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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水巖 > 문덕수 - 白島에서


                                 백도에서

                                            - 문  덕  수 -


                    새벽 꽃물살
                    한 발짝씩 설렌 뒷걸음 그만 헛딛어
                    멀리 거문도 한 자락에 붙들렸나
                    풍란은 10리 밖 향 잡으며 더욱 맵고
                    바위틈 동백꽃은 뉘 슬픔 피를 뿜네
                    갈매기 가마우지 흑비둘기 못다 핀 꿈이더냐
                    짙은 태고의 운무 속을
                    상백도 하백도 신기루로 비치더니
                    한겹한겹 스스럼없이 제 몰골로 발가벗더라



                    매,거북,석불,쌍돛대,남근
                    각시,쌍둥이,삼선,병풍,오리섬
                    벌리고 오므리고 안고 없고 비키며
                    설흔아홉 아니 아흔아홉 빙빙 돌다가



                    뒷걸음질 꽃품 한올 물이랑에 걸렸나
                    쪽빛 천년을 남몰래 멱감다 들킨 볼모
                    언제 풀리리, 저렇듯 제 몸 깍고 다듬는 영겁의 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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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巖 2006-06-23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 2006-06-23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저곳에 가보고 싶어져요. 백도... 수암님, 사진 감사합니다.
 
 전출처 : 실비 > 민들레



민들레

槿岩/유응교

너는
조선 천지
기름지고 좋은 땅
다 놔두고
그렇게도
척박하고 험한 곳만 골라
피어나느냐.

작열하는 지열 속에
너는 길고 긴 여름날을
동학의 농민들이
삼지창을 들고 일어나듯
네 주위를 포진 시키고
무엇이 두려워
노랗게 떨고 있느냐.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가진 것 더 가지려하고
있는 자리 더 지키려고 안달이 나는데
너는 나이가 들수록
그렇게 모두 털어 버리고
미련 없이 멀리 멀리
떠나가느냐.

희망의 작은 씨앗들
눈부신 하늘아래
흩뿌리며
그동안 아름다운 삶이었다고
축제의 하얀 폭죽으로
최후를 영접하며
너는
오늘도
바람 앞에 서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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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가는 아내에게


                                                      황지우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알한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 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묻힌 손으로 짚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게 눈 속의 연꽃> 문학과지성사

 

- 안도현의 내가 사랑하는 시 <그 작고 하찮은 것들에 대한 애착>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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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포터7 2006-06-02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시를 읽으니 TV에 하는 인간극장이라는 프로그램이 생각나네요. 거기서도 이리 나이들어 서로 보듬으며 살아온 부부들이 많이 나오더군요. 늘 부러움에 몸서리쳤는데,,, 우리도 언젠가느 저리 늙어가고 있을테지.라고 희망적인 생각을 해봅니다.

야클 2006-06-03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치 김광석의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가사를 듣는 듯한 느낌이네요. 마음이 짠~ 합니다.

소나무집 2006-06-03 0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1년 읽었던 이 시집 속에 이런 시가 있었나 싶어 얼른 펼쳐 보니 있군요. 나이가 들었나 봅니다. 가슴에 와 닿는 걸 보니.
 
 전출처 : 동그라미 > 어머니는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 / 김경주

어머니는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

김경주

고향에 내려와
빨래를 널어보고서야 알았다
어머니가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는 사실을
눈 내리는 시장 리어카에서
어린 나를 옆에 세워두고
열심히 고르시던 가족의 팬티들,
펑퍼짐한 엉덩이처럼 풀린 하늘로
확성기소리 짱짱하게 날아가던, 그 속에서
하늘하늘한 팬티 한 장 꺼내들고 어머니
볼에 따뜻한 순면을 문지르고 있다
안감이 촉촉하게 붉어지도록
손끝으로 비벼보시던 꽃무늬가
어머니를 아직껏 여자로 살게 하는 한 무늬였음을
오늘은 죄 많게 그 꽃무늬가 내 볼에 어린다
어머니 몸소 세월로 증명했듯
삶은, 팬티를 다시 입고 시작하는 순간 순간
사람들이 아무리 만지작거려도
팬티들은 싱싱했던 것처럼
웬만해선 팬티 속 이 꽃들은 시들지 않았으리라
빨랫줄에 하나씩 열리는 팬티들로
뜬 눈 송이 몇 점 다가와 곱게 물든다
쪼글쪼글한 꽃 속에서 맑은 꽃물이 똑똑 떨어진다
눈덩이만한 나프탈렌과 함께
서랍 속에서 수줍어하곤 했을
어머니의 오래 된 팬티 한 장
푸르스름한 살 냄새 속으로 햇볕이 포근히 엉겨 붙는다


2003년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2005년 대산창작기금 수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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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동그라미 > 푸른 밤/ 나희덕

푸른 밤

나희덕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1966년 충남 논산 출생
연세대 국문과 졸업, 동대학원 재학중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등
1999년 제17회 김수영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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