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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신을 찾아서 - 신념 체계와 삶의 방식에 관한 성찰 ㅣ 성찰 시리즈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16년 12월
평점 :
강유원이 '숨은 신'을 썼다는 것에 의아함을 가졌다.
그가 공부하고 읽어온 과정들은 '유물론자의 삶'인 것처럼 보여서였다.
철이 없었다.
삶을, 온전히 쥐고 있다는 오만함이 넘쳤다.(6)
그래. 이런 것이 강유원이었다.
중환자실에 누워있었다.
이란 병실로 옮겨진 뒤 복도 끝까지 걸어서 바다를 볼 수 있었다.
좌절은 없었다.
삶을 손에 쥐지도 못했고,
어디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하였다.
운명이라든가, 믿음이라든가, 그런 말들도 떠오르지 않았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무기력이 밀려 들어왔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절망, 즉 희망을 끊는 일이다.
야욕과 절망 사이에는 10년 정도의 시간이 놓여 있었다.
그 시간은 인간 존재의 하찮음을 가르쳐주었다.(7)
작가의 말이나 프롤로그 정도로 여겨지는 1장이 이 책의 집필 동기다.
죽음의 문 앞에서 누구나 삶을 돌아보는 것인 인지상정일 것이다.
불교에는 부정관이라는 수행법이 있다.
정결하지 못한 것을 보는 것이다.
해골을 볼 일이다.(94)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과
데카르트의 성찰과
오디세우스와 에이해브 선장을 읽는다.
사변보다는 문학이 훨씬 인물이 내음이 확 풍긴다.
에이해브 선장은 위엄있는, 신을 믿지 않는, 신을 닮을 사람이다.(152)
에이해브는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신의 신념 최계 위에서 확고한 일관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바다의 인간이었던 오딧세우스와 마찬가지로 갈등없이 자신이 길을 간다.(156)
결국 죽음 앞에서 그가 생각했던 것은,
살고 싶은대로가 아니라,
살던 대로 살자는 것 아닐까 싶다.
희망이란 것을 갖고 살다보면,
어느날, 그것이 '끊어지는' 절망을 만날 수 있으니,
신에 대해 생각하며 떨고 있는 갈대 같은 '팡세'보다는,
오딧세우스나 에이해브 선장을 본받아 살 일이다.
작가의 건강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