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는 나의 힘 

                                                         

기 형 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거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 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비자림님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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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 2006-09-11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제목의 영화도 이 시에서 따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어요. 어쨌든 이 시의 제목은 참 묘하게 사람을 끄는 힘이 있는 듯..
기형도에게 질투는 책 속의 사람들이었겠지만...
저에겐 마지막 두 행이 참 쓸쓸하게 박혔어요. 더 사랑해야 할 나 자신. 더 치열하게 살아야 할 내 자신의 인생...

프레이야 2006-09-11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자림님, 공감이에요^^

겨울 2006-09-12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어제, 이 시를 읽노라니 마음 가득 회한이 밀려오더군요.
이 시를 씩씩하게 낭독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프레이야 2006-09-12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울과몽상님, 이 시를 씩씩하게 낭독하던 시절은 가고 지금 그런 회한이 밀려오는 걸 보면 세월이란 녀석이 참 덧없이도 흘러갔나봅니다. 덧없다는 것은 변화한다는 것, 변화는 새로워지는 것이니 이제부터라도 스스로를 사랑하는 일에 좀 열심이고 싶어요. 님 좋은 시간 보내세요. 빗방울이 간간이 보입니다..
 
비 온 뒤 맑음 - 아빠와의 배낭여행기
뱅상 퀴벨리에 지음, 김준영 그림 / 거인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4학년 남자아이들에게 아빠와의 마음의 거리가 얼마 정도 된다고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보통이다, 전에는 보통이었는데 요즘은 가깝다, 가깝다, 이런 대답이 나왔다. 우리집 아이들에게는 아직 물어보지 못했다. 두 딸에게 이 질문을 해보아야겠다. 돌아올 대답이 조금 두려워 묻지를 못하겠거든 먼저 이책을 읽어보라고 부모님께 먼저 권하고 싶다. 아이들이 품을 수 있는 불만들이란 소소한 것일 때가 많다. 하지만 그걸 소홀히 할 때 문제는 확대되고 나중엔 걷잡을 수 없어질지도 모른다.

이 책의 원제는 '킬로미터 제로'다. 21일간의 배낭여행을 뜬금없이 제안하는 자유분방해보이는 아버지와 싫은 내색을 하면서도 억지로 끌려가다시피 배낭을 짊어지고 여행을 따라나서는 벤자민이 이 책의 주인공이다. 열두 살이면 사춘기가 시작되는 정도의 나이다. 부모님과 대화가 줄어들고 불만들이 쌓이고 세상사가 모두 자신에게 불리하거나 불합리하게 돌아가는 것 같다고 철썩같이 믿게 되는 나이이기도 하다. 그리고 부모와 어딜 같이 가기도 꺼리고 또래친구들과 있는 시간을 더 가지려는 경향도 있다. 아니면 차라리 혼자 있기를 선호한다.

이 책의 벤자민은 어릴 때부터 엄마와 아빠의 이혼을 경험하고 아빠와 단둘이서 살아온 아이다. 이 책에서는 벤자민과 아빠의 살아온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자세한 에피소드도 없고 인상적인 사건도 나열되지 않는다. 어쩌면 부모의 헤어짐으로 갈등하고 고민하는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이미 많이 나와있으므로 작가는 의도적으로 그런 부분을 피해가는 것 같다. 그 대신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여행하는 시점에서 시작한다. 그것도 둘만의 여행으로 21일간 300킬로미터를 걸어서 하는 여행이다. 벤자민은 프랑스 지도를 펴고 아빠가 표시해 둔 빨간색과 흰색의 선을 따라 걸어갈 예정이란 말밖에 듣지 못한다.

엄마의 권유까지 합세하여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여행 제안 앞에서 뚱한 얼굴로 출발하는 벤자민의 마음의 변화가 여정과 함께 드러난다. 21일간 300킬로미터의 길 위에서 투박해보이지만 사실은 섬세하게 나타난다. 강한 척 하지만 속으론 연약한, 이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갖는 이중적, 어중간한 감정의 양립은 육체적인 과도기 못지 않게 격렬하게 겪게 되는 변화다. '바보처럼 우리는 걷기만 했다. 마른 땅인데도 왜 발이 질척거리는 흙에 빠지는 것처럼 무거운지 알 수 없었다.' (11쪽)  이런 식으로 벤자민의 마음은 자연 또는 날씨 그외의 다른 것들에 비유되어 간접적으로 표현된다. 그런 글귀들을 따라가며 마음의 변화를 엿보는 재미가 있다. 벤자민은 그동안 아빠의 대화가 부족하였고 아빠의 관심도 부족하다고 느끼며 살아왔다는 것을 여행 중간 쯤에서 알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억눌려있던 감정들이 설움에 복받쳐 터져나오면서 벤자민의 마음은 점점 화해의 길로 접어든다. 어쩔 수 없는 취향의 차이, 세대차이로 인한 정서의 차이 같은 것도 둘만의 여행을 통해 서로가 알게 되며 인정할 것을 인정해야함도 배운다.

이들이 가까워지는 시간은 삶을 통틀어볼 때 그리 길지 않다. 20일 남짓 동안, 이들은 자연을 몸으로 느끼고 함께 호흡하며 원시적인 즐거움을 맛보기도 하고 자연의 아름다움 앞에서 숨막힐 듯 감사하기도 한다. 특히 복잡한 심경을 끌어안고 억압되어있던 벤자민은 낯선 길 위에서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고 정을 느끼며 부대끼는 소중한 경험을 한다. 어려운 일 앞에서도 스스로 해보거나 도움을 청할 줄도 안다. 더구나 어른들이 가질 수 있는 복잡한 감정 같은 것들에도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의 성장을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여행을 꿈꿀 정도로 말이다.

벤자민이 도착한 곳은 300킬로미터 떨어진 거리가 아니라, 아빠의 마음이다. 처음엔 그렇게 멀게만 느껴졌던 아빠의 마음에 걸어서 걸어서 도착한 것이다. 그곳은 아늑하고 미더우며 말하지 않아도 힘이 느껴지는 곳이다. 마음의 고향, 태어난 곳이자 돌아갈 곳, 생명의 원류인 것이다. 그래서 늘 그리운 곳이기도 하다. 여행의 의미가 사람마다 다르고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런 식의 여행이라면 둘이서, 가깝고도 먼 사람 둘이서 꼭 해보고 싶다. 나의 딸, 나의 아들 혹은 사랑하는 어떤 대상과 마음의 거리를 좁혀서 서로의 종착지로 삼고 싶다면 말이다. 마음과 마음, 세상에서 가장 멀고도 가까울 수 있는 거리가 아닐까. 제로 킬로미터로 좁혀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사이가 어디에 있을까싶다.

이 책의 미덕이라면, 그런 이야기를 한 편의 잔잔한 여행기로 군더더기 없이 풀어냈다는 점이다. 자연 속에서 한 호흡을 하며 감정의 거리를 좁혀가는 점도 그렇다. 걷다가 지치면, 우리는 아무 말없이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는 사이 아빠와 나의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70쪽)  또다시 그 거리가 멀어지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이 정도의 경험이라면 살면서 되돌아보며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공유될 것이다. 삽화도 깔끔하다. 하지만 한 문장에서 오자가 발견되어 아쉬웠다. 138쪽 - 해자 지는 모습을 싶은데요. --> 해가 지는 모습을 보고 싶은데요., 로 바뀌어야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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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11 07: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6-09-11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조카가 4,5학년이상이면 좋겠어요. 좋은날 시작하시기 바래요 *^^*
 
 전출처 : 해콩 > 한겨레 펌] 가치의 니힐리즘, 아이들의 애국주의 - 이계삼

가치의 니힐리즘, 아이들의 애국주의 - 이계삼
 
‘전체조회’라는 고약한 모임은 지금도 학교에 살아 있다. 아이들은 한줄로 기다랗게 늘어서서 멍하니 천장을 보거나, 신발로 바닥을 비비거나, 앞에 선 아이를 쿡쿡 찌르거나, 끝없이 히히덕거린다. ‘육체’와 ‘시간’이 서로를 뭉개고 누르면서 벌이는 이 지리한 싸움의 풍경.


이 모임은 언제나 국민의례라는 충성의 서약으로 시작한다. 나는 대열의 맨 뒤로 슬그머니 빠진다. 이 학교에서, 교사라는 직업인으로 살아가는 내가 충성을 바쳐야할 대상은 ‘조국’과 ‘민족’이 아니라는 믿음 때문에 나는 이 어설픈 ‘불복종’을 감행한다.

그리고 이제 나는 국민의례 때마다 김선일이 떠오르고, 앞으로는 전용철 아저씨와 홍덕표 할아버지를 떠올릴 수밖에 없으므로, 나는 굳은 얼굴로 대열의 맨 뒤에 멀찍이 서 있을 수밖에 없다. 그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물론 나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아니다. 그리고, 나에게는 ‘총’ 대신 ‘감옥’을 택한 양심적 병역 거부자의 결연한 용기도 없다.

소박하게 말하자면, 나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무언가를 응시해야하는 의식 그 자체가 사무치게 싫다. 그런데, 나이를 먹어갈수록 부끄럽기만한, 이제는 수치와 모멸의 감정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내 조국의 상징 태극기 앞에서, 가슴에 손을 얹고,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노라는 맹세의 주문을 듣고 있어야 한다니.


나는 그간, <한겨레21>을 구독하면서 독도 문제를 다룬 특집이나 우리 사회 소수자들을 옹호하는 기사들에서 우리 사회의 남성주의, 국가주의적 성향을 문제삼는 <한겨레21>의 관점에 공감해왔다. 국가주의건 남성주의건 모두 ‘전체주의’의 한 변종일진대, <한겨레21>의 이 모든 노력은 최소한 우리 사회에서는 ‘전체주의’에 대한 가장 예민한 촉각이었다. 그 기사들을 통해 내가 배운 점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목마름을 느꼈다는 것도 고백해야겠다. 예컨대, 이제는 대학 면접 구술 고사에서도 ‘양심적 병역 거부’, ‘동성애’와 같은 소수자 관련 문제가 출제되고, ‘똘레랑스’라는 말은 웬만한 고등학생도 알 정도가 되었다. 그럼에도 독도, 황우석, 새만금, 천성산, 쌀수입개방, 이라크 파병과 같은 굵직굵직한 사안 앞에서 ‘국익’이라는 도깨비같은 수사로 포장된 이 전체주의적 성향은 좀체 수그러들지 않는 것 같다.

이것은 조중동과 <한겨레>의 힘의 차이인가, 보수정당들과 민주노동당의 의석수의 차이인가, 아니면 교총 회원과 전교조 조합원의 숫자의 차이인가.

요컨대, <한겨레21>의 기사들을 통해 느꼈던 나의 목마름을 이런 질문으로 환언해보자. (국가주의, 남성주의를 위시한) ‘전체주의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 이데올로기인가, 아니면 삶의 양식(樣式)인가.’ 만약, 전체주의가 이데올로기라면 왜 학교 현장에서 ‘통일교육’ ‘양성평등교육’이 공식적인 교육과정 속에 등재되고, 국가인권위가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할 것을 권고하는 커다란 변화를 겪으면서도, 정작 학교 현장에서 전체모임(애국조회)은 사라지지 않으며, 국민의례와 같은 폭력적인 의식에 대해서는 아직도 문제제기조차 할 수 없는가.

왜 우리 아이들은 적지 않은 교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장애인을 ‘애자’라고 부르고, 동성애자를 ‘뵨태’로 느끼며, 독도 문제나 황우석 사태에서는 어른 세대 이상으로 폭발하면서 ‘잠재적인 우익’으로 ‘잠재적인 마초’로 성장해 가고 있는가.


아이들에게서 느끼는 ‘가치의 니힐리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국가주의, 남성주의, 그리고 그것들이 뭉친 ‘전체주의’는 이데올로기로 이 사회의 표면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삶의 양식’으로 이 사회에 깊숙히 뿌리박았다는 것이다.


전체주의가 ‘삶의 양식’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모두는 ‘안락에 대한 희구’와 ‘그 안락을 박탈당했을 때의 공포’로 꽁꽁 묶여버린다. 따라서 아주 작은 일탈도 자신의 전 존재를 걸어야 하는 모험이 되고, 모두에게는 그저 시스템이 만들어놓은 ‘뻔한 길’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우리 아이들은 그저 ‘안락한 삶’을 향하여 나 있는 반복된 루트를, 이를테면 학교와 학원, 텔레비전과 판타지 소설과 컴퓨터 게임을 오가면서 짓무르도록 답습할 뿐이다.


언젠가 나는 <구운몽>을 가르치면서 ‘성진’이 꿈속에서 ‘양소유’로 태어나 현세의 부귀영화를 맘껏 누리듯이, 너희들이 직접 꿈 속의 ‘양소유’가 되어 폼나게 살다가 꿈에서 깨는 과정을 써 보라는 과제를 준 적이 있었다. 나의 의도는, 짐작하듯이, 너희들이 지금 갖고 있을 현세적 성공과 관련되는 ‘욕망의 판타지’를 한 번 양껏 펼쳐보라는 것이었다. 판타지 소설이나 비슷한 류의 텔레비전 드라마에 너무나도 익숙한 그들이었기에 충분히 가능한 과제라 여겼지만, 결과는 의외였다.

너무나 앙상한 도식, “사법고시에 패스해서 온갖 연예인들 거느리며 살다가 꿈에서 깼다더라”는 식의 졸가리로 일관하는 글들이 넘쳐났다. 요컨대, 그 글들에서는 구체적 삶의 세계가 없었다. 그것은 성적이 우수한 아이건 그렇지 않은 아이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것은 나의 억지일까.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비록 확대된 해석일지라도 이런 경향 자체는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여기에는 중요한 문제가 깔려 있다. 우리 시대의 아이들에게는 그 나이, 그 세대에 고유한 ‘구체적인 경험의 세계’에 대한 감각이 결정적으로 퇴화해버렸다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부모 세대의 욕망이 구축한 시스템의 상자 안에 갇혀버렸다. 그들에게 사물과의 진정한 교섭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학교 교육이, 어른 세대가 가르치려 드는 가치,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들은 다만 본능적인 회의의 대상이다. ‘경험’이 없는데 어찌 그 경험의 알짬, ‘가치’가 자리잡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아이들에게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인가. 가치의 니힐리즘, 그리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족, 친구 집단같은 실체적 공동체건, 국가민족같은 상상된 공동체건)에서의 존재감의 확인, 그것밖에는 없다.


한 달여전 우리 학교 아이들과 3박4일간의 수련활동에 참여했을 때, 각 반의 재주꾼들이 장기자랑하는 자리에서 불렀던 노래를 나는 유심히 들은 적이 있다. 그 노래들은 물론 나로서는 대부분 처음 들어보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들은 대개 ‘사랑’을 다루고 있었지만, 아주 극단적인 상황, 이를테면 ‘너에 대한 사랑 하나로 이 세상에서 내가 겨우 사는데, 너는 죽었다. 혹은 그걸 남에게 빼앗겼고, 나는 지쳤다. 그러니 이제는 나도 죽을 것만 같다’는 식이었다. 이것은 원래 사랑 노래의 고전적인 도식일 따름인가.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사랑’들은 천년 이상의 까마득한 시간대로 비약한 신비화된 사랑이었고, 하나같이 처절한 비극이었고, 그래서 극단의 사랑이었다.

삶의 형상, 일상의 곡절속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사랑의 형상은 없었다. 문득 나는 느꼈다. 아이들이 불쌍했다. 그 노래들의 밑바탕에는 삶과 세계에 대한 그들 나름의 ‘절망’이 깔려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그 아이들이 부르는 장중한 발라드와 고음에서 터져나오는 절규가, 자유와 일탈의 모든 가능성을 거세당한 채, 희망도 없이, 오로지 ‘안락한 삶’만을 위해 학원에서 학원으로, 입시에서 입시로, 감시와 처벌, 통제과 규율 속에서 이리저리 떠밀리면서 그저 한 살 두 살 나이만 키워 온 그 아이들의 황폐한 내면의 한 풍경이라고 나는 느꼈다.

그들은 존재감을 갈구하는, 불안하고 가련한 어린 짐승들이었다. 그 아이들이 타자에 대한 관용과 힘없는 것들에 대한 연민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은 그야말로 ‘모험’이었다.


아이들에게 ‘경험’의 세계를


그래서 아이들은 제 존재감으로 육박해오는 것들에 열광한다. 학교에서 하는 전체 모임은 그토록 지겨워하고, 국민의례의 태극기에는 무덤덤한 아이들이 월드컵 공간에서는 붉은 악마가 되어 “대~한민국”에 눈물 흘리며 제 존재감을 확인한다. 아이들은 그래서 국민 영웅 황우석을 흠집내는 ‘진보주의자’들에 분노하고, 독도를 제땅이라고 우기는 ‘쪽발이’들과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한다.
“아니, 왜, ‘우리땅’ 독도를 건드리고, ‘우리’의 영웅 황우석 박사에게 가탁된 내 존재감을 박탈해가느냐”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사회의 국가주의, 남성주의를 피부로 느끼고, 점점 ‘애국주의’에 열광하는 아이들의 흐름을 조금이라도 되돌리기 원하는 지성이 있다면, 그 노력은 단연코 이데올로기 차원의 투쟁이 아니라, 아이들을 ‘자연’으로, ‘경험’의 세계로 돌려보내기 위한 투쟁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이야말로 근본적인 몸부림이다. 국가주의, 남성주의를 정연하게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김훈의 <칼의 노래>같은 마초적 허무주의, 우익적 사무라이 근성이 넘쳐흐르는 소설에 가슴 설레는 아이가 있다면, 그에게는 삶의 양식이 아닌 다만 ‘이데올로기의 혼란’이 있을 뿐이다. 가치의 니힐리즘, 아이들의 애국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은 다만 ‘경험’ 그 자체에서 싹터오를 수 있을 뿐이다.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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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전당에서 했던 인상파 거장전이 9월 8일부터 부산박물관에서 시작했어요.  오늘 오후 늦은 시각에 아이들이랑 옆지기랑 다녀왔습니다. 집에서 가까워요.



어른 만원에 학생은 칠천원의 입장료네요. 12월 10일까지 합니다.

프랑스 화가, 미국화가 모두 87점의 인상파 그림이 전시되어있고 미국 브룩클린 미술관에서 빌려온 것들이라고 하죠.

오랜만에 간 박물관의 전경이 가을향기와 함께 아늑했어요. 늦은 오후의 가을햇살이 아직 옷을 갈아입지 않은 나뭇잎 사이로 고운 무늬를 그려내고 있었어요. 정문을 들어서서 표를 사고 본당으로 올라가 옆의 회랑을 따라 돌아서 갔어요. 회랑을 걸어갈 때면 전 언제나 설렙니다. 돌아서는 그곳에 보고픈 만남이 있으니까요.

역시 인상파의 초기 화가 모네의 찬란한 빛의 붓터치는 인상적이네요. 두껍게 덧칠한 붓결을 눈에 두고 점점 뒤로 물러서면 그림이 마치 마술을 부리는 것 같습니다. 가까이서 본 그림의 인상과 점점 거리를 두며 갖게 되는 인상은 제 마음에 마술을 보여줍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술도 이런 것일까요.  주체와 객체 간에 그려내는 빛의 마술,  피사체에 눈을 갖다대는 행위의 묘미도 이런 것이겠죠.

늘상 빛의 포착에 집중하는 아마추어사진사 옆지기도 역시 모네가 순간적으로 포착한 빛에 매료되나봅니다. 한참을 서서 마주하고 있네요. 희령인 <모네의 정원에서>로 클로드 모네를 만난 적이 있어서 모네를 들먹이네요. 부인이 아주 많았다면서..^^

프랑스 인상파들만 알고 있었는데 미국 인상파화가들의 그림을 두루 볼 수 있었다는 점이 반가웠습니다. 특히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아니 보았던 것 같은 친근한 그림, 바로 그 그림,

찰스 커트니 커란이 그린 <언덕 위에서>!!

(여기 옮길 수가 없네요. 대신 부분만 폰카로 찍어서..)



눈이 부실 지경입니다. 하얀색 물감이 어찌 그런 터치로 칠해져 있는지.  하얗게 부서지는 빛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순결합니다.  나란히 앉은 처녀 세 명의 홍조 띈 옆얼굴과 올려묶은 머리카락에는  빛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무늬가  어립니다. 흰구름보다 더 흰 레이스옷의 질감이 그대로 잡힐 것 같네요.  보이지 않게 속으로 나풀거리는 흰색의 춤이 순수한 물결을 그려냅니다.  처녀들의 가느다란 팔도 꼭 한 번 잡아보고 싶을 정도로, 살아있는 온기가 느껴집니다.

화려한 빛과 점묘법의 화가, 르느와르는 1897년 사고로 팔이 마비되어 붓을 손에 끈으로 묶어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어요. 그렇게 화사하고 생기가 감도는 빛을 살려내면서, 이면에는 육체의 한계에서 오는 고통을 감당해야했을 화가의 정신력에 감탄했습니다. 딸기가 있는 정물, 처음 보았는데 느낌이 아주 좋았어요. 정물에서 동적인 느낌을 받게 되네요.

프랑스인상주의 화풍이 발달할 수 있었던 시대적 배경으로 사진기술의 발달은 알고 있었지만 일본판화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았다는 건 이번에 알았습니다. 일본전통판화로 세속을 주로 소재로 한 목판화 우키요에. 인체의 부분을 절단하는 형식의 그림이 그것의 영향이라고 하네요. 스냅 사진의 묘미인 순간의 포착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습니다. 

시대의 조류에 거스러는 행위는 그것이 예술이든 다른 무엇이든 호평을 쉽사리 받기 어려운 법이겠지만,  그런 것에 휘둘리지 않는 예술혼은 어느 시대에나 아니 시대가 흘러서 오히려 재평가를 받기 마련입니다. 프랑스 인상파화가들의 시대가 막이 내려갈 무렵 19세기 말, 미국의 인상파 화가들이 그들의 시대를 여는데 그들의 그림은 유럽풍보다 좀더 광활하고 거침없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저만의 인상인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시대의 조류였지 싶습니다. 미국 여류 인상파화가의 그림들도 인상적이었어요. 여성이라는 이유로 파리 미술학교 입학을 거절당하고 달리 공부한 여성화가도 있더군요. 이름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물체를 원뿔과 원, 원기둥 등으로 단순화한 화가도 있어, 후기 인상파 그림에서는 20세기 입체파의 태동을 느낄 수 있어요.

아무튼 미국의 인상파 그림을 볼 수 있었다는 점이 덤이었습니다.  기모노를 입고 있는 여인, 도 인상적이었어요. 석판화와 에칭 작품도 더러 있어서 또다른 느낌이었어요. 무엇보다, 빛의 기운을 잔뜩 받고 왔어요. 빛으로 가득한 가을을 꿈꾸며 모두 밖으로 나와 옆지기의 주문대로 모델이 되어주었어요.^^  일부러 마감시간 맞추어 갔더니 사람들이 별로 없어 감상하기에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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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09-10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옷. 그래도 인상파까지의 그림은 제 눈에 익어서 좋아하는데.. 예술의 전당에서 했었군요 ^^;

춤추는인생. 2006-09-10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글에서 가을냄새가 물씬풍겨요.. 그림도 역시..^^`찰스 커트니 커란의 언덕위에서`
는 저역시 좋아하는 그림이랍니다. 젤 앞에 앉아계신분이 혜경님이시구 다음이 저 아니였던가요?ㅎㅎ


프레이야 2006-09-10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춤추는인생님, 젤앞이 저라면? ㅎㅎ 생각만 해도 꿈같네요^^ 님이라면 정말 어울려요^^ 그 그림 포스터앞에서 울세모녀 나란히 세워두고 옆지기가 사진을 찍었다는 것 아닙니까?^^ 사진 잘 나오면 올릴게요..

기인님, 인상파 그림 아름다워서 좋아요^^

비자림 2006-09-10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부산이 논산이라면 다녀 오겠는데..^^ 너무 멀게 느껴져요 ㅜㅜ
희령. 따님 이름인가요? 님의 이름도 이쁘지만 참 여운 있어 좋네요.
빛의 기운 받고 오신 님! 따스하고 영롱한 가을 되시길!

水巖 2006-09-10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산에서 하는군요. 너무 인상 깊은 그림들과 그 그림을 감싸안고 있는 각양각색의 액자도 참 멋있었구요.

프레이야 2006-09-11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자림님, 논산에도 가면 좋을텐데요~ 네, 통통공주 희령인 2학년이에요^^ 님도 가을빛 한아름 안는 좋은 나날 보내시기 바래요!

수암님, 정말 그림을 안고 있는 액자들이 어찌 멋스러운지 저도 액자들을 유심히 봤답니다. 하나쯤 집에 걸어두고 싶은 그림들이었어요. 액자랑 그대로요^^

세실 2006-09-11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헛 예술의전당 갔을때 따른 전시회 보느라 미쳐 못갔거든요...생각할수록 후회 된답니다. 흑.
깊어가는 가을에 행복한 관람 하셨네요.

프레이야 2006-09-11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실님, 아깝네요. 가을의 정취랑 잘 맞았어요. 고풍스러운 액자들도 분위기 만점이었구요.^^

달콤한책 2006-09-11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님은 부산에 계셨군요...

꽃임이네 2006-09-11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 님 부산에서 사세요 ,,그먼곳에서 예술에 전당까지 오셨어요 .
와 ~~~~

프레이야 2006-09-11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콤한책님, 네 부산에 살아요. 님은요?
꽃임이네님, 부산박물관에서 봤어요^^ 예술의전당까진 못 갔거든요^^

달콤한책 2006-09-12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일산이에요...

프레이야 2006-09-12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콤한책님, 일산.. 가본적은 없지만 가보고 싶은 곳이에요. 느낌이 좋아요.
 

<꽃비>

 

누가 저들에게 옷을 입혀 다오

 

살냄새

분홍빛 살냄새

 

환각의 독을 마시지 않고서야

저럴 수는 없다

 

부끄럼도 없이

알몸으로 어쩌자는 것이냐

 

누가 저들에게 옷을 입혀 다오

 

나는 차마

눈을 감을란다

 

-이은숙 님 <북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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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또유스또 2006-09-06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안 주무시고 계셨군요...
^^ 님께 아직 부치지 못한 편지가 있는데 무엇으로 채울까 고민하고 있어요...
매일 생각 날때 마다 채우고 있으니 이번주엔 부칠수 있으려나요?
연두, 물빛, 바람빛, 보라,회색톤의 갈색, ... 님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빛깔들...
이 빛깔을 다 모아 편지에 넣어 보내드렸으면 좋겠는데..^^
허접하다 흉보지만 말아 주시어요...
추적추적 비가 드디어 이곳 인천에도 내립니다...
같은 비를 보고 있나요.....?

프레이야 2006-09-06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또또님, 여기도 비가 와요.. 촉촉해져요.. 9월이 벌써 닷새나 지나가버리고 있는데 왜 이리 마음만 동동거리고 있는지요.. 쓰고 싶은 글 써야하는데 요즘 머리가 꽉 막혀있는 것 같으네요. 님, 저에게 붙여주는 빛깔들이 얼마나 기분좋은지 아세요? 행복해요^^ 글구 뭘까? 기대돼요^^

프레이야 2006-09-06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자야겠어요. 머리가 띵하네요..

마노아 2006-09-06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차마 눈을 감을란다. 아... 어휘가 너무 좋아요. 제가 얼마 전에 뮤지컬에서 눈물 쏟으면 들은 노래 가사에도 이런 대목이 있었거든요. "나는 눈감고 있으려오. 그대 눈앞에 세상이 눈물뿐이니...."

꽃임이네 2006-09-06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 저도 궁금해지는걸요 ^^&

전호인 2006-09-07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빨리 옷을 입혀줍시다. ㅎㅎㅎ, 생각을 하게 하는 시인 것 같습니다.

비자림 2006-09-07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네요!
"살냄새
분홍빛 살냄새"


저는 살냄새가 좋아요. 잉, 아침부터 웬 야한 모드의 댓글을? ㅎㅎㅎ

씩씩하니 2006-09-07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옷 안입히고,,그냥 확~ 국 끓여 먹을까봐요,,히~
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자기 모습을 완전 다 드러내는 이들 보면 저도 옷 입혀주고 싶다,이런 생각이 들드라구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