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 누구와, 어떻게, 무엇을 위해 일할 것인가?
제현주 지음 / 어크로스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산업화시대를 거친 윗세대는 젊은 청년들에게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윗세대는 사람보다 일자리가 많았다. 경제는 해마다 성장하고, 기업들은 사람들이 모잘랐다.

지금 현재 청년들이 하는 일이란 윗세대의 고졸이 하던 일을 대졸 청년이, 대졸이 하던 일은 MBA나 석박사들이 하고 있다. 그만큼 고스펙을 자랑한다. 하지만 사람보다 일자리가 모자른다. 성장이 정체된 시대에 살고 있다. 문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할 정치권이나 경제인들은 해결의 노력을 하지 않는다. 일자리를 늘릴 대책을 만들 생각은 하지 않고 청년들을 비난한다.

 

어떻게 보면 청년들 스스로가 그 해법을 찾아 나서야 하는 아주 더럽고, 재수없는 상황에 처해졌다.

 

산업사회에서 일자리를 가지려면 자본에 '고용'되어야 한다.

산업화 초기에는 일자리에 노동자를 채워 넣는 것이 관건이었다. 산업화 이전에 사람들은 고용되지 않고도 스스로 일자리를 만들어 일하며 살아왔다. 산업자본은 그런 사람들을 고용된 일자리에서 일하도록 유인하는 데 골머리를 썩었다. 탈산업화된 시대에 접어든 지금, 상황은 역전되었다. 사람들은 일자리를 원하지만 자본은 예전만큼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브루니와 자마니는 산업시대에나 탈산업화시대에나 일자리와 일의 경계가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들은 "모두에게 임금 노동의 형태로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개념은 좋게 봐주어도 순전한 유토피아적 발상이며, 나쁘게 보면 위험한 거짓말"이라고 말한다. 일을 고용 중심으로 규정하는 산업 시대의 사고방식에서 이제 벗어나야 한다. 일의 규정을 고용시장 바깥에서 벌어지는 활동까지 아우를 만큼 넓히지 않는다면 '고용없는 성장' 시대를 극복할 방법은 없다. 이를 위해서는 복지에 대한 새로운 정의, 일에 대한 새로운 보상 체계가 필요한 것이다.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해결책이 필요한 지점이다. (111쪽)

 

 

소비 중심사회가 되면서 사회는 소비수준으로 사람의 수준을 결정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소비는 곧 능력이다. 그리고 고가의 제품, 서비스를 만들어낼 수록 능력있는 기업이다. 그것을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체험한다.

훌륭한 소비자가 곧 능력 있는 인간으로 치환되는 사회다. 벌어들이는 돈의 양으로 일의 성과가 측정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돈벌이를 해야 하는 우리는 모두 카지노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이다. 카지노에서 게임의 자원으로 인정받는 것은 오로지 칩 뿐이다. 무엇이 칩이고 무엇이 칩이 아닌지 결정하는 것이 바로 카지노가 지닌 권력의 핵심이다.(102쪽)

 

철학과 문학, 정치분야를 아우르는 저자이자 학습 공동체를 꾸려가는 우치다 타츠루는 <하류지향>에서 "소비하는 일로 사회 활동을 시작한 아이들은 인생의 아주 초반부터 '돈의 전능성'을 경험"하며, 이를 통해 " '사는 사람'의 위치를 선점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우친다고 지적한다. (215쪽)

가정은 노동 공동체이며 교육 공동체였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소비를 위한 재원을 공유하는 소비 공동체일 뿐이다.(217쪽)

 

그러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다 같지는 않다. 문제는 그 능력이라는 것도 판단 기준이 모호하다는 건데, 결국 좋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좋게 평가받는 쪽으로 능력이 규정되고 있다. 그런데 실상 능력에 따른 차별이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경쟁에 의해 나라가 세워졌던 미국을 제외하고는(아마 한국도...) 능력에 따른 차별을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느사이에 세상은 능력을 따른 차별을 당연한 것을 넘어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능력이 있고, 각기 타고난 능력의 종류 자체가 다르다. 누가 누구보다 능력이 좋거나 나쁘다는 판단에는 능력의 종류 자체에 대한 선호가 바탕에 깔려 있을 수 밖에 없다. 결국 능력주의는 능력이 더 뛰어난 사람을 높이 산다기보다는 시장이 원하는 종류의 능력을 가진 사람을 높이 사는 방식으로 작동하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런 능력주의가 정말 '공정한' 것일까? 부모의 재력을 무려받아 유리한 것은 비난하면서 시장이 원하는 능력을 타고나 유리한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더구나 능력은 설사 유전자의 덕이 아니더라도 운 좋게 누린 양육 환경의 덕이기도 하다.(144쪽)

다만 능력주의가 절대적인 공정성을 의미하지 않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 책(국가의 숨겨진 부)에는 흥미로운 설문 결과도 나온다. "같은 일을 하는 두 명의 비서 중에 일을 더 잘하는 비서가 돈을 더 많이 받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하십니까?"나는 질문에 대...해 세계 각국 사람들이 어떻게 답변했는지, 1980년대 초반에서 2000년대 초반으로 오며 그 답변이 어떻게 변했는지 보여준다. 미국은 예나 지금이나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눈길을 끄는 것은 1980년대 초반만 해도 '그렇다'고 대답한 비율이 그리 높지 않았던 이탈리아, 스위스, 덴마크, 네덜란드 등(50-60퍼센트 내외)도 시간이 흐르며 점점 미국 사람들과 비슷한 견해를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1980년대 초반에는 '그렇다'는 답변 비율이 70퍼센트 미만인 나라가 18개국 중 11개국이나 됐다.(2000년대 초반 즈음에는 단 한 나라도 없다.) 능력주의가 공정 사회와 같은 말이 된 것이 그리 역사가 오래된 현상은 아닌 모양이다.(145쪽)

 

우리는 모두 내리막길에 서 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전 세대보다 돈을 못 버는 세대의 등장. 그런 우리에게 세상은 자기계발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세상이 원하는 논리에 맞춘 인간이 되라는 것이다.

자기계발을 설파하는 목소리들은 빠짐없이 '자기 주도'를 말하고, 자유롭게 꿈을 추구하여 '자기를 실현'하는 개인을 이상화한다. '내가 주인공인 인생'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대표적이다. 이 말의 이면에는 오히려 자기 자신을 하나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숨어 있다. 자신의 주인공이 된 하나의 드라마를 완성해야 한다는 생각, 그 드라마 속의 나는 인정받아야 하고 그럴 만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드라마는 언제나 관객을 전제로 한다. 웃거나 울거나, 박수를 보내거나 야유하는 관객이 있어야만 드라마는 성립한다. 고로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려면 늘 관객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사실 드라마의 '주인'이 아닌 것이다.(207쪽)

 

이 책에서는 이런 규정화된 직업을 떠나 자신만의 삶의 영역을 개척하는 이들이 소개된다. 저자 역시 그렇다. 물론 그렇다고 이런 노력을 모두가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미 우리는 내리막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먼저 내려가든 행여 재수좋게 오르막길에 올라타던 서로 연대해야 한다는 희망을 던져준다. 같이 살아야 한다.

원해서든 아니든,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고정된 일터 없이 일해야 한다는 현실을 맞이할 것이다. 고정된 일터가 없더라도 여전히 활동으로서의 일은 존재한다. 따라서 동료도 있고, 고객도 있으며, 돈 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한 세트로 주어지지 않는다. 매번 자신에게 맞는 일을 능동적으로 선택해야만 한다. 앞의 말대로 `능동적 자유`가 엄청나게 확대되는 셈이다. 자신이 가진 여러 능력을 여러 일을 통해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그러나 이 능동적 자유는 본성상 불안전성을 품고 있다. 여기서의 불안정성이란 당연히 경제적 불안전성도 포함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포괄적인 불안정성이다. 고정된 장소, 고정된 관계망의 밖에서 일함으로써 느끼는 불안정성은 단순히 경제적 불안정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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