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옆에 있는 사람
이병률 지음 / 달 / 201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세상은 정말 불공평하다여행하면서도 먹고 살뿐만 아니라 섬세한 시인이고

베스트셀러 작가에 심지어 잘 생기기까지.

게다가 착하기까지!!

(사진을 못 찍는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구도가 영..... )


재수 없어서 책을 대충 흘겨봤다.


뭐 자기한테만 영화 같은 일이 일어나!’


의심을 가득 담아 시비 걸 대목을 찾아 문장을 꼬치꼬치 쫓아갔다.

지하철 역사에 책을 몰래 갖다 두는 걸 보고 살짝 미안해졌는데

시인이 한 번 스친 일본 사세보에서 태어난 노인 장례식에 참석한 일화를 읽다가 포기했다.

미워하는 것도 쉽지가 않다.


어느 책이었더라.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화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요

이 책은 시인이 여행 중에 만난 내 옆에 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앞이건 옆이건 뒤건 중요하지 않다.

잠깐.... ‘지금 내 뒤에 있는 사람이요는 좀 이상할라나)


여행조차 허락되지 않는 현실

잠깐 동안의 꿈에 젖는다.



나의 계절은 아직 겨울이어서.


밑줄 그은 문장 


p. 인생에 겉돌지 않겠다는 다짐은 눈빛을 살아나게 한다.


무구한 눈빛은 사람을 사로잡는다그 눈빛과 마주하는 순간 살고 싶어서 일순간 발바닥에 힘이 들어가기도 한다그 눈빛이 내가 잃은 지 오래된 것이기도 하고 그 눈빛으로 내가 씻겨지는 기분마저 들기도 해서 마치 좋은 바람 앞에 서 있는 것만 같은 것이다.

커피를 맛있게 내리는 사람은 커피콩을 갈고 뜨거운 물로 커피를 내리는 동안 그 옆을 떠나지 않는다좋은 눈빛으로 주시하고 집중한다그런 사람이 내주는 커피는 이미 마시기도 전에 맛있다는 생각을 머릿속 가득 채워준다어떻게 보면 그 좋은 눈빛이 커피에 닿아서일 거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우리는.


p. 다시는 이런 시간이 오지 않을 것 같아서요.


시 한 편을 낭송하는 시간이었다한 사람이 시 낭송을 마치고 울컥하였다

나중에 왜 울컥했어요라고 물으니 그가 말했다다시는 이런 시간이 오지 않을 것 같아서요.


p. 이 말들은 누구의 가슴에서 시작됐을까


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단풍 이야기다단풍이 말이다계속해서 남쪽으로 남쪽으로 물들어가는 속도가 사람이 걷는 속도하고 똑같단다낮밤으로 사람이 걸어 도착하는 속도와 단풍이 남쪽으로 물들어 내려가는 속도가 일치한단다.


어떻고 어떤 계산법으로 헤아리는 수도 있다는데 도대체 이런 말은 누가 낳아가지고 이 가을집 바깥으로 나올 때마다 문득문득 나뭇가지들을 올려보게 한단 말인가말과 말 사이에 호흡이 배어 있는 것 같은 이 말은이 근거는 누구의 가슴에서 시작됐을까.


또하나의 믿을 수 없는 것은 식물의 이름에 관련되어 있다백리향이라는 풀의 이름에도 그만한 쉼표와 호흡이 장치되어 있다백리향은 낮게 자라는 나무의 일종으로 주로 높은 산에서 볼 수 있는데이 식물의 향은 가을 풀 향 중에서 단연 으뜸이다단지 식물 냄새만이 아닌 동물적인 냄새까지도 포함하고 있는데다 진하고 또 강렬하여 늦은 밤 책상에 앉은 사람마음이 허전한 사람,종일토록 기력이 없는 사람사는 것이 지옥 같아서 자꾸만 먼 데만 보는 사람을 자극하는 데 직방이다백리향도 발 끝에 붙은 향기가 백 리를 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p. 만약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거든.


만약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거든.

많이 먹지 말고 속을 조금 비워두라.

잠깐의 창백한 시간을 두라.

혼자 있고 싶었던 때가 있었음을 분명히 기억하라.

어쩌면 그 사람이 누군가를 마음에 둘 수도 있음을,

그리고 둘 가운데 한 사람이

사랑의 이사를 떠나갈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라.

다 말하지 말고 비밀 하나쯤은 남겨 간직하라.

그가 없는 빈집 앞을 서성거려보라.

우리의 만남을 생의 몇 번 안 되는 짧은 면회라고 생각하라.

그 사람으로 채워진 행복을

다시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함으로써 되갚으라.

외로움은 무게지만 사랑은 부피라는 진실 앞에서 실험을 완성하라.

이 사람이 아니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예감과 함께 맡아지는

운명의 냄새를 모른 체하지 마라.

함께 마시는 커피와 함께 먹는 케이크가

이 사람과 함께가 아니라면 이런 맛이 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라.

만날 때마다 선물 상자를 열 듯 그 사람을 만나라.

만약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거든.


p. 봄이 왔는데 당신이 가네요


동백이 피었는데요

봄이 가네요

내 마음이 피었는데

조금만 머물다 봄이 가려고 하네요

나에게도 글씨가 찾아와서

이제는 편지를 쓸 수 있게 됐는데

봄이 왔는데요

당신이 가네요


(글씨를 배운지 얼마 안 되신 할머니의 시가 이 정도라니,

왠지 눈물이 난다.)


비록 증명사진 크기이긴 했지만 서로의 사진이 붙은 수험표를 편지로 교환해 나눠 갖기도 했던 그 어느 봄날의 기운이 묵직하게 내 가슴 한쪽께에 맺히는 것 같았다한번은 내가 나가지 않았고 또 한번은 그녀가 나오지 않아 싱겁고 싱겁게 어긋났던 두 번의 기회를 떠올렸다.


p. 아무도 모르는 사이거의 모든 일들이.


시간의 시침과 분침의 끝은 지금도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우리를 겨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지켜주기 위해서입니다.


p. 이토록 서서히 퍼지는 광채


좋아하는 술 가운데 마음을 전한다라는 뜻을 가진 전심이라는 술이 있다이 술은 어떤 맛이 나는가 하면 일단 첫맛에서 이러면 안 되지하는 맛이 난다.


p. 사랑은 어디로부터 왔을까.


점선처럼 만나 실선처럼 하루를 보냈습니다.

엄마는 하지 못했지만 너는 사랑을 하라고어떻게든 사랑이 나를 밟고 지나가지 않으면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게 되며 모르게 될 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그 어떤 엉킨 선도 풀어나갈 힘이 없는거라고.


p. 잊지 못한다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길고 먼 여행이 끝나고 나는 정신을 차리지도 못했으면서 정신을 차린 사람처럼 자를 사서 모으기 시작했네나라는 사람은 30센티에 불과하다고 평소에 생각했었으니까. 30센티 자 막대기를 볼 때마다 내 한도와 내 한계를 그것에 걸어보면 정신이 들까 하는 거였어자에는 1밀리미터의 눈금만 표시되어 있지사람이 눈으로 쉽게 볼 수 있는 최소한의 거리일 걸세한데 자를 들여다보면 볼수록 나는 30센티는커녕 그 1밀리미터의 간격을 표시하는 두 칸의 작은 눈금 사이에 웅크린 채 살고 있었네. 30센티 자 안의300개의 눈금그 사이 고작 두 칸만이 인생의 전부이자 내가 사랑한 전부라고 믿었던 거였네.


1밀리미터에서 시작되어 백 미터를 넘어 몇 킬로를 넘어 몇만 킬로까지 이어지는 눈금의 행진들그 눈금들이 촘촘히 만들어내는 마음 안의 파도들파도를 멈추게 할 힘이 있는가그럴 수 없어서 사랑이지 않겠는가.


p. 지금 어느 계절을 살고 있습니까.


대뜸 어린아이가 그리움이 뭐냐고 나에게 물은 적 있었다그때 나는 그리움은 눈 같은 것이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이해되었다는 듯 확신에 찬 얼굴로 그럼그리움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예요?”라고 돌아온 아이의 질문에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으니 나는 쓸데없는 고집이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사람에게도 저마다 계절이 도착하고 계절이 떠나기도 한다나에게는 가을이 왔는데 당신은 봄을 벗어나는 중일 수도 있다나는 이제 사랑이 시작됐는데 당신이 이미 사랑을 끝내버린 것처럼.


그러니 당신은 지금 어떤 계절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지금 어떤 계절을 어떻게 살고 있다고 술술 답하는 상태에 있으면 좋겠다적어도 계절은 지금 우리가 어디에 와 있는지를어디를 살고 있는지를 조금 많이 알게 해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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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16-02-15 08: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비 붙는 볼거리를 놓쳐서 아쉽지만 (농담) 포기가 참 아름다웁군요~ ^^

시이소오 2016-02-15 08:33   좋아요 2 | URL
애초에 아름다운 사람한테 시비걸어 자빠뜨리겠다는 심보가 고약했던거죠 ㅋ ^^

2016-02-15 09: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2-15 09:13   좋아요 0 | URL
글도 잘 쓰더라구요. ^^

깊이에의강요 2016-02-15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위의 어떤이가 아름답게 늙어야지 그래야지...
입에 달고 살아서
그이 몰래 입을 삐죽거렸던 적이 있습니다.
젊은 너도 아름답지 않거늘 늙어서는 말해 무엇하겠냐고...
이병률은 제가 알고 있는 몇 안되는 아름답게 늙어 가고 있는 사람 같습니다.
젊어서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시이소오 2016-02-15 10:32   좋아요 0 | URL
아름다운 여성 독자분이 이러시면 저는 이병률이 도로 미워집니다. ^^ ;;

깊이에의강요 2016-02-15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투는 나의 힘 ㅎㅎ^^

시이소오 2016-02-15 14:14   좋아요 1 | URL
이 경우엔 힘이 돼지 않아요. 질투와 질타만 남아요
`모래야, 나는 얼만큼 작은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