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水巖 > 꾸중때 애칭 사용 ‘발상의 전환’을


<멋진 아빠되기>
꾸중때 애칭 사용 ‘발상의 전환’을
엄마는 아이에게 잔소리를 하면서 이를 필요악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는 잔소리의 부당성에 분개하며 스스로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해묵은 논쟁처럼 보이지만 핵심은 둘 다 상대방의 변화에 목말라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잔소리를 하지 않으면 탈선이라도 할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기우이며, 잔소리를 안 들으면 더 열심히 할 것 같지만 그 또한 오산이다. 오히려 근본적인 것은 아이에게 분명한 꿈이 있고 없음이며, 이는 습관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 엄마는 논리적 타당성만을 내세우고 아이는 어떤 논리나 규칙보다 자유공간을 침해하는 언어공격에 불쾌해 하기 때문에 반목과 대립각이 첨예해진다. 그러므로 잔소리의 반복은 심리전의 실패요, 배려의 부족임을 알 수 있다.

이제 애칭으로 발상의 전환을 해보자. 애칭을 사용하면 잔소리도 부드러울 수 있다.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빠른 변화를 끌어낼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내면에 여러 명의 다른 ‘나’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본성으로서의 ‘나’가 있지만, 누구를 사랑하는 나, 누구를 미워하는 나 등등의 수십 명이 존재한다.

이 점을 응용해 지난해에 딸, 규리에게 특성에 맞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규리 이외에 도리, 미리, 차리, 수리, 서리라고 명명했다. 규리는 자신의 꿈을 갖고 실천하는 아이이고, 도(圖:그림도)리는 그림을 좋아하는 아이, 미(味:맛 미)리는 음식 만들기를 좋아하는 아이, 차(次:다음 차)리는 할 일을 차일피일 미루는 아이, 수(睡:잠잘 수)리는 잠자기를 좋아하는 아이, 서리는 시간을 도둑질하는 아이라고 설명했다. 아이도 그동안 시행착오한 뼈아픈 기억이 있기에 제안을 전폭 수용했다.

도리와 미리는 칭찬의 호칭이다. 그림을 그리거나 음식을 할 경우 불러준다. 야단은 주로 차리와 수리, 서리가 맡는다. 수리는 항상 규리를 힘들게 한다. 학교에 갔다 와서 피곤하다고 잠시 이불에 기대면 어느새 눕게 되고, 1분만 자야겠다고 생각하고 눈을 감으면 금방 1~2시간이 지난다. 그러면 해야 할 숙제를 깜빡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불에 기대는 순간, 경고를 한다. ‘규리야 수리를 조심해.’

차리는 핑계의 제왕으로 교묘하다. 찰나의 틈만 있으면 파고들어와 아이의 시간을 빼앗아 가는 능력이 탁월하다. PC에서 검색만 잠깐하려는데 어느새 게임을 한다. 그러므로 PC에 앉으면 ‘규리야, 차리를 조심해’라고 한다. 서리는 공공의 적이다. 때론 수리와 차리를 꼬드겨서 공동 전선을 펴기도 하며, 동시에 규리를 공격하기도 한다. 이렇게 잘못을 지적하는 방식을 아이는 좋아한다. 소꿉놀이처럼 재미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잔소리는 아이의 인격 전체를 비난하고, 강요하는 표현이다. 하지만 이것은 구체적으로 잘못된 부분을 정확히 지적하고, 사전에 경고를 함으로써 아이 스스로 움직이게 하는 기능이 있기에 마음의 상처도 주지 않는다. 아이에게는 청개구리 심보가 있다. 그러므로 강요를 할수록 도망을 가려고 한다. 그러나 애칭은 강요가 없다. 그저 아빠와의 작은 놀이다. 그것이 변화를 만든다. 아이에게 보내는 사랑의 눈빛과 따뜻한 애칭 한마디로 아이가 변하기 시작한다.

권오진 ‘아빠의 놀이혁명’ 저자(www.swdad.com)

출처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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