는 가운을 갖춰 입고 서먹서먹한 표정을 한 남자 세 명이 저마다의 자세로 들어 있었다. 맨 뒤에 서 있는 남자는 syo보다 열 살은 많아 보였고, 가운데 높은 의자에 앉은 사람은 할아버지, 맨 앞의 낮은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은 할할아버지쯤 되어보였는데, 사진 앞쪽에는 삼대가 이비인후과 의사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싸했다. 제발, 진료실에 있는 사람이 3세이기를. 제발, 할할아버지만은 안 돼… 들어가 보니 아들도 할할아버지도 아닌, 할아버지셨다. 어… 무슨 기분이어야 하지? 하는 사이에 할아버지는 척척 움직여 의자에 syo를 앉히고는 어떻게 왔는지(당연히 반말로) 묻는다. 아, 네… 귀에서 진물이 나오는 것 같아서요……. 어디 물에 들어갔어? 아뇨, 딱히 그런 건 아닌데요. 습진 같은 거야. 귀에 물 안 들어가게 해. 다른 병원에 가면 해리포터 지팡이 같이 생긴 놈을 귓속에 넣어서 삐빅- 사진도 찍어서 보여주고 그러던데 여긴 그런 기계 자체가 없었다. 오직 선생님만 있었다. 선생님이 기계는 아닐 거 아냐… 선생님은 면봉에 약을 발라 순전히 감으로 syo의 귓속에 찔러 넣으셨는데, 당연히 아팠다. 기계 아니네. 사람 솜씨네. 물론 해리포터 지팡이 병원에서도 아프긴 했는데, 왜 여기서의 아픔은 어딘가 싸한 아픔이란 말인가……. 자, 저기 앉아. 네. 그거 귀에 대. 네. 버튼 눌러. 네. 그래. 네. 이러고 약을 받아왔다.
그게 어제였다. 그리고 오늘 아침부터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오른쪽 귀의 청력이 떨어진 상태다. 여러분, 싸할 때는 피해야 합니다. 미깡 선생님께서는 『하면 좋습니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싸함은 싸이언스”
3
해야 할 것들이 있다 보니 아무래도 읽고 쓰는 일에 집어넣는 시간이 차츰 줄어든다. syo라는 놈은 일하면서도 열심히 읽고 쓸 수 있을 그런 범상치 않은 놈일 줄 알았지만, 이거, 아무래도 범상한 놈으로 밝혀질 분위기다. 지금까지 늘 그래왔던 것처럼. 한 달에 스무 권, 읽으며 살 수 있을까? 미친 척 읽으면 백 권도 읽던 인생이, 아등바등 잠 줄여가며 읽어야 스무 권을 겨우 채울까 말까 하는 삶을 잘 버틸 수 있을까?
뭐, 안 그럼 또 어쩔 거야. 다들 그러고 산다.
한번 책에 빠지면 다른 세계에, 책 속에 있기 때문이다…… 놀라운 일이지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그 순간 나는 내 꿈속의 더 아름다운 세계로 떠나 진실 한복판에 가닿게 된다. 날이면 날마다, 하루에도 열 번씩 나 자신으로부터 그렇게 멀리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에게 소외된 이방인이 되어 묵묵히 집으로 돌아온다. 그날 찾아낸 수많은 책들, 내 가방 속에 든 책들 생각에 골몰해 길을 걷는다. 전차와 자동차와 보행자 들을 피해가면서, 녹색 등이 켜지면 기계적으로 길을 건넌다. 행인이나 가로등과 부딪치는 일도 없이 걸어간다. 몸에서 맥주와 오물 냄새가 나도 내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건, 가방에 책들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녁이면 내가 아직 모르는 나 자신에 대해 일깨워줄 책들, 시끌벅적한 거리를 걸으면서도 빨간불에 길을 건너는 법이 없다.
_ 보후밀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
독서는 인류가 피할 수 없는 것을 지연시키는 방법이다. 독서는 우리가 하늘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방식이다. 이 장대하고 가능할 성싶지 않은 독서 계획이 우리 앞에 줄지어 있는 한, 우리는 숨을 거들 수 없다. 나는 아직 『빌레트』를 다 읽지 못했으니 죽음의 천사에게 나중에 다시 오라 전하라. 거기에는 우리 모두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갈 거라는 희망이 있다. 나 믿노니, 이것이 책이 인류에게 주는 가장 위대한 선물이다. 모든 생은, 최고의 생조차도, 끝은 슬프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죽는다. 우리가 듣고 싶은 목소리는 영원히 멈춰버린다. 책은 끝이 다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드러낸다. 제인은 로체스터와 결혼할 것이다. 엘리자는 사악한 노예주 사이먼을 저지할 것이다. 장발장은 자베르를 이겨낼 것이다. 핍은 에스텔라의 짝이 될 것이다. 악한 이는 나가떨어지고 정의로운 이는 번창하리라. 우리를 기다리는 아름다운 책들이 있는 한, 아직은 배를 돌려 안전한 항구를 찾을 기회가 있다. 포크너의 말마따나, 그저 살아남는 정도가 아니라 승리할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 아직도, 우리 모두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
_ 조 퀴넌, 『아직도 책을 읽는 멸종 직전의 지구인을 위한 단 한 권의 책』
--- 읽은 ---
+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나무가 되지요 / 문태준 : 180 ~ 303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김초엽 : 218 ~ 341
+ 슬픈 열대를 읽다 / 양자오 : 180 ~ 337
--- 읽는 ---
=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 앤드루 포터 : 88 ~ 180
= 다시 태어난다면, 한국에서 살겠습니까 / 이재열 : ~ 100
=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미국사 / 래리 고닉 : ~ 218
= 중국 근대사 / 이영옥 : 53 ~ 110
= 왕좌의 게임의 과학 / 헬렌 킨 : ~ 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