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인생 강의 - 낙타, 사자, 어린아이로 사는 변신의 삶
이진우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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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 should에서 i will, I am의 시대로...

 

60-70년대의 향수를 그린 '국제시장'의 대사가 있다.

이만하면 열심히 살지 않았습니까?

그야말로, 그렇게 살아야만 했던 '낙타'의 시대였다.

고개를 돌릴 틈도 없이 눈을 거의 감고 앞으로 앞으로 전진만 허용되던...

 

한국은 아직도 저항과 투쟁의 정신이 부족하다.

사대강을 해먹고, 자원과 방산비리를 해먹은 넘의 꼬붕이

선거 부정의 아주 자투리 죄를 물어 4년형을 받았는데,

일사부재리 운운 하고 자빠진 게 현실이다. 하품난다.

아직도 더 싸워야 하는 <사자>의 시대를 관통하고 있다.

지난 겨울의 촛불은 사자의 정신을 대변하는 세계사적 행동이었다.

 

대통령이 세월호 유가족에게, 광주 유가족에게,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에게 고개를 숙이고 따뜻한 품을 내어 안아주는 행동을

누구는 '쇼;라고 하지만, 인권을 인정하는 첫걸음으로 보인다.

어린아이는 아무에게나 선뜻 안기지 않던가.

전임 503호는 악수조차 하지 못한 천박한 마녀였음에 더 '어린아이'의

<실존> 자체가 소중한 시대로 가고 있다.

 

YOLO

 

허무주의와 퇴폐는 다르다.

일견 그것을 비슷하다고 연결시키는 자들이야말로,

뭔가 자신들의 권력을 지킬 것이 있는 자들이다.

욜로는 퇴폐보다는 허무주의에 가깝다.

그것도 적극적 허무주의.

 

신이 죽은 시대.

국가를 위해 달리던 낙타의 시대는 지나갔다.

아직도 핵무기가 날아 다니니 단결하고 조용히 하라는 자들은 신을 부활시키려 하는 바보들이다.

 

사람은 한 번 산다.

그래서 허무하지만,

또한 그래서 잼나게 살아야 한다.

 

당위에 짓눌려 살면 그저 낙타다.

하지만 낙타의 삶을 살 수밖에 없던 시대가 있었고,

그것을 부정하는 사자의 시대도 있었다.

이제 어린아이같이 해맑고 나누는 시대를 향해가기 위해

어둠을 몰아낼 투쟁이 노정되어 있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실존>이 존재의 이유 그 자체다.

무엇을 위해서 낙타처럼 견디거나, 사자처럼 싸울 필요도 없으니.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르게 해석해왔다.

필요한 것은 세계 변혁(마르크스)

 

마르크스는 사자의 아버지다.

그 다음 시대를 준비한 사람이 니체의 한 부분이다.

 

현대인은 동경할 줄도 모르고 꿈도 없기에

정반대 사람이 초인.

이상적 유형만이 초인은 아니다.(95)

 

초인은 '위버멘쉬'는,

절대자가 아니다.

계속 움직이는 자이고,

아모르 파티를 깨닫고,

아모르 문디를 지향하는 움직이는 '운동가'일 것이다.

 

끊임없이 자기가 이루어놓은 상태를 넘어서고자 하는 태도를

체와한 인간 유형의 실존 양식이 위버멘쉬(102)

 

 

달리는 자동차에서 물이 흔들리거나 쏟아지지 않도록 하는 장치가 개발되었다.

짐벌이라는 수평유지장치를 활용한 것이라는데,

인간도 이런 사고 방식이 필요하다.

전방위적 관심과 사고, 변화 가능성이 '짐벌 Gimbal' 정신이라 불러도 좋지 않으려나.

 

 

殺身成仁을 넘어 殺神成人의 시대로...

 

원래 살신성인은 '도덕'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낙타를 강요하던 시대의 철학이기도 했으나,

근대 이후에는 낙타처럼 사는 이들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투쟁하는 이들이

'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던 덕목이 살신성인이기도 하다.

 

이제 세계가 식민지가 되는 글로벌 시대에

신은 죽었으니 '인간 실존'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살아야 한다는 희망사항이 후자에 담겨있다.

 

절대적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는 말처럼,

신의 세계는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중심의 세계로 나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이드는 일도 멋진 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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