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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스 캐롤 오츠 : 작가의 신념 - 삶, 기술, 예술 ㅣ 위대한 생각 시리즈 8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송경아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전 세계적인 인지도에 비해 유독 한국에서 외면 당하는 작가들이 있다. 플래너리 오코너나 조이스 캐롤 오츠가 대표적이지 않을까. 그러고보면 한국에선 단편 작가들의 작품들은 번역도 제대로 되지 않을뿐더러 읽히지도 않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카버가 알려진 것도 거의 최근의 일이다. 왜 그런걸까?
이 책은 유년시절에 대한 기억, 글쓰기, 그리고 작가로서의 삶 등에 대한 JCO의 에세이다. <작가란 무엇인가2> 파리 리뷰 인터뷰를 보아도 그녀의 집필량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하다.(그녀의 얼굴만큼이나) 백 권의 책이라니! 그녀가 삼십년 정도만 더 산다면 어쩌면 발자크를 능가할 지도 모르겠다. 한 작품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는 곧이어 다른 작품을 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당신의 가슴속에 있는 것을 써라.
당신의 가슴 속에 있는 것을 써라. 결코 당신의 주제와 그에 대한 열정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당신의 금지된 열정은 글쓰기의 연료와 같다. 일생에 걸쳐 오래 전에 죽은 아버지에 대해 분노했던 위대한 극작가 유진 오닐처럼, 일생에 걸쳐 어머니에 대해 분노했던 위대한 소설가 어네스트 헤밍웨이처럼, 일생에 걸쳐 자살의 황홀경으로 유혹하는 매혹적인 ‘죽음의 천사’와 싸웠던 실비아 플라스나 앤 섹스톤처럼 말이다. 도스또예프스키의 난폭한 자기 파괴 본능, 플래너리 오코너의 ‘불신자들’에 대한 사디즘적 정벌의 본능 또한 그러했다. 발광에 대한 에드가 앨런 포의 공포,.....당신의 묻혀 있는 자아 또는 자아들과의 투쟁이 예술을 낳는다.
기죽지 마라! 곁눈질을 하거나 당신을 다른 동료들과 비교하지 마라! 글쓰기는 경주가 아니다. 아무도 진짜로 이기지 못한다. 만족은 노력에서 나오고, 그 결과 보상이 따른다 해도 그런 보상은 아주 드물게 오는 법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당신 가슴 속에 있는 것을 써라.
전적으로 당신이 속한 세대를 위해 써라. 그렇지 않다 해도 당신이 살아가는 시대를 위해 써라.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후세를 위해 쓸 수는 없다. 과거의 세상을 위해 쓸 필요도 없다.
세계가 당신을 정당하게 대우하거나 자비롭게 다루어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라. 인생은 롤러코스터처럼 정면충돌이다. 예술은 냉정하게 선택되고, 오직 소급적으로만 창조될 수 있다. 그러나 글을 쓰기 위해 인생을 살지 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행로를 걸으면서 몇 번이나 예술 작품과 사랑에 빠진다. 다른 사람의 예술에 대한 존경과 숭배에 열중해 버려라. 드가가 마네를 얼마나 숭배했던가! 멜빌이 호손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시인들이 월트 휘트먼을 얼마나 왕처럼 모셨던가! 만약 당신을 흥분시키거나, 인상적이거나, 긴장하게 하는 목소리나 통찰력을 발견한다면 그 안에 빠져 버려라.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배울 것이다.
나는 지금껏 루이스 캐럴, 에밀리 브론테, 카프카, 포, 멜빌, 에밀리 디킨슨, 윌리엄 포크너, 샬롯 브론테,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다양한 작가들과 사랑에 빠졌고, 그 사랑으로부터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했다.
책장위의 언어는 얼음처럼 차가운 매체다. 공연자나 육상 선수들과는 달리, 우리는 원하는 만큼 다시 상상하고 교정하고 완전히 퇴고해야 한다. 우리의 작품이 돌에 새겨지는 것처럼 돌이킬 수 없이 인쇄되기 전에는 원고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해야 한다. 초고는 아마 잘 안 써지고 사람을 피곤하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음 원고, 그 다음 원고들은 하늘을 날아오르는 듯이 상쾌할 것이다.
마지막 문장이 씌어질 때까지 첫 문장은 씌어질 수 없다는 믿음만 가져라. 마지막 문장을 쓰는 오직 그 순간에 이르러서만 당신은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소설이라는 고통의 치유법은 오직 소설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당신의 가슴 속에 있는 것을 써라.
달리기와 글쓰기.
내가 소설을 쓰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달리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일까. 워즈워드, 콜리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디킨스, 하루키, 그리고 조이스 캐럴 오츠 등등은 글쓰기에서 달리기 혹은 산책의 중요성을 몸소 보여준 이들이다.
이야기들은 정밀한 구현체를 요구하는 사령들처럼 나타난다. 관념적으로 말하면, 달리기는 내가 쓰는 것을 영화나 꿈처럼 그려볼수 있는 확장된 의식을 갖게 해주는 것 같다. 나는 타이프라이터 앞에서 이야기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경험한 것을 회상한다. 나는 워드프로세서를 쓰지 않고 상당한 분량을 손으로 쓴다.
다시 말하지만 ‘작가들은 미쳤어’.라는 소리를 들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의 글을 형식상 타이핑해 낼 때쯤이면 나는 이미 그 글을 거듭 마음속에 그려보고 있다. 나는 글쓰기란 결코 그저 책장 위에 단어들을 배열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비치는 것, 감정의 집합체, 날것 그대로의 경험 같은 것을 구현하려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기억할 만한 예술을 만들려는 노력은 독자나 구경꾼에게 그 노력에 걸맞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달리기는 명상이다. 좀더 실용적으로 말하자면, 달리기는 내가 마음의 눈으로 그때까지 쓴 원고 사이를 거닐고, 교정을 해서 오류를 잡아내고 글을 더 개선시키도록 만들어 준다. 끊임없는 교정이 나의 방식이다.
예술의 기원
모방으로 시작한 것은 어느 날 흘끗 바라본 우리 자신에게서 경이로움으로 가득한 채 발견하게 되는 그 무엇이 된다. 그건 무얼까? 인생 그 자체? 겉보기에 예술가들이 가장 의식하고 있는 것은 그의 ‘발견’에 대한 복종이다.
....예술 작품을 만듦에 있어 우리는 전혀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만들지 선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이전에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복종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 즉 그것을 발견하는 일은 마치 자연 법칙처럼 필연적이며 비밀스럽기 때문이다.
- 마르셀 프루스트.
“온 세상에 걸쳐 거대한 체스 게임을 하고 있는 거군요. 뭐, 물론 지금 여기가 세상이라면 말이죠. 와, 얼마나 재미있을까요! 제가 그 말들 중의 하나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말이 될 수만 있다면 졸이 되어도 상관없어요. 물론 여왕이 되는 것이 더 좋기는 하지만요.”
- 루이스 캐럴, <거울 나라의 앨리스> 중에서
나는 왜 썼을까?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죄가
나를 잉크에 담았을까, 부모의 죄일까, 나 자산의 죄일까?
아직 아이일 때, 아직 명성을 쫓는 바보가 아니었을 때,
나는 혀 짧은 소리로 시를 읇었다. 시가 내게 다가왔기 때문에.
- 알렉산더 포프, <애벗낫 박사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실패의 기록
예술가들은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실패에, 즉 실패의 정도와 적응과 타협에 능통하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 실패라는 용어는 대개 심오하다. 성공이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일시적 환상, 곧 꺼질 거품, 곧 지게 될 꽃인 반면, 실패는 진실이거나 적어도 타협할 수 있는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 합리적이리라.
만약 내가 믿는 바와 같이 절망이 도취감과 마찬가지로 영혼의 부조리한 상태라면, 그것이 인간의 환경과 덜 어긋남은 물론이고 더욱 실질적이고 믿을 만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에 누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T.S 엘리엇은 비평가들의 대부분이 실패한 작가들이라는 언급을 듣고 이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렇지요.”
모든 예술이 은유거나 은유적이라면, 은유의 동기란 정말 무엇일까? 동기라는 것이 있을까? 아니면, 사실은 은유라는 것이 있기는 있는 것일까? 사람이 절대적인 자신을 갖고 예술 작품에 대해서 결정적으로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을까? 왜 그것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심원하고, 저항할 수 없고, 때때로 삶을 바꾸어 놓는 응답으로 느껴지는 반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거의 의미도 없는 것일까?
옛날에 스물다섯 개의 양철 인형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형제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래된 양철 숟가락 후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인형들은 각각 자기 총을 어깨에 매고, 눈을 앞으로 꼿꼿하게 고정시키고, 아주 작은 빨강과 파랑 제복을 입고 있었습니다.....하나만 빼고 모든 군인들은 아주 똑같았습니다.
그는 다리가 하나뿐이라는 점에서 나머지와 달랐습니다. 맨 마지막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를 완성할 만큼 양철이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인형들이 두 다리로 서 있는 것과 똑같이 한 다리로 잘 서 있었습니다. 사실은 바로 그가 유명해진 인형이었습니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양철 병정> 중에서.
지드가 <수상록>에서 언급했듯이 예술가는 자기만이 열쇠를 가지고 있는 특별한 세계를 필요로 한다. 일을 하다가 죽거나 심하게 병들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매우 현실적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만약 여기에 분명한 모순이 있다면 그 모순은 예술이라는 모험의 핵심에 있는 것이리라. 작가는 깨지기 쉬운 달걀 피라미드를 실어 나르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실어 나른다. 사실 그 자신이야말로 언제라도 떨어져 마루에서 엉망진창으로 더럽게 깨질 수 있는 깨지기 쉬운 달걀 피라미드이기 때문이다.
새벽이 오기 전에 잠에서 깨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드물다. 차라리 죽음을 연모케 하는 꿈 없는 잠이, 아니면 현실보다 더 무서운 환영과 기괴한 모든 것에서 살아 꿈틀거리는 본능이 우리의 뇌수 곳곳을 휩쓸고 다니는, 공포와 일그러진 즐거움의 밤이 우리로 하여금 깨어나 어둠 속에 있게 한다. 그 본능은 몽상이라는 질병이 정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예술, 바로 고딕 예술에 지속적 생명력을 부여하는 본능이다.
......겹겹으로 겹친 외올베 같은 새벽안개가 한 꺼풀 한 꺼풀 벗겨지고 사물들이 조금씩 그 형태와 색채를 되찾으면 우리는 새벽이 그 고유한 바랜 빛깔로 세상을 다시 만들어 내는 것을 지켜본다. 흐릿한 거울이 사물을 비추어 보여준다는 본연의 삶을 되찾는다.....그 무엇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밤의 비현실적인 그림자로부터 우리가 익히 알던 대로의 진정한 삶이 돌아온다.
우리는 우리가 떠났던 바로 그 지점에서 삶을 다시 시작해야 하고, 이때 우리는 늘 하던 대로 판에 박힌 습관 같은 일을 힘들여 지루하게 반복해야 한다는 깨달음에 진저리를 치기도 하지만, 제어하기 힘든 갈망, 아마도 어느 날 아침 눈을 뜨게 되면 어둠 속에서 새로이 다시 태어난 세상을 보게 될 수도 있으리라는 갈망에 몸을 떨기도 한다. 이런 세계에서 어떠한 의무감이나 후회의 의식적인 형태를 띤 과거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도리언 그레이에게는 이러한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 삶의 진정한 목표였다.
-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중에서
대다수 소설가들의 특징인 몽상적인 것과 실용성의 기묘한 혼합은 <율리시즈>의 여러 가지 문체, 그 놀랄 만큼 풍부한 자기 패러디적 목소리들에 대한 조이스의 태도로 예증된다.
“내 관점에서 기술이 정확한가 아닌가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내 열여덟 개의 에피소드를 진군시킬 수 있는 가교 역할을 하며, 일단 내 군대가 지나간 후에는 적군이 다리를 하늘 높이 날려 버리더라도 내 알 바 아니다.”
실패에는 종종 문자 그대로의 이점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실패란 가장 우울한 경험으로 하여금 가치 있고, 사람을 성장시키고, 깊은 중요성을 가진 경험과 비슷해질 때까지 그 안팎을 뒤집어 버리는 방법이 아닐까?......<기 돔빌>이 실패한 후 제임스는 자기 수첩에 이렇게 쓴다.
“나는 오래된 펜을 다시 잡는다. 나의 잊을 수 없는 모든 노력과 신성한 투쟁의 펜을. 오늘 나는 나 자신에게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크고 충만하고 드높은 미래가 아직 열려 있다. 내가 필생의 작업을 해야 할 때는 바로 지금이며, 나는 그 작업을 할 것이다.”
만약 내가 내게 일어난 일, 혹은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글을 쓰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면 나는 내게 머무는 고독과 고립의 감각을 조금 잃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내 안에 있는 형상 없는 덩어리의 밀도와 모습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내 공책에 끄적이고 읽는다. 삶은 상상할 수도 없이 풍부해 보인다.
- 앨리스 제임스, <일기> 중에서
그러나 천재는 자기가 천재라는 것을 실제로는 알 수 없다. 희망을 갖고, 예감을 갖고, 맹렬한 편집증적 의심에 괴로워하지만, 결국 그에게는 오직 자기 자신만이 척도이다. 성공은 멀리서 사람을 미혹하는 것이지만, 실패는 충실한 동행이자 다음 책이 더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자극이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하러 글을 쓰겠는가? 그 충동은 이론적이고 철학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의 피와 뼈만큼이나 육체적인 것이다.
“죽기전에 무엇인가 쓰고자 하는 이 채워지지 않는 욕망, 인생이 짧고 열광적이라는 이 파괴적인 감각은 내가 나 자신의 닻에 집착하게 만든다.” 이렇게 버지니아 울프는 일기 속에서 우리 모두를 향해 얘기하고 있다.
영감!
우리는 모두 예전에 영감을 받은 경험이 어떤 느낌이었는지 알고 있지만, 앞으로 영감을 받으리라는 믿음을 가질 수는 없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영감이 되돌아올 것이라고 믿으면서 자신의 일에 끈덕지게 몰두한다. 마치 작은 불꽃이 피어나리라고 믿으면서 젖은 성냥으로 계속, 계속, 계속, 성냥이 부러질 때까지 불을 켜대는 것과 비슷하리라.
나는 초기 초현실주의자들이 분명히 옳았다고 생각한다. 세계는 해독해야 하는 ‘기호의 숲’이다. 꿈속의 외견상의 무질서 속에 의미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세계는 무질서 속에 ‘메시지’를 담고 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은 채로 개방성, 혹은 유용성이나 우연을 기록하려고 스스로를 열어 두고 카메라를 메고서 파리의 거리를 떠돌아다닌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만 레이와 같이, 경외심을 갖고 알아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이미지들은 넘쳐난다.
나는 그것을 한 편의 시로 적노라
맥도나와 맥브라이드
코널리와 피어스는
오늘 그리고 앞으로도
녹색 옷을 입는 곳이면 어디서든
변했다, 완전히 달라졌다.
무시무시한 아름다움이 탄생했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1963년 시인 랜달 자렐은 어머니에게서 한 상자의 편지를 받았다. 그 상자에는 자신이 열두 살이었던 1920년 대에 썼던 편지들이 들어 있었다. 그는 즉각 자신의 창조성의 마지막 단계가 될 일에 착수했다. 그의 아내가 말한 바로는 실로 시를 공중에서 잡아채는 일이었다.
노먼 메일러의 첫 소설 <나자와 사자The naked and the Dead>는 전적으로 계획적인 노력의 산물이자, “내가 스물다섯 살때까지 배운 모든 것에 따른 확실한 결과물”이었다......그러나 두 번째 소설 <바르바리 강변>은 난데없이 튀어나온 것 같다. 매일 아침 그는 소설을 어떻게 이어나가야 할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무 생각도 없이 썼다.
....메일러의 <허크 핀>은 이와 비슷하게 석 달 동안 무아경의 백열 상태 속에서, 어떤 의미로는 주인공의 목소리로 구술되어 쓰였다.
조셉 헬러의 소설들은 으레 주제, 배경, 인물, 이야기와 독립적으로 난데없이 튀어나오는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첫눈에 반해 버렸다. 요사리안은 군목을 보자마자 미친 듯이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라는 <캐치 –22>의 첫 문장은 아무 이유없이 그저 헬러에게 떠올랐고 그가 그것을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한 시간 반 이내에 헬러는 그 소설의 독특한 어조와 교묘한 형식 그리고 인물들 대다수를 마음속에 구상했다.
<사건이 일어났다>의 시초는 “내가 일하는 사무실에는 내가 두려워하는 네 명의 사람이 있었다. 이 각각의 네 명은 다섯 명씩을 두려워했다.”라는 불가해한 문장이다. 문장이 떠오르기 일 분 전까지만 해도 헬러는 이후 몇 년동안이나 열중하게 될 그 작품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지만, 문장이 떠오르자 한 시간 이내에 그 작품의 서두, 중간,결말 그리고 불안이라는 지배적인 어조를 파악했다.
조안 디디온은 인물이나 플롯, 혹은 사건의 개념초자 없이 <있는 그대로>를 시작했다. 그녀는 오직 마음속에 두 개의 그림만을 품고 있다. 하나는 온통 흰 색의 빈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라스베가스의 리비에라 호텔 카지노에서 이름을 불러 찾고 있던 할리우드 이류 배우이다. 빈 공간은 아무 이야기도 암시하지 않지만, 여배우의 모습은 이런 것을 암시한다.
“팔과 등이 드러나는 짧고 하얀 드레스를 입은 긴 머리의 젊은 여인이 새벽 한 시에 리비에라 호텔의 카지노를 걸어간다. 그녀는 혼자 카지노를 가로질러 비치된 전화를 집어 든다. 나는 그녀의 이름이 불리는 것을 알아들었기 때문에 그녀를 보았다.
1976년 <파리 리뷰> 인터뷰에서 존 치버는 전혀 공통점이 없는 사실들이 저절로 한꺼번에 다가오는 방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모아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직류 전기 에너지 같은 것이다.” 그 다음에는 글쓰기 자체가 중량을 맞추는, 즉 단어들을 상상과 일치시키는 지난한 노력만이 있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스티븐 디달러스는 조이스의 ‘에피퍼니’라는 개념을 이렇게 설명한다.
“조야한 말 혹은 몸짓이나 마음 그 자체의 주목할 만한 상태에서 갑자기 영적인 현시가 나타나는 것. 그것은 예술가들 자신에게 있어 가장 섬세하고 덧없는 순간들이기 때문에 이런 에피퍼니를 아주 조심스럽게 기록하는 것이 에술가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믿었다.”.
...그는 대략 70개의 에피퍼니를 모았고, 그 중 40개 정도가 살아 남았다..은총이 정말로 외부에서 우리에게 쏟아진다고 상상한다면 순진한 일이다. 강림을 받을 영적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예술의 신적인 기원에 대한 플라톤의 주장의 역 명제이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동일한 것, ‘악마적인’ 예술이라는 친숙한 개념은 그런 것이다. 무엇인가 ‘우리가 아닌 것’이 우리 안에 살고 있다. 무엇인가가 우리를 통해 이야기하겠다고 고집한다. 문학적 강박의 손아귀에 잡혀 있다는 것은 다른 강박, 가령 가장 원시적이고 강력한 색정적 사랑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여기서 감정의 대상은 전적으로 인간이지만 그 감정은 어딘가 원시적이고, 냉혹할 정도이고, 때때로 불안할 정도인 비인간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성난 바람, 비, 정령들의 힘을 암시하는 문자 그대로에 가까운 은유, 바로 ‘정신 착란(brainstorm)’이라는 개념이다.
가령 윌리엄 블레이크의 무절제한 환상이나, 초기 작품을 쓰던 카프카가 건강이 안 좋았고 육체적으로 탈진했다는 것과는 상관업싱 지칠 줄 모르고 뭔가에 사로잡힌 듯이 밤새 글을 쓰던 무아경 같은 것이다. 1934년 7월 27일 버지니아 울프는 이렇게 말한다. “창조력이 갑자기 우주 전체에 질서를 가져오다니 얼마나 놀라운가”그러나 그녀는 그 우주가 결국 사람의 가장 내밀하고 탐사되지 않은, 악마적이자 신적인 자아라는 것까지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보코프는 그의 자서전 <기억이여, 말하라>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시는 태곳적부터의 충동으로 의식 속의 우주에 있어 작가의 위치를 표현하려는 위상적인 것이다. 의식의 팔은 밖으로 뻗어 더듬어 찾고, 그 팔은 길수록 좋다. 아폴로가 타고난 기관은 날개가 아니라 촉수이다.”
제임스 조이스는 편지에서 동생 스타니슬라우스에게 말한다. “미사의 신비와 내가 하려는 것 가이에는 어떤 유사성이 있다......일상생활의 빵을 그 자체로 영구적이고 예술적인 생명을 가진 것으로 바꿈으로써.....사람들의 지적, 도덕적, 영적 고양을 위하여......그들에게 일종의 지적 혹은 영적인 기쁨을 주려는 것이다.”
1928년 9월 8일 비타 새크빌 –웨스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소설을 시작할 때 중요한 것은 당신이 그것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건널 수 없는 심연의 저쪽 편에 그것이 존재함을 느끼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숨가쁜 고통 속에서만 극복된다는 것도요. 글을 쓰려고 앉을 때 나는 분명 한 시간 정도 있으면 착상에 내려앉을 언어의 그물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설에서......훌륭한 것은, 그것을 쓰기 전에는 글로 쓸 수 없는 것처럼 보이며, 오직 눈에 보이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작가가 9개월 동안 절망 속에서 살면서 의도했던 것을 잊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 책은 봐줄 만해집니다.
문체는 매우 간단한 문제입니다. 그것은 모두 리듬입니다. 일단 당신이 그것을 파악하면, 틀린 말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리듬이라는 것은 매우 심원하고, 단어들보다 훨씬 더 깊이 내려갑니다. 광경과 감정은 그에 걸맞는 말을 만들어내기 훨씬 이전에 마음속에 이 물결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글을 쓰면서.....작가는 이것을 다시 잡아내어서 작동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기고 그 다음에, 그것이 마음속에서 뛰어오르고 굴러 떨어지면서 그것은 딱 맞는 말을 만듭니다.
“나(윌리엄 포크너)는 내가 전혀 파악하지 못한 소설을 쓰고 있다. 나는 145쪽에 머물러 있고, 그것이 무엇에 대한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그것을 증오한다. 프리다는 그것이 매우 좋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게는 잘 모르는 외국어로 된 소설 같다. 그것이 무엇에 대한 것인지 간신히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작가의 독서 : 기능공으로서의 작가 1
토마스 하디의 시를 연구하고 있었던, 더 이상 젊지도 않고 책도 내지 못하는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를 생각해 보라. 프로스트가 어느 날 자기의 선배만큼이나 위대한 시인이 되고 미국에서 하디보다 훨씬 더 널리 읽히게 된다는 것은 프로스트 자신을 포함해 아무도 예기치 못했던 놀라운 결과였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와 나다나엘 웨스트의 <미스 론리하츠>를 발견하는 젊은 플래너리 오코너를 생각해 보라. 오코너가 나다나엘 웨스트에게 진 빚은 그녀의 전 소설에 스며들어 있고, 심지어 <오르다보면 모든 것은 한 곳에 모이기 마련이다>같이 성숙한 작품도 날카롭고 폭로적이지만 재미있는 문장, 이야기의 결말에서 갑자기 잔인하게 변하는 희극적인 어조 등은 웨스트적인 구석을 간직하고 있다.
동시대인 나다니엘 호손의 알레고리적 이야기 모음집 <구 목사관의 이끼>에 너무나 충격을 받아 <모비 딕>의 집필 계획을 수정하는 젊고 열의가 넘치는 허먼 멜빌을 생각해 보라. <모비 딕>의 희극적이고 피카레스크적 어조를 훨씬 더 장중하고 더 고상하고 비극적인 어조로 바꾸는 과정에서 그는 19세기는 물론 20세기에서도 가장 강렬한 미국소설 중 한 편을 창조해냈다.
앨저넌 스윈번, 헉슬리, 심지어 동시대인 어네스트 헤밍웨이 같은 전혀 공통점이 없는 모델들을 취하고 버리면서 하나의 목소리, 시점, 통찰력을 찾고 있던 이십대 중반의 젊은 작가 윌리엄 포크너를 생각해 보라. 그 후 그는 자신과 기질적으로 더 맞는 작가들,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이나 조셉 콘라드의 <나르시서스 호의 검둥이>와 더불어 제임스 조이스를 발견했다.
이 작품들은 모두 포크너에게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영향을 미치게 되는, 획기적으로 씌어진 산문의 걸작들이다. 이후 포크너의 특이한 시적 산문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코맥 맥카시같이 다양한 작가들에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영향을 주었다.
마크 트웨인이나 셔우드 앤더슨 같은 걸출한 선배들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은 어네스트 헤밍웨이가 있다. 특히 그들이 <허클레비 핀의 모험>이나 <와인스버그, 오하이오> 같은 걸작에서 미국 방언을 갈고닦지 않았다면, 그 유명한 헤밍웨이 스타일은 개발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율리시즈>를 읽고, 내 경우에 맞도록 혹은 그 반대로 만들어야 한다. 나는 지금까지 1/3도 채 안 되는 200페이지를 읽었다. 그리고 첫 2,3 장에서는 즐거워하고, 자극받고, 매혹되고, 흥미를 느꼈다. ......그 다음에는 여드름을 짜고 있는 메스꺼운 풋내기 대학생을 보는 것처럼 당황하고, 지루해하고, 화가나고 환멸을 느꼈다.
그런데 톰(T.S 엘리엇)은 이것이 <전쟁과 평화>와 동등하다고 생각한다! 내게는 무식하고 천박한 책으로 보인다. 이것은 독학 노동자의 책이다. 그들이 얼마나 사람을 괴롭히는지, 얼마나 독선적이고, 끈질기고, 거칠고, 공격적이고, 궁극적으로는 욕지기가 나는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 1922년 8월 16일 일기 중에서
아, 고마워라. 나는 내 머리를 직관으로 가득 채웠다. 직관은 지나치거나 충분하게 채울 수 없는 것이다. 아, 마침내 그저 자아를 놓아 버리는 것. 그 기나긴 세월동안 (엄청나게 장렬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희망하고 기다려온 몰두와 생산이라는 행동 – 그저 잠재적이고 상대적인, 물질적인 면에서의 양의 증가 – 에 자아를 내던지는 것. 요컨대, 더 일할 수 있기를 기도하고 희망하고 기다려왔다. 그리고 이제 그것은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결말에 다다른 것 같다. 나는 이것만을 바란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순종과 그만큼의 감사를 느끼며 운명에 고개 숙여 절한다.
헨리 제임스, 1895년 2월 14일 <작가노트> 중에서
십대시절부터 이미 야심찬 젊은 작가였던 존 가드너는 다른 작가의 언어에서 산문의 리듬을 느끼기 위해 모범이 되는 소설 작품을 타이핑했다고 말했다. 가드너는 특히 톨스토이의 숭배자였고, 그의 도덕적이고 설교적인 어조는 가드너의 소설 속에 울려 퍼진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다른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방했던 단편 작가 중 한 명인 레이먼드 카버는 형식면에서 체오프, 이사크 바벨, 프랭크 오코너, V.S 프리쳇, 어네스트 헤밍웨이 같은 선배들에게 진 빚을 인정했다. 그는 <불길 : 에세이, 시, 단편>의 서문에서 책상 옆 벽에 체호프의 소설에서 나온 “......그리고 갑자기 그에게 모든 것이 명백해졌다.”라는 문장 일부분을 붙여 놓았다고 쓰고 있다.
소설가이자 영화제작자인 존 세일즈는 넬슨 올그런에 대한 존경심에 가득 차서 말한다. “당신이 꼭 당신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들처럼 쓰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들이 만든 등장인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 속의 영혼은 당신의 마음속에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렇게 열거된 사례들에서 어떤 교훈이나 일반적인 명제를 끌어낼 수 있을까? 만약 끌어낼 수 있다면, 그것은 간단한 교훈이다. 널리 읽고, 열성적으로 읽고, 의도가 아니라 본능의 인도를 받아라. 당신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작가가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작가가 되고 싶다면 책을 읽어야 한다.
작가의 독서 : 기능공으로서의 작가 2
헨리 제임스는 예술가란 이상적으로는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상상 세계에 ‘진짜’ 인물들이 살도록 해야 하고, 그들을 담고 있는 그 세계 또한 ‘진짜’라는 환상을 주어야 하는 소설가에게는 특히나 맞는 말이다. 작가라는 것은 지적으로,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감정적으로 작품을 통해 빛을 발해야 한다. 태양이 보이지 않는 흐린 날의 불빛같이 모든 것들이 동등하게 빛을 받아 보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물들을 바꿀 수 있고, 우리의 영혼을 더욱 깊이 있게 만들 수 있다. 사진작가들이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 더 날카롭게 보는 것철머, 글쓰기 훈련을 통해 더 성숙해지고 더 예민해지고 관찰력이 깊어질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변화를 겪을 수 있는 길은 글쓰기라는 예술을 기술로서 접근하는 것이다.
자기비판이라는 불가사의한 예술
‘그저 올바른 음절을 제대로 된 자리에 갖다 놓아라.’는 조나단 스위프트의 충고이자 완벽주의자의 신조이다. 그러나 이 신조는 작가의 악몽이 될 수도 잇다. 언제나 아름답고 찬란하게, 독창성을 발휘하며 ‘의기양양한’ 기세로 글을 쓰고자 하는 긴장은 스스로를 마비시키는 자기 저주가 될 수 잇다. 가장 야심작인 <노스트로모>를 쓰며 비참해하던 조셉 콘라드 같은 완벽주의자의 절망 속에는 어형과 겸손이 둘 다 들어 있다.
“낭떠러지 위로 14인치 널빤지를 따라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처럼 나는 계속 나아간다. 만약 비틀거리기라도 한다면 나는 파멸할 것이다.” 콘라드는 일에 대한 혐오가 발작하면 우둔한 느낌이 들 정도로 움츠러들고 두뇌가 물로 변해 버리는 느낌이며, 글쓰기는 그저 “신경증적 힘이 언어로 변환되는 것”일 뿐이라는 확신이 든다고 말했다.
입센은 <들오리>에서 ‘삶의 거짓’에 대해 말한다. 삶을 가능하게 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환상은 심지어 불합리한 것이라 해도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어떤 작가들에게는 ‘삶의 거짓’이 필수적이다. 그들은 자기가 천재성을 갖고 있다고 믿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글을 쓸 수 없다. 현실 생활과 너무 극적으로 충돌하지만 않는다면, 그런 확신에는 죄가 없다.
이 짧은 책의 리뷰가 이렇게 길어질 줄이야. 글쓰기에 관한 책은 널리고도 널렸다. <작가의 신념>이 다른 글쓰기 책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짧은 분량안에 무수한 작가들이 불쑥 불쑥 출현한다는 점이다. JCO가 그렇게나 많은 책을 쓸 수 있었던 동력은 그만큼이나 많은 선배들, 동시대의 작가의 책을 읽었기 때문이 아닐까.
죽기 전에 영화를 만들고 싶어한 이 채워지지 않는 욕망은 도대체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나는 실패했지만 다음 작품은 더 나아질 것이다. 정녕? 실패 이후의 헨리 제임스의 메모를 염두해 둘 것.
오늘 나는 나 자신에게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크고 충만하고 드높은 미래가 아직 열려 있다. 내가 필생의 작업을 해야 할 때는 바로 지금이며, 나는 그 작업을 할 것이다.
-2015.5.26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