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혁명 2030 - 석유와 자동차 시대의 종말, 전혀 새로운 에너지가 온다 혁명 2030 시리즈 1
토니 세바 지음, 박영숙 옮김 / 교보문고(단행본)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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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환경에너지, 신재생에너지 등의 바람이 불었던 것은 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의 일로 기억한다. 그러나 셰일가스의 등장과 석유가격의 끝없는 하락으로 태양광 등의 사업이 그다지 각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신규로 석유채광지역이 발견되고, 천연가스, 셰일가스 매장지역이 발견되면서 기존 화석에너지가 지속될 것으로 보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그런데 이 책은 이렇게 말한다. 패러다임의 전환은 없어서가 아니라 새로운 혁신으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현재 언론과 정계, 에너지 산업에서 논하는 국가적 담론은 지금이 '오일 피크'인지, 30년, 100년, 400년을 버틸 수 있는 천연가스가 충분한지에 사로잡혀 있다. 이러한 담론은 전적으로 핵심을 벗어난 것이다.

휴대폰이 유선전화 시장을 붕괴시킨 것은 구리가 모자라서가 아니다. 100년 동안 쓸 수 있는 충분한 구리가 땅속에 있지만 그것이 유선전화에 투자할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휴대폰 산업이 유선전화 산업을 붕괴시킨 것은 휴대폰이 더 빠르고 더 깨끗하며, 통신에 더 매력적인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콘텐츠를 생산하고 저장하고 전송하고 소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43쪽)

 

1918년 미국에서는 13가정 가운데 한 가정 정도가 자동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 후 11년이 지나면서 80%의 가정이 자동차를 보유하게 되었다. 미국의 자동차 시장이 불과 10년 남짓한 기간 동안 거의 전체 시장을 차지하게 된 주된 이유는 제네럴 모터스가 시작한 하나의 혁신 때문이었다. 그 혁신은 엔진이나 새로운 변속기 등 기술혁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었다. 1919년 제너럴 모터스는 듀폰과 협력해 GMAC(제너럴 모터스의 전속 할부금융회사)를 설립했다. ...

자동차 할부금융은 제너럴 모터스와 듀폰이 만들어낸 금융 혁신으로 기술혁신과는 다르다. 그러나 이를 통해 많은 구매자가 자동차를 살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해, 운송산업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비즈니스 모델에 의해 붕괴되었다.(80쪽)

 

에너지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저자는 태양광, 전기자동차, 자율주행자동차를 거론한다. 그러면 과연 태양광이 기존 화석에너지를 대체할 수 있을까? 많은 이들은 태양광의 원가가 높아 즉, 비싼 전기를 생산하기 때문에 기존 화석에너지를 대체할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기존 화석에너지 가격을 생각해보면 태양광은 놀라울 정도로 원가를 개선하고 있다. 오히려 화석에너지는 채광비용이 점점 상승하고 있지만 태양광에서 가장 큰 비용이 발생하는 패널가격이 계속 하락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게다가 요즘은 용융염 배터리 등의 개발로 태양광 발전을 저장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 태양광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화석에너지가 막을 내릴 이유 중의 하나는 내연기관의 비효율성 때문이다.

내연기관은 엔진을 가열하는 특성상 열역학의 법칙을 따른다. 내연기관은 열효율 법칙의 지배를 받으며, 열이 유용한 일로 전환되는 최대경계치가 있다. 휘발유 엔진의 한계치는 25~30%다. 이 말은 이론적으로 최상의 수치를 적용하더라도 휘발유 엔진은 여전히 70~75%의 연료를 낭비한다는 뜻이다.

 

그에 반해 전기자동차는 에너지효율이 높다. 게다가 기존 자동차 보다 혁신의 속도가 빠르다.

 

에너지 혁명을 가로막는 것은 가로막는 것은 기존 에너지 사업이다. 그런데 기존 에너지사업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이미 1990년대 GM은 볼트라는 이름의 전기차를 내놓았지만 에너지산업(석유)의 방해와 로비로 전기차를 더 이상 생산하지 못하게 된 역사가 있다. 또한 요즘은 지구온난화에 반대하는 연구에 엄청난 자금을 쓰고 있다. 그런 이유는 다음과 같다.

석유기업의 대차대조표는 이렇다. 납세자들이 시추에 필요한 자본 투자의 90%를 댄다. 시추작업은 주로 공공 토지나 정부 소유의 수면에서 이루어진다. 회사는 공기, 수질, 토양오염의 책임에서 면제된다. 납세자들이 위험과 비용을 감당하고 기업은 수조 달러의 이익을 챙긴다. 이러한 공식이 석유 및 가스기업들에게 믿기 어려울 정도의 수익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334쪽)

 

이를 통제해야 할 정부는 반대로 이런 에너지기업들에 사로잡혀 있다.

경제학에서 '규제포획regulatory capture'이란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규제기관이 피규제기관에 의해 거꾸로 포획당하는 현상을 말한다. 다시 말해 정부기관이 보호해야 할 공공의 이익을 희생해서 정작 규제해야 할 산업계를 보호하는 현상이다. 규제포획으로 인해 기업들은 공해, 보건안전 부분 등을 등한시하게 될 수 있다. (262쪽)

 

규제포획은 국민을 위해 산업을 규제해야 하는 기관이 산업을 위해 국민을 규제할 때 발생한다. 다른 말로 하면 규제포획은 규제 시스템이 규제를 받아야 하는 기업들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는 것이다. 규제포획이 발생하면 정부가 오염을 방지해야 하고 오염 정화비용에 세금을 써야 한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면서도 기업에 대규모 오염을 발생시킬 여지를 주기도 한다. 규제포획은 재래식 에너지 세계에서는 고질적인 병폐다.(363쪽)

 

에너지기업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책임은 정부가 알아서 해결해주고, 투자손실은 국민이 감수하고, 자신들은 이익만 챙겨간다. 게다가 보조금이라는 명목으로 국민의 세금을 자신들의 주머니에 집어 넣는다.

전력회사들이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시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정부의 보호와 보조금 때문이다. 모든 것을 얻을 수 있고 아무런 고통도 없기 때문이다.(266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기존 에너지산업은 태양광에 그 자리를 내줄 것으로 생각한다. 기존 에너지의 혁신은 더디기만 한 반면 원가는 점점 상승하고 있다. 특히 전기자동차의 발전으로 기존 화석에너지의 수요는 점차 줄어들 것이다.

 

저자의 이런 지적은 생각해볼만한 가치가 있다. 물론 석유산업이 쉽게 태양광에게 그 자리를 넘겨줄지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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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의 마법 - 화폐지배의 종말과 유대로서의 빚 카이로스총서 36
리차드 디인스트 지음, 권범철 옮김 / 갈무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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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이해하기 힘든 책이다.

물론 생각은 탁월하다. 지금까지 봐왔던 빚에 대해 도발적인 생각을 던져준다.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려고 시도한다. 첫째는 사람들의 무수한 삶의 양상들을 포획하고 통제하는 오늘날의 빚 체제의 완전한 힘을 설명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 파괴적이고 약화시키는 'bonds'(속박)가 어떻게 생산적인고 가능하게 하는 'bonds'(유대)로 전환될 수 있는지 묻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빚을 멀리해야 할 자본이 시민을 옥죄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저자는 빚을 통해서 경제가 성장해 온 것을 보면서 빚이 세상의 부족한 사람들을 어떻게 도와줄지, 그리고 빚을 통한 연대를 꿈꾼다. 가능한지도 모르겠고, 내용도 이해는 잘 안가지만 기존의 연대가 자본주의에서 깨져버린 상황에서 빚이라는 것을 통한 연대! 충분히 검토해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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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국가로부터 배당받을 권리가 있다 - 생태적 전환과 해방을 위한 기본소득 팸플릿 시리즈 (한티재) 2
하승수 지음 / 한티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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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성남시에서는 청년배당을 실시하겠다고 했다. 생소한 개념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득은 일해서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임금없는 일도 상당히 많다는 점(자원봉사, 가사, 동네청소 등)을 생각해보면 소득과 일이 꼭 일대일인 것은 아니다.

 

기본소득 또는 시민배당이라는 생각도 아직은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지만 곧 '상식'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만큼 우리가 처한 상황은 심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인류의 역사상 이렇게 '사유화'가 진행된 것은 불과 몇백 년 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그 결과는 불평등의 심화, 생태적 위기, 불안과 팍팍한 삶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발상의 전환을 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방법도 아주 간단하다.

'공유'라는 개념에 기반해서 재원을 마련하여 사람들에게 배당금을 지급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 불평등을 완화하고 불안을 줄이며, 진정한 자유를 보장하고 생태위기도 극복할 수 있다.(18쪽)

 

실제 시민배당을 실시하는 곳이 있다. 미국의 알래스카주는 알래스카에서 나오는 자원을 재원으로 주민들에게 배당을 지급한 적이 있다. 사실 천연자원이나 기본자원, 토지나 환경은 개인의 소유라고 하기 힘든 자원이다. 그런자원을 공유재로 활용하여 수익을 국민, 시민들에게 배당하면 된다.

 

생각해보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국민의 기본 삶을 위한 기본소득이라는 개념에서 공유재를 활용한 기본소득의 보장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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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에는 많은 책들이 소개된다.

그 책들을 읽어봄으로 아니면 책 정보라도 알아두면 독서를 확장시킬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다.

 

책에서는 리처드 세넷의 책이 네권이나 언급된다. 리처드 세넷 생소한데 이 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알라딘 저자 파일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유럽 지식인 사회에서도 주목받는 몇 안 되는 미국인 학자 가운데 한 명으로 노동 및 도시화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이다. 2006년에는 헤겔상, 2010년에는 스피노자상을 수상했다. 1998년 독일에서 베스트셀러에 올라 ‘유럽에서 읽히는 미국인’이란 평을 얻은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를 비롯해 노동사회학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계급의 숨겨진 상처>, <불평등 사회의 인간 존중>, <뉴 캐피털리즘> 등을 썼다

 

 

한두개 직장에서 한걸음씩 진급하는 전통적인 직업은 이제 퇴조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평생 한가지 기술만으로 먹고 사는 것도 힘들어졌다.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

세넷에게 가면쓰기는 자신의 이익을 위한 간교가 아니다. "은폐의 가면이 반드시 자기방어를 위한 것만은 아니다. 예의범절과 책략은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감정을 가려주는 행동이다."(투게더)

마음을 쏟고 일을 하고 즐기려면 과거와는 다른, 아주 개인적인 방식의 동기부여가 필요하다. 리처드 세넷은 <뉴캐피탈리즘>에서 자본주의의 문화에 맞서기 위한 근본적인 가치로 장인 정신을 다시 불러낸다.

자존심보다는 자존감으로 동기를 부여받을 수 있는 사람만이 '관객'으로부터 자유롭게, 오히려 진짜 '자기주도적으로' 일의 기쁨을 추구할 수 있다. (불평등사회의 인간존중)

 

      

 

태국에서는 '사눅'이라는 말이 있는데,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근심없는 즐거움, 현재 활동에서 느끼는 만족감을 뜻한다. .. 태국사람들은 사눅이란 것에 큰 가치를 두어 모든 활동을 '사눅(재미있는)'과 '마이 사눅(재미없는)'으로 나눈다고 한다. (일의 발견)

"나에게 일이란 언제나 삶 속에 녹아들어 있는, 놀이와 구분되지 않는 어떤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가슴뛰는 회사)

"노력금지라는 게 열심히 살지 말라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지 않은데 인위적으로 하려는 것들을 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노력금지)

알랭 드 보통은 21세기 일의 현장 열 곳을 직접 둘러본 뒤 그 취재기를 엮어 <일의 기쁨과 슬픔>을 펴냈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활동을 노동, 작업, 행위로 나눈다. ... 노동은 말할 것도 없이 생물학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다. 작업은 유용한 것을 창조하고픈 욕구에서 나온다. 행위는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픈 욕구에 응답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새로운 빈곤>에서 산업화가 시작되던 시기에 노동 윤리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공장에 끌어다 앉히려던 시도에 대해 이야기한다. 당시의 새로운 노동윤리는 장인의 성실성을 요구하면서도 장인을 장인답게 하는 자긍심과 주체성을 원하지는 않았다.

꾸준함을 칭송하던 과거의 노동윤리를 되살리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으며, 어떤 면에서는 좋은 방법 같지 않기 때문이다. 좋든 싫든 이미 '단기간'이 '장기간'을 대체했고, 즉시성이 궁극적인 이상이 되었다. (액체근대)

철학과 문학, 정치분야를 아우르는 저자이자 학습 공동체를 꾸려가는 우치다 타츠루는 <하류지향>에서 "소비하는 일로 사회 활동을 시작한 아이들은 인생의 아주 초반부터 '돈의 전능성'을 경험"하며, 이를 통해 " '사는 사람'의 위치를 선점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우친다고 지적한다.

 

      

 

 다만 능력주의가 절대적인 공정성을 의미하지 않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 책(국가의 숨겨진 부)에는 흥미로운 설문 결과도 나온다. "같은 일을 하는 두 명의 비서 중에 일을 더 잘하는 비서가 돈을 더 많이 받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하십니까?"나는 질문에 대...해 세계 각국 사람들이 어떻게 답변했는지, 1980년대 초반에서 2000년대 초반으로 오며 그 답변이 어떻게 변했는지 보여준다.

지은이는 <일>이 "하루치 빵과 하루의 의미, 현금과 인정받음, 무관심이 아닌 경이로움에 대한 책"이라면서 133명 대부분이일에서 하루치 급료 이상의 의미를 찾으려 노력했다고 말한다.

'열정'을 요청하는 사회적 명령 속에서 그 사람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열정을 끌어내고 있는지 열정을 끌어내기 위해 억지로 노력하고 있는지를 구별하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독일어에서 노동을 가리키는 아르바이트는 시련, 박해, 역경, 곤경으로 해석된다고 한다. (세상물정의 사회학)

 

     

 

 <달리기와 존재하기>를 쓴 조지 쉬언은 "아이들은 뭘 하면서 목적을 묻지 않는다. 자기가 하는 일이 도움이 되는 것인지 아닌지 묻는 일도 없다"며 우리 모두가 "아이로 성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철학자가 달린다>를 쓴 마크 롤랜즈는 "놀이는 그 자체를 위해 하는 행위"라는데 본질적 가치가 있으며, "일로 가득한 삶은 놀이로만 구원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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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 누구와, 어떻게, 무엇을 위해 일할 것인가?
제현주 지음 / 어크로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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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시대를 거친 윗세대는 젊은 청년들에게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윗세대는 사람보다 일자리가 많았다. 경제는 해마다 성장하고, 기업들은 사람들이 모잘랐다.

지금 현재 청년들이 하는 일이란 윗세대의 고졸이 하던 일을 대졸 청년이, 대졸이 하던 일은 MBA나 석박사들이 하고 있다. 그만큼 고스펙을 자랑한다. 하지만 사람보다 일자리가 모자른다. 성장이 정체된 시대에 살고 있다. 문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할 정치권이나 경제인들은 해결의 노력을 하지 않는다. 일자리를 늘릴 대책을 만들 생각은 하지 않고 청년들을 비난한다.

 

어떻게 보면 청년들 스스로가 그 해법을 찾아 나서야 하는 아주 더럽고, 재수없는 상황에 처해졌다.

 

산업사회에서 일자리를 가지려면 자본에 '고용'되어야 한다.

산업화 초기에는 일자리에 노동자를 채워 넣는 것이 관건이었다. 산업화 이전에 사람들은 고용되지 않고도 스스로 일자리를 만들어 일하며 살아왔다. 산업자본은 그런 사람들을 고용된 일자리에서 일하도록 유인하는 데 골머리를 썩었다. 탈산업화된 시대에 접어든 지금, 상황은 역전되었다. 사람들은 일자리를 원하지만 자본은 예전만큼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브루니와 자마니는 산업시대에나 탈산업화시대에나 일자리와 일의 경계가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들은 "모두에게 임금 노동의 형태로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개념은 좋게 봐주어도 순전한 유토피아적 발상이며, 나쁘게 보면 위험한 거짓말"이라고 말한다. 일을 고용 중심으로 규정하는 산업 시대의 사고방식에서 이제 벗어나야 한다. 일의 규정을 고용시장 바깥에서 벌어지는 활동까지 아우를 만큼 넓히지 않는다면 '고용없는 성장' 시대를 극복할 방법은 없다. 이를 위해서는 복지에 대한 새로운 정의, 일에 대한 새로운 보상 체계가 필요한 것이다.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해결책이 필요한 지점이다. (111쪽)

 

 

소비 중심사회가 되면서 사회는 소비수준으로 사람의 수준을 결정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소비는 곧 능력이다. 그리고 고가의 제품, 서비스를 만들어낼 수록 능력있는 기업이다. 그것을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체험한다.

훌륭한 소비자가 곧 능력 있는 인간으로 치환되는 사회다. 벌어들이는 돈의 양으로 일의 성과가 측정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돈벌이를 해야 하는 우리는 모두 카지노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이다. 카지노에서 게임의 자원으로 인정받는 것은 오로지 칩 뿐이다. 무엇이 칩이고 무엇이 칩이 아닌지 결정하는 것이 바로 카지노가 지닌 권력의 핵심이다.(102쪽)

 

철학과 문학, 정치분야를 아우르는 저자이자 학습 공동체를 꾸려가는 우치다 타츠루는 <하류지향>에서 "소비하는 일로 사회 활동을 시작한 아이들은 인생의 아주 초반부터 '돈의 전능성'을 경험"하며, 이를 통해 " '사는 사람'의 위치를 선점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우친다고 지적한다. (215쪽)

가정은 노동 공동체이며 교육 공동체였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소비를 위한 재원을 공유하는 소비 공동체일 뿐이다.(217쪽)

 

그러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다 같지는 않다. 문제는 그 능력이라는 것도 판단 기준이 모호하다는 건데, 결국 좋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좋게 평가받는 쪽으로 능력이 규정되고 있다. 그런데 실상 능력에 따른 차별이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경쟁에 의해 나라가 세워졌던 미국을 제외하고는(아마 한국도...) 능력에 따른 차별을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느사이에 세상은 능력을 따른 차별을 당연한 것을 넘어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능력이 있고, 각기 타고난 능력의 종류 자체가 다르다. 누가 누구보다 능력이 좋거나 나쁘다는 판단에는 능력의 종류 자체에 대한 선호가 바탕에 깔려 있을 수 밖에 없다. 결국 능력주의는 능력이 더 뛰어난 사람을 높이 산다기보다는 시장이 원하는 종류의 능력을 가진 사람을 높이 사는 방식으로 작동하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런 능력주의가 정말 '공정한' 것일까? 부모의 재력을 무려받아 유리한 것은 비난하면서 시장이 원하는 능력을 타고나 유리한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더구나 능력은 설사 유전자의 덕이 아니더라도 운 좋게 누린 양육 환경의 덕이기도 하다.(144쪽)

다만 능력주의가 절대적인 공정성을 의미하지 않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 책(국가의 숨겨진 부)에는 흥미로운 설문 결과도 나온다. "같은 일을 하는 두 명의 비서 중에 일을 더 잘하는 비서가 돈을 더 많이 받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하십니까?"나는 질문에 대...해 세계 각국 사람들이 어떻게 답변했는지, 1980년대 초반에서 2000년대 초반으로 오며 그 답변이 어떻게 변했는지 보여준다. 미국은 예나 지금이나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눈길을 끄는 것은 1980년대 초반만 해도 '그렇다'고 대답한 비율이 그리 높지 않았던 이탈리아, 스위스, 덴마크, 네덜란드 등(50-60퍼센트 내외)도 시간이 흐르며 점점 미국 사람들과 비슷한 견해를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1980년대 초반에는 '그렇다'는 답변 비율이 70퍼센트 미만인 나라가 18개국 중 11개국이나 됐다.(2000년대 초반 즈음에는 단 한 나라도 없다.) 능력주의가 공정 사회와 같은 말이 된 것이 그리 역사가 오래된 현상은 아닌 모양이다.(145쪽)

 

우리는 모두 내리막길에 서 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전 세대보다 돈을 못 버는 세대의 등장. 그런 우리에게 세상은 자기계발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세상이 원하는 논리에 맞춘 인간이 되라는 것이다.

자기계발을 설파하는 목소리들은 빠짐없이 '자기 주도'를 말하고, 자유롭게 꿈을 추구하여 '자기를 실현'하는 개인을 이상화한다. '내가 주인공인 인생'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대표적이다. 이 말의 이면에는 오히려 자기 자신을 하나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숨어 있다. 자신의 주인공이 된 하나의 드라마를 완성해야 한다는 생각, 그 드라마 속의 나는 인정받아야 하고 그럴 만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드라마는 언제나 관객을 전제로 한다. 웃거나 울거나, 박수를 보내거나 야유하는 관객이 있어야만 드라마는 성립한다. 고로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려면 늘 관객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사실 드라마의 '주인'이 아닌 것이다.(207쪽)

 

이 책에서는 이런 규정화된 직업을 떠나 자신만의 삶의 영역을 개척하는 이들이 소개된다. 저자 역시 그렇다. 물론 그렇다고 이런 노력을 모두가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미 우리는 내리막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먼저 내려가든 행여 재수좋게 오르막길에 올라타던 서로 연대해야 한다는 희망을 던져준다. 같이 살아야 한다.

원해서든 아니든,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고정된 일터 없이 일해야 한다는 현실을 맞이할 것이다. 고정된 일터가 없더라도 여전히 활동으로서의 일은 존재한다. 따라서 동료도 있고, 고객도 있으며, 돈 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한 세트로 주어지지 않는다. 매번 자신에게 맞는 일을 능동적으로 선택해야만 한다. 앞의 말대로 `능동적 자유`가 엄청나게 확대되는 셈이다. 자신이 가진 여러 능력을 여러 일을 통해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그러나 이 능동적 자유는 본성상 불안전성을 품고 있다. 여기서의 불안정성이란 당연히 경제적 불안전성도 포함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포괄적인 불안정성이다. 고정된 장소, 고정된 관계망의 밖에서 일함으로써 느끼는 불안정성은 단순히 경제적 불안정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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