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팻걸 - [할인행사]
카트린느 브레이야 감독, 아르시네 칸지앙 외 출연 / 엔터원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팻걸에 대한 평가는 호불호(好不好)가 분명히 갈리는 쪽이다. 나는 엄밀히 말하면 호(好)에 가깝다. 요즘 읽고 있는 책, [여자의 심리학]에서 말하는 열등감과 우월감 사이에서 방황하는 여자의 심리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휴머니즘을 담고 있는 영화를 꽤 좋아하지만, 현실을 잘 보여주는 영화도 상당히 좋아한다. 황당무계한 해피엔딩은...싫어.)
불호(不好)인 입장의 사람들은 말한다. 역겹다고. 맞다. 이 영화는 달콤한 영화는 절대 아니다. 처음엔 소녀들의 발칙한 성장영화인줄 알았다. 그러나... 물론 나도 역겹고 화나는 부분이 있었다. 게다가 영화 개봉 당시, 남녀의 체모와 성기가 노출되었다고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었다.(영화를 찍다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데, 논란이 되는게 아이러니하다. 마케팅 전략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정말 맘에 안 들었던 것은 "잔 것은 언니지만... 느낀 것은 나였다." 란 헤드카피. 정말 역겹다.
언니인 엘레나는 정말 예쁘고 말랐다. 자신의 외적인 가치도 잘 알고 있다. 반면에 동생인 아나이스는 뚱뚱하다. 어릴 때부터 놀림을 많이 받은 경험이 있었는지, 매우 현실적이다. 특히 사랑에 대해서. 아나이스는 '첫 경험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해야 한다.'라고 굳게 믿고 있다. 너무 슬펐다. 영화 전반에서 아나이스도 사랑을 갈구하는 소녀일 뿐이다. 현실을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또 먹게 되는거고. 쩝.
엘레나는 아나이스를 무시한다. 심지어 자신의 애정행각에 이용하기도 한다. 그 근거는 아나이스가 외적으로 아름답지 못하기 때문. 제 3자의 입장에서 엘레나는 악녀일 뿐이지만, 사실은 엘레나와 아나이스는 둘다 나르시시즘의 굴레에 갇혀있는 피해자다. 그녀들이 그렇게 된 것은 그녀들을 대하는 부모의 태도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엘레나는 아름다운 외모로 그들의 가치를 드높이는 착한 아이일 것이고, 아나이스는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도 자매들은 서로를 경멸하면서도 또 사랑하고, 자신과 동일시한다. 하지만 인생은 다르기에, 엘레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첫 경험을 하는데, 잔인하게도 아나이스는 그 현장에 있다. 그래서 그런 역겨운 카피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유럽은 극단적인 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다.)
마지막 장면은 압권이다. 차를 운전하던 엄마는 휴게소에서 잠시 눈을 붙이는데, 괴한이 나타나 엄마와 엘레나는 바로 죽음을 당한다. 아나이스는 도망치다 숲에서 성폭행을 당한다. 충격, 충격, 충격... 한참 멍해져서 영화를 보고 있는데, 마지막에 한방을 먹였던 아나이스의 한 마디. 그녀를 구조한 경찰들이 정말 성폭행을 당하지 않았냐고 묻자, 그녀는 대답한다.
'정말 아무일도 없었어요. 믿지 않으셔도 좋아요....'
아, 누가 소녀를 이렇게 만들었단 말인가. 마지막 장면에서 어깨에 힘이 풀려 버렸다. 무엇이 이 소녀에게 사랑에 대한 피학적이고 가학적인 환상을 심었는지 모르겠다. 어떤 사람들은 이 영화가 여자를 두번 죽이는 영화라고 한다. 그럴 수 있다. 내가 근래에 심리학 책을 안 읽었다면 나도 기분이 나빠졌을 것이다. 지금과 다른 시각이 었을 것도 같다. 그럴만큼 영화는 내내 역겹고 찝찝한 기분을 준다.
소녀들은 자신들을 서로와 동일시 했다는 점에서 볼 때, 엘레나는 여성 내면의 우월감을 나타내고, 아나이스는 여성 내면의 열등감을 나타낸다. 실제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외모에 대한 태도로만 보자면 그렇다. 이 영화가 욕먹었던 이유는 사회 저변에 깔려 있는 이런 태도를 극단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과한 것은 아니한만 못하다. 정말로!)
[팻걸]은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에서 만들었다. 거기는 여자들의 몸매에 관대한 사회가 아니었어?? 라는 나의 환상도 무참히 깨졌다. 흑. 나 이제 어디서 살아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