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평점 :
도무지 술술 읽히지 않았다. 배를 깔고 엎드리거나 갓 뽑은 커피를 마시며 이 책을 읽었다는 걸 작가에게 사죄하고 싶다. 지옥같은 내용을 서술하는 담백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따라가면서, 최대한 자제심을 발휘하여 안정적인 마음을 취하고자 하는 작가의 극한의 고통이 어떤 것일지, 곳곳에서 잠시 멈춰 숨을 고르고 넘어가야 했다.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후 40여년에 걸쳐 증언의 글을 남겼다. 이 책은 그의 첫번째 증언록이다. 그는 1987년 4월 11일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혹독한 ‘절멸의 수용소’에서도 하지 않았던 일을. ‘자살’은 사유가 가능할 때 할 수 있는 삶의 또 다른 적극적 방식이다. 수용소에서는 인간임을 자각할 수 있는 사유가 불가능했다. 그는 증언의 문학을 일관성 있게 발표하면서 우리 시대에도 끊이지 않고 있는 파시즘을 경고하고, 아우슈비츠에 대한 모든 증언을 또다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붉은 신호등으로 밝히고자 했다. 그가 자살을 하기 직전에 쓴 문장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그의 마지막 작품 <결론>에서 인용한 일부가 이 책의 부록에 실려 있다.
- 점점 젊은이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힘들어진다. 우리는 그것을 일종의 의무로, 동시에 위기로 본다.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위기, 귀 기울여지지 않을 위기, 사람들은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우리의 개인적인 경험들을 넘어서 혹은 그것과 상관없이, 우리는 어떤 근본적인 뜻밖의 사건을 집단적으로 목격했기 때문이다. 뜻밖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예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근본적인 것이다. (......) 과거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그러므로 그런 일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p338)
아우슈비츠나 독일군에 의한 유대인 핍박을 소재로 한 영화도 많고 책도 있지만 프리모 레비의 기록이 갖는 의미는 특별하다. 부록 1 ‘독자들에게 답한다’에서 친절하게 덧붙이고 있는 작가 자신의 사려 깊은 생각은 더욱 값지다. 독일인에 대한 증오의 감정을 극도로 표출하지 않은 담담한 서술, 집단적 반란을 하지 않았던 유대인들, 유대인에 대한 나치스의 광적인 증오에 대한 근본적 이유, 그리고 작가가 생존할 수 있었다고 생각되는 요인들에 대한 답변 등이 역사적, 철학적 사유와 함께 녹아있다. 청소년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의 형식인데 작가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대목들이다.
증언과 기록의 글, <이것이 인간인가>가 오랜 세월동안 읽히며 감동의 물결을 밀고 오는 이유는 이 책이 단지 기록에서 끝나지 않고 문학적으로 승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1943년 12월 13일 파시스트 민병대에 체포되어 폴란드 수용소로 걸어가는 길을 ‘여행’이라는 소제목으로 표현하여 이야기를 시작한다. 수용소에서 사람들이 꿈꾸고 그리워했던 것 중에 ‘먹는 것’과 ‘이야기’가 있었다. 그것은 거의 집단적인 꿈이었다. 탄탈로스의 신화처럼 영원한 기아와 갈증에 허덕이면서도 지난날을 소재로 혹은 돌아갈 집을 소재로 이야기들을 나눌 때면 암흑의 지하세계에서도 환영처럼 반짝 하는 햇살 한 줄기를 본 것인 양 행복해 했다. 사람은 누구나 이야기를 원한다. 이야기 속에는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수용소에서 금기어 중에 '내일 아침에'라는 말이 있었는데,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는 '내일 아침'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역설적으로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 책은 이야기로서의 장점을 두루 지닌다. 사실적이면서도 적나라하지 않고 긴장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어조의 높낮이를 조절하고 있다. 당연히 1인칭시점의 서술이지만 인물들을 보는 눈에 상당한 객관성을 유지하면서도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다.
특히 작가가 주변을 보는 눈이나 인물들을 파고드는 눈은 과학자답게(실제로 화학자) 섬세하고 면밀하다. 결코 치우치지 않고 감정을 표현하면서도 인간성의 본질에 대한 천착을 놓지 않는다. 그가 절멸의 수용소에서 경험한 모든 것을 생의 값진 소득이라고 여길 수 있는 힘도 인간성에 대한 나름의 연구,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에 기인한다. 인간성의 연약함, 인간이 열망하는 자유, 그래도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은 일련의 일들을 증언하며 “이것이 인간인가?”에 대한 진지한 답변을 스스로 하는 것이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혀만을 휘두른 이야기라면 오랜 감동을 줄 수 없을 테다. 그는 인간성의 위대함만을 과대평가하지 않는다. '인간성의 허약함'은 또 다른 아우슈비츠를 낳을 수 있다는 무서운 경고를 흘려듣지 말아야한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징후들은 사실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잔인한 얼굴에서 비롯되는 것일지 모른다. 그 얼굴은 실체가 없다. 이미지만으로도 괴력을 발휘하는 집단적, 총체적 두려움이다. 독일군이나 독일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왜 표현되지 않았느냐는 독자의 질문에 작가는 얼굴 없는 대상에 대고 어떻게 분노를 터뜨릴 수 있는가 라고 답변했다. 증오하지만 표적의 대상으로는 막연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그것이 인간이 갖는 공포심의 본질이 아니던가.
<이것이 인간인가>가 문학적으로 승화될 수 있었던 또다른 이유는 작품 전체에 장치되어 있는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이다. 작가는 수용소로 가는 길, 일 년 남짓의 수용소 생활과 퇴각하는 열흘간의 이야기까지 흘러오면서 내내 ‘지옥’을 연상하였음이다. 총 17장의 이야기 중 ‘오디세우스의 노래’ 에서는 단테가 집중적으로 인용된다. 나는 이 장에서 다른 어떤 생생한 증언이나 기록에서보다, 인간이 극한의 상황에서 다다를 수 있을 것 같은 슬픔의 극치를 느꼈다. 인간이 인간인 까닭과 인간임을 포기할 수 없어 감당해야 했을 자멸감이 절정에 이르러, 직설적 어조보다 울림이 깊고 강했다.
...... 단테는 어떤 사람인가. <신곡>은 무엇인가. <신곡>이 무엇인지를 간단하게 설명하려 애쓰다 보면 어느새 신선하고 낯선 감정이 생겨난다. ‘지옥’이 어떻게 나뉘어 있는지, 거기서 어떤 벌을 받는지. 베르길리우스는 이성이고 베아트리체는 신학이다.(p171)
동료, 피콜로에게 귀와 머리를 열어 잘 들어보라며, 날 위해 이해해 달라며, 읊는 아래의 노래는 프리모 레비의 참담한 심정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독자에게 전한다.
- 그대들이 타고난 본성을 가늠하시오.
짐승으로 살고자 태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덕(德)과 지(知)를 따르기 위함이라오.
마치 나 역시 생전 처음으로 이 구절을 들은 것 같았다. 날카로운 트럼펫 소리, 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잠시 나는 내가 누구인지, 어디 있는지 잊을 수 있었다. 피콜로가 다시 들려달라고 간청한다. 피콜로는 얼마나 착한 사람인지. 그는 지금 이렇게 하는 게 나를 위한 일임을 알고 있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p174)
그는 ‘익사한 자’가 아니라 ‘구조된 자’였다. 살아남을 수 있었던 요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대한 작가 자신의 대답은 이 책의 제목이 반문하고 있는 것에 대한 정직한 답변으로 들린다. 인간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암흑과 같은 시간에도 내 동료들과 나 자신에게서 사물이 아닌 인간의 모습을 보겠다는 의지, 그럼으로써 수용소에 널리 퍼져 많은 수인들을 정신적 조난자로 만들었던 굴욕과 부도덕에서 나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고집스럽게 지켜낸 것’ 이라고 스스로 해석했다. 하지만 그가 입은 트라우마는 40여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끝내 그를 자살로 몰고 갔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두 군데 오기와 한 군데 띄어쓰기 오류는 옥의 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