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해리포터7 > 연홍도.파도라는 여자 --이생진

연홍도 . 파도라는 여자

 

멀리서 아내에게 전화를 건다

  "여보세요, 난데"

  "거기가 어디죠?"

  "섬이지"

  "무슨 섬?"

내가 섬 이름을 대면 알까

연홍도라는 섬

아무리 일러줘도 모를 것 같아서

얼른 끊었다

전화통 밖에서 출렁이는 파돗소리

아내의 치맛자락 같은 향수

어느새 갈매기로 변해서

날아온 여자 목소리

거기가 어딘지도 모르며 따라온 여자

그것은 파란 치마 입은 파도라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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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미오와 줄리엣 (양장) 세계의 클래식 2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삐쁘첸코 류다 그림, 김종환 옮김 / 가지않은길 / 2006년 2월
평점 :
절판


로미오와 줄리엣은 너무나 유명한 내용이라 오히려 희곡으로 읽어보려는 시도를 안 하기가 쉽다. 이 책은 중학 2학년과 읽었다. 무게감이 느껴지는 장정과 고전적이며 낭만적인 그림으로 먼저 눈길을 끄는 이 책은 읽어내려가기에 어렵지 않으면서 시적 감흥을 함께 느낄 수 있다. 여백을 많이 두어 갑갑하지 않은 편집이다.

원어의 운율을 최대한 살려 번역에 힘을 썼다는 역자의 말대로 소리내어 읽어보면 리듬감이 느껴지면서 노래하듯 읊조리는 대사에 묘미가 있다.  오늘날까지 비극적인 사랑의 대명사가 된 로미오와 줄리엣은 죽음으로써 사랑의 결실을 이루며 반목이 심한 양가의 화합을 이루어내는 희생양이다.

이 책을 읽어보면 당시 중세의 사랑이나 결혼에 대한 가치관과 이들의 사랑에 장애물이 되는 요인 같은 것을 역사적 배경과 함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책에 직접적으로 정치, 사회적인 면은 나오지 않는다. 아버지의 정혼에 무조건 따라야하는 처지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해 벗어나려고 시도하는 대담한 줄리엣. 성급하고 미숙한 정열의 소유자 같이 보이는 로미오. 이들을 맺어주려고 계획하지만 뜻밖의 사고로 결실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결과를 낳은 로렌스 신부. 이들 가문의 반목을 질타하며 평화로운 마을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영주. 이들 가문의 오랜 반목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에 대한 내용은 어디에도 없지만, 장원제도를 바탕으로 유추해보면 어떨까 싶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고전이며 동시에 영원한 사랑의 세레나데다. 곳곳에 성적인 암시가 있는 글귀가 많아 유머러스하면서도, 시적이며 낭만적인 대사 또한 많다. 캐풀릿의 권위적이며 억압적인 대사는 거부감이 인다. 딸에 대한 지나친 사랑일지 가문의 영광을 위한 욕심일지, 이야기 나누어보았더니 의외로 딸을 너무 사랑해서일거라는 대답을 하는 남학생도 있었다.  그리고 로미오와 줄리엣의 극단적으로까지 보이는 사랑에 대해,  아이들은 대개 연민의 반응과 함께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무모해보일지라도 마음속 열정을 따라 사랑의 행동을 거침없이 한 로미오와 줄리엣은 이것저것 조건을 많이 따지는 오늘날의 사랑과 견주어볼 때,  너무 뜨거워서 순수한, 영원한 연인의 상징으로 남을 것이다. 이들이 죽고 난 후 양가의 어른들이 세우겠다고 약속한 황금동상처럼 말이다.  잘 변하지 않는 강함과 오묘하며 장중한 빛을 간직한 황금, 그 황홀한 색채로 기억될 것이다.

뒷장에는 셰익스피어에 대한 설명과 그의 작품세계를 3기로 나누어 간단한 설명을 곁들여두었다. 디 카프리오가 로미오 역을 한 영화와 올리비아 핫세가 줄리엣 역을 한 옛날의 영화를 모두 본다면 더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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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또유스또 2006-08-05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학교때  책받침으로 만들어 다녔던 올리비아 핫세 ^^

음 그 시절...

돌아가고 싶어요....

 


태그 EDIT

프레이야 2006-08-06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리비아 핫세 이 때 정말 청순하고 예쁘죠!! 이 노래도 얼마나 간절한지요. 집에 있는 이 비디오 다시 봐야겠어요. 아, 저 장면..동영상이랑 노래 무지하게 고마워요^^ 와, 좋아라~~

kleinsusun 2006-08-06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인형 같네요. 너무 예뻐서 현실 같지가 않은.... ^^
그러고 보니 <로미오와 줄리엣>을 희곡으로 읽은 적이 없네요.
저도 한번 읽어봐야 겠어요.

비로그인 2006-08-08 0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해야 하는 리뷰에요..;;

프레이야 2006-08-08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숍님, 감사~~ 얼마전 노래방에서 A Time For Us 불러 보았어요. 이 장면 생각하면서요^^ 또또님에게도 감사를~~ ^^

프레이야 2007-01-12 0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군님, 추천 감사합니다.^^

꽁주맘 2007-03-04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관함에 담습니다. 중1꽁주와 함께 읽어보고 싶어요. 저두 a time for us 가사
정말 잊지 못해요.^^

프레이야 2007-03-04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꽁주맘님, 중1꽁주가 있군요. 함께 보면 좋을 책이에요. 그림도 좋습니다.
저 노래, 참 낭만적이죠. ^^
 
 전출처 : 水巖 > 꾸중때 애칭 사용 ‘발상의 전환’을


<멋진 아빠되기>
꾸중때 애칭 사용 ‘발상의 전환’을
엄마는 아이에게 잔소리를 하면서 이를 필요악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는 잔소리의 부당성에 분개하며 스스로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해묵은 논쟁처럼 보이지만 핵심은 둘 다 상대방의 변화에 목말라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잔소리를 하지 않으면 탈선이라도 할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기우이며, 잔소리를 안 들으면 더 열심히 할 것 같지만 그 또한 오산이다. 오히려 근본적인 것은 아이에게 분명한 꿈이 있고 없음이며, 이는 습관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 엄마는 논리적 타당성만을 내세우고 아이는 어떤 논리나 규칙보다 자유공간을 침해하는 언어공격에 불쾌해 하기 때문에 반목과 대립각이 첨예해진다. 그러므로 잔소리의 반복은 심리전의 실패요, 배려의 부족임을 알 수 있다.

이제 애칭으로 발상의 전환을 해보자. 애칭을 사용하면 잔소리도 부드러울 수 있다.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빠른 변화를 끌어낼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내면에 여러 명의 다른 ‘나’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본성으로서의 ‘나’가 있지만, 누구를 사랑하는 나, 누구를 미워하는 나 등등의 수십 명이 존재한다.

이 점을 응용해 지난해에 딸, 규리에게 특성에 맞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규리 이외에 도리, 미리, 차리, 수리, 서리라고 명명했다. 규리는 자신의 꿈을 갖고 실천하는 아이이고, 도(圖:그림도)리는 그림을 좋아하는 아이, 미(味:맛 미)리는 음식 만들기를 좋아하는 아이, 차(次:다음 차)리는 할 일을 차일피일 미루는 아이, 수(睡:잠잘 수)리는 잠자기를 좋아하는 아이, 서리는 시간을 도둑질하는 아이라고 설명했다. 아이도 그동안 시행착오한 뼈아픈 기억이 있기에 제안을 전폭 수용했다.

도리와 미리는 칭찬의 호칭이다. 그림을 그리거나 음식을 할 경우 불러준다. 야단은 주로 차리와 수리, 서리가 맡는다. 수리는 항상 규리를 힘들게 한다. 학교에 갔다 와서 피곤하다고 잠시 이불에 기대면 어느새 눕게 되고, 1분만 자야겠다고 생각하고 눈을 감으면 금방 1~2시간이 지난다. 그러면 해야 할 숙제를 깜빡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불에 기대는 순간, 경고를 한다. ‘규리야 수리를 조심해.’

차리는 핑계의 제왕으로 교묘하다. 찰나의 틈만 있으면 파고들어와 아이의 시간을 빼앗아 가는 능력이 탁월하다. PC에서 검색만 잠깐하려는데 어느새 게임을 한다. 그러므로 PC에 앉으면 ‘규리야, 차리를 조심해’라고 한다. 서리는 공공의 적이다. 때론 수리와 차리를 꼬드겨서 공동 전선을 펴기도 하며, 동시에 규리를 공격하기도 한다. 이렇게 잘못을 지적하는 방식을 아이는 좋아한다. 소꿉놀이처럼 재미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잔소리는 아이의 인격 전체를 비난하고, 강요하는 표현이다. 하지만 이것은 구체적으로 잘못된 부분을 정확히 지적하고, 사전에 경고를 함으로써 아이 스스로 움직이게 하는 기능이 있기에 마음의 상처도 주지 않는다. 아이에게는 청개구리 심보가 있다. 그러므로 강요를 할수록 도망을 가려고 한다. 그러나 애칭은 강요가 없다. 그저 아빠와의 작은 놀이다. 그것이 변화를 만든다. 아이에게 보내는 사랑의 눈빛과 따뜻한 애칭 한마디로 아이가 변하기 시작한다.

권오진 ‘아빠의 놀이혁명’ 저자(www.swdad.com)

출처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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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스 넌 멋져!
엠마뉘엘 트레데즈 지음, 유혜광 그림, 최내경 옮김 / 크레용하우스 / 2003년 8월
평점 :
절판


엠마누엘 트레데즈는 프랑스에서 인기작가로 떠오르는 어린이책 작가라고 한다. <헤라클레스, 넌 멋져!>는 그리스 신화와 현실 속의 개구쟁이 친구들의 이야기를 절묘하게 배합한 독특한 동화다. 이야기의 줄기는 헤라클레스라는 이름을 가진 10살 남자아이의 일기형식의 고백이다. 특이한 이름 때문에 전학을 간 학교마다(아빠의 직업 때문에 전학을 자주 가게 된다) 놀림감이 되어 고민하는 이 아이는 어느 날 부모님에게 하소연을 한다.  아빠의 위로와 엄마가 주신 <헤라클레스의 모험>이라는 책으로, 자신의 이름을 좋아하게 되고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

이 동화는 우리네 동화처럼 교훈적이지 않다. 너무 어른스러운 아이들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아무렇지도 않게 친구를 괴롭히고 과일을 슬쩍 훔쳐 달아나고 선생님이나 다른 어른들에게도 무례하고 거짓말도 능청스럽게 한다. 이 나이 또래 남자 아이들의 짖궂은 장난과  호기심과 모험심이 일상에서 잘 드러나있어 보면 볼수록 웃음이 묻어난다. 작가는 어느 구석에서도, 아이들에게 친구를 따돌리지 말고 친구에게 다정하게 굴고 어른들에게도 예의바르게 행동하고 언제나 진지하여라, 라는 설교를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아이들의 천진하고 건강한 말과 행동을 통해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초등 3,4학년 아이들의 사랑스러운 면을 보란듯이 살려내고 있다.

수학을 잘 하는 헤라클레스는 결코 자신이 수학을 잘 한다는 것을 먼저 자랑하거나 내세우지 않는다. 이 아이는 자신의 고민을 혼자 꿍꿍 앓고 폐쇄적인 증상을 보이지도 않으며 부모님에게 근심을 토로할 수 있는 성격이다. 수학을 잘 하는 헤라클레스에게 먼저 반한 건 마크다. 마크는 악어파의 대장인데 악어파에 껴주겠다는 조건으로 재미난 조건을 내건다. 친구를 사귀는 데 어떤 조건을 내건다는 점에서 또 비판적인 시각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작가의 유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게 된다. 그리스 신화 속의 헤라클레스를 이름으로 가진 아이가 아닌가.

이 아이는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운명(주어진 이름, 친구사귀기의 어려움)을 자신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는 아이다.  신화 속 헤라클레스가 12가지의 모험을 겪은 것처럼 마크는 자신이 이미 반해버린 친구 '헤라클레스'에게 12가지의 과제를 수행할 것을 조건으로 내건다. 여기서 헤라클레스의 영리함이 엿보인다. 마크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수행할 과제를 도와줄 것이라는 뭔지 모를 믿음을 헤라클레스가 느낀다는 점이다.  우정은 이렇게 서로의 믿음으로 시작하는 것인가 보다.

여기서부터  '이야기 속 이야기' 를 보며 짜 맞추어 읽는 재미가 솔솔하다. 신화 속의 12가지 모험을 하나씩 들려주고 난 뒤 동화 속 헤라클레스의 일기가 다시 전개된다. 12가지의 과제를 하나씩 해결해가는 모습이 좌충우돌 흥미진진하다. 어찌보면 억지스러운 것 아닌가싶을 정도로 신화 속 모험과 현실의 과제가 짝을 맺는데 들여다보면 아이들의 톡톡 튀는 발상과 상상력이 엉뚱하면서도 그럴싸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모험은 헤라클레스가 네번째로 겪는 모험으로 황금뿔과 청동다리를 가진 케리네이아의 암사슴을 생포하는 과제인데, 동화에서는 헤라클레스가 속으로 좋아하는 아나벨에게 뽀뽀를 받는 것으로 해결된다. 아름다운 암사슴, 아나벨의 마음을 생포하기 위해 헤라클레스는 서투른 시를 써서 아나벨에게 준다.  이 방법은 물론 엄마의 마음을 사로잡은 아빠의 조언을 힌트로 하였다. 10살 소년이 쓴 연서와 아나벨이 분홍 편지지에 써서 준 답장이 얼마나 예쁜지... 귀여운 것들!

하지만 약간의 거부감이 드는 건, 이 대목에서 여자에 대한 편견이 보인다는 점이다. 여자들은 '떠받들어주고 예쁘다고 칭찬해주는 걸 좋아하고, 무엇보다도 자기를 위해 시를 지어 주는 걸 제일 좋아한'다고 힌트를 주는 아빠의 말이다.  게다가 헤라클레스의 독백에도 '내가 여자 애들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항상 수다를 떤다는 것, 축구 같은 건 할 줄 모른다는 것, 빨리 달리지 못한다는 것, 거울을 보며 시간을 보낸다는 것 정도다. 그러니 칭찬할 게 뭐가 있담!' 이라는 대목이 걸린다. 은연중에 남자아이들이 이런 마음을 가질까 우려되는 대목이다. 그래서 많은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상품 만족도 별 다섯 중 한 개를 빼기로 한다.

이 동화의 가장 큰 미덕은 우정을 가르치지 않으면서 다 읽고 나면 어느새 우정이 몸에 스며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예를 들자면 브뤼노의 더러운 방을 청소하는 과제(신화에선 아우게이아스 왕의 가축 우리를 청소하는 일)를 수행 중에 헤라클레스는 혼자서 방을 청소하며 램프의 먼지를 닦다가 잠깐 졸았는데 깨어보니 마법처럼 방이 대충이나마 깨끗해져 있다. 함께 읽은 3학년 아이들에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하고 물으니 아이들은 대개 요정이 나와서 치워놓았다는 대답을 하였다. 내 생각은, 헤라클레스만 그 방에 두고 모두 밖으로 나간 악어파의 다른 친구들이 들어와 치운 것일 테다. 아이들은 어려운 과제를 척척 해내는 헤라클레스를 점점 좋아하고 있었고, 아예 처음부터 그리 대단한 악의를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또래 아이들 특유의 호기심 어린 장난기 속에 이렇게 순수한 마음이 숨겨져있었던 거라 믿는다. 아니, 악어파 친구 모두가 아니라 대장 마크만 살짝 무리에서 빠져나와 헤라클레스를 도운 것일지 모른다. 이야기의 초반에 이런 암시가 나오는 대목이 있으니 말이다.

1년 후, 다윗이라는 아이가 전학을 왔다.  헤라클레스는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지금은 악어파 친구들과 뭉쳐서 잘 지내고 있는 자신들의 그룹에 다윗을 넣고 싶어한다. 작은 몸집에 울보지만 구슬치기를 잘 하는 다윗은 어떻게 친구로 뭉쳐질까? 작가는 독자로 하여금 흥미로운 상상을 펼쳐볼 수 있게 골리앗이라는 이름을 던져주고 이야기를 맺는다.  뒷이야기를 독후활동으로 적어보았는데 다윗도 골리앗을 이긴 후 악어파에 들어오고 나서 이순신이라는 이름의 아이가 전학을 온 걸로 하여 3탄을 기대하라며 맺은 글이 재미있었다.

그리스 신화를 좋아하는 아이라면 초등 3학년 정도에게 더욱 권하고 싶다. 그리스 신화를 알지 못하는 아이들이라도 이 책을 기회로 하여 신화 속 헤라클레스의 이야기까지 조금 더 찾아보고 상상력을 발동하게 되면 일거양득이 될 것 같다. 자신의 이름에 불만을 갖는 대개의 아이들, 친구 사귀기를 어려워하는 아이들,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도 늘 질문이 많고 자신만의 재미난 상상을 즐기는 아이들이라면 모두 이 책을 좋아할 것이다. 지루할 틈이 없이 숨가쁘게 전개되는 일상 속의 작은 모험이 신난다. 밝고 유쾌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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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2006-08-04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억하겠습니다. 엠마뉘엘 트레데즈.

치유 2006-08-04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보고 싶네요..^^-
 
 전출처 : 나귀님 > 영화의 사실성과 일관성의 문제 : <괴물>의 경우...

결국 마누라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괴물>이란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문득 기게스의 반지와 투명인간에 관한 보르헤스의 언급을 떠올리게 되었다. 존 바스는 에세이 "보르헤스와 나"에서 1967년에 하버드 대학의 찰스 노턴 강의에 강연자로 참석한 보르헤스를 "록펠러 기금으로 낚아채" 자신이 근무하던 뉴욕 주립대 버펄로 캠퍼스에서 강연을 하게 했던 사건을 회고하며, 이렇게 쓰고 있다.

  • 곧 이어 진행된 질의응답 시간에 그는 아주 훌륭했다.(사실 그 후 미국여행 시에 그는 "준비된" 강연보다는 질의응답 시간에 청중들과 담소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예컨대 공상과학 소설에 자기는 별로 관심이 없다고 말하면서, 그 이유로 H. G. 웰스의 <투명인간>과플라톤의 <기게스의 반지>를 멋지게 대조시켰다. 보르헤스에 의하면, 몸을 보이지 않게 하는 반지를 끼는 것은 단 한 가지 불가능한 것만 요구하면 나머지는 모두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몸을 안 보이게 하는 화학약품을 마신다는 것은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 끊임없이 버티어 나갈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화학약품보다는 반지가 더 삼키기 쉽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멋진 15분이 흘러갔다. (존 바스, "보르헤스와 나," <소설의 죽음과 포스트모더니즘>, 김성곤 편역, 글, 1992, 59쪽)

하긴 그렇다. "투명인간"이 자칭 과학적 근거에 의지한 거짓말(허구)이라 한다면, "기게스의 반지"는 환상에 근거한 거짓말이다. 이 경우에 어느 쪽이 더 손쉬운지는 명백하다. 반지야 "원래 그런 것이 있다"고 한 마디 던지면 그만이다. 그 유래가 무엇인지, 그 한계가 무엇인지는 설명할 수도 없고,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반면 플라톤에 비해 지극히 현대인이었던 웰스는 "투명인간"을 묘사하기 위해 과학적인 "그럴듯함"을 끌어들였고, 그러다보니 이후의 진행상황에 대해서도 수시로 "그럴듯한" 묘사를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요약하자면 이런 식이다. 똑같은 "뻥"이지만 기게스의 반지가 "큰 뻥 하나"로 만족할 수 있었다면, 투명인간은 "작은 뻥들"을 쉴새없이 갖다 붙여야 하는 구조가 된 것이다. 둘 중 어떤 게 경제적인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어차피 치는 뻥이라면 아예 확실하게 꽝 쳐 버리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모순도 줄어들고 굳이 머리를 짜낼 필요도 없다.

보통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나서 "아까 그건 좀 말이 안 되지 않아? 가령 주인공이..." 라고 말을 꺼내면, 그 이야기를 듣는 상대방의 대답은 십중팔구 "에이, 그러니까 영화고 그러니까 드라마지. 그럼 뭐 얼마나 사실적인 걸 기대했어?" 하지만 이때 상대방의 대답은 "사실성"과 "설득력"을 혼동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영화나 드라마는 정의 자체부터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허구는 비록 사실성은 결여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설득력마저 결여할 수는 없다. 쉽게 말해 영화나 드라마가 사실이 아닌 "허구"라는 걸 누가 모르느냐는 거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이 "그럴 듯한 허구"가 되기 위해서는 설득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한 가지 미심쩍게 생각하는 것은 영화나 드라마를 비판할 적에 "어차피 허구인데 뭘 그러느냐?"고 반박하는 사람들의 반박은 일종의 핑계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영화나 드라마를 보기 이전부터 "이것은 허구다"라고 자인한다면, 그들은 결코 영화나 드라마에 몰입하지 말아야 하고, 몰입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 허구를 비판적인 눈길로 바라보는 것에 대해 진저리를 치며 "허구일 뿐"이라고 반박하는 사람들일수록 사실은 그 허구에 깊이 "몰입"된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 자체의 설득력 부족이나 비논리를 지적하면 마치 덴 상처를 누가 건드리기라도 하는 듯 "발끈"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이들은 허구를 허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허구를 자신이 본 작품의 "약점"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 허구성을 드러내는 지적에 발끈한다. 그만큼 자신이 본 허구에 몰입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사실성"이 떨어지는 작품이라 하더라도, "설득력"마저 없어지고 나면 결코 잘 된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다. 가령 <반지의 제왕>이나 <킹콩>, 혹은 <해리 포터>나 같은 영화를 보자. 이건 그야말로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사실적 소재"와는 완전 담을 쌓은 영화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영화가 전혀 "설득력"조차 지니지 않았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가령 나 <킹콩> 같은 경우에는 외계인이나 괴물 같은 허구의 존재가 나타나긴 하지만, 그 외의 인간들은 그런 상황에서 있을 법한 상당히 "그럴 듯한" 반응을 보이며 설득력 있게 움직인다. 마찬가지로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에 나오는 요정이나 마법사는 허구의 존재이지만, 이들 역시 인과적 법칙에 따라 움직이며 이들이 사용하는 마법 역시 어떤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만약 그런 최소한의 설득력도 없는 영화나 드라마나 다른 작품이 있다면, 관객은 결코 그것을 "그럴듯 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결코 그것에 "몰입"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우리 인간이야 결코 24시간 내내 이상적이거나 합리적이기만 한 존재는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논리보다 비논리적으로 행동할 때가 더 많다. 그러나 오히려 영화나 드라마나 소설은 현실을 능가하는 "논리"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현실과는 달리, 이것들은 필름이나 종이 위에 "고정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과 달리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는 이런 "허구"는 오히려 현실보다 더욱 "사실"에 가까워야 한다는 역설을 요구사항으로 내세운다. 어쩌면 히치콕이 "제아무리 사실적인 영화라도 현실과는 전혀 다른 과장을 펼쳐야 관객들이 그럴듯 하다고 수긍한다"고 말한 것이나, "현실이 소설보다도 더욱 소설같다"는 역설이야말로 바로 이런 뜻을 암시하는 것인지 모른다.

사실 내 경우에는 <괴물>의 줄거리를 모두 다 알고 보았기 때문에 재미가 반감된 면도 없진 않을 것이다.(솔직히 요즘 인터넷 쓰는 사람 중에서 <괴물>의 줄거리를 "전혀" 모른 채 영화를 볼 수 있었던 행운아가 과연 있기는 할까? 아마 한강의 괴물인지 아기공룡 둘리인지만큼이나 희귀한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줄거리 못지않게 영화의 재미를 반감시킨 요소는, 보르헤스의 말을 빌리자면 "투명인간의 존재를 합리화하기 위해 끼워넣은 계속되는 변명들"이었다. 단적으로 말해 <괴물>이 보다 "그럴 듯한" 영화가 되기 위해서는 차라리 주인공(?)인 괴물이 "어디서 그런 게 갑자기 나타났다"고 불쑥 내뱉고 시치미를 뚝 떼는 게 더 나았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거다. 감독의 듀나의 비아냥처럼 "한국의 좌파 남성이 생각할 법한" 내용을 모조리 이 영화에 쏟아부은 모양이지만, 나름대로의 "설득력"을 제공하기 위해 덧붙여진 이런저런 부가 설명은 오히려 "설득력"을 잃는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듯하기 때문이다. 물론 일찍이 미군부대에서 독극물인 포름알데히드를 한강에 방류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니까 제아무리 "영화적 상상력"이 발동했다고 하더라도 그로 인해 "낚시꾼의 컵 안에 들어갈 만큼 작았던" 돌연변이 생물체가 그야말로 "버스 크기만큼 자라났다"는 것이야말로 지나친 비약이 아닐 수 없다. 그것도 단지 그 한 마리 이외에 나머지 한강 생태계에는 얼핏 보기에 별다른 영향도 끼치지 않았으면서 말이다. 물론 "한강의 돌연변이"라고 하는 설정도 나름대로는 "그럴듯"하다. 하지만 만약 그것을 "깊은 바다에 살다가 우연히 한강으로 올라온 돌연변이"라고 했다면 보르헤스 식으로 "더욱 그럴듯"했을 것이라는 거다.

그 외에도 온갖 트집거리를 늘어놓자면 한도 끝도 없다. 처음 대낮의 습격 장면에는 그야말로 버스 만한 크기로 묘사된 괴물이 어떤 장면에서는 불과 승용차 크기로 묘사되기도 하고, 가족들은 밤섬이 뻔히 바라다보이는 서강대교 남단에서 여자아이를 잃고 하루 종일 엉뚱한 하수관만 찾아 헤매다가 우여곡절 끝에야 "그 옆의 옆"에 있는 원효대교 북단을 찾아가며, 총을 몇 방이나 맞아도 꼼짝 않던 맷집을 자랑하던 괴물이 미국의 최신 "살충제"에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솔직히 그 정도로 독한 살충제라면 간신히 구출한 아이들을 비롯해서 가족들이나 그 주위 사람들 모두 진작에 기절하거나 돌아가셨어야 옳지 않았을까. 솔직히 그 장면에서 괴물이 또 다른 "독극물 방출"에 괴로워하는 장면만 보면 갑자기 괴물이 안쓰러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미국"이라는 공적 앞에서는 말 그대로 "괴물"인 괴물조차도 "자연"이나 "환경"의 아이콘이 되는 셈일까?) 딸을 잃은 아버지의 쇠꼬챙이에 찔려 세상을 하직하며, 분노한 할아버지는 "총알이 단 한 방" 들어 있는 사냥총을 들고 이거면 된다는 식으로 괴물과 1대 1로 맞서고, 괴물은 그냥 얌전하게 헤엄쳐 건너가도 될 강물을 굳이 "힘들게" 한강다리 밑에서 재주넘기를 하는 식으로 건너가고, 처음에는 딸이 죽었다고 해도 어리버리 정신 못 차리면서 골뱅이 통조림 따먹기에 열중하던 "덜 떨어진" 아버지를 비롯한 온 가족이 나중에는 마치 연습이라도 한 듯 호흡을 척척 맞춰 괴물을 처단하고, 괴물은 마치 이런 처벌의 이유라도 제공하려는 듯 친절히 기절한 척 입을 벌려 자기가 "먹던" 두 아이를 뱉어놓고 나서야 다시 일어나서 펄펄 뛰어다닌다. 그리고 한강에 살던 괴물이 어느 날 갑자기 "대낮"부터 교각에 매달려 있다가 육지로 올라와서 사람들을 습격한다는 설정은, 아무리 스펙터클이 필요했다손 치더라도 지나친 오버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커다란 괴물이 몇 년째 한강에 산다는 걸 아무도 몰랐다고 치면, 괴물은 아마 될 수 있는 한 사람의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살아가는 생존 전력을 취해 왔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분명히 뭔가 먹고 살아야 하긴 했을 테니, 간혹 고수부지에 어정대는 얼빠진 인간들을 납치하긴 하되, 공급 중단 사태가 없도록 최대한 은밀하고도 알뜰하게 챙겨먹었을 것이다. 솔직히 자신이 붙잡아 놓은 "먹이"가 도망가려는 시도를 시치미 뚝 떼고 지켜보다가 중요한 순간에 "장난"을 칠 정도로 "쎈쓰쟁이"인 괴물이라면 지능이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인데, 그런 놈이 아무리 빡돌았다거나 배고팠다 치더라도 고수부지 위에 올라와서 한 달 먹을 식량을 제멋대로 헤집어 놓고, 정작 먹이를 "먹는" 것보다 "뒤쫓는" 것에 몰두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설득력이 없다.

물론 이런 트집이 정말이지 트집으로만 느껴질 정도로 이 영화엔 "장점"도 많다. 아니, 어쩌면 장점이 많기 때문에 그런 "단점"이 더더욱 두드러져서 안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가령 괴물이 처음 등장하는 추적 장면은 상당히 박진감이 넘치고, CG도 효과적으로 잘 사용되었다고 본다.(맨 끝에 불 붙는 장면은 제외하고. 그건 솔직히 CG의 한계랄까, 좀 노골적으로 티가 났다.) 일부 언론에서는 괴물이 사람을 뒤쫓다가 제풀에 자빠지기도 하는 장면을 "봉준호식 유머 감각"으로 과대해석하는데, 내가 보기엔 오히려 괴물이 그렇게 자빠지는 것이 더욱 "설득력"있게 보인다. 하긴 버스 크기의 커다란 괴물이 그런 속도로 달린다고 칠 적에, 뭐 연습이라도 한 듯이 한 번도 비탈길에서 미끄러지지도, 헛발질을 하지도 않고 매끈하게 움직이겠는가. 그렇게 따지자면 빌딩 만한 괴물이 쿵쿵대고 질주해도 바닥에 발자국 하나 패이지 않은 <고질라>가 더욱 이상한 영화 아닌가. 물론 <괴물>에서도 CG로 묘사한 괴물의 움직임은 대단했지만, 한편으로는 듀나가 해리하우젠의 수작업 특수효과를 평가할 때 한 지적처럼 그 묵직한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가령 "버스만한" 크기의 괴물이 강물 속으로 뛰어들 때 물결이나 물보라가 상대적으로 약하게 튀었던 것을 보라.(특히 처음에 여자아이를 납치해서 강물로 뛰어드는 장면에서는 "백조 보트"가 둥실둥실 떠 있는 사이로 뛰어드는데, "버스만한" 괴물이 첨벙 뛰어들었는데도 주위의 보트들은 한 대도 뒤집어지지 않고 미동조차 없다.)

비중이 괴물 쪽으로만 쏠려 있기 때문일까, 송강호가 맡은 딸 잃은 아빠의 인물 설정이야말로 이 영화에서 가장 설득력 없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푼수처럼 실수만 반복하는 주인공은 자기 아버지의 시신과 경찰의 추적 사이에서 어쩔 줄 모르고 징징거리다가 결국 체포될 정도로 덜 떨어진 인물이지만, 얼떨결에 뇌 생검을 당한 후에는 의사를 주사기로 위협해 극적인 탈출에 성공하고, 심지어 수퍼맨처럼 괴력을 발휘해 콘크리트 매달린 경고판을 박살내 무기로 사용한다. 물론 딸의 죽음으로 인해 흥분해서 괴력을 발휘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솔직히 맨 처음에 딸이 괴물에게 "끌려가서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에는 그런 생각조차 없이 제 한 몸 건사하는("아버지, 나 죽는 거야?"라고 물어보고, 먹지 말라는 통조림까지 따 먹으면서) 데에만 열중하다가, 맨 끝에는 기절한(?) 괴물의 입을 맨손으로 벌려 아이들을 꺼내고, 한참 동안 괴물을 등지고 딸을 품에 안은 채 얼빠진 표정으로 서 있는 전형적인 "결말용 클로즈업"을 보여주다가, 역시 맨손으로 쇠파이프를 휘둘러 괴물을 찔러 죽이는("드라마-드라마주의"의 신봉자인 집사람조차도 이 대목에서 "차라리 괴물이 쇠파이프에 박히는 순간, 쇠파이프를 지지하던 송강호의 오른손이 찢어지거나 다쳤어야만 하지 않았을까" 하고 아쉬움을 나타냈을 정도였다.) 괴력을 발휘한 직후에는, 자기 딸과 함께 괴물 뱃속에서 나온 소년에게 다가가 "아는 척"을 한다. 솔직히 나는 <괴물>이란 영화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갖가지 약점에도 불구하고 전반부는 매우 "훌륭"하지만, 후반부는 매우 "엉성"하다고 생각한다. 어째서 처음 10분 동안 보여준 박진감 넘치는 연출이나 줄거리가 후반부에는 해당되지 않았는지 정말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또 한 가지 지적은 노골적으로 묘사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별로 설득력은 없어 보였던 "반미"라는 주제였다. 물론 이 영화에서 "괴물"의 발생 이유를 제공한 미군부대의 독극물 고의 유출 사건은 명명백백한 범죄이지만, 이후에 한강에서 괴물이 발생한 것과 관련해 미군부대나 미국정부의 개입이나 "살충제" 도입 등의 주장은 영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솔직히 미국이 그 정도로 "한강 괴물"의 처리 문제에 개입하려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라면, 단순히 주한미군 하사관 한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 주한미군만 습격한다거나 아예 대추리 미군부대 이전 예정부지가 "괴물의 둥지"였기 때문에 괴물이 보복으로 미군을 습격하고, 이에 대해 미군이 "이는 미국에 대한 도발 행위"이기 때문에 한국에 병력을 증강하거나 신무기를 배치한다는 식으로 나와야 더욱 설득력이 있지 않았을까? 물론 듀나의 지적처럼 "버스 만한 크기의 괴물이 대낮부터 수도 서울 한가운데의 한강에 나와 수십 명의 시민을 죽인" 판에 기껏해야 바이러스를 운운하며 방역업체 직원들보고 고물 트럭이나 몰고 다니며 소독약을 뿌리라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그야말로 "데프콘" 급의 비상사태가 되어 특수부대를 비롯한 군 병력이 본격적으로 한강에 투입되어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움직이는 놈은 뭐든지 쏴버리라"는 명령이 하달되어야 그럴듯하지 않겠는가? 물론 "반미"라는 것 자체에 대해서 비판하고픈 것은 아니고, 분명히 영화에 나와도 될 소재라고는 생각한다. 하지만 욕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반미건 친미건, 아니면 친공산주의나 심지어 "친노" 발언을 하고 싶더라도 뭔가 좀 더 "그럴 듯한" 맥락에서 해야 한다는 거다. 그런 설득력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솔직히 강우석의 영화에서 나타나는 노골적인 쇼비니스트적 "교훈"과 봉준호의 노골적인 좌파적 "교훈"이 뭐 다를 바 있겠는가? <괴물>에서 봉준호는 "한국의 좌파 남성"으로서 뭔가 한 마디를 하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그가 의도한 "한 마디"는 <괴물>이라는 영화의 다른 요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그야말로 "뜬금 없는 한 마디"로 남아있었던 것만 같아 아쉽다.

뭐, 이미 나온 영화의 각본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찧고 까불고 하는 것이야말로 이미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처럼 시간낭비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영화가 아무리 발전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세계적인 특수효과 팀을 불러서 탁월한 "블록버스터"를 만들었다 하더라도, 가장 기본이면서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각본"에 있어서는 아직도 엉성하기 짝이 없구나 하는 생각에 한숨이 나오는 것이다. 물론 순수 국산 CG 특수효과를 운운하면서 나온 심형래의 <용가리>를 봤던 사람이라면 봉준호의 <괴물>에 대해서는 AAA+++ 를 주고도 남았겠지만(왜냐하면 <용가리>는 CG도 각본도 연기도, 뭐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전무한 졸작이었으므로.) 그런 식의 자뻑스러운 상대평가가 아니라 절대평가를 취해 보면 아무래도 <괴물> 역시 "볼만한" 작품일망정 "걸작" 소리를 듣진 못할 것 같다.(듀나는 이 작품에 대해 별 네 개 만점에 별 세 개 반을 줬는데, 솔직히 나로선 별 세 개, 아니 별 세 개 하고 2/3을 주겠다. 그만큼 선뜻 추켜세우긴 힘들 정도로 아쉬움이 많다는 거다.)

이런 말을 하고 나면 "스크린쿼터 문제도 있어서 가뜩이나 힘든데... 한국영화를 사랑하자"는 도덕교과서적인 반론을 제기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나야 한국영화 외국영화를 가르기보다는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 혹은 "잘 만든 영화"와 "못 만든 영화"로 구분할 뿐이다. 제아무리 한국영화라도 "못 만든 영화"는 "나쁜 영화"이고 "잘 만든 영화"는 "좋은 영화"라는 내 신념엔 변화가 없을 것이다. 엉성한 영화를 단지 "국산"이란 이유만으로 치켜세우는 것 역시 국수주의의 한 형태가 아닐 수 없다. "옛날에 비해서는 나아졌다"고 주장에 대해서도 나는 의구심을 품는 것이, 지금이야 과거와 달리 온갖 소재와 금기에 대한 묘사가 가능해졌다고 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각본" 자체부터 삐걱거리기는 여전하니 말이다. 단적인 예를 들어 1950년대 중반에 나온 구로자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만 보더라도, 요즘 나오는 웬만한 영화나 드라마 각본을 뺨치게 잘 썼다. 그렇다면 솔직히 영화의 특수효과 같은 기술적 측면을 제외한다면, 각본이나 연기나 연출력 같은 가장 기본적인 측면은 단순히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발전하지는 않는 것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과거에 비하자면 요즘 한국영화는..." 하고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거다. 내가 보기에 요즘 한국 영화는 훨씬 넓어진 소재의 가능성과 발전한 기술적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승자박 식으로 저질 코미디와 로맨스, 그리고 짝퉁 블록버스터만 만들어내는 쳇바퀴를 여전히 돌리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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