곶감과 수필 태학산문선 301
윤오영 지음, 정민 엮음 / 태학사 / 2008년 3월
구판절판


정이란 하나의 면면히 흐르는 리듬이다. 절단된 데는 정이 없다. 비정의 세계다. 정이란 시간과 공간에 뻗쳐 무한히 계속되는 생명의 흐름이고, 자연과 역사와 인간의 유기적인 유? 이 정의 구상이 곧 미다. 수천 년 전의 작품, 수만 리 이역의 작품이 우리에게 공명공감을 일으키는 것은 그와 우리 사이에 보이지 않는 생명의 유대가 있기 때문이다. 수명에는 한계가 있으나 생명에는 한계가 없다.-86쪽

더욱이 글을 쓰는 사람도 평소에 文情과 文心을 기르지 않고 붓끝의 재주에만 맡기면 그 문장에 품위와 진실이 깃들이기 어려울 것이 아닌가....... 글을 사랑하는 사람은 문정과 文思에서 잠시도 떠나지 아니함으로써 속기를 떨치고 文雅한 품성을 기른다. 여기서 비로소 아름다운 글이 써진다. 그러기에 한 편의 명문은 10년의 교양에서 온다고 했다.-93쪽

왜 도연명의 황국이며 주렴계의 홍련이었을까. 날마다 일어나고 되풀이되는 신변잡사라고 그저 번쇄하고 무가치하다고만 할 것인가. 이런 것들을 다 떼어낸다면 인생 백년에 남은 것이 무엇인가. 생활 속에서 생활을 찾지 아니하고 만리창공의 기적이나 천재일우의 사건에서 생활을 찾으려는 것도 공허한 것이 아닌가. 더욱이 분분한 市井의 시비, 소잡한 정계의 동태, 불어오는 사조의 물거품, 그것만이 장구한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147쪽

저속한 인품의 바닥이 보이는 문필의 가식, 우러날 것 없는 재강을 쥐어 짜낸 미문의 교태, 옹졸한 분만, 같잖은 점잔, 하찮은 지식, 천박한 감상, 엉뚱한 기상, 이런 것들이 우리의 생활을 얼마나 공허하게 하며, 우리의 붓을 얼마나 누추하게 하는가.-148쪽

'절실'이라 두 자를 알면 생활이요, '진솔'이란 두 자를 알면 글이다. 눈물이 그 속에 있고, 진리가 또한 그 속에 있다. 거짓 없는 눈물과 웃음, 이것이 참다운 인생이다. 인생의 에누리 없는 고백, 이것이 곧 글이다. 정열의 부르짖음도 아니요, 비통의 하소연도 아니요, 精을 모아 奇를 다툼도 아니요, 要에 따라 才를 자랑함도 아니다. 인생의 걸어온 자취 그것이 수필이다.-149쪽

위정자의 최대 무기는 권력이다. 권력의 힘이란 시랑猜狼과 같은 것이다. 지도자의 최대 무기는 덕행이다. 덕행의 힘이란 물과 같은 것이다. 지성인의 최대의 무기는 발언이다. 발언의 힘은 추상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지성인의 발언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다. 확고한 신념이 아니면 발언할 수 없다. 한 마디 한 마디에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침묵의 권리와 사색의 여유와 불협조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발언은 천근의 무게가 있고 흉중의 보도寶刀가 항상 보류되어 있는 것이다.-175쪽

내 생각과 서로 드나들면, 비로소 읽을 수 있는 내 친구의 글이다. 예상보다 항상 새롭고 절실하면, 이는 上手의 글이라 즐겁게 읽을 수 있는 글이다. 말이 항상 의표를 찌르고 진실이 육박하며, 미지의 여운이 심층의 저변을 울리면, 이는 범상치 아니한 명문일 것이다. 나를 기쁘고 즐겁게 하기에 족한 글이다....... 음악인가 하고 읊어 보면 회화인 양 나타나고, 진리인가 생각하면 허망인 듯 잡히지 않는 기환奇幻, 사색의 무지개가 걷잡을 수 없이 피어나다가 책을 펴면 모든 것이 자취를 감추고 옷깃을 바로 하게 하는 글, 모르면서도 매력에 사로잡혀 놓지 못 하는 글, 그런 글이 있다면 일생을 송독誦讀하고도 남음이 있는 기문이니, 대소심천大小深淺의 차가 무량으로 크기 때문이다.-204쪽

"음식의 맛의 생명의 염담鹽淡 맞추기에 있다고 하셨는데 문장에서 염담이란 무엇에 해당합니까?" "문장의 농담濃淡이지. 문장의 농담이 없으면 정물화에 음영 없는 것과 같고, 음악에 박자 없는 것과 같지. 문장은 이 농담에 의해서 함축도 있고 여운도 있고 기환도 있고 내재적인 리듬도 있어 비로소 시취詩趣를 갖게 되는 것일세. 고인이 농담 없는 문장을 기리켜 몰골도沒骨圖라고 풍자한 이가 있어. 우리 모양으로 문장이 미숙하고, 또 배워보려는 사람들은 이 깍두기에서 얻는 바가 있을 것일세."-2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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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7-04-14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스로 바보라고 말씀하신 윤오영 선생님의 정갈한 글은 우리말의 큰스승님이라 할 만하죠.
혜경님 뽑아놓으신 글을 읽으면서 마음을 닦고 갑니다.

프레이야 2007-04-14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 특히 방망이 깎던노인과 사발시계, 깍두기 같은 글들... 참 좋더이다.
마음이 정갈해지는 글이었어요. 감사합니다.^^

하늘바람 2007-04-14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욱이 글을 쓰는 사람도 평소에 文情과 文心을 기르지 않고 붓끝의 재주에만 맡기면 그 문장에 품위와 진실이 깃들이기 어려울 것이 아닌가....... 글을 사랑하는 사람은 문정과 文思에서 잠시도 떠나지 아니함으로써 속기를 떨치고 文雅한 품성을 기른다. 여기서 비로소 아름다운 글이 써진다. 그러기에 한 편의 명문은 10년의 교양에서 온다고 했다.


이 글 저도 마음에 새기며 퍼담을 게요


네꼬 2007-04-15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싶어지네요. 저도 어떻게.. 정연하고 단아한 것까진 어려워도 좀 차분해질 순 있지 않을까요? -_-a

홍수맘 2007-04-15 0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고 싶어요. <방망이 깎던노인>은 제가 학교다닐 때 교과서에서 봤던 것 같기도 하고 가물가물 하네요.^ ^;;;

비로그인 2007-04-15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으며 내 마음을 바로 하고 내 자세를 바로 하게 됩니다.

오우아 2007-04-16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식의 맛은 염담, 문장의 맛은 농담이 절로 와 닿네요. 그러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맛은 무엇일까요? 혹 정(情)담이 아닐까요?

프레이야 2007-04-16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바람님, 문아한 품성을 기르는데 10년 20년 기한이 없겠지요. 노력하고 싶어요.
네꼬님, 이미지 바뀌었네요. 귀여워요.
홍수맘님, 그래요 그 글 맞아요. ^^
승연님, 그래서 글도 골라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우아님, 정담이란 말이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짱꿀라 2007-04-18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었던 작품을 또 한번 이곳에서 만나게 되니 너무 기쁘네요. 잘 읽고 갑니다. 역시 옛글의 정취가 묻어나는 것 같습니다. 문장 한구절 한구절이 너무 좋습니다.

프레이야 2007-04-18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타님, 전 어느분의 선물로 읽게 되었는데 곶감을 수필에 비유한 적절함이 마음에
와 닿았어요. 그 대목을 여기 옮겨적지 못했네요. 소박한 언어로 고아한 멋이 느껴지는 글들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