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하루종일 자고 나서도 두통과 이명이 잦아들지 않아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밤새 비가 내려 오늘은 아침 공기가 다르다. 깨끗하다. 지금 빗방울은 멈춰 있고 소란스러움도 가라앉는 느낌이다.

나의 출발지와 지금의 내 위치를 아는 것, 살면서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며칠동안 들었고

그걸 알게 해준 일이 새삼 고맙기까지 하다. 잘 자는 게 잘 사는 것! 잘 사는 건 의외로 간단하고 쉬운 일일 수도.

너무 볶아대지 말고 마음 한 자락 어디 얽매이지도 말고 집착 없이 바람처럼 그저 걸림 없이 살고 싶다.

갓 볶은 커피콩 향기 구수한 아침, 패티킴이 부르는 "사월이 가면"과 "구월의 노래" 그리고 "연인의 길"을 들으며.

 

 

 

 

 

은발의 꽃을 백마의 그것처럼 피워낸 패티킴, 뜨겁고도 차갑게, 자기관리가 철저한 사람.

무엇보다도 타고난 목소리와 울림으로 정말이지 노래를 잘 부르는 여인.

은퇴 기념 한정판인데 두 장의 cd에 그녀의 수많은 곡이 담겨있다. 

많이 들어본 노래도 있고 가끔 내가 부르는 노래도 있고 처음 들어본 노래도 몇몇 있다.

그녀가 티비 모 프로그램에 조영남과 같이 나와 한 말 중, 거침없이 가다가도 벗어났다싶으면

멈추고 조금 되돌아오고 그러면서 끊임없이 나아가는 생, 그렇게 살면 된다고 그렇게 살면

문제 없이 나아간다고 하던 말이 생각난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늘 확인하라는 말도. 

은발은 그냥 피어나는 게 아니었다.

 

 

 

 

 

일전에 브론테님의 첫 문장 페이퍼로 마음에 담게 된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바람의 그림자>

그 때는 절판이더니 오늘 보니 개정판이 나왔다. 담아둬야지.

 

 

 1권 첫 문장/

 

나는 지금도 아버지가 '잊힌 책들의 묘지'로 나를

처음 데려간 그 새벽을 기억한다.

 

2권 첫 문장/

 

저택을 나서자 어둠이 푸른 그림자로 우리를 감쌌다.

 

 

 

 

 

 

 

1945년 잿빛 바르셀로나. 안개에 휩싸인 거리가 아직 눈을 뜨기 전, 다니엘은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잊힌 책들의 묘지'에 발을 들여놓는다. 책들로 가득 찬 거대한 미로로 이루어진 도서관 같은 그곳에는 규칙이 있다. 그곳에서 본 것은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 것, 그리고 책 한 권을 골라 양자로 삼을 것. 다니엘이 선택한 책은 수수께끼의 작가 훌리안 카락스가 쓴 <바람의 그림자>였다. 모든 사건은 바로 이 저주받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알라딘 책 소개 중)

 

 

 

 

 <사진, 영화를 캐스팅하다>로 진동선의 글을 사랑하게 되었다.

2011년에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로 선정된 이 책, 사진과 철학이 만나는 출발점에

서서 쓴 그의 서문은 이마누엘 칸트의 훌륭한 말로 시작한다. 유용하다, 내게도.

 

"감성이 없다면 아무런 대상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고,

지성이 없다면 아무런 대상도 사유되지 않을 것이다.

지성만으로는 아무것도 직관할 수 없으며,

또한 감성만으로는 아무것도 사유할 수 없다.

인식이란 감성과 지성의 합일이다. 감성의 규칙이 감성학이라면,

지성의 규칙은 논리학이다.

이것들의 깊이 없이 어찌 참되게 직관하고 사유할 수 있을까."

 

 

 

 

저자는 앎의 본성은 반성과 성찰. 반성과 성찰은 궁극적으로 철학의 영역이고, 철학이 묻고 답하고 밝히려는 모든 학문들의

근간이기도 하다, 고 덧붙인다. 사진을 철학적으로 탐색하고 사진에 철학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말해 보려는 이 책은

눈과 마음의 감각적 풍경에서부터 삶과 죽음의 정신적 풍경까지 다섯 가지 철학적 풍경들로 구성된다.

그러나 그 다섯 가지가 명료하게 구분되거나 정의될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사르트르의 <상상적인 것>에 경의를 표하며"라는 헌사로 시작하는

롤랑 바르트의 사진에 관한 노트, <밝은 방>은 이런 인용문으로 그 다음을 연다.

 

마르파는 아들이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매우 감동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게 환상이라고 항상 말씀하셨죠. 아버님이 아들이 죽는다면,

그것도 환상인가요?"  그러자 마르파는 이렇게 대답했다:

"물론이지. 하지만 내 아들의 죽음은 최고의 환상이지."

                                              (<티베트 道의 실천>) 

 

 

 

삶처럼 사진은 각자의 눈에 비친 환상, 그중에서도 사랑하는 대상은 최고의 환상일 테지.

 

 

 

아주 오래전 어느 날 나는 나폴레옹의 막내 동생 제롬의 사진(1852)을 우연히 보았다.

그때 나는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놀라움을 드러내며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황제를 보았던 두 눈을 보고 있다."  때때로 나는 그 놀라움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아무도 그것을 공감하지도, 이해하지도 않는 것 같았기에(이처럼 삶은 작은 고독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나는 그것을 잊어버렸다.

                                                                                                                          - 본문 시작 p15

 

 

이렇게 시작부터 사로잡는 책은 무언가 다르다. 삶은 작은 고독들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하다니. 

역설적으로, 충분히 고독해야 참행복으로 이를 수 있다는 결론!!! 무엇이든 나를 날게 하는 힘이 될 거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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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2-06-30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멋진 책들이고 멋진 소개글이어요.
삶을 이루는 것은 결국 고독이었어요. 그런데 그걸 불평해왔다니...
시작부터 사로잡는 책은 무언가 다르다는 말로도 가슴이 쿵쾅쿵쾅..^^

프레이야 2012-06-30 10:40   좋아요 0 | URL
우왓~ 실시간에요, 나인님^^
패티킴은 정말 멋진 여인이에요. 나이 들어서도 저렇게나 훌륭한 포스를 뿜어내다니요.
책도 사람도 시작부터 사로잡는 무엇, 분명 있지요. 잘 가꾸고 이끌어나가는 것도 중요하구요.
이번 주엔 전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 가쁜 사랑'을 다 읽어야되는데 이래저래 마음 산란해서
반밖에 못 읽었어요. 주말에 다 읽어야겠어요. 나인님 주말 편안히 보내세요^^

비연 2012-06-30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의 그림자>... 구판으로 읽었을 때의 감동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듯. 개정판도 사려고 보관함에..ㅋ

프레이야 2012-06-30 10:48   좋아요 0 | URL
비연님도 그 책 감동으로 남아있군요.^^
개정판까지 보관함으로 담으실 정도니ㅎㅎ
저도 장바구니로 직행~~ 뿌듯~

비로그인 2012-06-30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페이퍼도 비 오고 갠 아침 느낌이에요.
서울에도 어젯밤부터 비가 내려요. 가뭄 끝이라 얼마나 비가 고마운지요.

이명에는 침이 효과가 있다던데. 한의원은 가보셨어요?
안과 간다는 남편에게 떡볶기랑 순대 오뎅 사오라고 시켰어요. 비 오는 날 점심은 떡볶기에 오뎅~~~

프레이야 2012-07-01 12:01   좋아요 0 | URL
허혈 체질이라 그런가 봐요. 한의원에 가볼까요?
오늘은 괜찮네요. 좀 많이 먹었더니...
비오는 날 떡볶이랑 오뎅 맛나게 드셨어요, 만치님?^^

맥거핀 2012-06-30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문장 멋있는데요? 잊힌 책들의 묘지..
건강을 잃기 쉬운 계절인데, 건강 잘 챙기세요. 그렇죠, 간단하죠. 잘먹고 잘자는 게 중요하죠.^^

프레이야 2012-07-01 12:01   좋아요 0 | URL
바람의 그림자, 아주 유명한 소설이던데요. 저도 이번에 담았어요.^^
맥거핀님도 여름 건강하게 나세요. 벌써 지치려고 하네요.

댈러웨이 2012-06-30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롤랑바르트,,,(숙제같은 남자),,, 그나저나, 클릭하게 만드는 <바람의 그림자>의 첫 문장이네요.

프레이야님, 이명은 좀 괜찮으신지, 마음은 좀 평온해지셨는지.

커피, 같이 마시고 싶어요. 저 커피 좀 주세요. (막 떼쓴다.)

프레이야 2012-07-01 12:03   좋아요 0 | URL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도 다 못 읽고 접어뒀어요.
바람의 그림자,는 아주 매혹적이죠. 저도 이번에 퐁당 담았어요.
이명은 오늘 나아졌어요. 마음의 문제이지 싶어요.
커피도 많이 마시니까 영향이 있는 것 같구요.
저 지금도 커피 마시고 있는데 댈러웨이님이랑 같이 마시고 싶어요^^

하늘바람 2012-07-01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명까지 들리시다니
몸과 마음이 많이 힘드시겠어요
갓 볶은 커피콩
그 자체가 더 근사한데요^^

프레이야 2012-07-01 12:04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님 이번 여름은 더 힘들 것 같아요.
오늘이 7월 첫날인데 벌써 몸이 왜 이리 지치는지..
님은 태은이 동생까지 돌봐야하니 진짜 몸 잘 챙기세요.^^

마녀고양이 2012-07-01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착없이 바람처럼'.... '흘러가는대로'....
언니, 저는 이 문장이 가장 큰 집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이것에 집착하는구나, 나는 이것에 두려워하는구나, 나는 이것이 변화하기를 바라는구나 라는 욕망을
인정함으로부터 모든 것은 출발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아무리 바람처럼 떠내려보내려 한다 해도
떠내려보내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 한다면, 결국 더욱 큰 회색 구름이 아닐까 싶어지기도 하구요... 그러나,

언니의 떠내려보냄과 제 떠내려보냄이 다른 것일테니,
아마 언니는 정말 편안함을 찾으셨을지도 모른다, 모두 이 동생의 늘 하는 걱정이다 라고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언니가 늘.... 제게 주시는 염려처럼요. 언니, 비가 와서 서늘해졌습니다만, 이제 진짜 여름이네요.
언니들을 보고 싶은데, 저는 7월 18일부터 7박8일 연수에, 7월 30일부터 3일간 종일 집단 상담에....
줄줄이 스케줄이 잡혀 있는 중입니다. 이래저래, 나쁜 동생만 되네요. 뽀뽀로 일단 때워야지, 쪼옥~~~~

프레이야 2012-07-02 10:29   좋아요 0 | URL
에고 마고님 또 약간의 오독이.ㅎㅎ 떠내려보냄, 그 말이 아닌데ㅜㅜ
떠내려보내려는 게 있나봐요, 마고님은. 전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런대로 편안해요.^^
마고님 워낙 바쁘니 건강 잘 챙겨요. 무척이나 에너지 소비가 많은 일이라고 여겨져요.
늘 염려하고 토닥여줘서 정말 고마워요.^^
7월 바쁜 일정 잘 소화하고 그후에 만날 수 있으면 꼭 만나요^^

마녀고양이 2012-07-02 20:50   좋아요 0 | URL
죄송해요... 제가 또 오독했나봐요,,, (풀이 팍 죽은~)
아무래도 저야 말로 무엇인가 잡고 놓아주질 않는군요. ^^

어디서 떠내려보낸다는 말을 본걸까요? 제가 페이퍼를 읽으면서
나뭇잎이 둥둥 시냇물을 타고 내려가는 장면을 어디서 본 걸까요?
제 상상력이 아무래도 너무 끝내주는 모양이예요,, 히히

프레이야 2012-07-02 21:24   좋아요 0 | URL
히히, 울마고님, 아니에요. 역시 일정 부분 예리하기도 한 걸요.ㅎㅎ
근데 잘 안 돼요. 누구든 자신이 잘 안 되니 그걸 말이든 글이든 하는거죠.
그치만 그 자체로 좋아요. 나쁘지 않지요. 그걸 본인이 안다는 거니까.
오늘도 하루종일 바빴죠? 난 지금 와인 한 잔 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