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현실을 <차브>는 잘 보여준다. 우리가 보는 영국은 만들어진 영국일 수 있다. 게다가 노동계층을 대변한다는 노동당조차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를 수 있다. 그런부분을 중심으로 페이퍼를 작성중이다. <차브>중에 특정 주제에 해당부분 발췌식으로...

 

실제 <차브>에서는 노동당 조차 중간계층을 대변하려 하지 노동계층을 대변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노동계층이 골수 우익집단을 선택하기도 한다.(이는 다음 글에 발췌하는 것으로)

 

앞서 대처는 가난을 사회 구조의 문제가 아닌 개인이 열심히 살지 않은 탓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보수당과 언론을 그렇게 만들어냈다. 이후 노동당 역시 가난은 빈곤계층의 잘못으로 몰고 갔다. 어찌보면 영국에서 빈곤계층을 그 누구도 대변해주지도 않는 존재가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노동당 정치인들은 형편없는 학교 성적이나 가난이 대물림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노동계급 내 '열망의 빈곤'을 분석하기도 한다. 가령, 신노동당 전 교육담당 비서 앨런 존슨(Alan Johnson)은 “특히 오늘날 노동계급 아이들 세대에 팽배한 열망의 빈곤"을 비난했다. 산업의 파괴에 따른 일자리와 직업연수의 부족이 문제가 아니라 노동계급 아이들의 태도가 문제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2008년 출간된 정부 보고서는 옛 산업지대에 거주하는 노동계급의 이른바 '부족한 열망'을 강조했다. 좋은 일자리가 부족한 이런 지역에서 열망을 가지기 위해 아이들에게 무엇이 필요 한지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이런 식의 접근은 대처주의 시대에 극히 전형적인 것이었다 노동계급이 직면한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책임은 정확히 그들 자신의 것이라는 말이다. 

'열망있음', 대 '열망없음'의 대립구도는 대처리즘 시대에 드러난 노동계급의 균열을 이용하려는 신노동당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노동당 정치인들이 '열심히 일하는 가족'이라고 부르면서 부정하게 복지금이나 타내는 수많은 게으른 사람들의 반대편에 세워놓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복지 식객을 때리는 것이 백만장자가 아닌 저임금 노동자의 지지를 끌어내기에 더 매력적인 방법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결국 적은 임금을 받으려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라면, 자기 돈으로 흥청망청 사는 부자들에게 분노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사실 산업의 붕괴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노동계급 공동체에게 복지에 대한 공격이 돌아갔다. 옛 산업지대는 실업자와 복지기금에 의존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가장 많았다. 사라진 일자리를 대체할 만한 안정된 일자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 그러나 신노동당의 접근방식은 그들을 연약한 노동계급이라 낙인 찍었고 악마로 만들고 말았다. (130-131)

 

신노동당의 복지정책은 무능하고 열망이 없으며 얻어먹기만 하고 비정상적인 데다 무질서하다는 일련의 차브이미지를 노동계급에 부여하는 데 기여했다. 이런 이야기들이 보수당이 아 닌 노동당에서 나옴으로써 노동계급 사회와 개인을 향한 중간계급이 가진 수많은 선입견과 고정관념은 더욱 강화되었다. 하지만 이런 공 격은 직접적인 공격보다 더욱 교묘하다. 신노동당의 기반이 된 많은 철학들은 중간계급 승리주의에 깊이 발을 담그고 있었다. 그 철학들 은 넝마를 걸친 채 남아 있는 노동계급은 역사의 잘못된 편에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같은 '중산층 영국'에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는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 (136)

 

노동계급 아이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이 부족하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는 정치인과 논평가들은 종종 핵심을 놓치고 있다. 대체 무엇을 희망하란 말인가? 예전에 그렇게 많이 존재하던, 좋은 급여를 제공하는 양질의 노동계급 일자리들이 전국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소멸해 버렸다는 것은, 아이들이 학교를 졸업한 뒤 슈퍼마켓이나 콜센터 같은 곳을 제외하면 갈 곳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259)

공공부문 삭감이 진행됨에 따라 상황은 한층 암울해 보인다. 공공부문은 수년 동안 졸업식을 갓 마친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선택지였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런 것이다. 만약 여러 해의 학업 기간을 거친 뒤에도 안정되고 벌이도 좋은 일자리를 얻을 개연성이 낮다면, 대체 왜 그런 과정을 밟아야 하나? 결국 하게 되는 일이 가게 점원이라면, 수년 동안 뼈빠지게 학교 다니는 수고를 감수하는 것은 시간낭비처럼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아이들이 '미래에 대한 기대'를 갖기를 바란다면, 기대할 만한 무엇 을, 그 아이들에게 줄 필요가 있다. (261)

노동계급을 악마화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시스템을 정당화하는 잔인하도록 합리적인 방법이다. 그들을 악마화하고, 그들의 이해관계를 무시하고, 그리고 극도로 불평등하게 이뤄지는 부와 권력의 분배를 사람들이 지닌 가치와 능력을 공정하게 반영한 결과라고 합리화하는 것. 그러나 이런 악마화는 훨씬 더 치명적인 의제를 갖는다. 오직 개인에게 책임이 있다는 교의는 특정한 노동계급 공동체들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 문제 전반에 적용된다. 그것이 빈곤이든 실업이든, 혹은 범죄이든 관계없이 그것은 개인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부서진 영국(Broken Britain)에서 희생자들은 자기 자신들 말고는 탓할 사람이 없다.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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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여인이라고도 불리는 마거릿 대처를 다시 봐야 한다.

 

일각에서는 그녀를 영국의 망국병을 해결한 것으로 말하지만, 실제로는 다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그녀는 영국의 제조업 기반을 무너뜨린 장본인이다. 산업의 기본은 제조업이라고 생각하는 내 입장에서 대처의 정책은 나라를 망치는 정책이다.

 

그리고 대처가 나쁜 건 노동계층을 적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난을 단지 그들의 잘못으로 생각한 것인데, ....

 

과연 다른 책들은 어떻게 다룰지 .. 이런 내용을 지적하는 다른 책들이 있을까?

 

영국 노동계급을 향한 모욕 중 가장 끔찍한 것은 산업과 노조에 가해진 대처의 두 갈래 공격일 것이다. 사회를 황폐화한 주원인은 단지 국가의 제조업을 구조적으로 폐기 처분했기 때문이 아니며-물론 이것은 실업과 가난, 그리고 그에 따른 심각한 사회적 문제들로 공동체 를 파괴시켰고 그 때문에 나중에 큰 비난을 받았다-노동계급의 정체성 자체를 맹공격했기 때문이다. (72)

대처 정부는 이런 기억들을 가차없이 조작했다. 정부의 목적은 노조를 영원히 괴멸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법안은 고용주들이 파업에 참가한 사람들을 해고할 수 있도록 했고, 해고 수당을 경감해주었다. 또한 노동자들이 다른 노조의 파업을 지원하지 못하게 했고, 법원이 노조의 자금을 압류하지 못하도록 하는 보호조치를 철회했으며 노조에 엄청난 벌금을 물릴 수 있도록 했다. (74)

 

다시 정리하자면, 영국 산업이 황폐화된 것은 정부의 정책 때문이지 역사의 행진 때문이 아니다. 서구의 다른 어떤 나라도 제조업이 그렇듯 단기간에 무너지지 않았다, 2009년 폭발한 금융위기에 대응했던 방식을 한번 되돌아보자, 1980년 대처리즘이 제조업이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도록 내버려둔 반면, 신노동당 정부는 탐욕과 어리석음 때문에 파국의 경각에 매달린 은행에 세금 수백만 파운드를 쏟아 부었다. 왜냐고? 은행은 무너뜨리 기엔 너무 거대했기 때문이다. “같은 이야기를 제조업에 대해저도 할 수 있겠죠”라고 그레이엄 터너는 말한다. “세계는 결국 회복되었고, 만약 제조업을 더 지원했다면 그렇게 많은 일자리를 잃지는 않았을겁니다.” (79)

노조와 산업에 대한 대처의 공격은 산업 노동계급에 패배를 안겨 주었다. 노동계급 정체성의 중핵을 이루던 고임금의 숙련된 직업들은 그렇게 뿌리가 뽑혔다. 노동계급과 연관된 모든 것들은 사라져버 혔다. (80)

 

가능한 한 많은 돈을 부자들에게 삽으로 퍼주는 게 정부의 목표가 되는 뻔뻔스런 일이 역사상 처음으로 벌어졌다. 첫번째 예산편성에서 최고소득층의 근로소득세(83%)와 불로소득에 대한 세금(97%)은 60%로 삭감되었으며 법 인세는 52%에 서 35%로 감면되었다. 1988년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니겔 로슨(Nigel Lawson)은 한술 더 떠서 최고 세율을 40%로 줄였다. 조프리 하우 재무장관은 “세무구조를 기업에 걸림돌이 되지 않게끔 바꿔야 한다”는 자신의 생각을 완고하게 고집했다. 하지만 대처가 벌인 계급전쟁에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세부담을 부자에게서 모든 사람들에게 확대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91)

 

어떻게 정부가 부자들의 뒤를 밀어주는 것이 정당화 될 수 있었을 까? 대처주의자들은 낙수효과 즉, 최고위층에 쌓인 부가 점점 아래로 떨어진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현상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대처리즘은 실패한 경제정책 대신 희생자들을 공격했다. 희생자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면, 그건 희생당한 개인 자신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대처 철학의 핵심에는 가난이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누군가 가난하다면, 그건 그들의 개인적인 실패 때문이다. “오늘날 이 나라에 근원 적인 가난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대처는 언젠가 말했다. “서구 사회에 남겨진 문제는 가난이 아니다. 물론 사람들이 어떻게 투자할지, 수입을 어떻게 지출할지 몰라서 생기는 가난은 있다. 하지만 가난은 정말 근본적으로 성격과 인품의 결함일 뿐이다.”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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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31 09: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雨香 2016-09-01 13:10   좋아요 0 | URL
대처가 금융업과 서비스업을 미래 영국을 먹고 살릴 산업으로 생각한 듯 합니다. 특히 책 후반부에 보면 노동당이 집권하고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으로 나옵니다. 저도 어릴 때 대처에 대한 전기를 읽었고, 존 메이저 등의 전기를 읽었는데, 참 뭐랄까. 제조업을 산업의 기반으로 생각하는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대처는 영국의 산업을 망친 장본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니네 2017-01-23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고된 노동에 반해 적은 돈에. 처우도 열악하고 인격모독도 수시로 발생하는 그런 제조업이 과연 산업의 중심일까요?

그렇담 제조업을 기피하는 우리네 한국 젊은이들은 인격적으로 잘못된 자들입니까?
 

영국에서 두 소녀의 실종사건이 발생했다. 한 소녀는 상류층의 딸로 리조트에서 실종되었다. 방송 등의 모든 미디어가 동원되어 그 소녀의 안녕을 바라고, 진척사항이 모든 영국인의 관심있듯 보였다.

 

그리고 또 하나의 실종사건이 있었다. 빈곤한 동네에서의 새년 매튜스라는 소녀의 실종사건. 그 사건은 언론의 관심을 받지도 못했다. 그러나 몇 주 후 이 사건은 영국사회를 큰 충격에 몰아 넣는다. 보상금을 노린 일종의 자작극이었던 것이 밝혀진 것이다.  

 

곧 모든 언론은 부도덕한 부모를 파고 들었다. 뿐만 아니라 그 동네가 전부 부도덕하게 몰아져갔다. 능력없는 부모와 일하지 않는 어른들. 복지기금으로 연명하는 나라의 세금을 축내는 인간들이 그려졌다.

 

오언 존스는 중간계급 혹은 전문직에서 일어나는 반인류적인 범죄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하면서, 빈곤층에서 일어나는 범죄에 대해서는 유독 그 계층 전부를 엮어내는 점을 꼬집어낸다.

 

영국 엘리트가 중간계급 사람들로 북적인다는 것은 어떤 이중잣대가 적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가난한 사람들에 의한 범죄는 하류 사람들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지만 중간계급 사람들의 범죄는 그렇다고 할 수 없다.

...

 섀넌 매튜스의 실종 사건은 이른바 식객들을 공격하는 발판으로 사용됐지만 부자들은 미디어나 정치인들에게 그 비슷한 비난을 조금도 받지 않는다. 엉터리 복지금 수령으로 1년에 들어가는 예산은 10억 파운드로 추정된다. 그러나 공인회계사 리처드 머피(Richard Murphy) 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탈세로 새나가는 1년 예산은 700억 파운드에 이른다. 결국 복지 사기보다 70배나 많은 것이다. 정말 치명적인 모순은 듀스베리 모어 같은 곳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은 정치인이나 언론인보다 수입 대비 많은 세금을 낸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중간계급 식객들을 향한 비난은 과연 존재하는가? 

 

미디어의 왜곡된 보도에서 세금 회피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복지 사기를 과대평가하는 건 전혀 놀랄 일도 아니다. 지도급 정치인들과 언론인들은 섀넌 매튜스 사건을 역사적으로 다루는 데 다른 잔인한 사건들만큼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자신의 연약한 딸을 금전적 목적으로 이용한 한 엄마의 기괴한 행각은 정치인과 언론인에 의해 의도적으로 부풀려져서 전통적인 노동계급 사회가 도덕적으로 타락한 노동회피 집단으로 전락했음을 입증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사건에서 끌어낼 더 폭넓은 교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사건은 오늘날 영국에서의 계급문제를 웅변해주고 있다. 비록 듀스베리 모어에 정신착란에 빠져 자식을 학대하는 백수 부모로 꽉 차 있지는 않더라도 그런 곳에 문제가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궁극적인 책임이 있느냐다.  노동계급사회인가 아니면 지난 30년간 이어진 정부의 정책인가? 또한 영국은 왜 그토록 양극화되어 차브에 대한 조롱과 경멸이 이 사회에 깊이 뿌리내렸는가?(48-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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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렉시트를 이야기할 때 잠깐 언급된 것이 백인 노동자층이다. 유럽연합에 있으나, 없으나 실업이나 삶의 빈곤에서 자유롭지 못한 백인 노동층은 유럽연합에서 결정한 이민자 정책은 유럽연합에 대해 분노를 야기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백인 노동계층을 주목한 책이 있다. 바로 <차브>이다. <차브>란 할일 없이 놀고 있는 노동계급을 부정적으로 언급하는 말이다. 처음에는 젊은 노동계급이라는 뜻이었지만 어느 샌가 '공영주택에 거주하는 폭력적인 사람들 (Council Housed And Violent, CHAV)'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폭력적이고, 게으른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지 못하는 이들을 뜻한다.

 

 노동계급이 이렇게 된 근원에는 사실 노동계층을 아예 없애버리려는 악마같은 대처 총리가 있었다. 그녀의 머리속에는 노동계층을 전부 없애버리면 전부 중산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인가? 아니면 그들을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을까? 참 이해하기 힘들다.

 

"백인 노동계급 은 또하나의 하찮은 소수인종이 되었으며 이것은 그들의 관심사가 오로지 인종의 시각에 머물러 있었음을 의미한다. 백인 노동계급은 역사의 고개를 넘으며 길을 잃은 부족이 되었고, 다문화주의에 의해 방향을 잃었으며, 집단 이민이라는 문화적 침략에 맞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방어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인 집단이 되었다. 말하자면 '백인 노동계급'이라는 단어 때문에 새로운 자유주의적 편견이 탄력을 받은 셈이다. 이제 '백인 노동계급'을 혐오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 그들은 한줌의 인종차별주의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18쪽)

노동계급이 악마화된 뿌리에는 영국 계급전쟁의 유산이 있다.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가 정권을 인수한 1979년은 영국 노동계급을 향한 전면공격이 개시된 해로 기록된다. 노동계급 기관이었던 노동조합이나 공영주택은 붕괴되었고 노동계급의 일터는 제조업에서 광산업까지 완전히 망가져버렸다. 그들의 공동체는 산산조각났고 다시는 회복되지 못했다. 또한 연대와 집단적 열망 같은 노동계급의 가치는 단호한 개인주의에 밀려 휩쓸려갔다. 힘을 빼앗겨 더이상 당당하지 못한 노동계급은 점점 더 조롱거리가 되었고 하찮은 희생양으로 전락했다. 또한 노동계급이 미디어나 정치의 세계에서 축출당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들의 생각은 터져나가지 못했다.

 

정치인들, 특히 노동당은 한때 노동계급의 조건을 향상시켜야 한 말을 했다. 그러나 오늘날 대략적인 공약은 노동계급을 회피하는 것들뿐이다. 정치가들은 중간계급을 확대하겠다는 약속을 더 좋아하고 '열망'이란 말은 개개인의 자기성취를 의미하는 말로 재규정 되었다. 결국 사다리를 기어올라 중간계급이 되라는 말이다. 한때 가난이나 실업 같은 사회적 문제는 적어도 자본주의 내부의 취약성에 비롯된 것으로 인식됐던 반면, 오늘날 그것은 개인의 행동이나 결점, 심지어는 선택으로 간주되고 있다.

 

노동계급이 처한 곤경은 보통 열망의 부족으로 치부돼버린다. 그들의 곤경은 책임이 있는 특권층들에 의해 조작된 불평등한 사회 때문이 아니라 개인의 특성 때문이라고 왜곡된다. 극단적인 경우 이런 시각은 새로운 사회적 다위니즘(Social Darwinism)으로까지 치닫는다 진 화 심 리 학자 브루스 찰튼(Bruce Charlton)에 의 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부 자보다 평균 IQ가 낮다. (--)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노동계급 가정 출 신이 일반 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할 가능성이 전문직업인 가정 출신 보다 훨씬 낮다는 것이다.”

 

앞으로 몇년 동안 영국 정치계의 심장부에선 차브를 희화하는 모습이 펼쳐질 것이다, 2010년 총선 이후 백만장자들에 의해 장악된 보 수정권은 지난 1920년대 이후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공격적인 예산삭감을 주장하며 집권했다, 2007년 이후의 글로벌 경제위기는 탐욕스럽고 무능한 금융 엘리트들로부터 촉발되 었건만 그 대가는 노동계급이 치러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복지국가를 난도질하려는 시도는 수많은 정치적 난관에 부딪혀 있고, 결국 정부는 은근슬쩍 국민들을 비난하고 나섰다."(20-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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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의 종말 - EU는 운을 다했는가
얀 지엘론카 지음, 신해경 옮김 / 아마존의나비 / 2015년 4월
평점 :
품절


2016년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탈퇴를 결정했다. 물론 그 과정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모르겠지만, 유럽연합 탈퇴의 이야기가 나온 것은 사실 몇 해 전 그리스 때 부터였다.  결국 그렉시트 대신 브렉시트가 결정되었고, 경제적인 이유보다는 정치적인 이유가 드러났지만, 사실 유럽연합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불안정하다.

 

사실이긴 하지만, 그리스가 지금 겪고 있는 문제 전부를 스스로 자초한 것은 아니다. 강대국 회원들 편에 서서 약소국 회원들을 도울 장치도 하나 없이 공통 통화를 계획한 유럽경제통화동맹의 불완전한 구상 뒤에는 그리스가 아니라 독일과 프랑스가 있다. 그리스의 국가부채를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그리스를 매력적인 투기 대상으로 만든, 2008년 국제 금융 붕괴의 책임을 져야 할 주체도 그리스 은행이나 그리스 규제당국은 아니다. 유로 위기가 시작된 초창기부터 그리스의 정책을 담당한 이는 그리스가 아니었으니, 가혹한 긴축과 내부적 가치절하 탓에 벌어진 참혹한 사회적, 정치적 효과를 놓고 아테네를 비난하기는 힘들다는 의미다. (33)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근면한 독일인, 게으른 그리스인을 이야기하지만 통계자료들을 보면 그렇지 않다. 게다가 사람들이 참 이상한게 저녁이 있는 독일인의 삶을 생각하면서도 일벌레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사회가 만들어낸 허상의 이미지에 속고 있는 것이 아닌지. 그리스는 유럽에서 손 꼽히게 노동시간이 많은 나라다. 반대로 북유럽 복지를 감안해보면 형편없는 복지정책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게으르고, 복지병에 빠진 그리스라 생각하고, 보수언론들이 그렇게 거짓말을 했다.

 

사실 유럽연합은 굉장히 착취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EU에 정책수립자와 정책수용자가 따로 있다는 사실도 그 어느 때보다 분명하게 드러났는 데, 전자는 채권국이, 후자는 채무국이 좋은 예가 된다.(36)

유럽통합은 무엇보다 먼저 힘의 정치를 제거했어야 했다. 크고 부유한 국가들이 더 이상 작고 빈곤에 빠진 국가들을 따돌리지 않게 해야 했다. 무엇보다 유럽은 독일에 의해 지배되지 않 아야 했다. 오늘날 소수의 A+, 국가들이 독일과 같이 운전석에 앉아서 유럽을 굴리고 있다. 회원국들 사이의 평등은 사라졌다. 새로운 조약들이 일부 국가들만 염두에 두고 서명되고, 외부로 부터의 (제멋대로인)내정간섭이 넘쳐난다. 정책들이라곤 대체로 지원과 동기부여보다는 처벌에 관한 것들이다.

 유럽통합은 또한 세상에서 가장 경쟁적인 시장을 창출해야 했다. 거기다 유럽통합은 유럽 북부에서만이 아니라 동부와 남부에서도'스톡홀름 컨센서스가'워싱턴 컨센서스를 누르고 성 공하도록 만들 거라는 의도를 가졌다. 공통 통화와 단일시장은 이런 야심찬 경제 목표들을 성취할수있도록 해주는 핵심수단 이었다. 지금 공통 통화는 곤란에 빠졌고, 곤란에 빠진 공통 통화는 단일시장의 성과를 잠식하고 있다.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경제들마저도 성장을 일으키는 데 실패하고, 유럽의 복지 제도들은 무너지고 있다. 유로는 유럽통합을 도왔어야 하지만 그 반대 결과를 얻었다. 유로는 흑자국과 적자국 간, 수입국과 수출국 간, 북과 남 간의 차이와 대립을 강화했다. (68-69)

 

게다가 재미있는 것은 재정건전성을 확보하지 못한 남유럽에 대해서는 가혹한 정책을 강요하지만, 실제 2000년대 독일-프랑스가 유럽연합의 기준을 지키지 못했을 때 정작 자신들에게는 그 정책을 가동하지 않았다. 유럽내 강대국과 그렇지 않은 나라에 대해 공평하게 정책이 지켜지지 않는다.

 

독일은 한 10년 전쯤이었으면 먹혔을지도 모르는 정책들을 추진했지만 지금의 채무국들이 보기에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비참한 결과들을 만들어냈다. 그리스 정부가 통계들을 '주물렀을수도 있지만, 결점이 있는 유로 체제를 (프랑스와 함께)계획한 것은 독일이다. 재정 규율과 관련해 유로존 규정을 (역시 프랑스와 함께)처음으로 깨뜨린 것도 애초에 바로 그 규정들을 제안했던 독일이다. 독일은 자국 재정을 통제하는 데 마침내 성공했고, 이는 분명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리스는 2009년과 2011년 사이에 구조적 적자를 12%나 감축했는데, 이는 독일이 더 나은 조건하에서도 더 오랜 기간에 걸쳐 이뤄낸 성과의 두 배에 이른다. (114)

 

그럼에도 저자는 유럽연합의 희망을 이야기한다. 다소 알아듣기 힘든 다성악이라는 용어를 쓰지만 다양성을 인정하며 하나의 유럽연합 공동체가 아닌 각 분야의 연합공동체가 하나의 공동체처럼 보이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잘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유럽연합을 좀 우려스럽게 본다. 유럽연합의 구조상 독일은 앉아서 돈을 벌 수 밖에 없고,(반대로 남유럽은 뭘 해도 손해를 볼 수 밖에 없다. 그 손해와 독일의 이익은 같다) 유럽연합내에서 힘의 독점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위치가 저절로 만들어지고 있다.

독일은 두 번의 전쟁을 이룬 전범국가이다. 물론 그래서 스스로 조심하고 있지만, 그리스에 대한 태도 등을 보면 예전 제국주의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공식적으로 만들어진 유럽연합이라는 대 제국의 우두머리.... 어떻게 보면 영국이 잘 떨어져 나간 것일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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