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부아르는 오스틴의 여주인공들이 묻는 질문을 이렇게 표현한다.
- “내가 단지 타자로서만 성취를 이룰 수 있다면 어떻게 나의 에고를 포기하게 되는 것일까?“(다락방의 미친 여자, 320)
5장에서는 오스틴이 창조한 비밀 요원들이라 할 수 있는 여주인공들이 실제로는 고집 센 ‘아버지’의 세계에 살면서 에고를 어떻게 포기했는지 아니 포기하는 척 위장했는지를 추적한다. 상대적으로 격렬하거나 온화하거나 오스틴 주인공들의 태도는 오스틴 자신을 반향하는 태도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오스틴 주인공들은 후반 작품으로 갈수록 에고를 포기하는 척함에 있어서 노련하고 사고는 더욱 깊어진다.
“자기주장, 상상력, 재치는 자기를 정의하는 유혹적인 요소이지만 지배당하는 운명을 감수해야 하는 여성에게 이것은 위험한 환상이며 겸손, 과묵, 인내의 이점들을 배워 나간다.(320)“
이렇게 개인적 정체성과 사회적 관계속에서 만들어낸 새로운 자아는 이중의 비전을 견지함으로써만 생존할 수 있다. 이들의 ”성숙은 무너진 세계와 자기 분열 이중성,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의 지속적인 가능성뿐 아니라 필요성까지 함축한다.
- <에마>(1815)의 화자는 ’인간의 말에서 완전한 진리가 드러나는 경우는 드물다. 정말 드물다. 어떤 일이 전혀 꾸밈도 오해도 없이 생길 수 있는 경우도 드물다‘고 했다. 오스틴은 여주인공들은 침묵을 조종의 수단으로, 수동성을 권력을 얻기 위한 전략으로, 순종을 그들이 유일하게 가능한 통제 수단으로 이용하고 그들이 원하고 필요한 것을 얻어 낼 수 있을 때 순종하는 듯 보인다(322)
오스틴 소설의 결말은 종종 너무 빤한 해피엔딩으로 취급되는데 그에 대한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 나온 아래 발췌문의 해석에 공감된다. 야단법석에 그 많은 수다를 다 펼쳐놓고 오스틴은 화자로서 불쑥 개입해 만족할 만한 결론을 내려주곤 하는데 독자는 서두른다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이는 벗어나기 어려운 남성 세계 안에서 가엾은 여주인공에게 “호의적인” 화자이자 구원자로 역할하는 것이다. 오스틴이 소녀와 여자들의 순진한 환상과 치욕스러운 순종을 꾸짖다가도 행복한 결말을 갑작스레 선사하는 것처럼 보이는 선한 의도에 손을 들어준다. 서글프지만 그 시대, ‘아버지’의 세계가 그만큼 완고하다는 방증이다.
- 이미 많은 비평가는 오스틴 소설의 행복한 결말이 내포하는 이중성을 주목해왔다. 이 결말에서 오스틴은 매우 서둘러서 또는 있음직하지 않은 우연의 일치로 또는 모든 메시지를 약화시킬 버릴 정도의 빈정거림으로 연인들을 축복의 가장자리로 데려온다. 호의적인 화자의 도움이 없다면 소녀는 결코 치욕감이나 부모의 집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암시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오스틴의 이중성이 좀 더 모호하게 나타나는 것은 극도로 강력한 여자들을 재현할 경우다. (중략) 그러나 그들의 에너지가 파괴적이고 불쾌하게 느껴진다면 그 이유는 오스틴이 자신의 가장 독단적인 측면을 타자로 가장하는 매커니즘 때문이다. 못된 여자들은 반항적 충동을 재연하고 그 충동은 그들을 이성적으로 만든다. 그것은 여자 주인공을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작가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333)
1814년 출간된 <맨스필드 파크>의 세 자매 중, 조카 패니를 적대시하고 모욕을 주는 노리스 이모에 대해서는 이렇게 옹호한다.
- 노리스 이모는 비록 비난 받는 인물이었지만 작가 입장에서는 기쁘게도 오스틴 시대의 사람들이 가장 격찬하며 즐거워 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노리스 이모는 <Mansfield Park>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목소리 중 하나다. 그녀는 백설공주의 계모인 부산하고 교활한 여왕을 닮았을 뿐 아니라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에 나오는 밤의 여왕과도 닮았다. 오스틴 소설의 모든 분노에 찬 귀족 과부들은 남성신의 계몽적 이성을 위협하며 남성신은 결국 여성의 섹슈얼리티, 변덕, 수다의 힘을 추방함으로써만 여자 주인공을 얻는다. (336-337)
- 5장 제인 오스틴의 겉 이야기(와 비밀요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