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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ㅣ 한국 현대사 산책 4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평점 :
김삼웅은 자유당 시절 3. 26일을 ‘어용곡필배들의 잔칫날’이라고 말했다. 3. 26일은 이승만의 생일이었다. 55년 80회 생일 기념식은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되었다. 시인 김광섭은 이승만 생일을 맞아 헌시를 바치며 이승만을 ‘세기의 태양’으로 극찬한다. 공보처장 갈홍기는 이승만을 “예수나 석가처럼 아무런 ‘나’도 없고 어떠한 ‘사’도 없이 민족의 자유와 독립,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개척하는 지공무사한 삶을 살아왔다”고 칭송했다. 박목월 작사, 김성태 작곡의 ‘이승만 대통령 탄신 80주년 기념’ 노래도 나왔다.
4.19때 국민들이 불을 지른 <서울신문>은 이승만을 ‘구국의 태양’, ‘인류의 등대’라고 말했다.
4월 18일부터 24일까지 인도네시아 반둥에선 ‘아시아 –아프리카회의’가 개최되었다. 23개 아시아 국가와 6개 아프리카 국가가 참여하였다. 반둥회의는 평화공존, 반식민지주의, 민족자결주의의 이념을 골자로 한다. 제국주의 미국은 반둥회의를 못마땅해 한다. 이승만은 주동자인 인도를 비난하면서 반둥회의를 공산주의자들의 모임이라 비난한다.
6월, 박인수 여대생 간음 사건이 터진다. 명문 E대생을 비롯한 70여 명의 여인과 간음을 했다는 박인수는 공무원 사칭과 혼인빙자간음 혐의로 피소되었다.
해병대 헌병 대위였던 박인수는 약혼녀가 자신을 배신하고 모 대령과 결혼해 버린데 충격을 받아, 불명예 제대 이후 여성 편력에 나선다. 재판 과정에서 박인수는 자신과 관계한 여성 중 처녀성을 지닌 여자는 단 한 명 밖에 없었다고 실토하자 언론은 일제히 “우리 여성들의 정조 관념에 일대 경악과 통탄을 금할 수 없는 중대한 현실 문제”라고 성토한다.
8월부터 중립국 감시위원단 축출 시위가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정부가 문제 삼은 건 체코와 폴란드 등 공산국가 대표였다. 이 축출 시위를 ‘적성감위 축출운동’으로 줄여 불렀다.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강제로 동원되었다. 백인빈의 <조국회상>은 <적성감위 축출운동>을 이렇게 회상한다.
“우리들은 구성지게 내리는 그 비를 맞으며 궐기대회니 총궐기대회니, 규탄대회니에 매일이다시피 끌려다녀야 했다. ...누가 만들어 나왔는지도 모르는 플래카드를 들고 서울운동장으로 달려가고, ....을지로나 종로를 통하여 시청 앞까지 나팔을 불고 구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하여야 했던 것이다. ....총 궐기대회에 나오지 않으면 배급을 주지 않는다거나, 이름을 적어간다는 소리에 질려서 서울운동장으로 끌려나가야 했던 것이다. ”
9월 10일 유엔대표부 상임이사 임병직이 대구를 방문하자 이를 환영하고자 중고등학생들을 뜨거운 햇볕아래 서너시간 동안 가두에 도열시키는 일이 벌어졌다. 보다 못한 대구 <매일 신문> 주필 최석채는 9월 13일자에 <학도를 정치 도구로 이용하자 말라>라는 제목의 사설을 썼다. 이 사설이 나가자 자유당 사주를 받은 폭력배 20명이 매일신문사를 습격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경북도경 사찰과장은 “백주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주필 최석채는 검거된다.
당시는 밀수가 성행했고 부정부패가 창궐하는 시기였다. 산의 나무를 도벌해 파는 걸 군대 용어로 ‘후생사업’이라 했다. 1955년은 ‘군대부정의 대표적인 해’로 불리운다. 고급 장교들은 고철 수집, 벌목 등 후생사업 뿐만 아니라 사병들의 몫을 횡령, 착복하기 일쑤였다.
근본적으로는 정치자금 조달 부정부패가 횡행했다. ‘원면 사건’이 대표적 예다. 미국으로부터 월동용 군 피복과 군용 이불을 만들기 위해 도입된 미화 약 50만 달러어치의 원면을 군용으로 쓰지 않고 상인들과 결탁, 부정 처분한 후, 국방부는 이 돈을 이기붕에게 헌납했다. 국방부와 육군이 결탁해 벌인일이었다. 이승만과 이기붕은 이 문제를 조사하던 국회 분과위원회에 압력을 가해 사건의 전모를 감추었다.
민국당 계열의 보수파는 9월 19일 민주당을 창당한다. 민주당은 이른바 ‘구파’와 ‘신파’로 구성된다. 한민당 – 민국당 계를 승계한 구파는 신익희, 조병옥, 김준연, 윤보선, 유진산 등으로 지주 집안 배경을 가졌거나 해외 유학파가 중심이었다. 김성수의 ‘보성, 동아 인맥’이 강세를 보였다.
신파는 장면, 오위영, 조재천, 엄상섭등을 핵심 인물로 한 관료, 법조인 출신이 주류였다.
민주당 참여를 거부당한 혁신계 야당 세력은 12월 22일 조봉암, 서상일, 이동화 등을 주축으로한 진보당 창당 준비위원회를 구성한다.
9월 한국에서 처음으로 국산 승용차 ‘시발’이 등장한다.
12월 10일 중앙극장에선 한국 최초의 여자 감독 박남옥의 <미망인>이 개봉한다. 55년엔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 이해연 노래의 <단장의 미아리 고개>가 히트한다.
전후로 ‘베이비 붐’세대가 태어난다. 55년~60년 기간 합계 출산율은 6.3명에 달했다.
53년 장준하에 의해 창간된 <사상계>는 55년 이후로 3만 부를 넘어서며 점점 영향력을 더해갔다. 55년 10월호에 쓰인 <권두언 : 소위 위기위식에 대하여>에선 당시 서구를 풍미하던 절망의 허무주의 사조 수입에 대해 비판했다.
“근래 구미의 일부 인사들이 위기와 절망이라는 ‘패자의 철학’을 고창함으로써 자유세계의 지성을 좀먹어 들어가는 것은 진실로 유감된 일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맹목적으로 이 ‘패자의 철학’을 받아들여서는 안 되겠습니다. 더구나 힘과 포부에 차야 할 젊은이들의 마음 속에 이러한 씨를 뿌린다든지, 젊은이들 자신이......제자리에 주저앉아 퇴영무위의 생활에 젖어버린다면 이보다 한심스런 일은 다시 없는 줄 압니다. 저들은 위기니 절망이니 하여도 그것은 오직 관념상 내지 이념상의 희롱에 불과합니다. ”
10월 박인환의 첫 단독 시집 <박인환 선시집>이 출간된다. 56년 이른 봄 서울 명동 ‘경상도집’에 문인 몇몇이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마침 그 자리에는 가수 나애심도 있었다. 일행이 나애심에게 노래를 청했으나 나애심은 노래를 하려 하지 않았따. 그러자 박인환이 즉석에서 시를 써내려갔다. 그래서 탄생된 것이 <세월이 가면>이라고.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서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박인환은 56년 3월 20일 3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월에 개봉한 이규환의 <춘향전>은 2개월 동안 12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기록을 세운다.
50년대 신흥종교가 창궐한다. 박태선의 전도관, 문선명의 통일교, 나운몽의 용문산 기도원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