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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스런 추억

                                                                   윤 동 주

 

봄이 오던 아침.

서울 어느 쪼그만 정거장에서 희망가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나는 플랫폼에 간신한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 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 주어,

 

봄은 다 가고-

동경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차운 언덕에서 서성거릴 게다.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스파피필름님 서재에서 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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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고정희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뒤에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말씀보다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

적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

서울에서 묻혀온 온갖 잔소리들이

방생의 시냇물 따라

들 가운데로 흘러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뒤에서

팽팽한 바람이 멧새의 발목을 툭, 치며

다시 더 큰 여백을 일으켜

막막궁산 오솔길로 사라진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 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그 아래 네가 앉아 있는

 

-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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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비자림 > 파블로 네루다의 '시'

 

                                             파블로 네루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말야

그렇게 얼굴 없이 있는 나를

그건 건드리더군.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내 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으며,

내 영혼 속에서 뭔가 시작되고 있었어,

열이나 잃어버린 날개,

또는 내 나름대로 해보았어,

그 불을

해독하며,

나는 어렴풋한 첫 줄을 썼어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전한

넌센스,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순수한 지혜,

그리고 문득 나는 보았어

풀리고

열린

하늘을,

유성들을,

고동치는 논밭

구멍 뚫린 그림자,

화살과 불과 꽃들로

들쑤셔진 그림자,

휘감아도는 밤, 우주를

 

그리고 나, 이 미소한 존재는

그 큰 별들 총총한

허공에 취해,

신비의

모습에 취해,

나 자신이 그 심연의

일부임을 느꼈고,

별들과 더불어 굴렀으며,

내 심장은 바람에 풀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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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포터7 2006-06-17 0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블로 네루다의 몸속에 이런 말들이 알알이 들어차 있다가 한꺼번에 다 쏟아져 나온것 같네요. 와 시란 이런거군요.좋은시 잘 읽고 갑니다 잘 퍼가겠습니다.
 
 전출처 : 비자림 > 슬픔의 독을 품고 가라

           슬픔의 독을 품고 가라         

                                                       

                                            신  현  림

       

  빈민가 담벼락 같은 가슴을 뚫고 겨울이 온다

  슬픔은 미친 종처럼 울고 슬픔은 끝없이 나는 연

  저 환장한 연을 잡았으면

  내가 너 대신 아팠으면 너를 안고 나는 갈매기였

으면

  아우야, 추운 너를 안고 어머니가 금강산을 날으셨

구나

  애인아, 그리운 너를 안고 나는 바닷속을 달렸더구나


  마음으로라도 날고 뛰지 않으면 살 수 없던 날들

  열린 차창으로 비명을 지르고 싶던 날들

  불탄 아현동 사람들이 무덤으로 던져진 어제

  저녁이 오기도 전에 식탁의 빵들은 부패했다

  장송곡보다 무거운 원피스를 입고 너는 꿈 속 강변

을 헤매고

  버림받은 자들이 부르는 유행가가 싸락눈으로 날린다


  의지대로 되는 일이 없다

  우리는 토실토실한 쓰레기나 불리며 살고

  작별의 꽃을 던지며 사나니

  술잔은 자꾸 죽음을 향해 기울어지더라


  기나긴 밤마다

  아무 위로 없이 남겨진 나의 너여

  더 이상 탄식의 나팔을 불지 마라

  현세가 지옥인 때는 슬픔의 독을 품고 가라

  무자비한 세상, 지옥의 슬픔을 월경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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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현림

마음이 다 드러나는 옷을 입고 걷는다

숨어있던 오래된 허물이 벗겨진다

내 허물은 얼마나 돼지처럼 뚱뚱했던가


난 그걸 인정한다

내 청춘 꿈과 죄밖에 걸칠 게 없었음을


어리석음과 성급함의 격정과 내 생애를

낡은 구두처럼 까맣게 마르게 한 결점들을

오래도록 괴로워했다.

나의 등잔이 타인을 못 비춘 한시절을

백수일 때 서점에서 책을 그냥 들고 나온 일이나

남의 애인 넘본 일이나

어머니께 대들고 싸워 울게 한 일이나

실컷 매맞고 화난 주먹으로 유리창을 부순 일이나

내게 잘못한 세 명 따귀 때린 일과 나를 아프게 한 자

마음으로라도 수십 번 처형한 일들을


나는 돌이켜본다 TV 볼륨을 크게 틀던

아래층에 폭탄을 던지고 싶던 때와

돈 때문에 조바심치며 은행을 털고 싶던 때를

정욕에 불타는 내 안의 여자가

거리의 슬프고 멋진 사내를 데려와 잠자는 상상과

징그러운 세상에 불지르고 싶던 마음을 부끄러워한다.


거미줄 치듯 얽어온 허물과 욕망을 생각한다

예전만큼 반성의 사냥개에 쫓기지도 않고

가슴은 죄의식의 투견장도 못 된다

인간의 원래 그런 것이라며 변명의 한숨을 토하고

욕망의 흔적을 버린 옷가지처럼 바라볼 뿐이다


고해함으로써 허물이 씻긴다 믿고 싶다

고해함으로써 괴로움을 가볍게 하고 싶다

사랑으로 뜨거운 그 분의 발자국이

내 진창길과 자주 무감각해지는 가슴을 쾅쾅 치도록


나는 좀더 희망한다

그 발자국이 들꽃으로 흐드러지게 피어나

나를 깨워 울게 하도록

 

<세기말 블루스> 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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