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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죽음 - 살아가면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에 대하여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7월
평점 :
이 책을 쓰고 2년 후, 1978년 ‘자유죽음’을 완수한 장 아메리(Jean Amery)에 의하면 인간이라는 집에는 온갖 것들이 들어차 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무겁다. "무거운 가구"부터 무거운 몸, 무거운 짐... 이것들에 짓눌리면 심리적으로 "가슴이 무겁다"고 표현한다. 이 모든 건 발목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우리 삶의 부조리함과 비슷하다. 나라는 집 둘레에는 타인이라는 다른 집들이 이상하고 괴상한 지붕을 이고 앉아 나를 째려보고 비난하고 모욕한다. 이들은 돌이킬 수 없는 실패, 에셰크(L’echec)로 명명될 수 있다. 아메리가 말처럼 자유에 등급이 있듯 실패에도 등급이 있다면 돌이킬 수 없는 실패는 최고등급일 것이다.
자유죽음은 ‘죽음’보다 ‘자유’에 방점이 찍힌다. 아메리에 의하면 스스로 생의 종착역으로 성큼 다가가는 최후 프로젝트로서의 그 길은 '자유에 이르는’ 길이다. 자유에 이른 길이라기엔 성급하다. 단지 자유를 향해 가는 길, 그 과정에 놓인 이 단어는 선택의 자유와 연결되는 인간 존엄성을 떠올려준다. 인간이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죽음이라고 한다면 이 말은 선택의 자유를 보장받으며 인간성과 존엄성을 지키는 삶이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자유죽음의 반대 의미로 쓴 자연죽음(보통의 죽음)은 태어나면서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한 인간의 시난고난한 사건과 감각다발으로서의 자아의 한가운데를 관통하며 그 치욕과 고통을 이겨낸 후 맞이할 수 있다. 자유죽음이란 그렇다면 고문(같은 생)의 치욕과 늙어감의 모욕이라는 고통을 피해 도피하라는 것인가라고 이 책의 논지를 쉽게 단정하지 않아야 한다. 인간 존엄을 지키기 위한 자유(선택)에 대해 집요하고 치열하게 파고들어 문학작품과 철학, 심리학과 사회학 등 다양한 프리즘을 통해 사유한 이 책은 장 아메리 개인의 놀라운 역사를 담고 진실성을 보장한다. 레지스탕스로 활약하다 나치스의 모진 고문을 이겨내고 망가진 몸으로 20년을 침묵하다 펜을 들었고 회유와 협박에 시달리며 다 늙어서야, 그제야 비굴했던 모국 오스트리아의 호텔에서 자유죽음을 실행한 사람은 (비유적 표현으로) '뛰어내리기'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메리가 이 책에서 말했듯 그것은 구호요청의 신호가 아니라 메시지 전달이었다. 그는 무슨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자신이 유대인인 줄도 모를 정도의 가정환경에서 자랐고 유대인으로서 저항하고 항거하다 생환한 장 아메리는 자신의 이름을 가증스러운 모국에 내던져버린다. 망명한 유대인들을 탓할 수는 없지만 그런 위인들과는 확연히 다른 삶이었다. 결국 이 책의 마지막 장 첫 단락은 절멸의 수용소 감방과 큰감방을 묘사하며 시작한다. 거친 숨결을 내뿜으며 단호하게 히틀러를 언급하고 유대인을 호명한다. 프리모 레비의 시적이고 우아한 증언록 문장과는 또다른 느낌의 강건하고 강렬한 문장으로 가슴이 짓눌리며 연민이 치솟았다. 편안한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는 그 시공을 상상하며 죽음본능(타나토스)이 아닌 생존본능(에로스)을 떠올렸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에 호응한 흔적이 많은 부분 드러나는데, 저자는 자유죽음에 선행해 존재의 ‘구토’를 상기시킨다. 욕지기 나는 세상, 에셰크는 “죽음이라는 토사물을 낳는 주범이다.” 존재를 부정하는 구토(혐오감)의 감정은 생존본능과 죽음본능 사이의 대립을 야기하고, 이원론적 본능이야말로 생명의 모순이라는 것이다. ‘본능’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다름 아니며 생명으로의 의지, 내가 내 세계 안에서 확장하고자 하는 의지의 다른 이름이다. 자유죽음은 이런 본능에서 잉태된다. "죽음에 이끌리는 성향", 허무에 이끌리는 성향, 다시 말해 "추락하려는 성벽(性癖)"은 식물의 굴지성(屈地性)처럼 인간의 본능이라고 저자는 본다.
생명의 논리와 죽음의 논리는 각각 있음의 세계와 없음의 세계에 바탕한다. 그 사이에 다리가 놓여 있지 않은 탓에 우리는 죽음의 논리를 부르짖고 실천한 사람을 쉽게 단죄하려 든다. 생명의 논리만 앞세우는 사회 종교 윤리와 학습된 의무감이 자유죽음을 실행한 사람의 내면에 가까이 가보지도 않고 이런저런 말을 하는 동안 그들이 발화하는 일상언어가 얼마나 폭력적인지 감지하지 못한다. 아메리가 요구하는 한 개인에 대한 성찰과 공감은 먼 나라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넘어가는 사이에 다리는 이들을 한 개인으로 이해하도록 돕는다. 일반적으로 삶의 권태나 아노미가 생을 스스로 마감하도록 부추겼다고, 책임감도 없이 가족을 버리고 어떻게 그럴 수가라고 말해버리기엔 석연찮다. 사회적인 기능으로서만 개인을 볼 때 우리는 놓치는 게 있다. 개인으로서의 나는 죽음의 노예이자 주인으로, 사회의 소유물이라기보다 ‘나’에 속하는 존재다. 자기결단은 실존적이고 결코 나르시시스트적이지 않다. "우리 삶은 각자 우리가 살아온 것이기에"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속하기에". 그 세계는 온전히 우리의 것이다.
사회적인 편견이 없이 죽음을 바라볼 때 우리의 지평 앞에 새로운 휴머니즘이 떠오른다. 희망이라는 원리를 놓지 않으면서도, 그 자체로 모순이지만 피할 길이 없는 허무라는 원칙도 함께 인정하는 게 우리의 새로운 휴머니즘이다. 세상의 피난민은 세계 정복자보다 못난 게 아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 보면 더 낫기까지 하다. 기능성을 위주로 끊임없이 변하는 법칙을 제시하는 다수는 더 이상 최후의 발언권을 갖지 않는다. 통찰과 배려라는 관용을 가진 인간이 자신의 발언을 함께 저울대 위에 올려놓는다. -118쪽
장 아메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자유죽음을 실행하거나 했거나 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을 소수자의 입장에 둔다. 이 관점에 손들어주고 싶다. 병적인 존재나 광적인 존재, 사회적으로 도태된 존재가 아니라 “죽음(허무)에 이끌리는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다. 누구나 품는 자유욕구, 해방욕구는 타인의 해방 수행과정과 충돌하게 마련이다. 아메리는 자유죽음을 해방의 가장 강력한 사례로 둔다. 해방은 부정, 파괴, 변화, 새로움의 도모와 나아감이다. 존재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부정하여 실존한다. 그러나 이 지극한 부정은 무의미하다. 없음의 세계에서 자유 또한 없음이다.
아메리는 분명히 말한다. 인생의 부조리만큼이나 자유죽음은 부조리하지만 인생의 부조리를 늘리는 게 아니라 줄여준다고. “유일하게 진솔한” 자유죽음의 의미는 ‘자유에 이르는 길’에 있다고. 존재에 저항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는 뜻으로 들린다. 그만큼 인간성과 존엄성을 담는, 자유는 소중하다고 역설한다. 자유죽음이 세계를 바꾸진 않는다. 존재가 사라지면 그 세계도 사라진다. 하지만 세계는 그대로 있다. 거침없이 폭주한 저자의 언어를 따라가다 숙연해진다. 흙으로 돌아가 누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부조리한 모래를 바라보며 마침내 안개(부조리하여 모호한 세상) 속에서 물에 잠기는 것이라고 자유죽음을 빗대어 말할 수 있으리라. (철학을 전공한 박 감독이 이 책을 읽지 않았을까 생각되는 구체적 부분이 많았다.이 이야기는 다음에...)
나의 세계를 지키는 유일하고 진솔한 행위, 집에서 나와(ex domo) 집을 향하여(pro domo).
“나에게서 나와(ex domo), 나를 위하여(pro domo)”(62쪽)
인간은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상량식을 올리는 축제의 날에 허물어져 내릴 집을 짓는! 물론 인간은 ‘자연적인 죽음’을 희망한다. 그 같은 희망으로 자기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언젠가는 떠나야 할 자기 자신의 일부를 짓는다. - 83쪽
후반부, 절대자에 대한 사유도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하지만 그만큼 강렬한 생존본능을 느낄 수 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멸절의 고통과 굴욕을 당한 자의 말이기에 힘이 있다. - "나는 '절대자'란 그저 하나의 말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깨닫는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그 어떤 실재도 절대자와는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절대자는 단지 비현실적인 욕구, 있지 않은 것에서 구원을 기대하는 욕구의 산물일 뿐이다......어떤 사람은 자신이 갈망하는 게 절대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게 뭔지 그 자신이 모른다. 그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어떤 무엇에 등을 돌리고 싶다는 의중일 따름이다.(259쪽)" 역설적으로, 죽음을 선택하여 실행할 수 있는 자유가 사회적 편견과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롭다면 구토의 대상으로서의 생을 당당하게 건너가는 데 힘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