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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힘 - 절망의 시대, 시는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가
서경식 지음, 서은혜 옮김 / 현암사 / 2015년 7월
평점 :
“I am a Japanese”
일본의 어느 중학교 교실, 모든 학생들이 선생님의 ‘아이엠어 재피니즈’를 따라 할 때
유독 한 소년만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뭐시여, 왜 안 따라 혀? 개기는 거여, 시방?”
선생님이 소년을 다그치자 소년은 우물우물 말했다.
“저는..... 조선인....인데요.”
안아주고 등을 토닥이고 싶었던 이 소년은 어느덧 예순을 훌쩍 넘겼으니
<소년의 눈물>의 저자 서경식 선생님이다.
(위의 상황은 약간의 윤색을 했으니 너그러이 이해해주세요 ^^)
<시의 힘>은 저자의 강연과 에세이들 중에 ‘문학’과 관련된 글들을 추려 엮은 책이다. 책을 통해 저자는 오에 겐자부로의 <읽는 인간>처럼 자신이 어떤 책을 읽어왔고, 어떤 작가들에게 영향을 받았는지를 회고한다. 오에 문학 출발점이 <허클베리 핀>이었다면 저자의 경우엔 라이너 마리아 릴케였다.
이것이 나의 투쟁이다.
천만 줄기 뿌리를 뻗어, 저 멀리 인생 밖으로 성장해가는 것이.
저 멀리, 세상 밖으로.
이외에도 프란츠 파농, 폴 니장, 에드워드 사이드, 루쉰, 나카노 시게하루, 프리모 레비 등등
고등학교 축제 때 자신의 시집을 직접 팔았을 만큼 시에 열정을 보였던 저자는 청년시절 주로 한국 시인들의 시에 영향을 받는다. 김지하, 신동엽, 신경림, 양성우, 고은, 한용운, 윤동주, 이상화, 김수영, 박노해, 정해성 등등. 특히나 그는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을 애타게 읽었다.
(어린 시절 그에게 영웅 같았던 김지하가 도살자의 딸을 지지하는 걸 보고 그 역시 꽤나 충격을 받았다)
한국에 독립투사들이 있었다면 일본에도 침략 전쟁을 반대한 열사들이 있었다. 고바야시 다키지. 일본의 대표적인 프롤레타리아 작가로 일본 경찰의 고문에 의해 죽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한 대표적 인물이 중국의 국민작가인 루쉰이다.
30년 동안 나는 많은 젊은이들의 피를 목도했다. 그 피들은 켜켜이 쌓여 숨도 못 쉴 만큼 나를 매장했다. 나는 그저 붓과 먹만으로 몇 줄의 글을 쓸 수 있을 뿐이며 그것은 진흙 속에 조그마한 구멍을 내고 목숨을 부지하고자 거기서 계속 헐떡이려고 하는 바와 같다. 어떤 세상인가? 밤은 길고, 길은 멀다. 차라리 망각이 나을지도 모른다. 잊어버리고 말하지 않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령 내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반드시 그들을 기억하여 다시 그들을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임을 나는 안다......
그리고 나카노 시게하루는 루쉰의 글에 감동을 받는다.
생각해보니 희망이란 본시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거였다. 이는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시 땅위엔 길이 없다. 걷는 이가 많아지면 거기가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나카노 시게하루는 루쉰의 정치와 문학의 결합을
“서정시 형태의 정치적 태도 결정”이라 명명했다.
나도 좋은 사람이 되어야지, 어떤 일이 있어도 올바른 인간이 되어야지, 하는 것 이상으로 (중략) 일신의 이해, 이기라는 것을 떨쳐버리고, 압박이나 곤란, 음모가들의 간계를 만나더라도 그것을 견뎌내며 어디까지나 나아가자, 고립되고 포위당하더라도 싸우자, 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 그곳으로 간다.
<시의 힘>이란 제목은 나카노 시게하루로부터 연유한 것이다.
생각하면 이것이 시의 힘이다. 말하자면 승산 유무를 넘어선 곳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다.
그러한 시는 차곡차곡 겹쳐 쌓인 패배의 역사 속에서 태어나서 끊임없이 패자에게 힘을 준다. 승산 유무로 따지자면 소수자는 언제나 패한다. 효율성이니 유효성이라는 것으로는 자본에 진다. 기술이 없는 인간은 기술이 있는 인간에게 진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원리로서 인간은 이러해야 한다거나, 이럴 수가 있다거나, 이렇게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며, 그것이 사람을 움직인다. 그것이 시의 작용이다.
프리모 레비의 시를 읽은 저자는 ‘이것은 후쿠시마를 노래한 시가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프리모 레비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을 읽고 내가 ‘이것은 세월호가 아닌가’하고 생각했던 것처럼.
저자는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를 쓸 만큼 레비의 삶과 제노사이드 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책에 실린 일본의 레비 연구 일인자인 다케야마 히로히데의 말에 무릎을 쳤다.
프리모 레비와 프랑클은 같은 강제수용소에 있었지만 문제의식은 전혀 달랐다. 프랑클은 강제수용소에서의 인간의 정신적 변화에 흥미를 느꼈다. 하지만 그는 강제노동 끝에 쇠약해져서 죽음에 이르는 일반적 억류자, 즉 레비가 말하는 ‘익사하는 자’의 변화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어떻게 강제수용소에서 살아가는가, 극한의 생존 상황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정신을 고양시킬 수 있는가에 주안점을 둔다. 그는 ‘고통받는 것의 의미’에 관해 생각한다.
‘가혹하기 짝이 없는 외적 조건이 인간의 내적 성장을 부추기는 일이 있다’ 그리고 ‘외면적으로는 파탄되고, 죽음마저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있어서조차, 인간으로서의 숭고함에 이르는’ 것과 통한다. (중략) 여기서 프랑클은, 아우슈비츠를 만들어낸 이유를 묻기보다는, 그런 곳에서의 극한상황이 어떻게 인간의 정신을 고양하는가 하는 점을 중시한다. 그리고 ‘희생’이 되는 것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고 한다. 그는 다른 곳에서는 ‘순교자’라는 단어까지 사용한다.
프랑클은 극한 상황을 어떻게 하면 극복할 것인가에 관심을 두었던 반면 레비는 내가 왜 이런 극한 상황에 처해있는지 그 시스템 자체를 문제시 삼았다. 과연 누가 옳았던 것일까?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장 아메리, 브루노 베텔하임, 프리모 레비, 말년엔 결국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 온전히 살아남은 이는 프랑클밖에 없다. 그렇다면 과연 프랑클이 옳았던 것일까.
프랑클은 ‘감동적’으로 소비되었으나, 저자의 말처럼 원인을 규명하고 재발을 막는 데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프랑클의 ‘순교자’라는 표현에 베텔하임은 이렇게 말했다.
나치 희생자들을 ‘순교자’라고 부름으로써, 우리는 그들의 운명을 속이는 것이다. (중략) 그들이 자신의 신앙을 버리더라도, 단 한 사람도 죽음을 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기독교로 개종한 자도 무신론자들이나 깊은 종교심을 지닌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가스실로 보내졌다.
그리하는 것은 그들의 것일 수 있는 마지막 인식을 그들에게서 빼앗는 것이며, 그들에게 부여할 수 있는 마지막 존엄을 부정하는 것이고, 그들의 죽음이 무엇이었는지 직시하며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는 일이다. 우리는 이러한 왜곡이 우리에게 가져다줄지도 모르는 하찮은 심리적 해방감을 위해 그들의 죽음을 미화해서는 안 된다.
베텔하임의 지적에 따르면, 프랑클의 저서는 그 처절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고통에는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는 ‘감동적’결말에 의해 오히려 독자에게 거짓 위로와 해방감을 주고, 방어적 부인과 억압에 도움을 준다고 할 수 있다.
빅터 프랑클의 <죽음의 수용소를 찾아서>는 분명 감동적인 책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을 소비함으로써 우리가 거짓 위로를 받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성찰해 봐야 하지 않을까.
‘국가주의’에 물든 한국인들은 대개 국민과 국가를 동일시하는 오류를 저지른다. 특히나 꾸준한 독서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잘못된 범주화 오류’를 저지르기 쉽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국민은 하나의 가족’이라거나 ‘피를 나눈 우리’와 같은 식으로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가족관계나 혈연관계에 비유하는 것은, 구성원 각자의 자발적인 참가를 전제로 해야 할 사회 조직을 마치 ‘운명 공동체’인 양 묘사하여 구성원들을 권력관계로 묶어둘 위험을 내포한다. 그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는 가족이라는 것이 각 개인에 의해 구성되는 사회적 단위라는 사실을 새삼 인식해야만 한다.
일찍이 니체는 ‘국가는 훔친 이빨로 물어뜯는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국가는 나를 대표하지 않는다. 루쉰이 자신들을 침략한 일본의 국민들에게 ‘친구’라는 표현을 썼듯 우리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친구’로 받아들여야 한다. 일본인이나 중국인이라고 해서 다르겠는가. 단, 국가의 수장들과 기득권자들의 악랄하고 비열한 행태에 침묵해서도 안 될 일이다.
설령 그것이 자신의 모국일지언정.
얼마 전 우리 박근혜 각하께서 노동자들을 자르기 쉽게 해달라고 서명을 받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저건 박정희 유신시절, 장준하가 주도한 유신 철폐 백만인 서명운동을 보고 따라 한 것일까?’
각하를 따라 대기업 임원들도 길거리로 나와 서명을 받았다지.
시인 정희성의 시처럼 이제 가진 자들이 저항을 하고 있다니!!
저자의 마지막 말에 울컥하였다.
‘시의 힘’이란 ‘시적 상상력’을 가리킨다. 루쉰에게 있어 “서정시 형태의 정치적 태도 결정(나카노 시게하루)” 역시 그러한 상상력이 가져온 것이다.
‘문학’이 저항의 무기로서 유효한지 의심스럽다. 내가 쓰는 것을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지는 더욱 의심스럽다. 그럼에도 이런 책을 내려는 이유는 본문에서 루쉰의 말을 빌렸듯, “걸어가면 길이 되기” 때문이다. 아직 걸을 수 있는 동안은 걷는 수밖에.
나 역시, 다짐해본다.
걸을 수 있는 동안 걸어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