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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소설가 - 오르한 파묵의 하버드대 강연록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평점 :
보르헤스, 이탈로 칼비노, 움베르토 에코에 이어 2008년 하버드 대학의 ‘찰스 엘리엇 노턴’ 강좌에는 오르한 파묵이 초청받았다. 이 책은 6차례의 파묵의 강연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1. 소설을 읽을 때 우리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소설을 읽는 것은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소설을 쓰거나 읽을 때 우리는 소설의 인위적인 면을 인식하지 못하거나(naive), 정반대로 인식하기도 한다(sentimentalisch)
파묵은 실러의 <소박한 문학과 성찰적인 문학에서>에서 이러한 개념을 빌려온다. 소박한 시인은 말이, 단어가, 시가 전체 풍경을 규명하리라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반면 성찰적인 시인은 단어들이 실재를 규명할지, 실재에 도달할지, 말들이 그가 원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지 등등의 문제로 불안해한다. 소박한 시인은 ‘우뇌적 시인’으로 성찰적인 시인은 ‘좌뇌적 시인’이라 불러도 될까. 파묵에 의하면 괴테는 소박한 작가이고 실러는 성찰적 작가다.
파묵은 우리가 소설을 읽을 때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작업 가운데 중요한 9가지 사항을 언급하는데 그 중에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소설의 ‘중심부’가 아닐까.
포스터는 <소설의 이해>에서 소설의 가치를 결정하는 마지막 기준은 우리가 그것에 느끼는 애착이라고 말한다. 파묵에게 있어 소설의 가치는 우리로 하여금 소박하게 세계에 투사할 수 있는 중심부를 찾아 나서게 하는 힘에 있다. 이러한 파묵의 의견에 가장 적합한 소설의 형태는 ‘교양소설’이다. 플로베르의 <감정 교육>, 토마스 만의 <마의 산> 등등.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는 소설의 중심부가 주는 기본적인 지식, 그러니까 세계가 어떤 곳이고 삶이 어떤 것이라는 지식을, 단지 중심부뿐만 아니라, 소설의 모든 곳에서 보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좋은 소설이란 모든 문장이 우리에게 진정 위대한 지식을, 이 세상에서 존재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이며 감각의 본질이란 어떤 것인지를 느끼게 해 주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여행이, 그러니까 도시에서, 거리에서, 집에서, 방에서 자연에서 지나가는 우리의 인생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불확실한, 감춰진 의미를 찾는 과정이라는 것을 소설에서 배웠습니다.
2. 파묵씨 당신은 이러한 것들을 경험했나요?
파묵은 두 가지 부류의 독자를 경계하라고 말한다. 우선 전적으로 소박한 독자들이다. 옆에서 아무리 얘기해도 이들은 텍스트를 작가의 자서전 혹은 경험담이라고만 생각한다. 두 번째로 전적으로 성찰적인 독자들이 있다. 이들은 모든 텍스트가 철저한 계산 아래 만들어진 허구라고 믿는다. 분명 진실은 이 두 부류 사이에 있을 것이다.
3. 소설의 캐릭터, 플롯, 시간
소설예술의 본질적인 목표가 삶을 정확하게 그려 내는 것이라고 믿는 파묵은 ‘캐릭터’는 없다고 주장한다.
소설 예술에서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소설 주인공들의 개성이나 캐릭터가 아니라, 소설 속 세계가 그들의 눈에 어떻게 보이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이해하고 도덕적 판단을 내리려면, 우선 세계가 그 사람의 관점에서 어떻게 보이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지식뿐만 아니라 상상력도 필요합니다. 소설가로서 나의 주된 임무는 모든 등장인물과 되도록 일일이 동일화되고, 그들 눈에 보이는 것이 내 소설의 세계라는 것을 절대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의 캐릭터가 아니라 그가 세계의 여러 형태에 보이는 반응입니다. 세계의 모든 색깔, 모든 사건, 모든 과일과 꽃, 그러니까 감각이 가져다준 모든 것에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가 중요합니다.
파묵에 의하면 플롯이란 그것을 서사 구조, 사건의 연속, 이야기라고 부르던 우리가 설명하고 서술하고자 하는 지점들을 연결하는 하나의 선일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나뉘거나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원자들이 있듯, 나뉠 수 없는 ‘순간’들이 있고, 이 수많은 순간을 연결한 일직선을 ‘시간’이라고 한다. 플롯 역시 크고 작은 나뉠 수 없는 단위를 합친 선이다.
소설의 시간은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달리 객관적이지도 않고 일직선도 아니다.
소설을 쓸 때 주인공의 캐릭터를 창조하고 구성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고,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현실 삶의 세부사항들을 사건의 구조에 결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에게 소설 쓰기는, 풍경 속에서(세계에서) 소설 캐릭터들의 심리 상태, 감정, 생각 등을 포착해 내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내가 앞서 언급한 소설을 구성하는 그 수천 개의 작은 점들을 일직선이 아니라, 지그재그를 그리며 연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항상 느낍니다.
4. 단어, 그림, 사물
파묵에 따르면 ‘단어적’인 작가들이 있고 ‘시각적’인 작가들이 있다. 톨스토이의 세계가 감각적으로 배치된 사물들로 들끓고 있다면 도스토예프스키의 방은 텅 비어있다. 호메로스가 시각적이라면 피르다우시의 <샤나메>는 단어적이다. 파묵에 따르면 소설은 기본적으로 시각적 문학이다. 소설을 쓰기 전에 그림을 그렸던 파묵으로서는 당연한 귀결인 듯 싶다. 파묵에게 소설을 쓴다는 것은 단어로 그림을 그리는 일이다.
플로베르가 자신이 글을 쓸 때 모색했다고 말했던 ‘가장 적절한 단어(le mot juste)’는 내가 상상했던 이미지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을 단어입니다. 소설가는 상상했던 것을 가장 잘 표현할 단어를 찾는 데 그치지 않고, 가장 잘 표현할 수 있을 것을 상상하는 법도 배웁니다. 소설가는 눈앞에 떠올린 이미지가 오로지 단어로 옮겨졌을 때만 의미가 있으며, 단어로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상상하는 법을 배울수록 머릿속에 있는 시각적, 단어적 사고의 중심부들이 서로 가까워진다는 것을 느낍니다.
T.S 앨리엇은 평론을 통해 처음으로 ‘객관적 상관물’이라는 표현을 썼다. 객관적 상관물이란 예술가가 어떤 예술 또는 문학 작품에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제시하는, 그 감정과 객관적으로 연관되는 ‘일련의 사물, 어떤 정황, 사건의 연쇄’를 뜻한다. 왜 소설 속에서 사물들은 중요한가.
프랑스 소설을 한번 보도록 합시다. 발자크 작품에서 주인공의 사회적 위치를 드러내 보인 물건은, 플로베르 작품에 와서는 개인의 취향과 캐릭터를 제시하며, 졸라에 이르러서는 저자의 객관성을 보여 주기 위한 도구로 쓰입니다. 같은 물건들이 프루스트의 작품에서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힘으로, 사르트르의 작품에서는 존재의 불안을 나타내는 징후로, 로브그리예 작품에서는 인간과 단절된 비밀스러운 독립체로 변합니다. 조르주 페렉의 작품에서 물건들은 리스트에서 상표와 함께 열거될 경우 시적인 면이 보일 수 있는 비밀스러운 것들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물들은 소설 속 수없이 많은 짧은 순간들의 없어서는 안 될 일부일 뿐만 아니라, 이 순간들의 상징이자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5. 박물관과 소설
알려져있다시피 파묵은 <순수박물관>이란 소설을 썼다. 그는 박물관과 소설이라는 주제로 세 가지를 언급하는데 세 가지 주제는 서로 맞물려 있고, 그 공통점은 자긍심이다.
1. 자존감.
박물관이 사물을 보존하는 것처럼, 소설은 인간의 평범한 생각과 이 주제에서 저 주제로 건너뛰곤 하는 이성의 불연속성을 구어로 표현함으로써 언어의 묘미와 색과 냄새를 보존한다. 소설은 단어, 표현, 관용구만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일상대화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도 기록한다. 유르스나르의 주장에 따르면, 평범한 일상 대화는 소설 이전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박물관적인 소설이 있다면 그것은 생각을 일깨우기 보다는 잊혀지는 것에 저항하는 중점을 둔다. 박물관적인 소설은 역사가 단지 공허하고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서 무엇인가는 간직될 거라는 느낌과 자긍심을 지닌다.
2. 차별화되는 느낌
우리가 소설을 읽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들과의 차별성을 드러내고 싶기 때문이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독한다면 얼마나 차별스러운가. 박물관의 관람객 역시 비슷한 심리를 공유한다.
3. 정치
파묵에 따르면 박물관과 소설은 누군가를 대변했다가 자칫 정치적 책임을 지게 될 우려가 있다는 점에서 서로 닮았다. 아마도 서구 국가의 작가나 독자들은 언뜻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한밤의 아이들>을 쓰고 암살 명령이 떨어진 살만 루시디를 떠올리면 금세 이해가 될 것이다.
6. 중심부
‘중심부’의 의미가 모호하다면 보르헤스가 말한 <모비딕>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처음에 독자는 소설의 주제가 고래잡이들의 고단한 삶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중에는 “고래를 추적해 파멸시키려는 에이햅 선장의 광기가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이야기는 방대해지면서 어떤 우주의 차원에 이르게 된다.”
도스또예프스키는 <악령>을 집필한 1년 후 어떤 영감에 의해 처음부터 다시 쓰기로 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도스또예프스키는 240페이지 중에 고작 40페이지만을 다시 썼을 뿐이었다. 바뀐 것은 중심부만이었다. 한편으론 중심부가 너무 명확히 드러나면 작품이 지루해지기 십상이다.
나에게 소설의 중심부는 어떤 종국에 우리에게 삶에 대해 가르쳐 주고, 느끼게 해주고, 암시해 주고, 보여 주고, 경험하게 한 심오한 어떤 것입니다. 소설가가 삶에 관한 지식이나 경험들을 소설 밖에서 단어들로 단순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면, 굳이 소설을 쓰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도 소설을 읽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순문학 소설에서 중심부가 무엇인지 쉽게 정의내릴 수 없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마치 삶이 그러하듯이 순문학 소설 역시 쉽게 의미를 찾을 수 없고, 다른 것으로 쉽게 환원될 수 없음을 상기해야만 합니다.
현대의 세속 독자들은 이런 노력이 부질없음을 내심 알고 있으면서도 읽고 있는 소설의 중심부를 찾으며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자신에게 묻지 않고는 견디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찾는 중심부는 바로 인생의 중심부이자 세상의 중심부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소설 읽기란 세상에 중심부가 있다는 것을 믿는 노력입니다. 위대한 순문학 소설들, 예를 들면 <안나 카레니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의 산>, <파도>같은 책들은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작품입니다. 세상에 중심부와 의미가 있다는 희망과 생생한 환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상은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유지되며 우리에게 행복감을 안겨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