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90. 최승자는 예의 <내 무덤 푸르고>의 <자본족>에서 “새들도 자본 자본 하며 울 날이 오리라”고 벌써 예언했다.
p192. 김정환은 마지막 시집의 뒤표지에 추천의 말으 쓰면서 이렇게 끝을 맺었다.
“......기어코 울음이 터지긴 전에, 승자야, 승자야, ‘오늘도 하늘 도서관에서 낡은 책 한 권 빌’리는 것은 얼마든지 좋겠으나 행여 ‘꿈에 꿈에 떠날 일이 있더란다 갓신 고쳐 매고 떠날 일이 있더란다’그딴 얘긴 다시 말고, ‘그리하여 오늘 오늘 오늘 내가 주고’ 그딴 생각 정말 말고 들어다오, ‘하룻밤 검은 밤’, ‘죽지 말라고’, ‘누가 자꾸 내 이름을 불러주’던 그 목소리를. 그 목소리가 바로 더 미친 바깥 시인들 목소리고 네 목소리 다 승자야, 네 이름이 승자 아니더냐.”
우리가 처음 만나던 그 날.
환희처럼 슬픔처럼
오래 큰물 내리던 그 날.
네가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네가 다시는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평생을 뒤척였다.
<기억의 집>, 기억하는가, 최승자
둥글게 내 볼을 파갔어, 박바가지였어
그래도 있잖아, 새색시였어
이쁘게 들여다보는 새벽이었어
떨려 온몸이 파들거렸지 뭐
하늘이 몇 번 우그러지고 펴지고 그랬어
<장마는 아이들을 눈뜨게 하고>, 박우물, 정화진
토막난 길들을 이으며 강은
탐욕스레 삶의 안팎으로 흘러간다
때로 사람들이 정처없이 발을 빠뜨리고 마는
저 강의 하구에
물컹거리는 무덤들의 바다가 있다
무수한 분묘이장공고를 펄럭이며
고요한 바다가
동백을 품은 채 누워 있다
낡은 옷의 사람들이 절름거리며
그들 몫의 생애를 건너가고 있을 때
<고요한 동백을 품은 바다가 있다>, 정화진
p203. 이제 작가가 되려고 제 펜의 날을 가는 사람도 제 욕망과 세상의 욕망이 출렁이는 강을 건너가려고 특별한 다짐을 할 것이다. 그의 탐색이 어디에 이를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스름저녁 국수당 돌각담의 스무나무 가지에 녀귀의 탱을 걸고 나물매 갖추어놓고
비난수를 하는 젊은 새악시들
-잘 먹고 가라 서리서리 물러가라 네 소원 풀었으니 다시 침노 말아라
벌개늪역에서 바리깨를 두드리는 쇠소리가 나면
누가 눈을 앓아서 부증이 나서 찰거머리를 부르는 것이다
마을에서는 피성한 눈숡에 저린 팔다리에 거머리를 붙인다
여우가 우는 밤이면
잠없는 노친네들은 일어나 팥을 까리며 방뇨를 한다
여우가 주둥이를 향하고 우는 집에서는 다음날 으레히
흉사가 있다는 것은 멀아마 무서운 말인가
- <정본 백석시집>, 오금덩어리라는 곳, 백석
섣달에 냅일날이 들어서 냅일날 밤에 눈이 오면 이 밤엔 쌔햐안
할미귀신의 눈귓신도 냅일 눈을 받노라 못 난다는 말을 든든히 여기며
엄매와 나는 앙궁 위에 떡돌 위애 곱새담 위에 함지에 버치며
대냥푼을 놓고 치성이나 드리듯이 정한 마음으로 냅일눈 약눈을 받는다
이 눈세기물을 냅일물이라고 제주병에 진상항아리에 채워두고는 해를 묵여가며
고뿔이 와도 배앓이를 해도 갑피기를 앓아도 먹을 물이다.
- <사슴>, 고야, 백석
산골에서는 집터를 츠고 달궤를 닦고
보름달 아래서 노루고기를 먹었다
- <사슴>, 노루, 백석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나라로
구름나라 지나선 어디로 가나
멀리서 반짝반짝 비치이는 건
샛별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반달>, 윤극영
엄마 하고 불렀더니
아빠 얼굴 떠오르고
아빠 하고 불렀더니
엄마가 웃으며 달려 오신다
왜 안 그래
산이 산이 높아도 물 속에 깃들고
물이 물이 깊어도 그 소리 산을 넘는데
바람은 울긋불긋 무지개 다리
옥이야 철이야 모두 오너라
줄 대어 그 위에서 발을 구르면
무겁다곤 안 할거야 떠받쳐 줄거야
좋아라 가락 높여 삼천리 꽃길을 가자
<꽃길>, 윤극영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벗이 갔단다
도래샘도 띶십도 버리고 강 건너로 쫓겨 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무지 쳐들어 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 골짝을 구름이 흘러
백 년이 몇 백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케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 줄게
울어 보렴 목 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오랑캐 꽃>, 이용악
아들이 나오는 올겨울엔 걸어서라두
청진으로 가리란다
높은 벽돌담 밑에 섰다가
세 해나 못 본 아들을 찾아오리란다
그 늙은인 암소 따라 조이밭 저쪽에 사라지고
어느 길손이 밥 지은 자췬지
끄슬은 돌 두어 개 시름겨웁다
<강가>, 이용악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이 깨어
그리운 곳 참아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그리움>, 이용악
p241 그러나 그(김춘수)가 정작 목표로 삼았던 것은 비유적 이미지도 서술적 이미지도 아닌 , 염불을 외우는 것과 같은, 이미지로부터 해방된 “탈이미지이자 초이미지”인 무의미의 시다. 이 이미지 넘어서기 속에 구원이 있다고, 말하자면 다른 세상이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한 시론에서 이렇게 썼다.
“이미지를 지워버릴 것, 이미지의 소멸, .....이미지와 이미지의 연결이 아니라, 한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를 뭉개버리는 일. 그러니까 한 이미지를 다른 이미지로 하여금 소멸해 가게 하는 동시에 그 스스로도 다음의 제3의 그것에 의하여 꺼져가야 한다. 그것의 되풀이는 리듬을 낳는다.”
남자의 여자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밤에 보는 오갈피나무,
오갈피나무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은
새가 되었다고 한다.
발바닥만 젖어 있었다고 한다.
<눈물>, 김춘수
한밤에 깨어보니
일만 개의 영산홍이 깨어 있다.
그들 중
일만 개는 피 흘리며
한 밤에 떠 있다.
밤은 갈라지고 혹은 찢어지고
또 다른 일만 개의 영산홍 위에 쓰러진다.
밤은 부러지고 탈장하고
별들은 죽어 있다.
별들은 무덤이지만
영산홍은 일만 개의 밤이다.
깨어 있는 것은 쓰러지고
피 흘리고
한밤에 떠 있다.
p249. 유몽인의 <어우야담>과 허균의 <성소부부고>가 모두 황진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은 작게 여길 일이 아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여,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황진이.
누가 곤륜산의 옥을 잘라
직녀의 빗을 만들어 주었던고
견우를 떠나보낸 뒤에
시름하며 푸른 허공에 던져두었네
영반월, 황진이
공주님 한창 당년 젊었을 때는
객기로 청혼이사 나도 했네만,
너무나 청빈한 선비였던 건
그적에나 이적에나 잘 아시면서
어쩌자고 가을되어 문을 삐걱 여시나?
수두룩한 자네 딸, 잘 여문 딸
상객이나 두루 한 번 가 보라시나?
건넛말 징검다리 밖에 없는 나더러
무얼 타고 신행길을 따라 가라나?
<석류개문>, 서정주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행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깃발, 유치환
p271. 산문은 이 세계를 쓸고 닦고 수선한다. 그렇게 이 세계를 모시고 저 세계로 간다. 그것은 시의 방법이 아니다. 시가 보기에 쓸고 닦아야 할 삶이 이 세상에는 없다. 시는 이를 갈고 이 세계를 깨뜨려 저 세계를 본다. 시가 아름답다는 것은 무정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