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날 이곳엔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일기예보를 믿을 게 못 된다싶더니 이번엔 아주 잘 맞다. 그날 빗줄기가 오락가락하더니 오후 늦게 비가 그치고 기온이 뚝 떨어졌다. 가을이 오긴 왔다. 유난했던 폭염에 지칠대로 지쳤었는데 이런 날이 오긴 오는구나 싶다. 그와함께 내면의 소란스러움도 좀 잦아드는 느낌이다. 조금 편안해졌다고나 할까. 모든 게 내 마음의 문제이긴 하지만, 좀더 나를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하게 된다.
오늘은 문우의 모친상으로 변두리 달음산에 있는 모 절에서 올리는 재에 갔다. 빗방울이 좀 내리더니 다시 가을햇살이 화창했다. 고양이 여럿이 볕을 쬐며 뒹굴고 있고, 낮은 슬레이트 지붕을 뛰어다니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작은 간이역 앞에서 등산객들이 내려오는 동네길로 접어들어 고불고불한 외길을 조금 올라가 들어앉아있는 절은 외형적으로는 보잘 것 없이 보였다. 16살에 출가한 여승이 주지스님으로 있는 절인데 그분은 고희도 넘긴 상주의 여동생이라고 한다. 작은 체구에 천수 반야심경을 외는 등줄기가 야위어 보였다. 나눠주는 책자를 무릎에 두고 눈으로 따라가기도 어려운 나는 그저 책자를 덮고 눈을 감고 그냥 '소리'에 집중해보았다. 내면의 소란스러움을 잠재우고 집중의 힘을 얻기 위해 나도 나름의 방안을 찾아야될 것 같다.
단지 신경숙의 문장을 소리내어 읽어볼 요량으로 다음 녹음도서로 <어.나.벨>을 찜해두었었는데, 이미 다른 곳에서 다른 봉사자가 녹음 시작했다고 알려주었다. <앙팡 테리블>은 편집도 끝, <죽음의 밥상>은 편집 조금 남은 상태. <랩소디 인 베를린>은 조금 미뤄두고 전에 찜해두었던 <습관의 심리학>을 시작했다. 벌써 아주 조금밖에 안 남은 상태다. 자기경영에 관련한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요새는 부쩍 이런 책들, 특히 심리와 관련되거나 자기 치유와 내면의 경영에 관련한 책들에 손이 간다. 당분간 이런 책들을 좀 읽고 내면을 다듬어야할 필요가 있겠다. 물론 읽어서만 될 일이 아니라 실천이 가장 중요하다. 안다, 안다고.ㅎ
"나와 조직의 운명을 결정하는 사소한 습관의 위대한 비밀" 이라는 부제
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 지음 / 갤리온
내용이 아주 명료하고 불필요한 구절이 거의 없다. 구체적인 지적이 개인과 조직의 바람직한 경 영에 유용할 듯하다. 표지에는 앞뒤로 사람의 표정을 다양하게 이모티콘처럼 그려놓았다.
좋은 습관이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고 표정을 바꾸고 인생을 바꾼다, 뭐 이런 내용이 결론일 것이다.(아직 결론은 남았으니)
상당히 유용한 팁이 많은데, 그 중 우리들은 왜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반복적으로 후회를 재생산하는지, 그에 대한 잘못된 선택의 습관을 분석해 놓은 글을 보고, 나도 이런 습관에 젖어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에, 이것은 우리가 느낄 수 있는 행복감과도 무관하지 않다. 행복을 얻자는 게 아니라 행복감을 얻자는 게 삶의 목표라면!
좋지 않은 습관 셋 :
객관적인 확률에 근거한 합리적인 선택을 하기보다는 어림짐작으로 가장 그럴듯한 선택을 하거나(휴리스틱 heuristic), 대표적인 것 이외의 다른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고 판단해버리는 경우(아무개 논증 man-who argument), 막연한 기대감에 근거한 선택을 해버리는 경우(도박사의 오류gambler's fallacy) 등이다.
특히, 전망이론(prospect theory)는 포장지보다 내용물에 집중해야함을 강조한다. 내 생각에 이는 말의 내용에 더 집중하라는 뜻이 되지만, 역으로 말의 형식도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타인을 설득하기 위해선 사람의 이런 심리를 역이용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물론 악의적인 이용이 아니라, 선의의 설득을 말한다. 예를 들어, 글을 쓸 때도 적용된다. 글의 주제란 읽는 이에게 내가 주장하고 싶은 내용이 아니라 내가 설득하고 싶은 내용이라는 점. 그렇다면 문장을 긍정의 틀보다 부정의 틀로 쓰면 훨씬 솔깃해진다는 말이 된다. 긍정문을 선용하라고 하지만 때로는 부정문의 힘은 막강하다. 남용되면 약발이 떨어지겠지만, 이건 차츰 나의 글쓰기에서 시험해봐야할 일이고, 다시 본론으로...
반만 채워진 물 컵을 바라보며 "반밖에 안 남았구나"와 "반이나 남았구나"의 차이. 이는 판단하는 시점이 어디에 있느냐, 즉 판단의 프레임이 어떠한가가 중요하다는 일례다. 사람들은 객관적인 확률을 주관적으로 변환해서 생각하는 습관이 있다. 동일한 확률적 수치라도 그것이 제시되는 틀이 어떤가에 따라 확률에 대한 지각이 달라진다.
1. 긍정적 틀에서 제시되는 질문 -
"다음 판에 돈을 걸지 않으면, 당신은 지금의 50달러 중 20달러를 지킬 수 있다. 다음 판에 돈을 걸겠는가, 아니면 가만히 있겠는가?"
2. 부정적 틀에서 제시되는 질문 -
" 다음 판에 돈을 걸면 당신은 30달러를 잃는다. 다음 판에 돈을 걸겠는가, 아니면 가만히 있겠는가?"
위의 두 가지 질문의 틀 중 돈을 걸겠다고 하는 사람이 많은 쪽은 어느 쪽일까?? 둘의 경우 기대효용은 동일하고 확률도 같다.
실제 연구에서 긍정틀로 문제를 제시받은 사람들 중 40%가 돈을 걸기로 한 반면, 부정틀로 제시받은 사람들 중 60%가 돈을 걸기로 결정하였다. 여기에 묘한 심리적 이유가 숨어있었다.
사람들은 0에 가까운 희박한 확률은 실제보다도 크게 지각하는 반면, 100에 가까운 확률은 실제보다도 일어날 확률이 더 낮은 것으로 지각한다고 한다. 또한 사람들은 긍정틀에서는 안전을 추구하고, 부정틀에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부정틀에서는 모험을 무릅쓰고, 희박하지만 희망적인 결과가 일어날 수 있는 도박을 선호하고, 긍정틀에서는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만에 하나 원치 않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도박 포기를 선호하는 것이다. - 96쪽
우리가 실낱 같은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로또를 사고 인생역전을 꿈꾸고, 불황 속에서도 막연히 잘 될 거야,를 다짐하는 심리의 기저에는 이런 게 숨어있다. 극소의 희망을 가지는 게 전혀 희망을 갖지 않는 것보다 나을까? 무수한 긍정의 틀 속에서 하루하루 살고 있으면서 그것의 소중함이나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지금 이 순간 채워지지 않는 것, 즉 부정이나 부재의 틀 속에서 희망을 걸고 도박을 하려는 성향은 사람들 누구에게나 잠재된 욕망에 기인한 것이 아닌지. 그러나 묻고 싶기도 하다. 합리적이고 지혜롭고 똑똑한 것만이 가치있는 것일까. 그래야 자기경영에 성공하고 인생도 성공하는 것일까. 좀 바보같고 손해 보고 앞뒤 잴 줄 몰라 실수투성이라도 그 존재자체로 그냥 가치있는 것. 성공하지 않아도 말이다. 하지만 최소한 하루치 보너스에는 감사하기로 하자. 큰 사고 후 죽을 수도 있었는데 살아서 노래 부를 수 있으니 그때부터 하루하루를 보너스로 생각하고 산다는 어느 여가수의 진부하지만 진실된 말처럼. 아니 그만큼까지는 아니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