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알라딘이 아니라 이곳 도시의 바다를 낀 서점 'Eternal Journey'에서 골라 야곰야곰 먹던 책이다. 무민과 토베에 대한 거의 모든 걸 담아낸 멋진 책이라 단숨에 끌렸다.
나는 실제 인물을 다룬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다. 특히 관심 가는 예술가의 삶과 영혼을 다룬 영화에는 무조건 끌린다. 울타리를 넘어 새로움을 시도하고 뚜렷한 족적을 남긴 위대한 인간에 대한 탐구는 이리저리 편집되어 복제되기에 한 인물의 총체를 온전히 들여다보기엔 제한적이다. 누군가의 삶을 한마디로 재단하는 것은 무례한 일일 테지만 어느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한 인물의 정수를 오히려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이 된다. 위대한 인간의 박제된 삶과 시대를 오늘날 생생하게 살려보려는 시도는 쉽지 않기에 어떻게 그려냈을까, 어떤 면은 베일을 벗기고 어떤 면은 여전히 베일에 가렸을까, 즉 감독의 개성 있는 관점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섣부른 평가나 판단이 아니라 섬세하게 이해하려는 노력을 바탕으로, 한 사람에 대한 경외에 동참하게 된다.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1/1007/pimg_7345851733145982.jpeg)
토베 얀손Tove(자이다 베리로트 2020)
2021년 8월 26일 개최한 제23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막작이다. 감독과 각본가, 촬영감독을 비롯한 대부분의 스태프가 여성이라는 점은 영화의 시선이 어떨지 짐작되는 대목이다. ‘영화의 전당’에서 상영하기에 예매를 해 두었는데 그날 시아버님이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았다. 이미 의식을 잃고 호흡기에 연명해 이틀을 중환자실에서 사투하다 영이별하셨다. 인연의 가닿지 못한 거리와 여전한 일상의 배경 사이에서 멍하니 추석 연휴를 보내고 한 사람의 생에 대한 숱한 생각에서 채 빠져나오지 못한 날, 미루어 두었던 영화 두 편을 연이어 보러 갔다.
<토베 얀손>은 무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놓칠 수 없는 영화다. 피터 래빗 다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무민의 원화전이 핀란드 독립 100주년 기념으로 대구에서 열리고 있던 3년 전 새봄, 한 시간가량이면 도착하는 기차에 올랐다. 전시장은 허술하고 짜임새가 덜했지만 1945년 『무민 가족과 대홍수』를 시작으로 1952년 출판되어 당시 그림책 시장에 신선한 반향을 일으킨 첫 번째 그림책 『무민, 밈블 그리고 미이에 관한 이야기』부터 1970년 무민 시리즈 중 마지막 소설책으로 출판된 『늦가을 무민 골짜기』까지 토베가 창조한 특별한 세계를 맛 볼 수 있었다. 무민은 오동통한 하얀 몸에 호기심이 강하고 다정하고 친구들 특히 단짝 스너프킨과 함께 여행하며 모험하기를 좋아한다.
싱크로율 100%의 배우 알마 포위스티는 이 영화에서도 중요하게 재현된 무민 연극 초연에 참여한 조부모를 가족으로 둔 배우다. 무민 연극의 각본 제의를 연인 비비카에게 받고 무대에 올린 토베는 이후에도 그림뿐만 아니라 소설가, 극작가, 일러스트레이터, 무대연출가 등 다양한 예술 활동을 한다. 십 대에 탄생시킨 무민트롤의 평생 이어지는 기나긴 서사도 그런 역량에서 가능했으리라. 따스한 색감, 경쾌한 춤과 음악이 이어지는 이 영화는 덜 알려진 토베의 내적갈등과 분방한 사생활, 무민이라는 개성 넘치는 캐릭터의 탄생과 진화를 전기영화의 무거움을 벗고 그런대로 잘 그려낸다.
토베 얀손이라는 다재다능한 예술가의 불꽃 같은 긴 삶 중에서도 정점을 이룬 1944년에서 1962년까지의 시간에 집중한다. 무민 가족과 주변 인물을 통해 토베의 성적 정치적 정체성과 예술관이 격변과 성장을 이루던 시기였다. 어린이를 위한 무민 이야기를 그만두고 다른 작업에 몰두한 인생 후반의 이야기는 ‘...행복하게 살았다’로 영화는 과감히 생략했다. 실제로 토베는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 스스로 자신의 삶을 두고 비록 고달프긴 했어도 흥미진진하고 파란만장한 삶이었고 아주 행복했다고, 살면서 가장 중시한 건 일과 사랑이었노라고 회상했다.
1944년 핀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황에 뒤늦게 휘말려 소련과 독일 사이에서 국가적으로도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다. 1914년생 토베가 서른 살이던 해, 이미 국민 예술가로 추앙받던 조각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화가에 대한 고정관념과 결핍된 부성애로 박탈감에 몸서리치던 토베는 정신적 도피처 정도로 무민을 그렸지만 애정은 남달랐다. 겁이 나면 무민마마를 찾기도 하지만 모험하기를 멈추지 않는 무민을 자신의 또 다른 자아 정도로 여겼으니까. 1945년 무민의 매력을 알아본 연극연출가이지 시장의 딸 비비카의 도움으로 무민이 세상에 공개된다. 두 사람은 각자 토프슬란, 비프슬란이 되어 사랑의 은어를 주고받으며 명랑한 시절을 보내고 격정과 이별, 고뇌와 성장이 토베의 삶을 밀고 나아간다.
<토베>는 자유영혼을 지닌 예술가의 고민과 솔직한 욕망, 타인의 기준에 굴하지 않고 욕망을 실현하고 성취해 나가는 과정을 활력 있고 섬세하게 조명한 영화다. 삶은 모험이라고 선언한 토베는 비비카에게 이별 통고를 받고 후에 무민 시리즈에 '투티키'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다른 동성 연인 툴리키 피에텔레와 거의 반세기 동안 행복하게 살았다. 색안경 낀 세상은 토베의 그런 흔적은 지워 버리고 혼자 외롭게 살다간 사람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토베의 생기 넘치는 내면을 대변하듯 영화는 실제 토베와 배우 토베의 춤을 살려내었다. 술과 파티, 댄스가 자주 등장하고 토베가 그랬듯 사람들은 ‘어떤’ 세계를 바랐다.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밝고 씩씩하게 모험과 도전을 이어가는 무민 가족의 세계에 토베는 창조자이자 거주자로 스스로 몸담았고 사람들의 바람에도 부합하였다. 억압적 존재이기만 했던 아버지가 딸이 구현한 무민 세계와 성취들을 남몰래 스크랩한 것도 그런 마음이 담긴 응원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죽은 후 그 스크랩 노트를 보고 오열하는 토베를 멀리서 잡은 너른 시선도 기억에 남는다.
ps: 그날 본 다른 영화는 <아임 유어 맨>이었다.
알고리즘 행복의 조건에 대해 생각을 던져 주는 흥미로운 영화였다.
모든 걸 이해하지만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맨'을 통해 주인공 박물학자 여성은 행복이란
완벽하게 셋팅된 조건에서 온다기보다 갈망하며 찾아가는 과정에 그 열쇠가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하지만 단정하긴 이르고 "아임 유어 우먼"으로서 동반자와 살게된 어떤 외로웠던 남자는 아주
행복해 하고 만족한 삶을 살고 있다. 얼마나 오래 가는지까지는 영화가 보여주지 않아 장담할 수
없지만. 가보았던 독일 페르가몬박물관에서의 장면은 반갑기도 놀라기도^^
토베는 새로운 사랑을 풍성하고 따듯한 경험으로 묘사했다. 새로운 풍경을 찾아 떠나는, 믿을 수 없는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여행 같았다고 했다. "속속들이 안다고 자신했던 자기 옛집에서 굉장한 새로운 방을 발견하는 일 같아. 그리고 거기에 그냥 들어가는 거야, 그 방을 여태 몰랐던 걸 신기해하면서." - P110
토베는 자신이 쓴 책에 어떠한 교육적 의도도 없다고 주저 없이 밝혔다. "재미있으라고 쓴 거에요. 가르치려고가 아니라요." 자기에게는 철학도 정치 성향도 없다고 했다. 그저 자신을 매료시킨 것이나 무섭게 만들었던 것에 대해 쓰고 싶었고, 그 모든 사건이 ‘이를테면 무해한 혼란스러움, 그리고 자기들을 둘러싼 세계를 받아들이는, 또 서로 굉장히 사이가 좋다는 걸 가장 큰 특징으로 갖는 한 가족을 중심으로 벌어지도록 설정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 P14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