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비행 소담 베스트셀러 월드북 64
생 텍쥐페리 지음, 이원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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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지드는 <야간비행>의 서문을 썼다. '인간의 허약함이니 불성실이니 방종함이니 하는 것들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것인데다 오늘날의 문학이 너무나 잘 제시해 주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인간의 긴장된 의지력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자기 초월의 경지는 오늘날 우리가 제시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식탁 위 불빛 과 밤하늘의 별빛 하나 중 어느 것이 더 가치있는 것일까. 개인의 행복이란 것이 얼마나 그 빛을 발하고 영속되는 것일까. 늙음과 죽음은 이런 모든 것을 한낱 먼지로 날려버릴 것인데. 어두운 밤의 너른 평원, 어느 농부의 집에서 흘러나오는 한 줄기 빛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희망이 되는지. 개인의 소소한 행복이 영원할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을 영원한 것으로 만드려면 어떤 고차원적인 것에 종속되어야할까. 아니 고매한 그 무엇을 지향해야할까.

리비에르가 모자를 쓰고 옷을 입고 나타나면 언제나 '나그네' 같다. 50줄에 들어선 그는 부하직원의 생사가 궁금해 찾아온 여인 앞에서 수많은 갈등을 하고 옷을 챙겨주는 아내에게 자신이 하는 일의 치열함을 내색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의 나쁨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결점이 가져올 악을 미리 처벌한다.

리비에르는 야간비행을 위한 길을 닦아놓는 일에 매진한다. 구름의 미세한 물결을 읽으며 야간비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영원의 길을 열어놓기 위함이다. 길이 있으면 사람들이 그 길을 다니기 마련이다. 신기루처럼 사라질 행복이라는 황금빛 성역에서 끄집어내어온 부하들을 단련하여 초월의 경지로 몰고가며 길을 만드는 일에 동참하게 한다. 보다 영속적인 것이 있을지 모른다는 확신과 책임으로 가능한 일이다.

다다이즘이나 초현실주의 문학이 아니라 철저한 행동주의 문학이라는 평을 받는 생 떽쥐뻬리의 <야간비행>은 자신의 체험과 실제인물을 모델로 하였다. 사람들과 잘 사귀고 지내는 일에는 서툴렀다는 작가에게 영향을 크게 미친 몇 안 되는 인물이 디디에 도라인데, 그는 작가가 1929년 항공우편사에 근무할 당시 직장 상사이다. 작품에서의 그의 화신 리비에르는 '육신과 다름없이 덧없는 행복을 초월하고 보다 영속적인 존재가치를 인간에게 부여할 길은 없는지'를 고민하는 사람으로 나온다. 소시민적 행복, 그런 종류의 행복은 그에게 겉치레로 보일 뿐이다.

'영원'의 문제에 매달리는 리비에르의 마음을 따라 페루의 고대 잉카족의 신전 돌기둥에 대한 단상이 마음에 안긴다.

> 사랑한다는 것, 그저 사랑한다는 것은 막다른 골목이 아닌가! 리비에르는 사랑하는 의무보다 더 큰 힘을 지닌 의무에 대해 숨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문제는 그 애정을 영원하게 만드는 것이다... '당신이 추구하는 것은 당신 자신 속에서 소멸된다.' <

> 산 위에 똑바로 서 있는 돌기둥들. 그 돌기둥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인류의 양심을 무겁게 짓누르는 경이적인 문명에서 무엇이 남아있겠는가?  잉카 문명의 지도자는 대체 어떤 무자비함, 아니 어떤 이상한 사랑이라는 미명 아래 백성에게 산꼭대기에 신전을 쌓아올리라고 명하면서 그 문명의 영원성을 세우게 했을까? ...... 고대 민족의 지도자는 아마도 인간의 고통에 대해서는 동정심을 느끼지 않았지만,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는 동정심을 느꼈으리라. 개인의 죽음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막에 묻혀버릴 종족의 소멸에 대해서 동정심을 느꼈으리라.(89쪽)<

한낱 삶의 덧없음을 사회가, 집단이, 문명이 영원으로 이끌 수 있을까.  '나'는 우주의 원기를 받아 태어나지만 그것에 이름이 없다면 존재도 있기 전 소멸할 가능성이 있다. 그 생명에 이름을 붙여주는 순간 '나'는 집단의 일원이 되고 어느 문명의 일원이 된다. 동시에 소멸의 길로 가는 '나'의 삶의 덧없음을 사회가, 집단이, 문명이 영원으로 이끌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또한 소멸에 대한 무의식적 두려움이 개인을 좀더 고매한 문화적 행위로 이끄는 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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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4-04-21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경우든 야간비행은 추천대상입니다. 흐흐.
특히 배혜경님 글에는...

waho 2004-05-01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리뷰 쭉 읽다 보면 어쩜 책을 이리 많이 읽으시는지...리뷰도 잘 쓰시고..넘 부러워요.
야간 비행 아직 못 읽어 봤는데...읽어봐야 겠네요
 

날씨가 너무나 좋았다. 귓볼을 살랑이는 바람도 어찌 부드럽던지. 희원이 희령이, 그리고 친정엄마랑 나는 오늘 낮 3시 이 연극을 보러 갔다. 여기저기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가족들, 특히 엄마들이 많이 보였다. 원작 그림책을 한 팔에 끼고 있는 아이들도 많았다. 화단 앞 벤치에 앉아 간식을 좀 먹고 들어가 휴대전화를 끄면서 우리 자리를 찾아 앉았다.

너무 큰 기대를 하지 않고 간 게 다행이었다. 역시 그림책의 아름다움에는 못 미쳤기 때문이다. 미하엘 엔데의 글에 프리드리히 헤헬만의 그림이 미치도록 아름다운 베틀북의 그림책에 오늘의 연극은 비할 수 없었다. 특히 그림자를 그리고 있는 부분과 천국의 문으로 들어가는 길의 몽환적인 분위기가 연극에서는 그리 잘 나타나지 못했다.

만 4세 이상이면 볼 수 있도록 가족극이란 이름으로 공연한 연극이라 원작에서 나오는 그림자들의 추상적인 이름을 아이들이 재미있어할 만한 이름으로 바꾸어놓았다. 예를 들면 무서운 어둠, 외로움, 밤앓이, 힘없음, 덧없음 같은 이름들은 깽깽이(고장난 바이얼린), 키다리아저씨(부러진 전봇대), 구멍난 물뿌리개, 콩콩이, 가수, 이런 것들로 나온다. 전체적인 분위기도 좀더 밝고 경쾌하게 흘러간다. 아이들은 배우들의 과장되고 익살스러운 연기에 깔깔대며 박수치고 좋아했다.

그림자 다섯과 오필리아가 등장인물이다. 배우들의 연기는 좋았다. 특히 오필리아는 자상하고 넉넉한 가슴의 소유자로 유머러스하며, 자신을 필요로 하는 모든 것에 아낌없이 자신을 내 주고 상대를 받아들이는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가족의 품을 그리워하는 떠돌이 그림자들을 모두 받아주고, 싸우려드는 그들에게 서로 아껴주며 사는 법을 따뜻한 어조로 가르쳐준다. 그 어조는 시적이며 연극적이다. 오필리아가 평생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는 연극의 대사들, 목소리가 작아 배우의 꿈을 이루진 못했지만 배우들에게 대사를 나지막히 불러주는 역할을 하며 만족해한다. 극장 곁에 있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을 해도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극장은 우리의 인생이다. 인생은 연극이라는 진부한 비유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셀 수도 없이 많은 종류의 배우들을 이런 식으로 만나는 일에 오필리아는 만족해한다. 그녀는 극장을 사랑하는 만큼 삶을 사랑한다. 세월이 변하고 사람들의 삶도 다른 양상을 보이면서 극장은 문을 닫아야하고 오필리아의 삶의 막도 내려야 할 시간이 다 되어온다.

어느 날 죽음의 그림자가 여태껏 기다렸었다며 나타났을 때 그녀는 자신에게 다가온 마지막 그림자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지금까지 불쌍하고 버림 받은 그림자들은 받아들여준 것처럼 '죽음'마저 선선히 안고 천국의 문을 들어선다. 이미 오필리아의 일부가 된 그림자들까지 천국에 함께 입성하고 이들이 펼치는 '오필리아의 빛 그림자 극장'이 열린다. 이것도 원작은 '오필리아의 빛 극장'이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극이 끝나고 배우들과 무대에서 사진을 찍겠다고 희령이가 고집을 부려 극단의 사람에게 부탁했더니 홈페이지 자료실에 올려놓을테니 다운 받아가시란다. 그거라도 고맙다. 

집에 돌아와 그림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꿈처럼 아른하고 눈부신 그림 속으로 빠져들었다. 우리 삶이 그런 것이려니. 꿈처럼 봄날처럼, 손 안에 들어왔다싶은 순간 어느새 빠져나가고 없는 찰나적인 것. 덧없음의 분위기가 이토록 사무치게 아름답게 그려진 이 그림책이 난 더 좋다. 희령인 나름대로 재미있었던 눈치고, 희원인 도움을 청하는 그림자들을 친절하게 받아들여준 오필리아 할머니가 좋단다. 친정엄마는 연령이 연령이니만큼 더 와닿지 않았을까. 우리 곁에 항상 가까이 있는 '죽음'에 대하여 스치듯 한마디 하시곤 웃으셨다. 오늘밤 괜한 우울함에 빠지진 말았으면 좋겠다. 워낙 감상적인 분이라...

이 그림책의 리뷰를 전에 썼던 기억이 난다. 거기서도 친정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두서없이 늘어놓았었는데, 난 이 그림책이나 연극을 보며 왜 자꾸 당신 생각이 나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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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4-11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하엘 엔데...그의 작품 중 <끝없는 이야기>만 읽어 봤는데, 음 ~ 이 작품 끌리네요.
그건 그렇고, 님의 글을 읽고난 결과... '오필리아의 그림자 극장'...꽤나 철학적인 접근이 요구되는 내용일 것 같은데,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게 어떻게 연극으로 올렸을 지 저도 직접 보고 싶네요. 그리고 시간 날 때마다 희령이, 희원이한테 너른 세상, 아름다운 세상 보여 주시는...님, 정말 보기 좋은 어머니의 모습이십니다~ ^^

바람꽃 2004-04-12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작하니 자주 오게 되는군요. 저는 지난 여름 방학때 봤거든요. 방학때만 되면 어쩐지 아이들을 문화스러운 것에 접촉시켜 줘야 할 것 같은 마음에 부랴부랴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다녀왔는데... 자주가는 서점에 그 책이 없어서 책은 나중에 봤답니다. 전 왠지 몰입할 수 없었는데, 아이들은 눈물도 찔끔하던걸요(아들도). 오랜만에 본 연극이라 감회가 새롭던데.... 대사도  좋아요(다 잊어버렸지만).


프레이야 2004-04-12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창한 아침이에요.
냉.열.사님, 강추 그림책이에요. 아름다워 눈물이 날 걸요. 그림자들의 연극이요.
바람꽃님, 작년에 보셨군요. 저도 중간에 약간 졸았어요. 양옆에 앉은 딸들은 재미있어하더군요. 님의 아들 참 따뜻한 성품인것 같네요. 제 큰딸 희원인 5학년인데요, 어젯밤 일기장을 살짝 보니," 떠돌이 그림자를 다 받아준 오필리아처럼 받아들이기 싫은 것들도 받아들여야할 때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라고 적어놓았더군요. 그림자들의 말과 행동도 각자 개성있고 재미있었다고도 해 놓구요. 성공한 것 같죠?

프레이야 2004-04-12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원작에 신경쓰지 말고 그냥 보면 좋을 것 같아요. 대사도 위트있거든요.
오필리아가 마른 기침을 뱉자 그림자들이 다가와 안쓰럽게 보느데 오필리아가 자상한 웃음을 지으며 하는 말, "나이가 들면 말을 적게 하라고 기침이 많아지는 거야" 이래요.

바람꽃 2004-04-13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이들과 '가족'이라는 말에 대하여 이야기했던것 같습니다. 대사 중에 가족임을 강조하고 있죠. 혈연에 의한 가족과 현대가 요구하는 가족,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는 가족의 개념에 대하여 영역을 확장시키며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답니다. 주제가 좋은 연극이죠.


프레이야 2004-04-13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혈연중심의 가족이란 의미가 드넓은 의미로 확장되면 좋겠어요. 아이들과 이런 얘기를 나누셨다니 바람직하네요^^ 진정한 가족이라면 서로를 인정하고 이해하고 북돋아주는 게 우선되어야겠죠. 가족이란 이름으로 서로 헐뜯고 괴로움을 주는 관계도 있는데 말이죠. 원작의 의미와는 좀 다르지만 연극에서는 충분히 나누어봄직한 주제라고 생각되네요. ^^
 

아파트 단지안의 공원 주변에 온통 눈꽃이 피었다. 대낮에도 등불을 밝혀둔 것처럼 천지가 봄햇살처럼 화사하고 따스하다. 바람에 몸을 맡기고 살폿살폿 내리는 눈꽃송이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가볍다. 얄궂은 봄바람의 입김을 거스르지도 않고 괜한 어깃장을 부리며 투정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날리다 바닥으로 떨어져 앉은 눈꽃송이를 난 감히 밟지 못한다. 발소리도 안 내고 그 옆을 가만히 걸어간다.  

눈꽃송이들은 시시각각 다르게 보인다. 이른 아침에 이들은 막 잠에서 깬 듯 조용하다. 고요함으로 정지하여있다. 조심스럽게 하루를 열고 싶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수줍어하며 또롱한 눈망울을 굴리는 아이의 얼굴을 닮아있기도 하다. 어느 어머니가 식구들 깰까 물소리도 조용히 얼굴을 씻고 앉아 기도의 싯구를 읊조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며칠 전 4월을 알리는 봄비가 내리던 날, 눈꽃송이는 젖고 젖어서 참 겸허해보였다. 자신에게 오는 차가운 물줄기를 피하고 싶지 않은 것 같다. 받아들여서, 자신을 피워올려주는 줄기에, 뿌리에 자양분으로 내려보낸다. 비가 그친 후, 그토록 청아하게 맑은 웃음을 짓고 있는 눈꽃송이를 하염없이 올려다보았다. 눈꽃송이는 햇살을 받아 더 영롱하다.

아직은 커다랗지 않다. 올망졸망한 얼굴로 까르르 웃으며 모여있는 눈꽃송이는 유치원 셔틀을 기다리고 섰는 아이들의 얼굴을 닮아있다. 아이들이 좋아하여 냄비가득 튀겨낸 팝콘 같기도 하다. 토닥토닥 냄비안에서 나는 소리는 경쾌하다. 아마 눈꽃송이도 그런 소리를 내며 앞다투어 터졌을 것이다. 얼마나 밝고 귀여운 소린가. 소리가 멈추고 숨을 죽여 뚜껑을 열면, 고소한 내음을 풍기며 뽀얗게 피어나있다.

어제 저녁, 아이들 이모집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오랜만에 잠깐의 나들이를 했다. 아, 하얀 가로등불이 비춰주는 벚꽃송이들은 잠시 온 천지에 눈이 내렸나 착각을 불러왔다. "와아, 엄마, 눈꽃이다.~ 길에도 눈이 많이 내렸어." 황홀하여 쳐다보고 섰는 나를 아이들이 흔들어 깨운다. 

요즘은 어딜 간들 이보다 못할까. 전국이 봄나들이하러 나온 사람들로 몸살을 앓고 있을 텐데. 봄을 그렇게 떠들썩하게 만나는 것보다 나만의 느낌으로 은밀하게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이의 손을 잡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 그 길지 않은 벚꽃길이 날마다 나에겐 새롭다. 오늘은 어떨까 설레며 만나면 기껍다. 꽃은 아무 말이 없는데 나의 간사스러움이 날마다 다른 말을 걸고 싶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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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연엉가 2004-04-04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오늘 날씨가 제법 쌀쌀해서 정말 눈이 내렸나하고 생각을 했지 뭐예요.
꽃눈송이.... 정말 눈이 오는 것처럼 휘날리고 있더군요.
연휴 봄나들이 몸살을 앓고 있는데 지도 소박하게 집근처에서....

겨울 2004-04-04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다니는 길에도 벚꽃이 만개해서 바람에 날리는 모양이 꿈 같았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똑같이 아름답게 바라보는 것 자체로 행복하다는 생각이드네요.

프레이야 2004-04-11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이렇게 공감대를 형성하고 소통할 수 있어 정말~ 행복합니다.
 
어머니는 우리를 25단어로 키우셨다
테리 라이언 지음, 이은선 옮김 / 바다출판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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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이 책의 제목만 보고 연상되는 것은, 잔소리를 최대한으로 줄이고 엄선한 말로 아이를 지혜롭게 길러내고 싶은 엄마교육서 같은 것쯤으로, 단선적인 생각이다. 원제는 How My Mother Raised 10 Kids 25 Words or Less 이다.

여기서 '25 Words or Less'는 각종 콘테스트에 출품했던 응모작의 문구들을 통칭하는 것이다. 2차대전 후부터 추첨식콘테스트가 생겨나기 이전까지 물자가 귀하던 시절, 미국 오하이오 주 디파이언스라는 중서부의 한 작은 도시에 살았던 이블린 라이언이 이 책의 주인공이다. 10남매 중 여섯번째로 태어난 저자는 여러사람이 제공해준 자료와 이야기의 도움으로 하늘나라로 간 어머니에게 이 책을 바친다고 했다.

이블린 라이언은 술주정을 일삼는 남편의 말에 의하면 '징글맞게' 행복한 사람이다. 어떤 고난 앞에서도 실망하고 있기보다는 금세 다른 일에 몰두하며 희망 쪽으로 해바라기를 하는 그녀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삶이 고달프다고 짜증을 부릴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녀는 자기 앞의 조그만 희망의 불씨를 기회로 잡아 남편을 비롯한 11명의 가족들을 행복의 용광로에 빠뜨릴 준비를 언제나 하고 있는 사람이다. 재기 넘치는 글로 온갖 콘테스트에 당선되어 받은 갖가지 상품과 상금이 그들 12명 가족을 그럭저럭 꾸려가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불굴의 의지'라는 뜻을 담고 있는 디파이언스에 그녀가 살았던 건 우연의 일치가 아닌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이블린 라이언의 자존심과 용기는 가난한 이들 가족을 성공으로 이끄는 버팀목이자, 등불이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것 같은 환경에서 그녀가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고 또 그것으로 생활비를 벌고, 그러면서도 아이들을 금처럼 여기며 아이들의 자존심과 가능성을 위해선 어떠한 희생도 치르겠다는 엄마의 태도 앞에, 나약한 심성으로 자신을 파괴의 길로 몰아갈 아이가 몇 있을까. 빈곤이 오히려 이들을 서로 사랑하게 하고 걱정을 함께 하며 나눌 줄 알게 한다. 크리스마스를 쓸쓸히 보내게 하지 않으려고 그동안 받아둔 상품들로 식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근사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마련하는 엄마의 재치와 자애로움 앞에 어떤 아이가 자신의 가난을 부끄럽게 생각할 수 있을까.

술술술 실타래에서 풀리는 털실처럼, 이블린의 화려한 콘테스트 당선 경력과 함께 이들 가족의 다사다난,  엎치락뒤치락, 황당하게 울고 웃는 세월의 이야기들이 풀려나온다. 부럽게도, 이블린의 탁월한 유머감각은 타고났다. 25단어 이하로 운율을 맞추어 문구를 작성하는 것이 어려웠다고 하지만 이블린은 다리미판 옆에 공책을 항상 두고 머리속에 '번쩍'하는 것을 메모한다. 소란스럽고 팍팍한 일상의 모든 게 그녀의 눈을 통과하는 순간 마법에 걸린다.

아이들 글쓰기 지도는 함께 공책에 댓구가 되는 시를 한 행씩 적으면서 했다. 엄마가 먼저 한 행을 적어놓으면 뱃시는 다음 행을 기가 차게 적어놓았다. 많은 수의 아이들 이름도 다 동원하고 middle name을 이리저리 바꾸어 써가면서 하나의 업체에 여러 편의 응모작을 보내기도 하여 당선이 되었다는 연락을 받고도 어느 문구가 당선이 되었는지 모를 때도 있다.

정말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고 기대했던 것이 의외로 좋은 결과를 보이지 못할 때도 이블린은 실망을 모른다. 무심하고 무능한 남편의 태도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그녀의 손에서는 멋진 시로 태어난다. 번역의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빠져버렸겠지만, 운율이나 댓구는 거의 감상하기 어려웠다.

다소 과대광고 같은 면도 있지만 고농축의 단어를 골라 이중의 의미까지 담은 압축된 문장을 만들어놓은 것들에서, 하나같이 그녀의 낙천적, 긍정적 성격을 읽을 수 있다. 세상의 어머니는 강하다고 했지만 모두 그럴까. 이블린은 자신의 모든 걸 던져 아이들의 자존심과 가능성을 지키고 키워주었고, 타고난 생동감과 유머감각으로 가족들이 슬픔에 짓이겨지는 걸 필사적으로 막았다.

이들 가족이 그리는 아름다운 그림 주변에 있는 사람들 또한 따뜻하고 정겹다. 이들이 함께 그리는 그림은 어느 시골길을 가다 길섶에 오밀조밀 낮게 누워 피어있는 이름 모를 들꽃 같다. 수수하고 향기마저 은은한데다 볼수록 정이 가는 그런 모습이다.

아버지는 먼저 저 세상으로 가고 장성한 아이들의 영원한 우상, 이블린은 암으로 조용히 투병하다 세상을 뜬다. 그 1주일 전까지도 단어의 개수가 정확히 25개인 시를 쪽지에 적었다. 그녀의 '샘솟는 활기'와 변함없는 '유머'는 자신에게 주어진 차선의 운명을 최대한 크게 팔 벌려 끌어안고, 징징거리지 않으며, 여유있게 살아낸 자에게 주어지는 증표와도 같은 것이다.

<<나는 성당 앞을 지날 때마다 

    꼭 한 번씩 들러서 인사를 하지.

    그래야 나중에 천국 문 앞에 가서 섰을 때 

    하나님이 "거기 누구야?" 하지 않으실 거 아니니.>> 

운명을 믿는다면, 대개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삶은 언제나 최선이 아니라 차선이나 나쁘게는 최악이 온다. 하지만 그것을 최선으로 살아내는 것은 자신의 몫이다. 진지하되 너무 무겁지 않게, 발랄하되 너무 가볍지 않게, 강하되 너무 딱딱하지 않게, 스스로 마음의 평화를 지키고 그것으로 주위 사람을 전염시킨 이블린. 그녀를 말할 때 딸 뱃시는 '위대한 웃음을 지니신 우리 어머니'라고 부르며 '기록과 윤색과 임의 삭제로 점철된 평생'을 사신 어머니라고 했다. 마천루의 어느 광고회사에서 멋드러진 카피를 쓰거나 신문의 칼럼을 쓰는 커리어우먼으로 살 수도 있었을 이블린은 결혼 전 생긴 뱃속의 생명과 앞으로 이어지는 9명의 생명들을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로 여겼다.  

아이 때문에 자신의 재능을 다 죽이고 살고 있다고 투덜대는 엄마가 있다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자신의 재능은, 사회적으로 명성을 얻고 학계의 명예를 얻고 지적허영을 채우기 위해 학위를 받고 하는 따위의 허울이 말해주는 게 아닐지 모른다. 자신의 보석같은 재능을, 아이들을 위해 가족을 위해 누추한 삶 속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풍요롭게 하기 위해,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연마한 이블린을 오늘날 소박한 인물평전의 대열에 넣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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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4-04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 보곤 님의 말씀처럼 단순한 자녀 교육서 쯤으로, 님의 서평을 읽어 나가는 중엔 소설이겠지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블린 라이언의 아들인 저자가 어머니를 회상하며 쓴 에세이였군요.....
...정말 이블린 라이언의 평전이라 해도 아깝지 않을 이야기같아요.
슈퍼우먼이 되어야 함을 강요받는 사회,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 여성의 입장에서, 이블린의 삶은 , 맞아요....뭔가를 건네주네요. ^^

프레이야 2004-04-04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냉열사님, 아침에 주시는 커피 한 잔... 님의 커피잔만 보면 기분이 마구 좋아져요.
저자 테리 라이언은 딸이랍니다.^^ 한 사람의 엄마로, 아내로,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에 뭔가 멋진 주문을 걸고 오늘도 시작하렵니다.

2004-04-04 2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BRINY 2004-04-19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얘기, 몇년전에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다이제스트판을 본 적 있어요. 전 그렇게 좋은 인상만 받지는 않았어요. 여기 나오는 엄마는 그래도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지 않고 긍정적이고 행복하게 살아서 자식들을 성공시키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엄마가 결혼 전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일과 가정 양쪽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거든요.

프레이야 2004-04-20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RINY님 코멘트 반가워요. 실수(?)란 누구든 하며 사는게 아닐까요. 그 실수 자체가 저에겐 나쁜 인상으로 다가오진 않았어요. 사랑의 결실을 실수라고 생각하기도 그렇고요. 오히려 그것에 대한(생명에 대한, 자신의 행동의 결과에 대한) 책임이 차선을 선택한 삶에 의미를 주는 것 같았어요.^^ 물론 딸이 글을 쓰는 과정과 기억을 되살리는 과정에서 미화된 부분도 많겠지요^^ 이런 이야기자리가 기쁘네요.
 
 전출처 : 水巖 > 결혼기념일

지난 달에 한 쇼핑업체에서 메일이 왔다.

[ 결혼기념일 ]을 축하합니다. 라는 멧세지 밑에 다음과 같은  기념일 명칭을 소개하고 있었다.

  • 1 주년  紙婚式 지혼식                          15 주년  水晶婚式 수정혼식( 수정식이라고도 함)
  • 2 주년  綿婚式 면혼식                          20 주년  陶磁器婚式 도자기혼식
  • 3 주년  革婚式 혁혼식                          25 주년  銀婚式 은혼식
  • 4 주년  花婚式 화혼식                          30 주년  眞珠婚式 진주혼식     
  • 5 주년  木婚式 목혼식                          35 주년  珊瑚婚式 산호혼식
  • 6 주년  糖果婚式 당과혼식                    40 주년  綠玉婚式 녹옥혼식
  • 7주 년  銅婚式 동혼식                          45 주년  紅玉婚式 홍옥혼식
  • 8 주년  靑銅婚式 청동혼식                    50 주년  金婚式 금혼식
  • 9 주년  陶器婚式 도기혼식                    55 주년  翡翠婚式 비취혼식
  • 10주년 朱錫婚式 주석혼식                    60 주년  金剛婚式 금강혼식
  • 11주년 鐵婚式 철혼식
  • 12주년  明紬婚式 명주혼식                   미국에서는 75주년을 diamond혼식이라고 한다.
  • 13주년 水婚式 수혼식
  • 14주년  象牙婚式 상아혼식                   햇수와 호칭은 나라에 따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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