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장 보부아르의 유산
1980-1986년
“다행히도 내 힘으로 내 삶을 성취했다. 나에게 성취는 곧 일을 의미했다.”
1980년 사르트르 죽음 후 보부아르는 아픔을 이기고 문학에서 카타르시스를 찾기 위해 “작별의 의식”을 쓰고 1981년에 출간한다. 이 책은 노년과 질병이 가능성을 제한하고 삶의 상황을 바꿔 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사르트르의 쇠락과 죽음을 이야기했다.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길이지만 상황에 따라 그 과정이 다 같지는 않을 것. 보부아르는 이 책을 사르트르에게 바치는 책이자 “노년”의 연장이라고 생각했다. 역시 혹독한 비난을 받았으나 이후 보부아르는 좋아하는 두 가지 일에 전념한다. 하나는 여성 해방을 지원하는 일 또 하나는 실비를 비롯한 친구들과 시간 보내기.
보부아르는 여성이 “바라 보는 눈”이 되고 여성이 세상을 보는 시각이 표현되고 경청되고 존중되기를 바랐다. 여성 권익을 위한 위원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했다. 1982년 미테랑 대통령이 수여하려 한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거절한 보부아르는 문화 제도 기관이 아니라 참여하는 지식인이었다. 클로드 란즈만이 12년만에 완성한 “쇼아” 서문을 비롯해 각종 글쓰기는 그를 지탱하는 힘이었고 변화의 다음 단계로 나아갈 역량이 있는 젊은 여성 세대에게 명령과도 같은 말이었다.
보부아르는 란즈만에게 권한을 차츰 넘기긴 했지만 1985년에도 여전히 “레 탕 모데른”을 지휘했다. 위스키를 끊지 못하고 타계하기 몇 주 전까지도 한결같이. 편집진은 보부아르의 “물리적 존재감, 힘, 권위가 매체를 살아 숨 쉬게” 했다고 증언하고 개인적 정치적 격랑 속에서 편집위원회를 붙잡아주었다고 기억한다.
자신은 체계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로 체계적 철학자이길 거부했으나 자신의 책에 철학이 들어가 있다면 그게 자신이 세상을 보는 방식이라고 밝혔다. 미리 알 수 없는 미래, 그 의미를 갈망하며 사는 데에 인간의 존재 의미가 있다는 말에 동의한다. 활화산 같은 에너지를 지닌 사람, 세상의 오해와 비난도 즐겨 맞으며 그 많은 일을 어찌 다 했는지 경이롭다. 보부아르에게 문학과 글쓰기는 정력을 내뿜어 자기정화와 통찰로 가는 최고 방편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되어가고 있는지, 하나의 질문을 유산으로 남겼다, 보부아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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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젊었을 때 열을 올려 토론하다가 둘 중 하나가 이기면 끝장을 내며 의기양양하게 상대에게 말하곤 했지요. “당신 꼼짝 못하게 됐네요!” 이제 말 그대로 당신의 작은 관 속에서 꼼짝 못합니다. 당신은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고 나는 당신에게 가더라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당신 옆에 묻는다 해도 당신의 잿가루와 나의 유해는 서로 오가지 못할 것입니다.
- 작별의 의식, 들어가며, 중
1986년 4월 사르트르 기일을 몇 시간 앞두고 78세의 일기로 눈을 감은 보부아르의 유해는 몽파르나스 묘지에 나란히 안치되었다.
“그의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고 있다. 나의 죽음이 우리를 결합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된 것이다. 우리의 생이 그토록 오랫동안 일치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아름답다. “
함정임이 옮기고 현암사에서 정갈한 디자인 양장본으로 낸 “작별의 의식”은 1970-1980년간의 말년 사르트르를 사유의 견줄 데 없는 친구였던 보부아르가 보고 남긴 기록이다.
“존경은 산 자에게 돌릴 것, 죽은 자에게는 오직 진실만을 돌릴 것” - 볼테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